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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아편 전쟁 | 2차 아편전쟁 | 태평천국운동 | 양무운동 (동치중흥) | 변법자강운동 (무술변법) | 의화단 운동 | 신해혁명 | |
시기 | 1840-42 | 1856-60 | 1850-64 | 1862-94 | 1898 | 1899-1901 | 1911 |
배경 | 편무역→ 삼각무역 | 영-애로호 사건 프-선교사 살해 | 재정궁핍→ 증세 →농민 몰락 | 서양문물의 우수성 인정 | 청일전쟁 패배→ 근본적 개혁 필요 | 半식민지화, 경제몰락, 크리스트교와 충돌 | 半식민지화, 경제몰락, |
주체 | (중국-영국) | (중국-영국,프랑스) | 홍수전의 상제회 | 이홍장, 증국번 | 캉유웨이 | 의화단 | 쑨원, 중국혁명동맹회 |
주장 | 토지균분, 남녀평등, 멸만흥한 | 中體西用 | 입헌 군주제 과거폐지 신교육도입 | 부청멸양 반외세, 反크리스트교 | 청조 타도, 민주공화정 삼민-민족, 민권, 민생 | ||
과정 | 임칙서의 아편소각, 영국의 공격 | 1858 텐진조약 외교관 베이징 주재 크리스트교 포교 자유 | 화남, 난징 정령 | 서양문물 수입-공장 서양 군사제도 도입 | 광서제의 개혁 서태후의 탄압 | 교회방화, 선교사 살해, 서태후 지지 8개국 연합군의 진압 | (1908 헌법대강) 민간의 철도부설 준비 철도 국유화 → 무창 군대 혁명 → 쑨원을 임시대총통 |
결과 | 1842 난징조약 홍콩할양, 개항, 공행폐지 | 1860 베이징 조약 텐진 개항 주룽반도 영국에 할양 러시아연해주획득 | 향용, 외국군의 진압 (근대 최초 사회 개혁 운동 反봉건 反제 민족 운동) | 청일전쟁 패배로 쇠퇴 | 서태후 탄압으로 실패 | 베이징 의정서 (=신축조약) 외국 군대 주둔 허용 청조 유지, 혁명파 성장 | 중화민국 건설 (청조의 위안스카이가 임시 대총통이 되어 선통제 퇴위 시킴 황제가 되려다 병사 → 군벌 항쟁) |
국사 | ≒운요호사건 | ≒동학농민운동 | ≒대한제국의 개혁 |
2016.3.30.wed.악동
도올의 중국일기 1인문학/ 책 과 이야기
이 책은 일기형식이다.
연변자치주의 연변대학에서 한 학기 객좌교수로 초빙되어 중국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
체험한 것을 썼다. J T BC에서 방영중인 <차이나는 도올>은 그가 중국에서 체험한 일들과
그동안 쌓여온 생각이 어우러져 표출된 멋진 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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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라는 형식으로 도올 자신의 세상을 바라보는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역사 인식의 한
방편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서문에서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두보가 도달키 어렵다고 말한 나이에 도달한 나 도올은 말한다. 내가 느낀 그 찬란한
중국과 그 체험을 일기로 미처 다 쓰기조차 버거운 도올, 그대와 내가 같이 시간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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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하건만 이 순간만은 서로를 칭찬하기로 하자고! 나는 서로를 칭찬하는 그 순간을
영원 속에 남겨두고 싶어 이 일기를 독자들이게 공개한다.
p27~ 38
나는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크게 4단계로 대별한다. 그 제1단계는 1921년 7월 상해에서
공국공산당 제 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시점으로부터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기까지의 차난한 해방투쟁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의 중국
공산당이야말로 인간의 언설이 찬양할 수 있는 모든 현실적 도덕성을 유감없이 구현해
나간 간난의 여정을 그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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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단계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된 후로부터 모택동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격동의 시기,
정치사적으로는 “동아시아 30년 전쟁”시기를 커버하고, 미국의 제국주의가 이 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말아먹을 수 있다는 신념이 근원적으로 붕괴되어간 시기를 말한다.
창업보다는 수성이 더 어렵다는 당태종의 지혜를 모택동은 철저히 외면함으로써, 자신의
도덕성을 유감없이 까먹었다. 모택동은 이미 “인민의 벗”이 아닌, “무소불위의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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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단계는 등소평의 개혁개방으로부터 오늘까지 진행된 시장경제도입시기를 말한다.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은 기실 실사구시의 실용주의 노선을 의미한 것이지만, 그 실제적
함의는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시키는 무분별한 차등의 실험으로 중국의 역사를 치닫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중국은 G2의 당당한 위상을 확보했지만, 4억5천만의 인구가 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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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면서 도, 농의 격차가 심화되고, 대도시중심의 사회구조는 양국화의 모든 극단적
양상을 표출하게 되었다. 무분별한 개발, 과도한 에너지 낭비체제, 관료주의적 부패양상,
도덕의 해이, 가정윤리의 문란, 천박한 소비주의의 촉진 등등으로 서구의 천민자본주의가
걸어온 모든 부작용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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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연변에 오게 되었는가? 나의 연변 행은 중국공산당의 세 단계 역사전개가 필연
적으로 보정, 지향하지 않으면 아니 될 제4단계의 역사 성격과 관련이 있다.
제3단계의 질주는 분명 제2단계 쓰라린 체험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무리한 평등실험은
모든 사람에게 비극을 가져온다는 처절한 체험이 공산주의의 집체주의에 대한 신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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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기하게 만들었고, 그만큼 제3단계의 개방, 차등실험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제2단계의 “문화파괴”에 뒤이은 제3단계의 “욕망질주”는, 그것이 바른 자체 비전을
수립하기 어려운 상태인데다가 서구적 시장경제의 낡은 모델, 즉 맹자가 비판하는 패도의
“독락 獨樂” 농단의 천장부 賤丈夫 모델을 모방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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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1~
지금도 가정을 잘 꾸리는 사람들은 짭짤하고 알뜰하게 가계를 운영하는 것을 지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런데 현재 국가경제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사기를 잘 치는가,
얼마나 부풀리는가, 얼마나 소비를 촉진시켜 유통을 촉진시키는가, 다시 말해 실물이 아닌
허물의 확대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중국의 “위앤화”가 세계경제의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중국이 세계 최대의 적자 국이 되어야만 한다는 아이러니를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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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아직도 세계를 지배하는 도덕성을 갖는 것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미국의 군사력은 월남인민의 도덕적 투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미국의 경제력도
현재 중환자실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힘은 “대학(유니버시티)”에서
나온다. 미국의 대학은 아직도 세계 문명을 선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중국이 50년 안에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도 과연 중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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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대학의 힘이 50년 안에 미국의 하버드, MIT, 시카고, 카네기 멜론, 스탠포드, 버클리를
합친 정도라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인가? 앞이 캄캄한 이야기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한다고
우리나라 교육부는 “선택과 집중” 운운하면서 과학유망주 교수들에게 일 년에 100억씩 10년
에 걸쳐 1,000억의 연구비를 지불하고 있다. 그것도 어느 연구소에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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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적 한 개인에게 1년당 100억을 지불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라
도, 노벨상을 한 아름 안은 과학자라도 일 년에 10억 이상의 연구비를 받는 예는 희소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실력도 검증되지 않은 젊은 아이들한테 일 년에 100억씩을 안기고 있다.
이런 연구비를 받는 사람이 현재 2·30명이나 되는데, 이들은 중소기업회장 보다도 더 유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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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누리고 있다. 이니! 돈을 쓰느라고 아무 연구도 못하고 있다는 게 과학계에 있는 사람들
의 정평이다. 이러한 선택과 집중 때문에 대한민국 과학계의 연구비는 씨가 말라버렸다.
진정으로 뜻있는 과학자는 그런 연구비에는 얼씬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이명박-이주호가
실천한 뉴 라이트 신자유주의의 정책의 극단적 사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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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목요일
p123~132
엊그제 교수강의를 끝내고 나오는데 어떤 수강생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의 무신론은 중국공산당의 입장과도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좋습니다.”
물론 그렇게 잘못된 표현도 아니고, 그 사람은 나의 입장을 찬동하는 “찬사”를 던진다고
한 말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의식 속에서 “선생님의 무신론”이라는 표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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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귀에 거슬렸다. 이것을 당장 그 사람과 변론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학생들
모두에게 이런 표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그들의 학문방법론을 개척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입씨름의 에너지를 아껴두었던 것이다.
이런 말을 한다고 나를 과연 무신론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유대인 랍비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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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하고 진지한 삶을 살고 있으며, 매사에 “신앙”이 두터운 사람이다. 신앙이 없이 내가
일초라도 견딜 수 있을까보냐? 그럼 내가 생각하는 신이란 무엇이냐? 내가 신앙하는
하느님은 무엇이냐? 너의 삶의 모험, 믿음, 신념, 소망의 원천은 무엇이냐?
“여러분! 여러분을 공산국가에서 태어나 사회주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너무도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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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규정하는 습관에 젖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문화혁명 때 그냥 홍위병이 길거리
지나가는 의젓한 신사를 ‘쩌우쯔파이’ 라고규정하면 그 사람은 목이 달아났겠죠.
나를 ‘무신론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와 똑같은 의미맥락을 갖는 오류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무궁무진한 신에 대한 해석을 접하기도 전에 나를 무신론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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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가능성을 제약하고 배움의 기회를 묵살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나의 강의를 그냥 들으십시오. 규정하지 마십시오. 다 들어보고
취사선택하면 그만입니다. 내 신념을 배우지 않아도 좋습니다. 여러분은 우수한
학생들로서 여기 뽑혀왔습니다. 장학금을 받으면서 조선의 미래를 고민해야 할 사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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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고, 여러 학문의 디시플린을 습득한 학도들로서 이 자리 하나의 프로젝트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문제를 고민한다는 것은 곧 20세기 인류사의 최 난제를 해결하고 청산하는
문제이며, 그것은 좁은 이념의 시선으로는 접근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어립니다.
무한한 성장의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리 규정, 한정하지 말고 그냥 백운이 푸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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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스쳐가듯 마음에 수용하십시오. 그래야만 중국의 미래가 열립니다.
함부로 규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공자가 말하는 하오쉐이의 첫걸음입니다.”
<2014년 9월 19일 단청 루 학술 보고 청, 세계적으로 저명한 도시설계사, 베를린공과
대학 교수 라울 분쇼텐 강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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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주제는 이런 것이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사는 도시를
스마트하게 만들 수 있는가? 제가 말하는 스마트 시티는 에코 시티라고 말할 수도 있고,
서스테이너블 시티라고 말할 수도 있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 폰은 결코
스마트하지 않아요. 제가 말하는 스마트의 의미를 여러분들이 사용하는 스마트 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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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일상생활의 편리함은 좀 해결해주지만 번거로움을 더 많이 가져다주는 그 스마트 폰의
의미로 해석되면 곤란하죠. 여러분의 스마트 폰은 스마트하지 않아요. 스마트 시티를
만든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스마트하지 못한 사기꾼들이 너무 많습니다. 조심하세요!”
스마트 시티는 우선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부 고위관리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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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금 그는 독일의 옛 공항 주변으로 포진된 도시를
스마트하게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베를린이라는 도시에 10개의 특별지구를 설정
하여 그 지구를 스마트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작업과정을 소개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작업은 어떠한 모델을 확정지우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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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모델을 만들고 해체하고 또 다시 만들고 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시의 스마트함이란 대기에 이산화탄소 배출이 줄어야
하며, 지상의 공간에는 에너지 소비가 절감되어야 하며, 지하의 유통체계가 현대화되고
효율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의 코디네이션은 너무도 종합적인 함수를 무궁무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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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하기 때문에 단정적인 모델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의 전통적
마을이나 도시가 대부분 스마트하다고 말했다. 중국 학생들에게 그대들은 주체적으로
사고해야 하며, 중국의 농촌이나 도시를 바꾸어야만 할 그 무엇으로 생각하지 말고
배워야만 할 그 무엇으로 생각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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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월요일
이 건물은 내 숙소 맞은편에 있는 도서관인데 연변대학의 학생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이용하는 도서관이다. 나도 이 건물 안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건물이름이
“일부도서관”이었다. “일부”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홍콩의 부자 이름인데 중국의
대학이나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어는 곳이든지 일부선생이 기증한 도서관건물이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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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한다. 그럼 카네기보다도 더 많은 도서관을 지은 사람이 중국에 있구나, 했는데,
나중에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일부의 이름이 소일부인데, 본명은 소인릉(그가 바로 그 유명한 홍콩의 영화사, 보통
Show Brothers라고 불리는 소씨 형제유한공사의 창업 인이었다. 우리가 어릴 때 보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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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박과 축 영 대> <대 취 협>등등의 감동적인 명편을 연상하면 쇼 브라더스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는데, 그가 영화산업과 주식투자로 번 돈을 전부 홍콩과 대륙의 교육, 예술,
문화발전에 쏟아 부었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다. 그가 세운 건물이 6,013개나 된다고
하니 그 자선사업의 규모를 알 수가 있다. 영국의 옥스퍼드, 캠브릿지, 미국의 하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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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중국 학생을 유학시키고 중국연구소를 세우고, 돈 황의 벽화를 보존하고, 지진
재해를 복구하는 등 실로 엄청난 일들을 했다. 그는 107세까지 건강한 삶을 향유했으며,
엘리자베스2세로부터 “Sir"작위를 받았으며, 2003년에는 동방노벨상으로 불리는 소일부상을
창립했다. 9월 30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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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70~
사실 우리는 백제나 신라, 부여나 경주에서 느끼는 소담한 느낌으로 고구려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구려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초대형 제국이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고구려
대륙기상”을 단순히 시어나 문어로서 뇌까리는 것이 아니라, 두 눈으로, 가슴으로, 피부감촉
으로 느낄 수 있었다면 오늘과 같이 자질구레한 시야에 갇혀 살지는 않으리라! 선거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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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장에 나와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그런 나의 심정도 기우에 불과하리라!
나는 환인 시 동북쪽 8.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오녀 산성의 전경을 보는 순간, 고구려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아닌 신화가 아닌 사실로서 나에게 그 엄연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시조 추모 왕이 북부여에서 남하하여 자라들의 도움으로 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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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를 안전하게 건넜고, 비류 곡에 도착했다. 추모왕은 거기서 홀 본 서쪽 산위에 올라
성을 쌓고, 도읍을 정했다.”이런 이야기들이 쓰여 져 있는 그 거대한 당대의 비문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비문의 내용과 관련된 사실들을 지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실로
너무도 충격적인 것이다.이러한 사실은 신화라는 것이 “신화적 표현”의 구조 속에서 내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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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가 주어지는 언어적 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신화적 표현을 요청하고 있는 그
주체집단은 인간세의 시공을 점한 확고한 물리적,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오늘날
까지 우리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나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기 시작했다. 주몽이 도읍한 그 곳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두 발로 걸어 올라가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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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성을 오르고 내리는 데만도 하루는 걸릴 것 같았다.
내가 정경일교수를 만날 때, 가장 가슴에 걸리는 것은, 같은 동포이지만 중국국적의 학자로서
한국고대사를 바라보는 시좌를 어디에 정해놓고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만약 그가 중국의
체제 안에서 중국의 관방학문적 관점에 헌신하는 사람이라면, 소위 “동북공정”과 같은 시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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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 속에서만 역사를 바라본다면, 고구려 역사는 당연히 중국 역사의 틀 속에서 명멸한 한
중국변방의 왕조로서만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고구려강역이 현재 중국 땅 속에 편입되어
있는 만큼, 중국 사람의 입장에서 현재 중국강토내의 역사를 타국의 역사로 간주하지 않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충분한 정당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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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가들이 우리나라 강역에서 활동한 “왜”의 성격을 우리와 동떨어진 일본역사의
주류로서 독립해서 취급할 리 없다고 한다면 중국학자들이 “동북공정”을 강행하는 것이,
어떠한 무리가 있다 해도 우리로서 그들에게 특정한 세계 인식을 강요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이런 문제는 실로 난감하기 그지없는 과제상황이며, 모든 국제분쟁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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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과연 정경일 교수는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
나는 고구려를 대한민국역사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한국
사가 대한민국역사인가? 대한민국 역사는 실제로 1948년 이후의 짧은 시간에 국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사는 무엇인가? 고구려역사는 과연 한국사의 일부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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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힌극시”라는 개념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국사가 한국의 역사라고 한다면,
“한국”은 도대체 뭐냐? 한국이 대한제국이냐? 대한민국이냐? 조선왕조냐? 고려냐? 고조선
이냐? 조선의 사람들은 자기를 “한국사람”이라고 생가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의 신민이었을
뿐이다. 그럼 하물며 고구려 사람들이 자기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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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따져 들어가면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는 개념의 혼동 속에 다 엉망이 되어버린다.
지금 단일 국가를 단위로 하여 그 국가의 강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시론적으로 기술하는
역사를 대개 “민족사”라고 하는데, 이 민족사는 “민족국가”라는 개념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민족국가는 대개 20세기 전반에 정착된 개념이다. 그 개념을 가지고 역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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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은 많은 경우 터무니없는 무리를 수반한다. 사실 “독일역사”
“블란서 역사”라는 개념은 역사학에서 정밀한 개념으로 성립할 수가 없다. 우리역사는
비교적 민족적 단일개념이 장시간 지속된 경우에 속하는 특이한 케이스다.
그러나 그것도 고려 이전으로 소급하기는 곤란하다. 통일신라까지는 소급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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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지 모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통일신라의 역사는 발해사를 포함하는 남북국시대의
역사로 다시 기술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통일이 아니다. 더구나 삼국시대의 역사, 혹은
그 이전의 역사, 혹은 고조선의 역사에 “한국”이라는 단일민족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오늘의
편협한 현대사의 역사인식을 광활한 무경계의 대지에 무리하게 팻말을 꽂는 어리석은 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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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하다. 고대사에 현대사적“민족”개념을 부과하는 것은 움직이는 배에서 바다에 영역표시의
선을 긋는 것과 다름이 없는 짓이다. 모든 것이 유동적인 것이다. 강역도 민족도 국가도 다
유동적인 것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민족의 단위라기보다는 문화적 교류의 네트워크이며,
그 네트워크속에서 생존하는 인간들의 주체적인 노력이다. 그 노력의 전승태가 어떠한 정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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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역의 족족을 남겼는지를 살피는 것이다.그래서 고대사는 “민족사”가 아닌 “문화사”가 되어야
한다. 사실 중국, 한국, 일본이라는 민족국가 강역이 사라져야만 진실로 고대사는 제 모습을 드러
낸다. 문제는 오늘을 사는 그 누가 그 제 모습을 보다 충실히 이해하고, 그 역사로부터 피 끓은
교훈을 얻느냐하는데 있을 뿐이다. 정교수는 고구려 역사에 관하여 우리 한국인의 일반적 관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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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질 않았다."저는 조선족 학생들에게 우리역사를 강의하면서 틈나는
대로 꼭 고구려유적을 직접 목도 하게끔 권유하지요. 조선 사람이라면 고구려를 한번 느껴보지
않으면 조선의 기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고구려는 중국의 어는 왕조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자기 문화를 지닌 위대한 문명이지요. 원래 고분도 2만기나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어는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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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도 고분벽화가 풍요롭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나타나는 생활상도 그들 자신의 독특한 전승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 수 있지요. “ 그래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동북공정을 지시하는 중국
관방의 입장과는 너무도 다른 것 같은데, 과연 그래도 되는 겁니까?”
“중국이 언제 그렇게 동북공정에 열을 올렸었나요?” 그렇다면 왜 연변자치주를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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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었겠습니까? 고구려야말로 조선민족의 프라이드 원천인데 그걸 죽인다면 조선민족을
죽이는 일이죠. 중국은 변방문화에 대하여 그토록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다 최근의 일이지요. “그럼 왜 최근에 그렇게 열불을 올리게 되었나요?”
“그게 다 알고 보면 대한민국 사람들의 업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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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라니요?”
“과도한 우파성향의 사람들이 좁은 소견으로 저지른 짓들이 중국 사람을 자극시켰기
때문이죠. 중국이 무리한 동북공정을 강행한 것도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렇게 휘몰아간 측
면이 강해요.” “많은 생각을 하고 사는 나이지만, 그렇게 생각해보지는 못했는데요. 뭔 일이
있었나요?” “생가해보세요. 대한민국은 중국과 1992년 수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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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몰려온 사람들이 중국의 값싼 노동시장을 노린 장사꾼들 이외로도, 터무니없는 우파
국수주의자들이 있었거든요. 역사적으로 대종교는 위대한 민족종교였지만, 사실 대종교의
정신은 나철의 죽음과 더불어 같이 사장되었다고 보아야겠지요. 일례를 들면 그런 류파의
불확실한 잔당이라든가, 고대사의 신화에 터무니없이 집착하는 종교적 성향의 국수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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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이 투철하지도 못한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이 만주지역의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제사를 지내곤 했단 말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까지는 참아줄 수 있는데, 제사를 지내고
난 자리에 꼭 ‘한민족의 고토를 회복하자’는 식의 플래카드를 중국말로, 한국말로 써 놓고
다녔거든요. 남의 땅에 와서 그런 짓을 하는 것이 과연 어떤 업보를 초래할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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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그들이 하기나 했겠습니까?”“한국은 남쪽에 일본의 낭인들이 와서 미마나 고토를 회복
하자고 소리 지르는 것과 다름이 없겠지요.”
“두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사건은 조선일보사에서 1993년에 제멋대로 전시한 ‘아! 고구려!
1천5백 년 전 집안 고분벽화’ 운운하는 이벤트였을 거예요. 그 전시회는 한국인의 감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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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기시키고 엄청난 인구를 동원해서 엄청나게 흥행에도 성공한 획기적인 전시회였겠지만,
결코 세부적인 정당한 합의의 프로세스를 거친 이벤트는 아니었다. 이 말이지요. 그들이
만들어간 사진자료들이 제대로 허가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기가 난감하거든요. 물론 일이
터지고 나니까 중국 사람들이 변명하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인들은 한국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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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만 생각했지 중국인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았지요. 아무튼 세부적인 것은 제가 다 알
수 없지만, 그 전시회로 인해서 연루된 많은 사람들이 심하게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런 것을 한국에서는 모르고 있단 말입니다.”
“아 그랬군요! 우리끼리만 ‘아! 고구려!’하고 외쳤지, 그 여파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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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했지요. 하여튼 조선일보사 고구려전은 호암아트홀에서 히트 친 이중섭전과 쌍벽을
이루는 대 성황이었어요. 그렇게 멋있는 전시회는 없었거든요. 저도 그 전시장을 벅찬
가슴으로 둘러보았고, 기획자들에게 감사했거든요. 이중섭전시회에서 이중섭그림의 평가가
천정부지로 뛰자 온갖 위작이 쏟아져 나온 것과도 같은 부작용은 분명히 있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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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겁니다! 조선일보사의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전은 그 벽화 그 자체를 도둑질해가는
엄청난 사건을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어요.”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물론 조선일보사 전시회와 직접 연관이 있다고는 말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하여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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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부작용인 것만은 틀림없어요. 한국사람, 그 어떤 기발한 과대망상 자가 연변의 조선족
을 사주하여 조선일보 사진기자들이 찍은 그 벽화 그 자체를 떼어내는 도굴을 감행케 한
것이죠.” “벽화를 떼어내다니 그게 뭔 말입니까?” 난 너무 놀라, 금시초문의 이야기라서
재차 묻고 또 물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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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출행도, 청룡도, 백호도, 현무도 그런 엄청난 고구려벽화를 돌칼로 도려낸 것이죠.
그런 것만 깨끗하게 도려내면 다시 찾아다 붙이면 되겠지만, 얼마나 열악한 조건에서 얼마나
엉터리로 잘라냈겠습니까? 그 주변의 모든 시설과 벽면을 다 파괴시켰죠. 그 위대한 1천5백
여년의 성상을 버티어온 고분이 망가져 버린 것이죠. 세상에 이런 가슴 아픈 일이 또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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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누가 왜 그런 짓을 했습니까?”
“건당 55만 위 앤 (당시 한국 돈 8,300만원)을 받고 한국인 이만식이라는 사람에게 그 벽화를
건넸다는 재판의 기록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그런 짓을 했을까요?”
“조선족 사람들은 돈 때문에 생각 없이 한 짓이었겠지만 요, 그것을 시킨 사람들은 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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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기위해서만 그 짓을 한 것 같지는 않아요. “루불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훔쳐 간 사람은
모나리자를 연모해서 그랬다는데, 하여튼 독특한 심리에 사로잡힌 광인이 펼친 밀반출사건인
것만은 틀림없겠군요. 그런데 그 배후를 못 캤나요?”“ 이 도굴사건은 1997년 가을부터
1998년 4월까지 5차례에 걸쳐 감행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국가문화재급인 집안 한복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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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실총과 가기서 동북방으로 압록강을 끼고 올라가면 있는 장천1호분 등 3기가 도굴되고
파손되었습니다.“그 벽화는 한국으로 반출되었습니까?”
“그 벽화는 분명히 안전하게 반출되었고 지금 한국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한국정부가 성의 있게 찾아낸다면 찾아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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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꾼들은 중국정부가 잡지 못했습니까?”“도굴에 관련된 범인 6명을 잡았고, 그중 3명,
김 권홍, 한 형국, 한 찬국에게는 2003년 4월 16일자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배후 범인을 못 잡았습니까?” “사형이 집행되었다면 그 과정에서 어떠한 문초도
가능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진실로 이들은 그 배후를 몰랐던 것입니다. 지시대로만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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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 브로커들을 통해서 돈만 받은 것이죠. 배후자는 배후를 철저히 숨긴 것이요. 수사가
좀 더 과학적이었더라면 사형집행을 서두를 것이 아니라 배후를 더 철저히 파헤쳤어야
했는데......,”“선생님! 생각해 보세요! 생각 없는 사람들의 제사난동, 한국국민들의 관심을 응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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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킨 조선일보사의 고구려전시회, 천인공노할 도굴사건, 일련의 이 세 사건만 보더라도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촉박한 외재적 동력이 있었다고 보아야하지
않겠습니까?우리 학자들은 현대사의 이런 편견들을 근본적으로 초탈해야겠지요. 물론 이런 사건
때문에만 동북공정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한국이 점점 강성해져가는 모습을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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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궁극적으로 남·북의 통일이 중국에 미칠 영향 등등을 생각하면, 중국정부가 정부 나름대로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은 당연한 조치일 수도 있습니다. “9월 30일, 화요일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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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해의 본명은 오기섭이다. 1911년 3월 5일,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도베야라고 불리는 한
시골마을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소년기는 길림성 화룡 현 수동 촌에서 보내었고, 청년기부터
는 북만일대에서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1930년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고, 1931년에
는 중국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한다. 그리고 동북 항일 련 군의 주요 멤버로서 항일투쟁의
찬란한 경력을 쌓는다. 독립 운동사를 연구하다보면, 동 인물에 대한 이명이 성까지 마구
변하는 아주 제멋대로의 방식을 취할 때가 많은데 그것은 일본군경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엉뚱하게 다른 이름을 사용하곤 한다. 주덕해는 1934년까지만 해도 오기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 후 전사로 혁명가로 거듭나면서 주덕해로 이름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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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부터 45년까지 연안에 머물면서 중국혁명의 주류 속에서 활약하고 폭넓은 인맥을
구축했다. 주덕해는 팔로군 359려 719단 한 특무련에서 지도원으로 복무를 했고 8단에서
지도원으로, 다시 조선혁명군정대학에서 관리처장으로 활약하면서 착실하게 입지를 굳혀
나갔다. 주덕해는 항일련군출신의 중국 공산 당원이었기에 항상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의
연대적 관계와 특수모식에 관해 고민했다. 저선혁명군정대학에서 조선의용대출신과 항일
투사들이 연안에서 합류하고, 또 연안의 혁명기류에 포섭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중국혁명
속에서 조국 조선의 명운이 어떻게 되어야하는가에 관해 고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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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모든 문제의식이 표면의 긴박한 과제상황으로 부상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8.15해방
이후의 일이다. 8.15해방 그 자체는 우리민족이 스스로 쟁취한 사건이 아니다. 8.15가 “해방”
이지 “독립”은 아니다. 일제의 마수 속에서 우리민족이 풀러 놓여 진 사건일 뿐인데, 그 사건
의 주체라는 것은 일본의 항복이고 강대열국간의 타협이다. 따라서 조선이라는 해방된 공간을
누가 점유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하여서는 어는 누구도 그 정통성이나 정당성을 독점할 수
있는 주체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러한 상황에서는 누가 그 공간을 권력적으로 장악하느냐
하는 문제는 “운 좋고 재빠른 놈이 장땡”이라는 결론밖에는 없다. 그러나 “잽싸게 운
좋은 놈”의 최적여건은 “줄을 잘 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줄”이란 조선해방의
뒤처리를 담당하는 강대국의 빽 줄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시다시피, 그 빽 줄은
미국과 소련이었다. 다시 말해서 중국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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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일본이라는 적수가 사라지자마자 곧 집안분규에 휩싸여 밖을 관리할 수 있는 여념이
없었다. 일본이라는 적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동북항일련군”이라는 실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일련군이란 일본이 있을 때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미 동북항일련군은
양 징위와 같은 거대한 지도자가 일본군의 집중토벌작전에 의하여 밀리고 또 밀리다가 장렬
하게 궤멸되고 마는 시점에 이미 그 지속의 동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 대운이 기울어지는
것을 파악한 김일성은 미적거림 없이 중국을 떠나 소련으로 튀었다. 하바로프스크소련 88
국제여단의 소련군 장교로 둔갑하다. 조선반도의 뒤처리를 장악한 소련의 입장에서는 러시아
어, 중국어, 한국어에 능통한 청년장교 김일성 이상의 연줄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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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입장에서도 상해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의 공식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미국 내에서
다양한 외교활동을 벌려왔던 노회한 지식인 이승만 이상의 “안전 빵 연줄”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여튼 일본의 패망이 목전에 다가왔을 즈음 팔로군의 총사령과 주 떠는 동북에서 활약하고
있는 조선의용군에게 조선 진출을 목표로 한 동원령을 내린다. <주덕해평전>의 저자는
“연안에서 주덕의 6호 명령을 받고 조선 진출을 목표로 심양까지 나왔다가 포츠담선언에
부딪히면서 무산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그 명료한 자료제시가 없어서 구체적인
정황은 알 길이 없으나 동북 무장 세력의 조선 진출은 원칙적으로 봉쇄되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전후처리를 논한 포츠담 선언에서 중공이 전혀 이니시어티브를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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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의 대표는 지앙 지에스였지 마오 쩌똥이 아니었다. 지앙은 당시 한국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가가 없었다. 그리고 뒤늦게 소련의 스탈린 수상이 참여하여 선언문에 함께 서명함
에 따라, 이미 한국문제가 소련과 미국사이에서 요리되는 반찬으로 종결되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따라서 중공은 무리한 조선 진출을 기획할 수가 없었다. 동북의 한민족공동체의 운명에
관하여 가장 심오하고 넓은 관심을 지녀왔고 행동수반의 역할을 수행했던 주덕해에게는
조선 진출이 봉쇄됨으로써 크나 큰 좌절을 맛봐야 했고, 또 동북의 조선동포의 운명에 관하여
명료한 인식을 재정립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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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북의 조선인들은 우선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관하여 명료한 인식이 없었다.
자기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그냥 조선에서 건너온 교민정도인지 잘 알 수가 없었고,
또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할 지에 관해 원대한 포부를 지닐 수 없었다.
더구나 지겹고 끔찍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패망하고 고국 땅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은
그들의 삶의 행방에 관하여 깊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8.15해방이전 통계로 동북에 살고
있었던 조선족 총인구는 216만 정도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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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8.15해방을 전후로 해서 이 인구는 “민족대이동”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1945년 시점의 상황에서 만약 중국이 통일을 완수하고 국가로서의 명료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고 한다면, 동북의 조선인들이 서둘러 귀국하는 동요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마오가 통일된
중국의 리더로서 포츠담에 사인을 했다고 한다면, 당연히 조선의 남북분열은 세계사의 페이지
에 등장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김일성이나 이승만과 같은 변방 적 인물이 해방 후 조선의
리더로서 무리하게 권력을 장악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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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하튼 조선은 해방공간이 된 반면, 중국은 치열한 국공내전에 돌입해야 했다.
동북에 진출한 조선의용군도 조선 진출의 꿈을 꺾고, 당면한 동북의 인민 해방 전선에 국궁
진취, 있는 힘을 다해야 했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혼란을 피해 고국으로 이주한 조선의
동포들은 8.15전후로 하여 약 100만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혼란기에 동만, 북만, 남만의
동포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기에 동북의 동포들에게 명료한
청사진과 가치관을 제시한 위대한 영도자가 바로 주덕해였다.
주덕해는 이 혼란시기에 동북지역을 다니면서 외쳤다. 그가 말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었고
민주의 절절한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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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왜 여기에 왔습니까? 무슨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왔습니까? 당신들은 배고파서,
땅이 없어서, 농사지으러 바로 이 땅에 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반세기가 넘도록 이 땅을
개간하고 논밭을 만들며 어렵게, 어렵게 생활터전을 닦아나갔습니다. 이제 이 땅은 우리
만족의 삶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특정시기의 이주민이라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편면 적입니다.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어디로 간들 무슨 보장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 땅의 주인입니다. 이 땅의 주인으로
서의 의식과 자세를 갖지 못하면 우리는 하루아침에 남의 땅에서 천시당하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체가 확립되어야만 남들이 믿어주는 것입니다.
조선민족의 번영과 발전은 이런 자세가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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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주덕해가 이러한 메세지를 설파한 시점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기 이전의
불안한 시기였으므로, 이러한 명료한 관점을 표방한다고 하는 것은 보통의 신념으로는 이루어
갈 수 없는 것이다. 주덕해는 진실로 광대한 시야와 거시적 역사의식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1945~1949년의 기간 동안 조선청년들을 격려하여 인민해방군의
영도 하에 국민당과의 싸움에 적극 참여하여 빛나는 승리를 쟁취하도록 하는 한편 중공중앙과
의 연계 속에서 일정한 구역을 조선민족의 자치구로 만드는 구역자치안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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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역자치안은 어찌 보면 중앙에서 보면 분열주의로도 비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워낙 동북지역의 해방투쟁이 8.90% 조선인의 노력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에 의리상 그러한
오해의 소지가 없었다. 그만큼 중국공산당과 우리조선의용군의 선전공장이 없이는 인민해방군
은 소기의 전술 전략적 성과를 올릴 수 없었다. 중국 인민 해방군 군가의 작자가 전남 광주
출신의 정률성이라는 사실은 그러한 유대감의 일면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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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동북지역에 진출한 10만 여명에 이르는 팔로군, 신사군 부대들과 2만여 명의 한족
간부들이 조선족집거구역에 근거지를 튼튼히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인 항일련군 내의 조선
민족투사들과 조선의용군투사들이 혁명단체를 건설하고 인민 무장 대오를 조직하여 공산정권
을 수립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아놓은 사실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해방전쟁기간에도
전 동북에서 약 6만 3천 여 명의 우리민족 청장년들인 인민해방군에 입대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민족 매 17명당 1명이 참군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가운데서 조선족이 집중된 연변
5개현에서만 해도 3만 4855명이 참군하였는데 전 연변 참군 자 총수의 85%를 차지한다.
3년 해방 전쟁기간에 연변 5개현에서 담가대, 운수대 등 전선근무에 참가한 사람은 연인원
20만 2300명이었고 우마차 등 여러 가지 운수도구는 1만 9200대가 동원되었다. 전선근무에
나간 우리민족의 농민, 노동자, 학생들은 적의 포화를 무릅쓰고 전선에 탄약과 식료품을
나르고 부상병을 후방으로 이송하였다. 그들은 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해 빛나는 공훈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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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해는 바로 이러한 공훈을 배경으로 자치구 구상을 강력히 밀고 나갔던 것이다.
다행히 이러한 구상을 깊게 이해해주고 대폭적으로 지지한 강력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동북항일련군의 지도자였으며 김일성과 같이 소련영내로 들어가 그를 끝까지 후견해
준 김일성의 은인이자, 당시 갈림성 성장이었던 저우 빠오종이었다. 주덕해는 자신의 구상에
관하여 “그것은 배타성과 족장석 관습이 아니다. 타관 땅을 개척했던 집단 체의 동질성확보와
정체성에 대한 부단한 확인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조선인들의 소속근거는 중국에서
땅을 개척하는 그 시각부터 이미 특정한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공동체로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구역자치만이 중국현실체제에 적응되고 생존에 부합되며 우리민족의 정치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명확한 입론으로 못을 박았다. 저우 빠오종은 공화국 창립전야인 1949년 8월
운남성으로 전근되어가기 전, 중공중앙 마오 쩌똥주석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먼저 연길지구
에서 민족자치를 실현하는 것이 최 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민족은 이 저우 빠오종
이라는 고마운 인물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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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이 창건되기 직전, 주덕의 “중국 인민해방군총부명령”이 하달되면서 전 중국의 해방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때 1949년 6월 15일부터 19일까지 뻬이핑에서 정치 협상 준비 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전국적으로 중국공산당, 각 만주당파, 각 인민
단체, 각 지구, 인민해방군, 각 소수민족 23지구에서 134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정치협상회의
조례와 공동강령, 정부방안과 선언을 기초하고, 새 중국의 국기, 국가, 국장 도안을 제정했는
데, 이 영예로운 역사적 134명 중의 한 사람이 주덕해였다. 이 회의에서 180명의 전국위원회
위원이 탄생하였는데 주덕해도 위원으로 선거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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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민해방투쟁시기에 주덕해가 “구역자치안”을 강력히 추진해나가는 그 이면에 같이 염두
해 두었던 두 가지 사태를 꼭 같이 언급해야 한다. 첫째는 교육이다. 주덕해는 자치구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자치구의 정신적 백본을 형성하는 교육이라고 하는 시스템이
활성화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며, 가능하다해도 민족정체성을 유지할 길이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민족의 교육열, 향학열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1906년 보재 이상설이
용정에 서전서숙을 창립하고, 1908년 김약연이 용정외곽 명동 촌에 명동학교를 설립한 이래,
조선민족은 진달래가 피는 골골마다 수없이 학교를 세웠다. 이 교육열의 측면에서는 조선
민족은 중국내에 존재하는 어느 소수민족보다도 선진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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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봄, 주덕해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단에서 류수 처 사업을 하였는데 그는 병으로
인하여 부대를 따라 떠나질 못하고, 소석향 수전 촌이라는 곳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그해 7월 주덕해는 수전 촌 태창수 농민네 집에 있으면서 비밀리에 유격대 조직사업을
하는 한편, 태창수의 집에다가 항일야학을 꾸렸다. 주덕해는 당시 24세였다. 그의 교육열정은
이때부터 이미 야학운동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주덕해가 북만 땅에 꾸린 야학교는 당시
최용건이 보청현에 꾸린 “군정강습소”, 조상지가 바랑허골짜기에 꾸린 “제3군사령부전신학교”
허형식이 방정현에 꾸린 “단기훈련반”등등의 학교와 함께 일제강점시기 중국공산당이 영도
한 항일교육 기초시설의 역사에 당당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 후로 주덕해는 하얼삔
제3지대 시절부터 북만따에서 2만 명 이상의 조선족인재를 양서해내 유서 깊은 “상지중학교”
를 청설했고, 연변진출 후에는 연변대학의 모체가 되는 여러 단과대학을 창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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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대학은 중국 소수민족지역에서 가장 일찍 설립한 민족종합대학으로 그 설립시기가 중화
인민공화국의 성립보다 빠르다. 1948년 10월부터 논의가 시작되어 1949년 3월20일에는
연길시 스탈린극장에서 연변대학 개학식이 거행되었던 것이다. 교명은 “동북조선인민대학”
에서 “연길대학”으로 다시 “연변대학”으로 확정되어 4월 13일 동북행정위원회의 비준을
받았다. 주덕해가 초대 총장, 림민호가 부총장, 김유휸이 교무처 처장, 박규찬이 비서처
처장을 맡았다. 주보중은 연변대학이 창립될 때, 개인의 명의로, 연변대학에 화물자동차
한 대, 피아노 한 대, 주단 한필을 증송하였다. 참 눈물겨운 정경이다. 주덕해는 이러한
교육기관의 창설이야말로 민족자치구의 성립을 확고하게 만들 수 있는 첩경이라고 생각
했던 것이다. 주덕해는 ㅈ초대총장으로서 연변대학 10대 운영방침, 연변대학 12년 교육
사업 발전계획, 12년 과학연구계획의 제정에 직접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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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해가 노력한 교육체제 정비 사업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유치원교육으로부터
소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육에 이르기까지의 완전한 교육체제를 확립하여 인재양성에
필요한 기본적 토대를 확고하게 쌓아나갔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훌륭한 인재들을
후하게 대접하여 선생으로 모셔왔다.
또 하나는 토지개혁에 관한 것이다. 인민들이 안심하고 동북지역에서 살 수 있는 기반은
결국 “땅”이다. 해방투쟁기간에도 중공은 민중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배분하는 정책을
과감하게 밀고 나갔다. 토지개혁을 통하여 봉건적인 토지관계와 착취제도를 철폐하고,
빈 하 농중을 골간으로 하는 농민들이 주권을 쥐게 되었으며 땅을 분여 받았다.
주덕해는 말한다. “토지개혁 중에서 동북조선인민의 95%를 차지한 농민은 모두 마찬가지로
토지, 마소와 가옥을 나누어 가지었다. 20만 노호 매호에 평균 비옥한 논 한 쌍 7무
(한 무가 666.7㎡) 씩 나누었다. 정치건설에 있어서도 동북의 조선인민은 이미 자기
운명의 주인공으로 되었다. 전 동북조선인미의 74%를 차지한 길림, 연변지구에 있어서
전원공서로부터 구·촌에 이르기까지 절대 대부분이 모두 조선인민이 자기절로(스스로)
선거한 조선간부이다” 이렇게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를 모두 갖추면서 자치구의 구상을
현실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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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투쟁 (제2차 국공내전시기) 3년 이래 참군한 조선의 청년의 총계는 전 인구의 5%이상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이당시 어떤 사람들은 “무산계급의 조국은 소련이고, 민족의 조국은 조선
이며, 현실의 조국은 중죽이다”라는 다조국론을 운위하고 있었다 주덕해는 이러한 견해야말로 조선인들의 소속감을 상실시키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주덕해는 말한다. “조선 사람들은 다른 형제민족과 함께 광활한 북만,동만,남만 지구를 개척
하였고, 여러 민족 인민들과 함께 반제, 반봉건 투쟁을 벌여왔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위하여 우리민족공동체의 모든 힘을 기여하였습니다. 우리민족의 이 영광스러운 역사를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중화민족의 떳떳한 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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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족의 떳떳한 일원으로서 조선민족의 확고한 아이덴티를 지니자고 역설하는 주덕해의
논리야말로 당시의 복잡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방편이었고 정도였으며 당위였다.
주덕해의 이러한 비전이 중공의 소수민족정책의 보편적 모델로 발전한 것이다.
1952년 9월 3일, 연변인민들은 드디어 민족구역자치의 새 역사의 장을 열었다.
1951년 주덕해와 최채는 뻬이찡으로 가서 건국 2돌 경축활동에 참가했고, 그때 전국정치협상
회의에서 주덕해는 연변이 조선민족자치구를 건립할 수 있는 주관조건과 객관조건을 다
구비하였으므로 조선정부에서 조선족인민의 요구를 비준하여줄 것을 요청했다. 뻬이징의
흔쾌한 대답은 들은 주덕해는 연변에 돌아오자마자 “연변조선민족자치구준비위원회”를 건립
하고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본골격을 완성에로 이끌었다.
-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성립되 1952년 9월 3일은 한국전쟁이 최후의
고비를 넘기고 있던 시점이기도 했다. 백마고지 등의 고지탈환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으로
능선의 주인이 수 없이 바뀌고 있었던 시점이기도 햇다. 중국에서는 6.25전쟁을 “항미원조”
라고 부른다. 미국의 침략에 항거하여 조선민주의 인민공화국의 해방전쟁을 지원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연변의 동포들은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했을까?
당연히 중공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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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17일, 연변 각계 인민대표회의에서 항미원조 연변분회를 설립하였고 실제운동
으로 항미원조를 지원하였던 것이다. 연변전원공서에서는 1,000여명의 여성간호원을 양성하여
한국전쟁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애국헌납운동을 전개하여 97억 여 원을 모금, 비행기 6대
반을 살 수 있었다. 2만 여명의 이곳 조선족 동포들이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였고 8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북한의 최용건과 같은 거물이 연변을 직접 방문하였던 것이다.
여기 연변열사능에는 항일투쟁시기, 국내 해방 전쟁 기, 항미원조 시기의 3대 걸치는 열사
비군이 모셔져 있는 것이다. 내가 만약 6.25참전용사라고 한다면 여기 열사능을 바라보는
감회가 어떠할 것인가 동포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그 피눈물로 뒤범벅된 이 민족사의
회한을 어디에 호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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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치열하게, 자기 인생에 구비치는 파란만장한 역사의 물결을 충실하게 헤치고 나아간
주덕해의 최후는 너무도 비참한 것이었다. 문혁의 홍위병들은 연변자치주의 가장 위대한
거물인 주덕해를 타도하지 않으면 도무지 “혁명”을 완수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주덕해는 아무리 트집 잡으려 해도 트집 잡을 건덕지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면 주변의 양심적 인물들은 그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면 그런
인물들이 먼저 타도의 대상이 됐다. “주덕해를 타도하고 전 연변을 해방하자”라는 구호가
난무하였다. 주덕해는 조리돌림을 당하고 감금을 당하면서도, 이 홍위병의 난동으로 인하여
조선민족지간에 분열이 생겨서는 아니 되며 령도간부들이 한편으로 치우치는 발언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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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해의 감금소식에 중앙에서 우려를 표시한 사람은 다름아닌 주은래총리였다.
진실로 주은래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주덕해는 비참하게 길거리에서 얻어맞아 죽었을 것이다.
주은래총리가 문화대혁명의 소란 중에서 노간부와 군대내의 장군들과 소수민족영도자들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은 찰스 디킨스의 역사소설 <두 도시 이야기> 속에 나오는
시드니 칼튼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주은래는 진질로 유일한 양심이었고 양식이었고 합리적인
조정자였다. 주은래는 연변군관회의에 주덕해를 연변에서 빼내어 북경으로 이송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비밀을 엄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1967년 4월18일 밤 비밀리에 가족과 작별인사
를 하고 북경 행 특별열차에 오른다. 그 뒤 “문혁”시기에 주덕해 집 물건을 전시했는데 큰
딸이 그곳을 가보았다. 그 물건들은 모두 “제1백화상점”에서 끄집어내온 것들이었다.
북경으로 올라간 주덕해는 북경 중앙 직속기관 초대소에 들어갔는데 이곳은 주은래가 노간
부를 보호하는 비밀장소였다. 그러나 결국 이 초대소도 홍위병들에 의하여 습격당하고 만다.
주덕해는 7명의 노 간부와 함께 " 2.7차량공장"으로 재배치되었다. 주덕해는 이곳에서 독한
엽초를 피우면서 혹독한 노동을 한다. 기관차 배수 밸브 덮개를 수공으로 깎는 일에 종사
했다. 그리고 1969년 9월에는 결국 호북 성 무한 장옥 령 부근에 있는 53농장으로 배치된다.
그곳에서 주덕해는 비지땀을 흘리면서 서서히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었다. 그리고 서서히
죽어갔다. 호북성 무한 53농장에서 유물로 회색중산복 한 벌을 이 세상에 남기고 눈을
감지 못한 채 61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1972년 7월 3일 저녁 9시 10분이었다.
그의 유서에는 단 한마디가 적혀있었다. "저는 연변에 돌아가겠습니다.
[출처] 도올의 중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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