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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 본 구절은 다윗이 그의 유일한 의지의 대상으로서 `여호와'를 강조하는 기도문이다. 다윗은 왼수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요새나 바위 등 팔레스틴의 지형(地形) 지물(地物)을 이용하지 않은것은 아니다. 그러나 몸은 비록 이러한 것들 뒤에 숨겼을지라도 그의 마음은 항상 여호와만을 의지 했던 것이다(Kid- ner). 한편, 혹자는 본 구절을 다윗이 성소의 보호지역에 들어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나(Kraus) 원수에게 쫓겨 유랑하던 시절에 다윗이 성소에 들어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본 구절은 여호와를 간절히 의지하는 다윗의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Delitzsch, Rawlinson, Calvin).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 이는 다윗이 현재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혹자는 본 구절을 `원수에게 붙잡힘으로 인하여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게 하소서'라는 뜻으로 해석한다(Hengstenberg). 그런데 본시 전체에서 다윗이 대적들에게 사로 잡혔던 사건을 암시하는 구절이 구체적으로 없으므로 이 해석은 타당성이 없다.
주의 의(義)로 나를 건지소서 - 여기서 말하는 `의'란 하나님의 언약을 환난 중에서도 순종하며 인내하는 의인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과 그에 따른 보상을 의미한다(Rawlinson, Delitzsch, Kraus). 핍박받는 의로운 다윗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를 기다렸던 것이다. 아울러 `주의 의'라는 표현은, 비록 인생이 연약하여 언약을 어기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오직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용서해 달라고 하는 의미도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다. 시편에 나오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의 개념은 로마서의 `의'의 개념(롬 1:16 이하)으로 발전되었으며 개혁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Kraus).
=====31: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 선지자는 대단히 완곡하게 풍자적으로 (irony), 그리고 대단히 완곡하게 하나님의 지혜와 애굽의 지혜,그리고 애굽에 자신을 의뢰한 유다 지도자들의 지혜를 비교한다(5:21;19:11-15;28:14,25;30:1.2)-'애굽이 지혜롭다면, 하나님은 더욱 지혜로우시지 아니하냐?(그러므로 마땅히 그에게 조언을 구했어야 했다.) 유다 지도자들아, 너희들만 지혜롭고 하나님은 지혜롭지 아니하시느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들로 하여금 큰코를 다치게 하실 것이다)'(Alexander) .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 자신을 불신한 백성들에 대해 선포하신 경고를 결코 철회치 아니하신다는 말이다. 오직 중심에 우러나는 회개가 아니고서는 어떠한 것으로도 하나님의 징계를 변경시킬 수 없다. 악행하는 자의 집...행악을 돕는 자를 치리시니 - '악행하는 자의 집'은 유다를 가리키고(1:4),'행악을 돕는자'는 애굽을 가리킨다-'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불행을 가져오기로 마음 먹으시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Oswalt).
속히 건지시고 - 본 구절은 다윗의 위급한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다윗의 원수들은 가까운 곳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다(Briggs).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保障)이 되소서 - 원수들의 공격에서 구원해 달라는 간구이다. 여기서 `견고한 바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추르 마오즈'인데 `추르'는 거대한 산을(18:2), `마오즈'는 안전한 장소, 곧 피난처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합성어는 `거대한 산위에 세워진 피난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어떠한 공격이나 환난도 막아낼 수 있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를 상징한다. 또한 `보장'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베트 메추도트'인데 여기서 `메추도트'는 `높은산', `산 꼭대기'를 의미하며 `베트'는 `거주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합성어 또한 난공불락의 요새를 의미하는 말로서 `견고한 바위'와 유사한 개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이처럼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안전한 피난처를 하나님 안에서 찾으려 했다는 사실이다.
=====31:3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 본 구절은 원문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 로 시작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을 직역하면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기 때문에'이다. 즉, 다윗은 지금까지 `여호와만을 자신의 반석과 산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고난 당하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Rawlinson).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란 목자의 인도를 나타내는 용어인 듯하다(23:2-4). 맹수를 만난 어린 양이 목자를 의지하듯이 원수들의 추격을 받고 있던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인도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인하여'에 대해서는 23:3 주석을 참조하라.
=====31:4
본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대립 된다. (1)부정적으로 보는 경우 : 목자들(애굽)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사자(하나님)는 일단 잡은 먹이 (유다)를 놓지 않고 끝까지 잡아먹는다(징벌한다, Delizsch,Young,Lange). (2)긍정적으로 보는 경우 : 목자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유다를 끝까지 보호하실 것이다(Calvin, Oswalt, J.Watts). 여기서는 후자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저희가...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 내소서 - 다윗은 원수들을 사냥꾼에 비유하고 있다. 이 비유는 저들의 간교성을 시사해 준다(9:15; 25:15; 140:5).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 원수들은 간교한 궤계로써 다윗을 잡으려고 하는 반면 , 다윗은 다만 여호와를 의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윗의 의지는 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간교한 인간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다(고전 1: 25). 여기서 `산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마오즈'이다. 이에 대해서는 2절 주석을 참조하라.
=====31:5
새가 날개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 앞절에서 사자로 비유된 하나님께서 본문에서는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새로 비유된다. 어미새는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제 몸도 아끼지 않고 싸울 만큼 모성애가 강하다(신 32:11). 이는 하나님과 유다의 관계에 있어서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즉,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사자처럼'강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애정과 관심이 '어미새처럼' 끈끈하고 뜨거움을 묘사하는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선지자는 연속되는 4개의 동사들을 사용하여 다양하게 표현한다.
호위하며 건지며 넘어와서 구원하리라 - '호위하며'(가난)는 '덮다','가리다'는 뜻으로 , '넘어가다'로 번역된 '파사흐'와 평행을 이룬다. '파사흐'는 출애굽기에서 유월절 사건과 관련하여 사용된 동사인데 그때 하나님의 보복의 천사가 애굽의 장자들은 남감없이 죽이는 한편 이스라엘 자손의 집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게 '넘어갔던' 것이다(출 12:13,23,27). 이는 미래에 있을 구원이 출애굽과 비슷할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11:15; 30:29). '건지며'(나찰)와 '구워하리라'(말라트)는 평행하는 말로서 다같이 '구해낸다'는 뜻이 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 여기서 `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시편에서 흔히 사용된 `네페쉬'가 아니고 `루아흐'이다. 이 `루아흐'는 창조주께서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신 바로 그 `생기'를 의미하는 것으로(창 2:7 ) 인간 생명의 근원을 의미한다. 다윗은 인간 생명의 근원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 좌우되는 줄로 알고 이것을 주의 손에 맡긴 것이다(Delitzsch). 또한 `부탁하나이다'에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페키드'는 `...에 두었다'는 으로(렘 37:21) 다윗이 자신의 생명 전부를 하나님의 손에 이양시켰음을 뜻한다(Kraus). 한편, 본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자신에게 인용하신 말씀이기도 하다(눅 23:46). 다윗은 죽음으로 부터의 구원을 소원하며 자신의 영을 하나님께 맡기었으나 그리스도는 죽음을 초월한 부활의 생명을 소원하며 자신의 영혼을 맡기신 것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 다윗은 자신의 생명 전부를 자신있게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여기서 밝혀고 있다. `진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메트'는 `확실하다', `확증하다'는 의미의 동사 `아만'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참된 것', 또는 `참'을 뜻한다(Twot). 즉, 여호와는 한번 언약하신 바를 반드시 지키시며 실행하시는 참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참되심을 과거의 개인적인 역사를 통해 체험하였다. `나를 구속하셨나이다'라는 구절은 과거에 자신을 실제로 위험 가운데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고백하는구절이다(Calvin).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참되심에 의거하여 다위은 이 순간에도 자신의 생명 전부를 그분에게 맡길 수 있었다.
=====31:6,7
그 백성을 위로하시는 여호와의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선지자는 동(同)시대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너희는 심히 거역하는 자에게로 돌아오라 - '심히 거역하겠다'는 말은 직역하면 '반역을 심화하였다'(헤에미쿠 사라)이니,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것을 더욱 심화시켰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아직 회개의 문이 닫힌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죄악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긍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은우상,금우상을...던져 버릴 것이며 - 우상 숭배가 만연되었던 때에 참회개의 증거는 이전에 섬기던 우상들을 무가치하게 내던져 버린 행위로 나타날 것이다(30:22).회개는 내면에서부터 보이지 않게 시작하지만 항상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인 열매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또 그럴 때에만 그 진실성을 인정 받게 되는 것이다(눅 3:8-14참조).
=====31:6
허탄한 거짓을 숭상(崇尙)하는 자를 미워하고 - 여기서 `허탄한 거짓'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블레 솨웨'인데 `하블레'는 `허무한 것'을 의미하며(왕하 17:15) 렘 2:5) `샤웨'는 `멸망', `황폐'를 의미하는 말이다(잠 1:27). 따라서 이는 `멸망의 허무한 것'이라는 뜻인데, `멸망의 허무한 것'이란, 물론 이방의 우상이나 마술을 의미하나(신 32:21; 왕상 16:13 렘 8:19; 14:22, Delitzsch, Rawlinson, Lange), 보다 포괄적으로 인간이 믿고 의지하다가 멸망당할 이 세상의 모든 헛된 유혹을 포함한다(Calvin). 이러한 것들은 참되신 하나님과는 대조적으로 인간이 믿는 만큼 참 만족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멸망을 초래하는 거짓된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거짓된 것과 이 거짓된 것을 숭상하는 자까지도 미워한다. 이렇게 다윗이 강도높은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일에 있어서 그 어떠한 것으로 부터도 유혹을 받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Calvin).
=====31:7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 다윗은 기도 중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기를 이미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가 기도 중에 깨달았기 때문이다(Craigie, Calvin). 한편, 여기서 `인자하심'(헤세드)이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곧 자기 백성을 언약하신 대로 끝까지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의미한다.
나의 곤난을 감찰하사 - `감찰하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는 `바라보다', `조사하다'는 뜻으로 이는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이 악인에게 사용되면 악인들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살펴 보신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인의 고난을 자세히 살펴보시는 것은 그 고난에서 그를 건지시기 위함이다.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 여기서 `아셨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 는 단순히 피상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포괄적인 지식, 또는 완전한 지식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용어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등의 전문적 지식에도 적용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완전히 습득하고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TWOT, Delitzsch). 바로 이와같은 완전한 지식으로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을 아셨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걸어온 다윗의 여정, 그에게 닥친 모든 역경들, 그리고 이로 인한 그의 영적인 상태를 빠짐없이 살펴보시고 그를 아셨던 것이다.
=====31:8
앗수르는 칼에 엎어질 것이니 - 앗수르의 멸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서 주어진다(8,9절). 그러나 이것은 앞절에서 언급된 백성들의 회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본문 초두에 나오는 접속사 '와우'에서 이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그때에 앗수르가 떨어질 것이며...'(원문).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니겠고 - 앗수르 군대가 군사적 열세 때문에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을 초월한 신비한 힘에 의해 괴멸된 것을 말한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신비가 반복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홍해를 건넌 사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전투, 기드온의 승리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 될 것인데 , 여기에 선지자는 앗수르의 몰락을 첨가시킨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덧붙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굳건한 신앙 관계에 있을 때에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음을 또한 교훈하고 있다.
그 장정들은 복역하는 자가 될 것이라 - 한 나라의 꽃이라고 할 수있는 청년들, 곧 전쟁을 위하여 선발된 용사들이 외국으로 끌려가 노예로 복역하게 된다는 것은 그 나라의 완전한 붕괴를 뜻한다.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禁錮)치 아니하셨고 - 여기서 `금고치 아니하셨고' 라는 말은 다윗이 원수의 손에 의해 완전히 굴복당하지는 아니했음을 의미한다. 다윗은 지금까지 용케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을 여호와의 인자하심 덕택으로 돌리고 있다.
내 발은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 `넓은 곳'은 안전과 구원을 상징하는 말이다(18:19 주석 참조). 다윗이 원수들에게 완전히 굴복당할 즈음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셨던 것이다. 다윗은 이와 같은 과거의 은혜로운 사건들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고통 역시 그때와 같이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는 간구를 할 수 있었다.
=====31:9
그의 반석은...그의 방백들은 기호를 인하여 놀라리라 -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반석'이 '그의 방백들'과 평행하는 말로서, 앗수르의 왕을 가리킨다는 데에 일치한다(Delitzsch, Cheyne, Lange). 군대를 지휘하던 그, 그래서 백성들이 철석같이 믿었던 왕도 두려움 때문에 싸움 한번 변변히 못하고 그만 물러나고 말 것이다. '기호를 인하여'(미네스)는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1) '기호때문에', 즉 적군의 군기를 보고 크게 두려워 한다.(Oswalt, J.Watts). (2) '기호로부터', 즉 너무나 무서워서 자신들의 군기마저 뒤에 팽개친 채 도망친다(Calvin, Delitzsch). '두려움을 인하여'라는 말과의 평행을 고려할 때 전자가 더 나을 것이다. 여호와의 불은...예루살렘에 있느니라 - 예루사렘은 하나님의 불이 타오르는 풀무이며 그곳에서 타는 불은 죄악을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능력을 상징한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풀무인 한, 그래서 함부로 손대는 자마다 소멸하는 불에 의해 멸망할 수밖에 없다면 (레 10:1-7 참조),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보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Oswalt). 본절에 이르러 다윗은 본격적으로 하나님께 탄식한다. 이는 현재 자신의 형편이 극도로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 고통은 다윗의 영과 육 모두를 쇠하하게 만들었다. 구약시대에 있어서 `눈'은 건강의 척도로 여겨졌다. 특히 근심은 눈을 어둡게 하는 원인이다(6:7주석 참조). 한편, `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몸과 대조되는 개념인 영혼을 의미한다. 다가오는 고통에 대한 근심으로 다윗의 영혼까지 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텐'은 하복부(下腹部), 여성의 자궁, 위 등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여기서는 몸의 내부, 또는 내장을 가리킨다(Delitzsch, Lange). 고통에 대한 근심으로 다윗의 몸의 내부가 크게 상한 것이었다. 또한 이 단어는 `네페쉬'와 함께 사용되어 총체적인 인간, 곧 전인(全人)을 표현하기도 한다(TWOT).
=====31:10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며 - 다윗은 슬픔과 탄식으로 인해 자신의 귀중한 생애가 마감되고 있음을 한탄하고 있다. 여기서 `보내며'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칼라'는 `끝내다', `마치다'는 뜻이다(TWOT). 이는 그의 삶이 탄식으로 가득찼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의 고통이 죽음의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볼 수 있다.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여 - `죄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온'은 일반적으로 `죄'를 의미한다. 그런데 본절 이하의 내용은 다윗의 죄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아뢰는 간구이다. 또한 `아온'은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의미로도 종종 사용되었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개념과 매우 밀접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죄악'은 보다 구체적으로 `고통'으로 번역되는 것이 좋다. 다윗은 자신의 말할 수 없는 `고통'(9절)을 여기서 약간 색다른 의미의 단어로 표현했을 것이다(Calvin, Briggs).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 이는 말라빠진 다윗의 몰골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기진 맥진하여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다윗의 처절한 모습이 충분히 나타나 있다.
=====31:11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맡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히니 - 다윗은 그의 대적들은 물론이요 그의 이웃으로 부터도 모욕을 당하였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대적으로 부터 받는 모욕보다도 이웃으로 부터 받는 모욕이 더욱 견딜 수 없었다.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란 구절은 바로 이와 같은 그의 감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Rawlinson).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어다 - 다윗이 명성을 날리던 때에 다윗을 가까이 헹던 그의 친구들이 그의 영육이 쇠약해지고 가련한 신세가 되자 이제는 그를 수치스럽고 불쾌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더구나 다윗에게 임한 고통이 행여나 자기와 자기 식구들에게 옮겨올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보는 것조차도 피했던 것이다(Calvin).
=====31:12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파기와 같으니이다 - 본절은 위의 구절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다윗은 모든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음으로써 외톨이가 되었다. 마치 죽은자나 깨진 그릇과 같이 아무도 그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육체와 심령의 고통위에 사회적 고통이 가중된 것이었다.
=====31:13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 여기서 `비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디바'는 `중상', `비방', `악평'이라는 의미도 있으나 `사악한 소문', 또는 `나쁜 보도'(창 37:2; 민 13:32)라는 의미도 있다. 랑게(Lange)는 이를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말'로 보았다. 이렇게 볼 때, 본 구절은 항간에 떠도는 다윗에 대한 나쁜 소문을 그가 들었음을 나타낸다.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 이는 나쁜 소문의 내용이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소문을 들음으로써 다윗의 고통은 크게 가중되었을 것이다.
=====31: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 `나'(아니)는 히브리 문법상 강조형이다. 여기서 다윗은 어떠한 환난 가운데서라도 오직 하나님을 의지 하겠다는 그 자신의 확고한 신앙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강조 어법을 구사했다.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 다윗은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자신의 신앙을 입으로 고백함으로 확증했다. 극한 한난 중에서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견고한 다윗의 놀라운 신앙이 다른 탄식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어김없이 잘 나타나 있다.
=====31:15
본절에서부터 18절까지는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다윗의 기도이다. 다윗은 이기도를 이전에도 드렸으나(1-3절) 자신의 고통을 고백한 후 다시금 반복하고 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 `시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트'는 `정한 때'를 의미하는 말이다. 우주의 만사(萬事)에는 정한 때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정한 때는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104:27; 욥 38:32; 렘 8:7). 다윗은 이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그 자신에게도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시련의 때와 형통의 때가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인간들(원수들)에 의해서, 또는 우연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기름부으심으로 형통과 복을 약속하셨다. 따라서 다윗은 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였다.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 앞 구절에 언급된 주의 `손'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손'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은 일시적으로 다윗을 핍박할 수는 있어도 약하여지고 맥이 풀리는 힘없는 손이다(삼하 4:1; 렘 50:43). 따라서 그 손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정해 놓으신 형통의 때를 결코 저지할 수 없다.
=====31:16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 구약 시대에 주의 얼굴 빛이 사라지는 것은 주의 진노하심으로 이해되었으며(4:6), 반대로 주의 얼굴 빛이 비추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의 상징이었다(민 6:25). 다윗은 자신의 환난을 하나님의 부재(不在)의 결과로 느겼으나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임하시기만 한다면 지독한 고난에서 즉시 해방될 줄로 믿고 기도한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 이에 대해서는 7절 주석을 참조하라.
=====31:17
나로 부끄럽께 마시고 악인을 부그럽게 하사 - 성도의 부끄러움과 악인의 부끄러움이 대조 되어 있다. 다윗은 악인들로부터 일시적인 부끄러음을 당하였으나 그는 악인들의 영원한 부끄러움을 간구하고 있다. 이 영원한 부끄러움은 하나님이나 그의 백성들을 반역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미치는 당연한 죄의 결과이다(6:10; 22:6; 40:14; 109 :28; 사 41:11; 렘 51:47).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 음부는 무의식의 세계이다(6:5 주석 참조). 다윗은 자신을 모욕한 무리들을 이곳에 들어가게 하여 영원토록 입을 다물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31:18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 - 이는 13절의 비방(악한 소문), 악한 의논과 관련되는 구절이다.
벙어리 되게 하소서 - 이는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17절)의반복적 표현이다.
=====31:19
본절에 이르러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어 다윗의 찬송이 시작되고 있다 - 이러한 변화는 그가 지금까지의 간구에 대한 응답을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쌓어 두신 은헤 - `쌓아 두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판'은`숨겨놓다' , `비장(秘藏)하다'는 뜻이므로 본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은밀히 준비해 놓으신 좋은 것을 의미한다.
인생 - 이 말은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과는 대조적으로 무능력하여 제한된 인간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여기서 이 용어는 대적들을 의미한다.
어찌 그리 큰지요 - 본절에서 다윗은 두 가지 관점에서 크게 감탄하고 있다. 그 첫째는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특히 환난의 때에도 그에게 베푸실 은혜를 예비해 오셨다는 사실이며, 둘째는 그 은혜가 너무나도 풍성하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때문에 그의 감탄은 조금도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31:20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 `주의 은밀한 곳에'(베세테르 파네카)는 직역하면, `주의 얼굴의 은밀한 곳에'이다. 혹자는 이를 여호와의 성소에 숨은것으로 이해하려 하나 이러한 해석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서 `주의 얼굴'은 고난받는 성도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16절 주석 참조).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급히 강림하사 핍박받는 의로운자를 아무도 해할수 없는 은밀한 곳에 감추셨다는 의미를 가진다.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 여기서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케스'는 본절과 사 40:4 `험한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됨)에서만 나오는 단어이다. 여기서는 13절에 언급된 대로 다윗의 생명을 빼앗기로 한 원수들의 공모를 가리키는 듯하다(Walford).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 `장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수카'는 숲과 같은 `잠복처', 덮개로 가리운 `초막'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안전한 피난처를 상징한다(사 4 :6). 따라서 본 구절은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와 내용상 평행 대구를 이루고 있다.
구설(口舌)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 여기서 `구설의 다툼' 이란 언어의 폭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18절의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을 말한다(Rawlinson).
=====31:21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 본 구절 뒤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은 자신의 찬송이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 여기서 `견고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추르'는 `포위하다'는 의미의 동사 `추르'에서 파생된 것으로 `성벽(담)으로 완전히 둘러싸인'이란 의미를 내포한다(Delitzsch). 따라서 `견고한 성'은 성벽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안전한 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상징이다. 한편, 본 구절의 전치사 `베'(에서'를 학자들은 `.. .와 같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Calvin, Hengstenberg, Stier). 나님의 보호는 바로 견고한 성이 놀라운 방어력으로 대적을 물리쳐줌과 같은 것임을 본 구절이 나타낸다는 것이다. 내용상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31:22
내가 경겁(驚怯)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니 - 이는 다윗이 극한 환난 중에 놀라 말한 것을 가리킨다.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는 그의 중얼거림은, 환난에 처한 성도의 최악의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 즉, 극한 환난에 처하여 성도는 먼저 실망을 느껴며, 둘째 하나님의 보호를 의심하다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최악의 생각에 빠지게 된다(Briggs). 그리고 이러한 최악의 상태는 `경겁한 중에', 곧 `두려움'에 이르게 한다(Calvin).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 이는 상반절과 대조적인 내용이다. 즉, 얼마 전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그가 이제는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다윗이 좌절에 계속적으로 압도되지는 아니 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가 일시적으로 좌절에 사로잡히기는 했으나 말씀과 기도로써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믿음으로 이를 극복한 것이다(Calvin ). 한편,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히브리 본문에서 본 구절 맨 앞에는 `아켄'이란 용어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진실로' 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놀라움'을 나타내는 것으로(TWOT) 여기서는 (1) 자신의 일시적인 불신에도 불구하고 응답하신 하나님의 사랑, (2) 믿음으로 간구하였올 때 지체치 않으시고 즉각적으로 응답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다윗의 감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31:23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 다윗은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 여호와를 사랑할 것을 모든 성도들에게 자신있게 권고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엄중히 갚으시느니라 - 다윗은 여기서 성도가 여호와를 사랑해야 할 분명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본 구절의 내용은 이미 다윗이 체험한 바이다. 한편 `엄중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테르'는`충분히', 또는 `남김없이'란 의미이다(Kraus). 따라서 이 표현은 악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보여 준다.
=====31:24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 `강하고 담대하라' 는 말은 22절의 `경겁한 중에'와 대조적인 개념으로 모든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확신 가운데 있으라는 권면의 말이다. 왜냐하면 다윗이 이미 경허한 바와 같이 두려움은 불신을 가져다 주고 확신은 응답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한편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란 말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아'란 의미를 지닌다(Anderson ). 이런 의미에서 본 구절은 27:14과 같은 내용이다.
본시에는 비탄(9-13절), 신뢰(3, 5, 15절), 감사(7, 8, 19, 20절) 등 여러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본 시편이 여러 작품의 혼합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러 주제들이 혼합되어 있다고 해서 본 시편 자체가 그 통일성을 상실한 것으
로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우리는 본시를 단일 작자에 의한 단일 작품이라고 분류상으
로는 전반적 분위기를 고려하여 '비탄시'의 계열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장르 면에서 뿐만 아니라 작시(作詩) 배경에 있어서도 본시는 애매성을 드러낸다.
예컨대, 1-8절에서는 대적들로부터 보호를 요청하고 있고, 9-12절은 질병으로 앓고 있
는 자의 탄식으로 보이며, 13-18은 송사(訟事) 과정에서 부당한 판결을 당한 자의 하
소연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시의 저자에 대해서 혹자는 표제어를 무시하고 예레미야라고 주장하기도
나다. 이들은 본시의 일부 내용이(13절) 렘 20:10과 유사하며 여기 사용된 용어나
탄식하는 분위기도 예레미야서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등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
나 이러한 유사한 점들은 다윗과 예레미야가 서로 유사한 고난의 상황에 직면한 데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예레미야의 저작권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참조 사실을 논
한다면 오히려 예레미야의 저작권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다. 귿이 참조 사시를 논한다
면 오히려 예레미야가 다윗의 문체를 모방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대부분의 보
수주의 주석가들은 표제어에 기록된 대로 다윗의 저작권을 인정하며, 비록 단언할 수
는 없지만, 다윗이 원수들에게 핍박받던 시절, 특히 사울 왕에게 쫓겨 혈혈 단신(孑孑
單身)으로 메마른 광야를 유리 방황하며 생존을 이어가던 대환난의 시기를 배경으로
본시를 지은 것으로 추측한다(삼상 23:1-18). 본시에 여러 가지 다양한 분위기가 교차
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때에 황량한 광야에서 외로이 도피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심경
의 변황에 기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의 감정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의 기본적인 신앙이 결
코 변하지 않았다. 그 당시 다윗은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1) 때로는 주의 이
름에 대한 확신 중에 구원을 간구햇으며(1-8절), (2) 또 어떤 때는 자신의 처절한 형
편에 대해 비애를 느끼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펼쳤으며(9-18절), (3) 마
음속에 두려움과 불신이 일시적으로 자리를 잡더라도 이를 말씀과 기도로써 극복하고
끝내는 소망중에 하나님을 찬송하였던 것이다(19-24절).
우리는 이러한 장면에서 다윗의 신앙의 본질을 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신앙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념적 신앙 혹은 교리적 차원의 신앙이
아니었다. 반면에, 그의 신앙은 생명 그 자체엿으며 그의 삶의 전부였다. 그는 이 신
앙을 지키기 위해 끝없는 투쟁도 불사하였다. 먼저는 그를 핍박하는 불의한 세력들과
의 투쟁이었으며 아울러 풍전 등화(風前燈火)와도 같은 자신의 처절한 형편에 대한 비
애로 인해 찾아드는 마음의 두려움과 불신, 곧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하나
님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셨는가'라는 의심과의 힘겨운 투쟁이었다. 그 투쟁의 무기는
보이는 물질이 아니었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과 기도였고 소리높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는 간구였다. 결국 다윗은 극한 환난 중에서 이 투쟁을 잘하여
승리를 이끌어 내었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힘있게 찬송함으로
본시를 끝맺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시낭의 모본(模本)을 볼 수 있다. 그
것은 극한 환난 중에 찾아드는 모든 종류의 의심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놀라
운 기적을 간구하는 영적 투사의 모습이다.
이제 이러한 내용의 본시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확신(31:1-8)
황량한 광야를 홀로 정처없이 도피하는 가운데서도 다윗은 구원에 대한 큰 확산과
기쁨을 소유할 수 있었다(7절). 이러한 그의 큰 확신과 기쁨은 결코 개산된 환경으로
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환경과 처지는 오히려 크게 악화되었다(9-13저).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가 큰 확신과 기쁨을 소유할 수 있었던 근거는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5절)라는 그의 고백에 잘 나타나 있다.그는 실로 위급한 상황 중
에 자신의 생명 자체를 하나님께 맡겨버린 것이다. 그가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생명을
하나님께 맡겨 버렸다는 것은 불신자들이 볼 때에는 미련하게 보일지 모르나 실상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동의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이다(1-4절). 하나님은 난공 불락(難攻不落)의 성(城)과 같이 원수들의 모
든 공격을 막아주신다(2-4절). 따라서 다윗은 이 하나님외에 다른 어떠한 것을 의지하
는 자들을 비웃어버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자신의 생명을 맡긴 것이다(5, 6절). 또한
그가 자신의 생명을 맡기고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현재 자신의 고
난을 환히 살피시고 자기의 괴로움을 깊이 알고 계심을 깨닫고 크게 기뻐하며 즐거워
할 수 있었던 것이다(7, 8절).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성도를 영원
히 괴롭힐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어떤 환
경 가운데서라도 성도는 하나님게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으로써 실로 큰 확신과 기쁨
을 소유할 수 있다는 진리도 배우게 된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5절) 라는 구절은 본시 전체의 요절이자
성도의 생활의 표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으며(눅 23:46), 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도 돌에 맞아 숨지면서 이와
유사한 말을 남기도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워졌다(행 7:59).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위대
한 신앙의 인물들, 곧 신성 로마 제국의 샤를마뉴 대제, 캔터벧리 대주교였던 토마스
베켓, 보헤미아의 종교 개혁가 존 후수(John Hus), 루터와 멜랑톤,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가 존 위스할트 등도 순교 또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한결같이 기쁨과 확신 중에
이 구절을 외었던 것이다
2. 극한 고통의 호소와 간구(31:9-18)
다윗의 견고한 신앙을 극적으로 잘 나타내고 잇는 본 구절은(1) 근심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쇠약해진 다윗의 육체와 영혼(9, 10절), (2) 대적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배반
당하는 다윗의 처절한 사회적 소외(11-13절),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간구하는 다윗의 견고한 신앙(14-18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다윗의 신앙은 '그러하여도', 곧 '그럼에도 불구하
고'의 신앙이다(14절). 그는 오랜 도피 생활로 온몸과 영혼이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더욱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원수들의 위협에 대한 근심으로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
졌으며(9절), 죽음이 그의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고통으로 그의 기력은 탈진하여 비
틀거리며 겨우 몇 발자국 걸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10절). 게다가 이러한 고통을 가중
시킨 것은 가까운 친지마저 독설과 비방을 퍼부은 사실이었다(11, 12절). 전에 다윗이
명성을 날리던 때에 그를 가까이하며 따랐던 친구들이 이제는 가련한 신세로 전락하자
그를 시체와 깨진 그릇같이 여기고 그를 대면하는 것조차 꺼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러한 고통 또한 전부는 아니었다. 그에게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왓으니 대적들이 그를
죽이려고 공모햇다는 소문들이 여기저기서 그의 귀에 들려왔던 것이다(13절). 따라서
그는 쇠약해진 몸과 영혼을 잠시 쉬게 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장소에도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사방에 죽음의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약한 인생이 이쯤되면 사리글 포기하고 절망에 빠지는 것이 상례라고도 짐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절망의 기운을 단번에 물리쳐 버리는 다윗의 위대한 신앙 고
백을 엿보게 된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주는 내 하나님이시라'(14절). 즉, 모든
것이 자기에게 불리할지라도 자기는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신앙의 고백이
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신앙 고백은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그의 바른 인생에 기초한
다. 하나님은 아무리 절망적인 환경일지라도 그 환경을 뒤바꾸어 놓을 수 있는 전능의
하나님이시다(15절). 반면,자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이쓴 원수들은 그들이 아무리
공모하고 힘을 합하여도 하나님을 대적할 능력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임재하셔서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역사하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모든 상황이역
전될 수 있음을 시인은 믿었다(16절). 바로 이러한 확신 가운데 다윗은 절망하지 아니
하고 오히려 자신의 구원과 승리를 소망했고 의기 양양한 원수들의 영영한 파멸과 수
치를 바라보았다(17, 18절).
우리는 여기서 역경을 물리칠 수 있었던 다윗의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1)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확신과, (2)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바른 이해, 그리고 (3) 절
망적인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바라본 '그러하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
이었다.
3. 감사와 찬송(31:19-24)
절망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찬송
하는 내용인 본문은 (1) 일시적으로 찾아온 영적 위기를 극복한 후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 중에 하나님을 찬송함(19-22절), (2) 성도들에게 여호와를 사랑할 것을 권
면함(23, 24절)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문 중에 나타나고 있는 다윗의 찬송은 실로 감탄과 놀라움 그 자체라고도 이해된
다. 다윗은 두가지 점에서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19절)라고 크게 놀라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실 좋은 것을 오래 전부터 으밀히 준비해 오셧다
는 사실이었다('쌓아두신 은혜', 이에 대해서는 19절 주석 참조). 다윗이 환난 당할
때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서 명성을 날리고 큰 영광을 누
리게 될 것을 예상한 사람은 그 당시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절망적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만은 그의 복된 길을 아셨으면 그에게 주실 좋은 것을 예비하고 계셨
던 것이다. 다윗은 간구 중에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에 대한 놀라움으로 하나님을 크게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좋은 것이 너무나도 크고 엄청났기 때문에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햇다. 그는 환난 중에서 단지 원수들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다른 사
람들과 같이 평범하게 살 것만을 기대하였으나 그가 간구중에 발견한 그의 복(福)은
그 정도에 그치지 아니하였다. 본문에는 그 복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언급외어 잇지는
않지만 틀림없이 그는 환난을 극복한 후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 큰 승리와 영광을 차지
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견고
한 성(21절)과 같이 그를 보호하시며 그를 안전한 피난처에 숨기실 것이다(20절). 따
라서 그는 아무런 근심도 없이 뜨거운 찬송을 여호와께 드린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환난 중에 오직 하나님께 피하는 경건한 성도에게 하
나님께서 어떠한 은혜를 베푸시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1)그를 안전하게 보호
하시는 것이요, (2) 그에게 내리실 복이 어떠한 것임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큰 용기와
소망을 갖게 하시는 것이요, (3) 그를 위해 더욱 큰 복을 쌓아두시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준비가 되어있는 성도에게
는 고난이 저주가 아니라 복이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한편, 다윗이 이처럼 뜨거운 찬송으로 드리게 되기까지 신앙적인 위기가 없었던 것
은 아니다. 그는 극한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에 대해 심각한 회의
를 했던 적이 있었다(22절). 비록 일시적인 현상이었으나 만일 그가 이 회의를 극복해
내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놀라움의 찬송이나 그의 영광스런 미래는 없을 뻔하였다. 하지만 기도와 말씀에 대한 묵상과 신앙 고백(14, 22절)으로써 그는 이 모든 회의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다윗은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온갖 종류의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와 말씀의 생활에 전념하라는 중요한 삶의 방침을 제시해준다. 다윗이 기도와 말슴에 대한 묵상으로써 영적인 위기를 극복했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얻는 수단은 기도와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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