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과
성령이 주도하는 사도 바울의 1차 선교여행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여행을 살피는 것만해도 우리들에게 큰 은혜와 감동을 준다. 어떠한 핍박과 죽음의 위협이 따른다할지라도 멈추지않고 계속하여 선교하는 모습은 우리 모두를 감동케한다. 사도바울의 선교정신은 오늘날 성도들이 본받아야할 선교정신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놀라운 선교의 역사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도하는 선교사역이었다. 성령이 주도하는 1차 선교여행은 어떠했는지 순례의 길을 따라가보고자 한다.
바울의 1차선교여행의 경로
바울과 바나바는 어떤 정신으로 선교를 하였을까? 1차 선교여행 속에 나타난 두 사도의 선교정신을 배워보고자 한다.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행 13:1-4)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사도 바울의 선교는 바울이 계획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도하신 일이었다.
성령께서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금식할 때에 사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서 안수하여 보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안디옥교회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여 선교사로 파송한 것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사역이었음을 말해준다. 성령께서 명령하신 선교여행이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13장 4절에 나타난 것처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고 선교여행을 출발하게된 것이다. 성령께서 주도하는 사역의 동역자로서 선교여행을 떠난 것이다. 각 교회의 선교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도하는 선교가 되어야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역이 되어야할 것이다.
사도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마친 후에 교회에서 선교보고를 할때에도 그의 모든 선교여행은 “하나님이 함께 행하”(행 14:27)신 선교여행이었다고 보고한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말해주고자하는 교훈은 선교는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역사라는 것이다.
바울의 선교여행의 출발지요 선교본부로 사용된 안디옥은 어떤 도시였는가?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은 수리아의 수도로서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살았고 부유했으며, 아름다운 환경이 있는 휴양지였으나 사치와 죄악의 도시였다.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고 언급된 지역 가운데 그 당시 수리아의 수도였던 안디옥이 있었다. 사람이 붐비는 그 도시는 광범위한 무역의 중심지였으므로 다양한 나라의 많은 백성들이 그 도시로 모여들었다. 그 외에도 안디옥은 건강에 좋은 위치와 아름다운 주위 환경, 그리고 부와 교양과 세련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안락과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휴양지로 잘 알려져 있었다. 사도시대에 있어서 안디옥은 사치와 죄악의 도시가 되었다.”(행적, 155-156)
선지자와 교사 인물소개
바나바는 구브로섬 출신이고, 니게르라하는 시므온은 아프리카 사람으로 추정된다. 루기오는 구레네 사람으로 아프리카 북쪽 지중해에 인접해있는 지역으로 아프리카 지역 인물이며, 마나엔은 분봉왕 헤롯의 동생으로 최고의 상류층이었으며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 사람이다.
안디옥 교회는 행정적으로 어떤 지도자들이 있었을까?
선지자와 교사, 그리고 목사가 있었다.
(행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수하였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목사였다.
“안디옥에 있는 교인들의 교회 목사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들의 손을 얹었을 때 그들은 그 행위로써 정해진 그 특별한 사업을 위해 헌신한 그 선택된 사도들 위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한 것이었다.”(행적, 162)
1차 선교여행의 첫 선교지는 어디인가? 구브로 섬이다.
1. 구브로섬의 살라미와 바보
(행 13:4-6)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1) 왜 첫 선교지가 구브로섬이었을까?
(행 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바나바의 고향이 바로 구브로였다. 고향부터 복음화시키고자 첫 선교지로 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스데반의 핍박이후 구브로 피난해온 형제들을 돌아보고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행 11: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구브로는 스데반의 죽음에 뒤따른 박해 때문에 신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도망한 곳들 중의 하나였다.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에 와서 “주 예수를 전파” (행 11:20)한 것도 구브로에서 간 것이었다. ”(행적, 166)
2) 요한은 누구이며 요한을 언제부터 수종자로 두었을까?
(행 13: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행 13: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요한은 12장12절에 보면 그냥 요한이 아니라 마가 요한으로 소개하고 있다.
(행 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행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행 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골로새서 4장에 보면 바나바의 생질(조카)로 소개하고 있는데 바나바와 친척관계이었다.
(골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이다.
베드로의 구출을 위해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던 집이 바로 마가 요한의 집이었다.
(행 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베드로는 감옥에서 구출된 후 찾아갔던 집이 바로 마가 요한의 집이었다.
마가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가?
“마가의 어머니는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한 사람이었으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집은 제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행적, 166)
그럼 바울과 바나바는 왜 마가 요한을 수종자로 함께 데리고 가게 되었을까?
(행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마가가 자신도 복음전도사업에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고 싶어서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구제금을 가지고 왔을 때 마가 요한의 집을 방문하였었는데 그때 선교여행에 함께 동참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마가가 그들의 선교 여행에 동행할 것을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의한 것도 사도들이 그의 어머니의 집을 방문하던 때였다. 마가는 그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은총을 느꼈으며 복음 전도 사업에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고 싶었다.”(행적, 166-167)
그리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돌아올 때 마가 요한을 데리고 온 것이다.
살라미의 여러 유대회당에서 말씀을 전하고 구브로섬의 바보로 이동한다.
살라미에서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바보에 갔더니 한 반대자를 만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을 만났는가?
(행 13:6-8)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예수의 아들, 여호수아의 아들)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점성술사,마술사)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박수 엘루마(아람어에 온 말로 박수와 같은 뜻, 요술쟁이, 마술사)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박수 엘루마가 바예수라는 거짓 선지자가 총독 서기오 바울로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총독은 그들이 전하러 온 기별을 듣고자 사도들을 불렀으나
박수 엘루마가 기별을 듣지못하게 방해하였다.
“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썼다.
사단은 투쟁 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세워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행적, 167)
사단은 하나님의 사역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싫어 한다.
사단이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와 같이, 타락한 원수는 만일 개심하면 하나님의 사업에 효과적인 봉사를 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자기 대열에 잡아 두고자 항상 노력한다. ”(행적, 167)
첫 번째 선교지였던 구브로 섬에서 바울이 선교의 방해를 받았을 때 성령이 충만하여 그 박수 엘루마를 책망한다.
(행 13:8-10) 『[8]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복음전파를 방해하던 박수 엘루마는 어떻게 되었는가?
(행 13: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바울이 표적을 행하여 얼마동안 소경이 되게하였다. 이것 또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이다. 사도 바울의 능력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하신 것이다. 그러자 박수 엘루마는 소경이 되어 인도할 사람을 찾게되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은 성령이 함께하는 사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수 엘루마에게 일어난 표적을 본 구브로 총독은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행 13: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 그가 눈먼 가운데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로 사도들이 행한 이적이 엘루마의 비난대로 요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증명되었다. 총독은 사도들이 가르친 교훈이 진리임을 확신하고, 복음을 받아들였다.”(행적, 168)
박수 엘루마가 소경이 되어 보지못하는 것을 본 구브로 총독이 하나님을 믿게된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바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해준 것이다.
두 번째 행선지는 어디인가? 행 13:13-14절을 보자.
2. 바보 -> 밤빌리아 버가 -> 비시디아 안디옥
(행 13:13-14)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밤빌리아 버가에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여행을 계속하여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갔다. 그들의 길은 고생스러웠고, 그들은 고난과 궁핍을 당하였으며 또한 도처에서 위험에 둘리워 있었다. 지나는 촌락과 도시에서 그리고 외로운 큰길에서, 그들은 보이는 위험과 보이지 않는 위험에 둘러싸여 있었다. ”(행적, 169)
버가에 와서 마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린다.
밤빌리아 버가에서 마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인가?
“마가가 공포와 낙담에 억눌려 한동안 전심으로 주의 사업에 헌신하려던 그의 목적에서 흔들린 것도 이 곳에서였다. 고난에 익숙하지 않은 마가는 그 길의 위험과 궁핍으로 낙심하였다. 그는 좋은 환경 아래서는 성공적으로 일하였으나, 이제 흔히 개척자들이 당하는 반대와 위험 가운데서 훌륭한 십자가의 군병으로 고난을 견디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는 위험한 박해와 반대를 용감한 마음으로 맞아야 할 것을 배워야 하였다. 사도들이 앞으로 나아갈 때에 마가는 더 큰 어려움을 우려하고 겁이 나서 용기를 완전히 잃어 앞으로 나아갈 것을 거절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행적, 169-170)
버가에서 비디시아 안디옥까지는 200km나 되고,
평균고도 해발 1,100m, 최고봉은 해발 3,300m의 험준한 타우루스 산맥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곳은 강도들이 많이 출몰하는 곳이다.
“버가 지역은 해적의 소굴이었고 이곳에서 내륙의 도시로 가는 길은 험준한 타우루스 산맥의 산들과 도적의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다.”(사도행전, 김기곤저, 86)
이렇게 험란한 산과 위험한 곳을 지나가야했기 때문에 마가 요한은 두려워서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예화) 리빙스턴 박사
아프리카에서 일하고 있을 때 친구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우리는 자네에게 사람을 몇 명 더 보내고 싶네. 자네가 있는 지역으로 가는 좋은 길을 알아 놓았는가?”
리빙스턴의 답장
“이곳까지 오는데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나는 길이 없어도 오겠다는 사람을 원하네.”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정신은 바로 이런 정신이었다.
그들의 선교사역은 길이 있어야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없어도 가고
핍박이 없어야 가는 것이 아니라 핍박이 있을 줄을 알면서 가는 길이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어려움들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들의 마음은 멸망하는 영혼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충만하였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충실한 목자들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안일과 편의를 생각지 아니하였다. 자아를 잊어버린 그들은 피곤하고, 주리고, 추울 때에도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한 가지 목적, 곧 양의 우리에서 떠나 방황하는 자들의 구원만을 바라보았다.”(행적, 169)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가진 선교정신은 오직 영혼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요 영혼의 구원만을 바라보는 정신이었다. 선교를 위해 오직 이 정신만 품었으며 영혼구원을 위해 방해되는 것은 자아까지도 다 버렸던 것이다.
(빌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정신이 한 영혼을 위해서라도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이다.
“주께서 교회들을 다니시면서 어떤 특정한 사업을 하도록 그들에게 명령하시지만 그들은 그 일을 하기를 거절한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을 하나님의 노력과 연합시킨 어떤 사람들이 바로 인간의 불행과 고통의 바닥에까지 접근하고자 노력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풍성하게 임할 것이다. 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소수에 불과할지라도 그들의 사업은 허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에는 한 영혼이 귀중하고도 매우 귀중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한 사람이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살게 하고자 그 한 영혼을 위해서도 돌아가셨을 것이다.”(8증언, 72)
1차 선교여행에서 낙오되었던 마가 요한이 2차 선교여행에 합류하려고하자 어떤 문제가 발생되었는가?
마가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툰 후에 갈라서게 되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가고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배타고 구브로로 간다.
(행 15:37-39)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마가요한과 사도 바울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누구든지 완전한 사람은 없다. 선교를 하는 일꾼도 인간적인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잠시 포기할때도 있고 잘못 판단할 때도 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면 잠시 나뉘었을지라도 하나로 연합하게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다.
마가 요한이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극복하고 처음 가졌던 선교정신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헌신을 결심하고 사역에 임하는 모습을 보고 사도 바울도 후에는 그를 선교 동역자로 삼는다. 선교를 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고 방해가 되는 모든 자아는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과 마가 요한은 관계가 회복이 되어 마가를 '나의 동역자'라고 부른다.
(몬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딤후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또한 사도 바울이 마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바울과 마가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들도 어긋난 관계가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로서 서로 화해하며 관계를 회복하여 하나로 연합되어야할 것이다.
마가 요한 또한 사도 바울에게 유익한 존재로 변화되었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와 선교 사역에 유익한 자로 변화된 것이다. 우리 모두도 언제나 하나님의 선교사업에 유익한 존재가 되어야할 것이다.
마가 요한은 사도 바울에게 유익한 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내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벧전 5: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마가 요한은 마가복음을 기록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마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개척한 개척자로 알려져 있으며 서기 68년에 복음 전파를 막으려는 이교도들에게 목이 묶여 도시 전체를 끌려다녔으며 돌팔매질을 당하는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험악한 선교여행의 길이 두려워 되돌아갔었던 그가 후에는 하나님께 대한 변함없는 믿음과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며 변화된 마가 요한의 신앙을 보여주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스도인은 마가 요한처럼 처음엔 좀 부족하고 불완전하다할지라도 점점 성장하고 변화되어가는 성도가 되어야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의 변화가 되어야할 것이다.
예화) 허드슨 테일러
개신교 선교의 제 1기가 인도 선교를 한 윌리엄 캐리(목사)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면
개신교 선교의 제 2기는 허드슨 테일러(청년)에 의해서 막을 열게 되었다.
테일러는 1832년 영국에서 독실한 감리교도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일러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 아들이 태어나면 중국에 선교사로 보낼 것이라고 하나님께 서원하였다고 한다. 허드슨 테일러는 17세에 중국 선교의 결단을 하게 되었으며, 1853년 9월 19일 ‘중국복음전도협회’ 소속으로 중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6개월 간의 항해 끝에 1854년 중국 땅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 그는 충분한 선교훈련도 받지 못했고 대학교육도 부족했지만 간단한 의학공부를 마치고 21살의 나이에 중국에 도착한 것이다.
더 많은 선교사가 필요하여 어느 날 고국에 돌아와서 선교사 지망생을 모집하게 되었고 지망생들에게 질문을 하게되었다.
테일러의 질문: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선교사로 중국에 가려고 하십니까?
지망생들 답변: 중국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멸망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가 중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가기를 원합니다.
테일러의 답: 그 대답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대답은 당신들이 삶의 역경과 선교의 어려움 속에 크게 부딪히면 흔들리고 말 것이다.
지망생들 질문: 그렇다면 선교사님은 무슨 동기로 중국에 가셨습니까?
테일러의 답: 내게 있어서는 한 동기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들을 사랑해서입니다.
왜 사도바울이 힘든 선교여행을 떠났을까?
그 영혼들을 사랑해서이다.
왜 모든 힘든 상황을 참았는가? 그 영혼들을 사랑해서이다.
선교의 장애는 큰 폭풍과 핍박과 방해가 아니다. 영혼을 사랑하지않은 죄가 가장 큰 장애이다.
“더욱 깊은 신앙적 열성이 없고 교회 안에서 피차간에 나누는 더욱 열렬한 사랑이 없는 이유는 선교 정신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2보감, 128)
영혼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없는 것은 선교정신이 죽어가고 있기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정신을 다시 가져야하겠다.
마가 요한처럼 때로는 버거운 일이고 힘든 일이어서 후퇴하기도하지만 다시 선교정신을 가다듬고 선교여행에 동참하였던 것처럼 우리들도 새로운 선교정신을 가지고 영혼을 구원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영혼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가지는 성도가 되어야할 것이다.
1. 비시디아 안디옥
비시디아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가?
1) 기뻤던 점
(1) 2주 안식일에 걸쳐 말씀을 하라고 요청받아 설교하였다.
(행 13:42-44) 『[42]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전할 말씀이 있으면 말하라고 그 한 번의 기회가 큰 감동을 주었고 온성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서 말씀을 듣게되었다.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고 청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방인들이 간청하였다.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나가자 이방인들이 간청하기를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로 설교해 달라고 하였다””(행적, 173)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첫 번째, 이방인들은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그리하여 그 지방에 두루 퍼지게된 것이다.
(행 13:48-49)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셨음을 크게 기뻐하였고, 감사한 마음으로 설교 말씀을 들었다. 믿는 사람들은 열심히 복음 기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으므로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행적, 173-174)
그런데 두 번째, 말씀을 듣던 유대인의 반응은 다르다.
(행 13:44,45)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말씀을 듣고자 나아오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런데 말씀을 듣고자 나오는 무리를 보고 시기하고 비방하는 것이다.
하늘나라는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들어간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이 간다. 말씀을 사모하고 하늘나라를 들어가고자 사모하는 자들이 가는 곳이다.
(마 11:12)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이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며 쫓아내서 이고니온으로 갔다.
(행 13:50-51)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유대인들의 방해로인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복음사역을 위해 연합하는 자가 되어야하지 방해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핍박과 반대가 있지만 그럼에도 선교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복음 기별이 비시디아에 전파될 때에 안디옥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맹목적인 편견으로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그 지방에서 쫓아 내었다.
사도들은 이러한 취급에 낙심하지 아니하였고, 다음과 같은 마음으로 선교여행에 임하였다.
복음 기별이 계속 전파되었으므로, 사도들이 용기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행적, 176)
유대인들의 방해와 핍박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하는 복음 기별을 듣고 믿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계속하여 힘을 얻고 선교를 하게된 것이다.
(행 13:51-52) 『[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방해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전진하였던 이유는 모든 선교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이고니온으로 갈때에도 그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선교하자 그 결과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렇듯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은 바울이 주도하는 선교가 아니라 성령이 주도하는 사역이었다. 사람의 생각을 따라 나아가는 선교여행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나아가는 선교여행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며 선교에 임하여야할 것이다.
“복음사업을 그처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성령의 부재이다. 학식과 재간과 능변과 선천적 혹은 후천적인 온갖 재능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영의 임재가 없으면 마음을 전혀 감동시킬 수 없고, 결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그 반면에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면, 가장 보잘것없고 무식한 그분의 제자라도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8증언, 21)
2. 이고니온
이고니온에서 선교사역은 어떠하였는가?
1) 허다한 사람들이 믿었다.
(행 14:1-2)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이렇듯 같은 복음을 듣고도 듣는 이의 마음에 따라 반응이 서로 다르다. 복음을 듣고 허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가하면 복음을 듣고도 믿지않고 시기하고 선동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복음이란 마음에 받아들일 때 삶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나 복음에 순복하지 않을때는 아무런 변화도 있을 수 없다. 심은 씨앗이 없는 땅에는 어떤 변화도 없다. 복음의 씨앗이 땅에 심겨질 때에 변화가 시작된다. 사단은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들을 하게하는 것이다.
2) 반대를 무릎쓰고 주의 사역을 계속하였다.
(행 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왜 이고니온에서 오래 사역을 하였는가?
“사도들은 그들의 사명을 피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까닭이었다. 반대와 시기와 편견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사업을 계속하였고,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14:3)”게 하셨다. ”(행적, 177)
복음을 받아들이는 영혼들을 볼 때 얼마나 행복하고 기뻐하겠는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영혼들을 보는 기쁨이 잠시 당하는 반대와 시기와 편견을 능가하였기때문에 이고니온에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치려고하자 루스드라로 갔다.
(행 14:5-6)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돌로 치려고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순종치 않는자들이었다.
돌로 치려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사도들에게 자신을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아니하고 폭도들로 하여금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쳐 그들의 수고를 끝내려고 결심하였다.”(행적, 179)
두 사도는 참으로 위험이 항상 사방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선교환경이 언제 갑자기 바뀔줄 모는 상황이다. 하지만 갑작스런 테러의 위험 속에서도 목숨이 위태롭지만 선교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한번만 위협을 당해도 좌절하고 낙담할 수 있을텐데도 불구하고 결코 증인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교회가 든든히 서가는 이유는 이러한 증인의 정신으로 선교와 헌신과 봉사하기때문일 것이다.
3. 루스드라
(행 14:5-6)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루스드라는 어떤 곳인가?
“이고니온에서 박해로 내어 쫓김을 당한 사도들은 루가오니아에 있는 루스드라와 더베로 갔다. 이 성읍들은 주로 이교도들로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나, 그들 중 더러는 즐겨 복음 기별을 듣고 받아들였다. 사도들은 유대인의 편견과 박해를 피해 이러한 곳들과 인근 지역에서 일하기로 결정하였다.
소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기는 했으나 루스드라에는 유대인 회당이 없었다. 많은 루스드라 주민들은 쓰스에게 봉헌한 신전에서 예배하였다. ”(행적, 179-180)
루스드라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다른 선교지에서 그랬었던 것처럼 이곳 루스드라에 사는 우상숭배자들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나누어 주고자 하였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 성읍에 나타나 루스드라 사람들을 모으고 복음의 단순한 진리들을 설명하자, 많은 사람들은 그 교리들을 쓰스를 예배하는 그들 자신의 미신적 신앙과 연결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사도들은 이 우상숭배자들에게 창조주 하나님과 인류의 구주이신 그의 아들에 대한 지식을 나누어 주고자 노력하였다.”(행적, 180)
하나님께서 루스드라에서 놀라운 선교 역사를 이루시도록 계획하셨다.
루스드라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나면서 앉은뱅이를 고쳐준 것이다.
(행 14:8-10)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어떻게 앉은뱅이를 고쳐주게되었는가?
“한번은 바울이 백성들에게 병자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낫게 하신 그리스도의 사업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때에, 청중 가운데서 한 앉은뱅이를 보았는데 그는 바울을 주목하고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믿었다. 바울의 마음은 이 고통당하는 자를 동정하게 되었고, 그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분별하였다. 바울은 우상숭배자들인 청중 앞에서 그의 발로 일어서라고 그에게 명하였다. 지금까지 이 앉은뱅이는 앉은 자세밖에 취할 수 없었으나, 이제 그는 바울의 명령을 즉시 순종하여 평생 처음으로 자기 발로 일어섰다. 이와 같은 믿음의 노력에 능력이 임하였고, 이 제까지 앉은뱅이었던 그는 “뛰어” 걸었다.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였다”(행적, 181)
앉은뱅이를 고쳐준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바울의 명성을 위해서 고쳐준 것이 아니다. 그에게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었기에 고쳐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을 만나게 해주신 것이다. 구원받을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할 것이다.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를 고쳐주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행 14:11-13) 『[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3]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를 고쳐주자 루스드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던 신이 강림하신 것으로 여기며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알고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자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를 고쳐준 후 그 일로인해 말씀을 듣고 믿는 자가 남자의 수만 약 오천이나 되었었다. 이 역사를 알고있는 사단은 앞으로 루스드라에서 일어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예감하고 이를 막고자 계획한다.
(행 14:19-20)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사단은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일의 구원의 역사를 직감하고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있는 유대인들까지 동원하여 루스드라에 와서 바울을 돌로 치며 더 이상 선교를 하지못하도록 막는다.
그들은 바울이 돌에 맞고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으로 내어버렸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바울을 통해 계속 진행되어야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보호하신 것이다. 루스드라의 선교는 아쉬움을 남긴채 더베로 이동하게된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1차 선교여행보고를 한다.
(행 14:26-28)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1차 선교여행에 대하여 보고하기를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이라고 보고한다. 진정한 선교정신을 가진 선교사였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정신을 이어받는 선교인들이 되어야할 것이다. 선교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증인으로서 하는 일은 증거하는 일이다.
(겔 3:11)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
증인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는 것이 증인의 사명이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이다. 증인은 전하는 일이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이 될 것이다. 우리들도 증인으로서 마지막 보고가 이러한 보고가 되기를 소망한다.
바울의 선교사역 보고를 듣던 성도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하나님의 성령이 바울의 말에 함께하셨으므로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 .”(행적, 172-173)
이렇게 사도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은 성령이 함께한 성령이 주도하는 사역이었다. 사람의 힘이나 이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행하신 사역이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여행은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마쳐졌다.
“심령을 감동케 하는 것은 기분을 즐겁게 하는 기만적인 이론들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다. 공상적인 이론들은 생명의 양식이 아니며 영혼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다.”(1기별, 160)
“성령의 감화가 없는 진리의 이론만으로는 사람의 심령을 깨우치고 마음을 심화시킬 수 없다. ”(실물, 408)
사람이 아무리 씨앗을 잘 심었다할지라도 하나님으로 공급되는 능력이 없이는 싹을 틔울 수 없듯 선교사역은 사람이 주도하는 사역이 아니라 성령이 주도하는 사역임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선교는 인간의 이론이나 논리와 주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함께하시고 성령이 주도하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