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장 불길한 예감
곡철은 몸을 재빨리 돌리면서 홍수죽에게 시선을 옮겼다.
홍수죽은 이미 급격히 핏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곡철은 다급하게 말했다.
"흥형, 귀파의 인마가 곧 도착할 것이니 조금만 더 견디시오. 조금만 참으시면 당신을 구해줄 사람이 반드시 올 것이오…… "
홍수죽은 힘없이 축 늘어져서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할딱거리며 대답했다.
"이미 늦은 것 같소… 고… 곡대협, 내 걱정은 말고…… 그들더러 나의…… 시신을 대초원에다 무…… 묻어 달라고 해 주시오"
곡철은 고개를 아래위로 크게 끄덕거렸다.
"좋소! 당신의 부탁을 잊지 않으리다."
이윽고 홍수죽은 한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곡철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홍수죽의 시체를 안전한 곳에 숨겨 놓고 쏜살같이 무외산장으로 날아갔다.
높다란 담을 한 잎의 낙엽과 같이 가볍게 뛰어 내려선 곡철은 그곳이 뜰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뜰은 꽤 넓었는데, 땅바닥은 대리석으로 깔려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돌로 지은 거대한 집들이 둥그렇게 들어차 있었다.
정면에는 대청이 있었고,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 대청에는 등불이 휘영청 하게 밝은데 사람의 그림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곡철은 천천히 계단을 밟고 올라가 대청으로 들어섰다.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찾았으나 움직이는 것이라곤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곡철은 조심스럽게 옆문을 통해 뒤 칸으로 들어갔다.
뒤 칸은 우아하고 아담하게 치장이 도니 화청(花廳)이었다.
화청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다.
한 개는 후면으로 통했고 좌우에 각각 한 개씩의 문이 있었다.
잠시 어느 문을 택할까를 생각하다가 곡철은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오른쪽에는 꼬불꼬불한 화랑으로 통했고, 끝부분은 양식이 똑같은 세 줄의 돌로 지은 건물로 통하고 있었다. 집안은 온통 어둠침침했고 아무런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곡철은 사방을 돌아보고 몸을 가볍게 날려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지붕을 타고 약 이십여 장을 날아갔을 때였다. 돌연 시야에 들어오는 두 개의 번쩍하는 물체가 있었다.
그들은 십여 장 밖에서 번개 같은 신법을 전개하면서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어둠침침한 곳이었지만 무공이 높은 곡철은 희미하나마 맞은편 지붕위에서 격투를 벌이고 있는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반호수 제요임을 알아보았다.
그와 맞서고 있는 한 사람은 온몸에 불덩이같이 시뻘건 장삼을 걸친 인물이었다.
막 몸을 날려 제요를 도와주려 할 때 곡철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흑수당의 패거리는 모두 검은 옷을 입었는데 저자는 어찌하여 붉은 옷을 걸쳤을까? 혹시 흑수당에서 그 사이에 다른 방파(幇派)의 고수를 초청해 와서 함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청해 왔을까?
그들의 무공은 어느 정도일까?
그들이 지금 모인 곳은 어딜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곡철은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한 마리 새와 같이 몸을 날리면서 그들에게로 날아갔다. 이장 거리에 당도했을 때 벌써 그의 장력은 예리한 칼날마냥 그 홍삼인의 머리를 후려갈겨 내고 있었다.
"이야압!"
홍삼인은 우렁찬 기합소리를 지르며 삼척 가량 공중으로 치솟았다.
반호수 제요는 뒤로 몸을 빼내면서 흥분에 젖어 고함을 질러댔다.
"곡대협! 아가씨의 행방을 알아냈소. 지금 백양이……"
말끝을 채 맺기도 전에 홍삼인은 몸을 좌우로 재빨리 흔들면서 일장은 곡철을 향해서, 다른 일장은 제요를 향해 날카롭게 펼쳐내었다.
꽈릉!
그의 장풍은 마치 산더미 같은 파도가 덮치는 것같이 거대했다.
그러나 곡철은 피식 웃으면서 가볍게 피했다.
반호수 제요는 눈에 살기를 띠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홍삼인의 몸 전체 요혈을 향해 가차 없는 공격을 시도했다.
곡철은 잽싸게 몸을 날리며 그의 절초인 월몽영을 구사했다.
홍삼인 이중(二重)의 압력이 가해오자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재빨리 손을 거두어 몸을 뒤로 돌렸다.
찌찍!
하나 어느 새 홍삼자락이 곡철의 손에 찢어져 나갔다.
곡철은 홍삼인에게 숨들일 여유도 주지 않고 바싹 추격해 가면서 단숨에 서른일곱 장을 후려치는 동시에 양다리를 풍차와 같이 빙글빙글 돌리며 걷어차 냈다.
파파파팡!
그러자 둑이 터진 강물처럼 거센 장풍이 밀려나와 홍삼인으로 하여금 지붕의 맨 끝부분까지 후퇴하게 만들었다.
곡철은 몸을 뒤로 빼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제형, 전형은 쫓아갔소?"
제요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소생이 막 뒤따라 추격해 가려고 했을 때 그만 저놈이 가로 막았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홍삼인이 또다시 덮쳐왔다.
그가 다짜고짜 두 손을 연거푸 펼치자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장영(掌影)이 곡철을 향해 밀려왔다.
이때 곡철은 상대방의 생김새를 뚜렷이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매우 영준하게 생긴 젊은이였고, 미간 사이에는 사나이다운 기개가 서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분노 때문에 눈썹이 곤두서 있어 몹시 날카로와 보였다.
곡철은 교묘히 몸을 날렸다. 그러자 곡철이 입은 노란 장삼은 수백 개로 화해지면서 각기 다른 방향과 다른 각도에서 수백 개의 그림자가 되어 홍삼인을 덮쳐갔다. 이 초식은 강호에 그 명성을 진동하고 있는 황룡의 구대절학중 하나인 몽리마(夢離魔)였다.
곡철은 강호에서 수많은 격전을 벌이면서도 이 몽리마 초식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아홉 가지 절학 중에서 이 몽리마와 혈천심(血淺心)이 제일 악독한 초식이었다. 그는 근 육년의 세월이 걸려서야 이 두 초식을 완전히 터득했던 것이다.
"헉?"
홍삼인은 곡철의 몸이 갑자기 수백 개로 변하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공세가 다가오자 놀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쌍장을 종횡무진으로 후려쳤다. 그는 무형강기(無形 氣)의 벽을 조성해 사면팔방에서 덮쳐오는 신비스런 공격에 저항하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하나 다음 순간,
퍼퍼퍽!
일련의 음향이 터져 나오며 홍삼인의 신형은 줄이 끊어진 연처럼 튕겨져 나가 지붕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떨어지는 그의 신형은 이미 살아있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반호수 제요는 잽싸게 다가오더니 이마의 땀을 훔치며 칭찬을 했다.
"곡대협, 정말 장하십니다. 겨우 삼 초만으로 그놈을 없애버렸으니…… 저는 이백 초나 겨루었는데도 아직……"
곡철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제형, 이 세 초가 내가 육칠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터득했다는 것을 당신은 아시오?"
제요는 약간 멍청해졌다.
"그렇게 오래…… 정말 저놈의 무공은 상당히 고명하였소. 솔직히 말해서 만약 곡대협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저는 아직도 그와 겨루고 있었을 겁니다. 아무런 승산도 없이 말입니다."
곡철은 제요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약간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일이 좀 심상치 않소. 저 홍삼인은 흑수당의 무리가 아닌 것 같소. 게다가 귀파의 인마는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고 귀파 장문 따님의 행방도 아직 확실치 않으니 말이오."
곡철은 이렇게 말하면서 주춤했다. 하마터면 무심코 철담 홍수죽의 죽음을 말할 뻔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의 소식을 알려 준다면 무쌍파의 사기에 큰 영향을 줄 것이 분명했다. 무쌍파의 고수들이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날뛴다면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다.
이때 제요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곡대협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 장원 속에 어둠이 깔려 있고 또 범위가 광대하니 백양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오."
"우리 이렇게 하기로 합시다. 일단 헤어져서 찾다가 귀장문 따님을 찾던 못 찾던 향 두 자루를 태울만한 시간 후에 장원의 정문에서 만납시다."
제요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다그쳐 물었다.
"아참 곡대협, 수죽은 어디 갔습니까?"
곡철은 이 말을 듣고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면서 빠르게 말했다.
"그는 나와 헤어져서 잘 모르겠소. 자! 제형, 우리 빨리 그녀를 찾아봅시다."
그는 말을 하면서 몸은 이미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제요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른 방향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곡철은 신형을 멈추지 않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몸을 날리며 날카롭게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어둠만이 사방에 깔려 있을 뿐, 거대한 장원은 마치 쥐죽은 듯 고요했다.
멀지 않은 곳에 평상시에 잘 손질한 듯한 화원(花園)이 눈앞에 보였다. 국화꽃이 송이송이 아담한 연못의 주위에 심어져 있었고, 하나의 조그마한 구름다리가 연못을 가로지르고 놓여 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 채의 정교한 정자가 평화스럽게 지어져 있었다.
곡철은 담담한 기분으로 이것들을 훑어보며 막 다른 곳으로 발길을 옮기려던 순간 갑자기 그 정자 속에서 옷자락 부비는 소리가 들려 나왔다.
곡철은 황급히 몸을 엎드려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 정교한 정자를 응시하였다.
잠시 후에 정자 속에서 또 한 번 조심스럽게 옷자락 여미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머리 하나가 살그머니 나와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곡철은 민첩하게 몸을 날려 그 마귀할멈과 같은 머리 앞에 당도했다.
얼굴을 내민 사람은 돌연 눈앞에 무언가가 희끗거리고 이어 한 사람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자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곡철은 재빠른 손으로 그 사람을 붙들어 끄집어냈다. 그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험상궂은 얼굴을 한 전형적인 흑수당의 졸개였다.
"아이고!"
흑수당 졸개는 땅바닥에 나둥그러졌다.
곡철은 다섯 손가락을 갈퀴 모양으로 하여 그의 목덜미를 낚아채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른대로 대답하면 살려 주겠다. 무쌍파 장문인의 따님을 어디다 가두었지?"
흑수당 졸개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벌벌 떨며 대답했다.
"난… 난 모릅니다."
곡철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네가 죽는다면 말하겠느냐? 네가 아무리 충성한다 해도 너를 칭찬해줄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다. 흑수당은 이미 멸망하였고 네가 장렬한 죽음을 한다 해도 허무한 일이다. 자! 사방에는 아무도 없다. 네가 솔직히만 가르쳐 준다면 살려줄 뿐만 아니라 백냥의 대가까지 주겠다. 어떠냐?"
흑수당 졸개는 의혹에 찬 시선으로 곡철을 바라보더니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좋소! 당신에게 가르쳐드릴 테니 약속은 꼭 지키시오. 무쌍파 장문인의 따님은 정자 밑의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소."
곡철은 눈을 번쩍이며 다급하게 물었다.
"지하실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하지?"
"정자 중앙에 있는 석탁을 좌우로 각각 세 번 돌리면 석탁이 자동으로 열려지며 밑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소. 그곳을 쭉 내려가면 복도가 나오고 복도를 통과하면 석실이 한 칸 나옵니다."
"그 낭자를 누가 감시하고 있나?"
흑수당 졸개는 침을 한 번 꾹꺽 삼키더니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음…저… 여덟째 두목 전재와 다섯 명의 대두목……"
곡철은 눈에 살기를 띠우며 미소를 지었다.
"좋아! 너는 솔직해서 좋다! 곧 사례를 해주겠다."
흑수당 졸개는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손을 내밀었다.
다음 순간 곡철은 은자를 주기는커녕 그의 갈비뼈를 세차게 후려쳤다.
"왁!"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꼬꾸라지는 졸개의 목덜미를 쥐어 올린 곡철은 냉랭하게 물었다.
"정말 간이 큰 놈이군."
흑수당 졸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나… 나는 사실을 말해줬소! 그… 그것은……거짓이……"
"네놈은 제법 대담했지만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너희 여덟 째 두목은 이미 내 손에 죽었다."
졸개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멍하니 곡철을 쳐다보았다.
"바른대로 대라!"
곡철은 목덜미를 잡고 있던 손으로 번개같이 흑수당 졸개의 뺨을 후려쳤다.
졸개는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흑수당 졸개는 벌떡 일어나면서 돌연 땅에 떨어져 있는 칼을 집어 들고 곡철의 두 다리를 냅다 후려 갈겼다.
그 칼날이 번쩍거리는 순간, 곡철의 발끝은 이미 치켜 올려져 상대방의 기세보다 더 맹렬히 그의 태양혈을 걷어차 버렸다.
흑수당 졸개는 못 속으로 풍덩 쳐 박혀 버리고 말았다.
곡철은 물속에 들어간 흑수당 졸개의 시체를 지켜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정자 앞에는 어느 새 나타났는지 온몸에 검은색 옷을 걸치고 은빛 수염이 기다란 노인이 서 있었다.
그 노인은 매서운 눈초리로 곡철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곡철은 냉랭하게 상대방을 주시하명서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올려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그 노인은 침착한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노부가 너에게 무쌍파 장문인 따님의 행방을 가르쳐 주겠다."
곡철은 냉랭하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나는 진여진(晋如塵)이다."
곡철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이 진여진이로군. 오랫동안 대명을 흠모해 왔소."
그의 음성에는 비꼬는 빛이 담겨 있었다.
진여진은 흑수당의 군사(軍師)였다.
강호에서 마유(魔儒) 진여진 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만큼 그는 잔인한 독계(毒計)와 가공할 무공으로 살인을 밥 먹듯이 일삼는 일대흉인(一代兇人)이었다.
그 진여진이 곡철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진여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노부는 평상시엔 자비롭다. 하지만 화날 때는 무척이나 음험하지. 너도 나 못지않게 살인을 밥 먹듯 하고 마음과 손씀이 악랄한데 누구를 나무라느냐?"
"그럼 두 악당이 만났으니 생사(生死)를 판가름해야 당연하다는 말이로군."
진여진은 은빛 수염을 쓰다듬으며 몹시도 침착하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너는 무쌍파 장문인 따님의 일을 알고 싶지 않느냐?"
"말해라!"
"무쌍파 장문 따님인 철양양과 우리 셋째는 마음이 맞아 서로 헤어질 수 없는 사이다. 그들은 너희가 오기 전에 이미 혼례식을 치렀다."
곡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가 혼인을 시켰느냐? 철양양 양친의 승인을 얻었느냐? 정말 너희들 마음대로구나!"
진여진은 안색이 변하는 듯 하더니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너는 명확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만약에 철낭자 자신이 원하지 않았다면 절대 혼례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오늘 혼례식을 치렀지만 그들은 벌써부터 부부관계를 맺고 있었다."
곡철은 암암리에 긴 탄식을 했다.
"강옥덕은 무쌍파에서 목숨을 구해주고 상처를 치료해 준 덕망을 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남의 보물을 훔치고 남의 아녀자를 유괴했으니 누구에게 물어도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행동을 범했다. 이 혼사가 설사 철낭자 자신이 원했다 해도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진여진은 차가운 콧방귀를 날린다.
"흥! 곡철! 그건 오산이다. 혈전(血戰)은 이미 시작되었다. 노부가 네게 이일을 설명해 준 것은 타협을 목적으로 해서가 아니다. 더군다나 여섯째와 일곱째, 여덟째, 아홉째 동생이 너의 손에 선혈을 토하며 죽었으니 이 빚을 너는 죽음보다 더한 대가로 치루어야 한다."
진여진은 음침하게 얼굴을 굳히며 한참 동안 곡철을 노려보다가 차갑게 내뱉었다.
"곡철! 그럼 잠시 후에 만나자!"
"잠시 후에 볼 필요 있나? 지금 해결하면 되지."
진여진은 곡철을 차갑게 노려보더니 휙 몸을 돌렸다.
그는 몸을 돌리는 것 같더니 이미 자취가 없어져 버렸다.
곡철은 그가 서있던 곳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의 벽돌이 천천히 닫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진여진은 지하실 밀실로 들어간 것이다.
곡철은 잠시 동안 한숨을 내쉬며 서 있다가 몸을 돌려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는 이 사실을 급히 무쌍파에게 알려주어야만 했다.
하나 중요한 것은 흑수당 무리들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거대한 음모가 은밀히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흑수당의 두령들이 이 급박한 혈전에 대부분 몸을 드러내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번 싸움은 흑수당의 생사존망(生死存亡)이 걸린 중요한 일전(一戰)인데 그들은 왜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둘째는 무쌍파가 총진격을 했는데도 싸움은 열두 개의 길목에서만 치열할 뿐, 비석산 위와 무외산장은 별다른 긴장이나 경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처럼 세심하고 치밀한 흑수당이 아무런 계책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있을 리는 없었다.
셋째로, 조금 전에 자신의 손에 쓰러진 홍삼인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는 흑수당이 도움을 청해온 다른 방파의 인물이 아닐까?
그렇다면 흑수당은 그런 고수들을 얼마나 청해온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지금 어디에 숨어서 잠복해 있단 말인가?
많은 의문들이 곡철의 머리에 맴돌았다.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태가 유리하게 진행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는 더욱 빨리 몸을 날려 한 건물의 지붕위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여전히 등불만 휘황하게 켜져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멀리 굳게 닫힌 무외산장의 대문이 곡철의 시야에 들어왔다.
곡철이 막 몸을 솟구치려는 순간, 어디서 우레 같은 함성이 들려 왔다.
"와아...!"
그 함성 속에는 유황탄의 폭발소리와 불빛과 연기도 보였다.
방금 전까지 장원에 있을 때는 들리지 않던 소리였다. 그렇다면 그 짧은 시간에 무쌍파가 이곳까지 돌격해 왔단 말인가?
이건 분명히 음모가 있음이 분명했다.
흑수당이 이토록 쉽게 총단을 내줄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곡철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진기를 끌어올려 단숨에 무외산장 밖으로 날아갔다.
막 장원의 담벽을 뛰어넘던 그의 시야에 다시 한 무리의 무쌍파 인마가 미친 듯이 길목과 산비탈을 진격해 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흑수당 졸개들은 극소수만이 간신히 저항하고 있었는데, 그들도 머지않아 북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불빛과 유황 연기 속에서 금익의 신형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삼십 여명의 무쌍파 제자들이 따르고 있었다.
"금존주. 여기요!"
곡철은 소리 내어 부르며 황급히 앞으로 달려 나갔다.
금익은 얼굴이 불덩이와 같이 시뻘겋게 변했고,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몸에는 여러 군데 시커멓게 탄 자국이 나있었다.
그는 곡철을 보자 기쁨이 솟구치는 소리를 질렀다.
"곡철, 자네 쪽은 어떤가?"
곡철은 빙긋 웃어 보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금존주, 당신들은 어떻게 이토록 빨리 공격해 올 수 있었소?"
금익은 득의만면해져서 껄껄 웃었다.
"하하하…… 별로 빠르다고는 할 수 없네. 자네의 신호를 받고 곧 공격을 개시했는데 이 망나니들이 죽자 살자 저항을 했네. 산길을 반쯤 올라 왔을 때 노부는 이미 이십여 명의 문하제자를 잃고 붉은 수염까지 부상을 당했다네. 나중에야 흑수당놈들은 불리함을 알았던지 후퇴를 하더군. 그래서 여기까지 올라온 거네."
금익은 숨을 돌리고 주위를 살폈다. 사방에서 날뛰는 인영이 모두 무쌍파의 제자들뿐임을 둘러보고 득의에 차 이렇게 말했다.
"곡철, 우리 함께 그놈들의 소굴 깊숙이 들어갈까?"
곡철은 고개를 저었다.
"금존주, 내 생각으로는 사태가 심상치 않으니 잠시 공격을 멈추는 것이 유리할 것 같소."
금익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잠시 멈추라고? 죽을힘을 다해서 여기까지 올라 왔는데 어째서 손을 멈추는가? 지금 포기한다는 것은 제자들의 사기를 꺽는 거나 다름이 없네."
곡철은 조급해졌다.
"금존주, 상대방에서 지금까지 나타났던 인물은 열 명 두목 중 무공이 제일 약한 몇 명에 불과하오. 강한 고수들은 아직 한 명도 보이지 않았소. 더군다나 무외산장은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할 뿐 사람의 흔적은 없고 나는 조금 전에 다른 방파의 인물까지 발견했으니 이 모든 것이 좋은 징조가 아닌 것 같소이다."
다시 한 번 사방을 둘러본 곡철은 말을 이었다.
"그들은 처음에 굉장한 방어를 했었소. 그런데 지금 갑자기 후퇴를 하는 것이 필시 무슨 흉계가 숨어 있는 것 같소."
금익은 멍해져서 가만히 들으니 과연 이것은 심상치 않은 현상임을 느꼈다.
이때 이십여 명의 무쌍파 제자들이 한 뚱뚱한 대머리 대한의 인솔 하에 무외산장의 대문을 덮쳐가고 있었다.
곡철은 다급하게 외쳤다.
"금존주, 빨리 귀파의 인마들을 멈추게 하시오!"
금익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뾰쪽하게 내밀었다.
그러자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휙휙하고 온 산을 울렸다.
사방에서 살수를 펴쳐 내고 있던 무쌍파의 제자들은 이 휘파람소리를 듣자 모두 격투를 멈추고 영문을 몰라 멍해져버리고 말았다.
이때 두 개의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왔다.
바로 열화금륜 상선청과 청엽자 나시 였다.
상선청은 도착하자마자 금익을 보고 노성을 질렀다.
"금익, 돌았느냐? 이런 때 공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리다니…"
금익이 대답하기 전에 곡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존주, 그것은 소생이 금존주한테 부탁한 일입니다."
상선청은 곡철을 보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억지로 부드러운 음성을 내며 말했다.
"곡대협,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했나?"
곡철은 금익에게 방금 설명한 일을 간단하게 다시 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금존주, 흑수당은 독랄함과 음험하기로 이름이 나있습니다. 그들은 계략이 없으면 이처럼 쉽사리 후퇴하지 않습니다. 여기엔 필시 흉계가 있으니 이대로 무외산장으로 덮친다면 그들의 계략에 빠지게 됩니다."
상선청은 손을 내저었다.
"그렇지 않네. 곡대협, 노부는 거센 세파를 많이 격은 사람일세. 흑수당은 이미 참패를 당했기 때문에 간담이 써늘해져서 후퇴한 걸세. 이토록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곡대협, 계속 진격하는 것이 상책(上策)일세."
곡철은 암중에 탄식을 하고 다시 한 번 만류했다.
"금존주, 소생은 아직 나이가 젊어 견식이 없어 존주와 이치를 논할 자격은 없습니다만 이번엔 존주께서 심사숙고 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열화금륜 상선청은 껄걸 웃었다.
"하하… 대협은 너무 겸손하네. 노부가 방금 너무 지나친 말을 했나본데 마음에 새겨 두지 말게."
"어찌 감히 제가 마음에 새겨 두겠습니까? 존주께서 지나친 걱정이십니다."
상선청은 고개를 들어 무외산장을 살피며 나직이 말했다.
"곡대협이 더 반대하지 않겠다면 노부는 명령을 내려서 다시 상대방의 소굴을 공격하겠네."
옆에 서 있던 금익이 약간 망서렸다.
"상형, 곡대협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좀 고려해보는 것이 어떤가?"
상선청은 기분이 나쁜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망설이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제일 꺼리는 점이네. 자네가 만약 망설인다면 여기에 그냥 머물러 있게."
금익은 안색이 돌변하면서 마주 소리를 지른다.
"상선청, 너는 나와 같이 무쌍파에 속하고 또 함께 대초원에서 왔는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
상선청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휙 몸을 돌렸다.
어어 날카로운 휘파람소리를 내며 몸을 날렸다.
그러자 사방의 무쌍파 제자들은 사기 충전하여 비장한 함성을 지르며 곳곳에 뛰쳐나와 산이라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무위산장으로 덮쳐갔다.
"와아아....!"
"와아!"
수십여 명의 인영은 이미 담을 뛰어넘고 있었다.
상선청이 손짓을 하자 청엽자 나시는 바람과 같이 날아갔다.
금익은 깊이 탄식을 했다.
"곡대협, 상선청은 원래 독단적인 성격이니 마음에 새겨 두지 마시오."
곡철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나도 정성을 다했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소?"
그가 말하는 사이에 한차례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무외산장 대문이 활짝 열리고 무쌍파 제자들이 벌떼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곡대협, 우리도 가는 게 어떻소?"
곡철은 먼저 몸을 솟구치며 쓴 약을 먹은 듯 입맛을 다셨다.
"좋소!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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