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제십좌(忍門第十座)
쾌활화림의 정문은 굳게 닫혔다. 그 문은 이 날 술시(戌時)가 되어야 다시 열릴 것이다.
정문이 닫히면 후문을 사용해야만 한다.
무유서생은 느릿느릿 걸어 후문을 나선다.
한기(寒氣)를 막기 위해 두꺼운 털옷을 걸치고 걸어가는 무유서생.
이름이 백무엽(白武葉)이라던가?
산학(算學)이 능한 덕에 꽤나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다.
천진부(天津府) 중심지.
부내(府內)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은 표행(杓行)의 건물이다.
천진표행(天津杓行).
그 곳에는 백이십 대의 마차(馬車)가 소속되어 있다.
표두(杓頭)들의 수만 해도 삼백, 표행의 규모는 가히 대강이북(大江以北)에서 제일이라 할 수 있었다.
백무엽은 느린 걸음으로 표행의 뒷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접객소(接客所).
그 곳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모인다.
표물을 먼 곳으로 발송하려는 사람들과, 먼 곳에서 온 표물을 찾기 위해 오는 사람들!
백무엽은 이 곳 출입이 꽤나 잦은 편이었다.
그가 쾌활화림의 서기가 된 지도 어언 삼 년. 그 사이 그는 이 곳을 백여 회 출입했다.
남경(南京)에 친척이 있다던가?
그가 외질(外侄)이 되는 백무엽을 위해, 귀한 고서(古書)를 구해 천신표행에 탁송한다던가?
"즉시 문을 닫게! 바깥의 찬 공기가 흘러들면 장작을 더 때서 방 안을 덥혀야 하니까!"
표물을 취급하는 사람은 금적산(金積山)이라는 기이한 이름을 갖고 있는 노인이었다.
그는 황국(黃菊)을 수반(水盤)에 꽂고 있는 참이었다.
그는 철창 뒤에 있었는데, 철창이 처진 이유는 표물을 찾으러 오는 척하며 돌연 비적(匪賊)으로 돌변하는 자들을 막기 위함이라 했다.
노오란 황국(黃菊), 한겨울에 국화를 본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천진부 외곽에 천야농원(天野農園)이 없었더라면 천진 사람은 겨울에 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황금에 눈이 먼 금적산!
그가 이 거대한 표행의 진짜 주인이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부호(富豪)가 되었다고 노는 자는 미친 놈이다! 노부는 죽을 때까지 일을 할 것이다!
천진쌍부(天津雙富) 중의 하나인 금적산. 그가 머무르는 곳에는 그가 일생 동안 모은 모든 것이 있다.
철창 뒤에는 금은창(金銀倉)이 있고, 전표가 가득 든 목괘 수십 개가 있다.
가히 황금산(黃金山)!
하지만 누구도 그 곳으로 가려 하지 않는다.
보라, 지하로 통하는 계단 가에 기대어 서 있는 거대(巨大)한 그림자 하나를.
손에 늘 반쯤 뽑힌 장도(長刀)를 들고 있는 자!
얼굴이 온통 칼자국투성이이고, 걸치고 있는 가죽 피풍의(避風衣)에서 늘 피비린내가 나는 자!
혈도(血刀) 마운(馬雲)!
황금의 동부로 가는 어귀를 지키고 있는 청부고수(請負高手)다. 즉, 그는 금적산의 충견(忠犬)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도초(刀超)는 가히 천하제일쾌(天下第一快)인지라, 아무도 그의 목을 먼저 벨 수는 없었다.
놀라운 것은 혈도 마운이 늘 목에 쇠사슬을 묶고 있다는 점이다.
거대한 자물쇠가 달린 쇠사슬은 마운의 목을 바싹 조이고 있다.
매일 거액의 수고비를 받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그러한 상태에서 호법(護法)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혈도(血刀), 너의 손(手)은 믿으나 네 마음(心)은 믿지 못한다. 네가 돈이 필요해 나의 호법이 되고 싶다면, 목에 쇠사슬을 걸고 있어야 한다. 물론, 호법 역할에 대한 대가는 엄청난 것이다. 큿큿, 이래봬도 노부는 무정태공(無情太公) 같은 졸부(卒富)와는 다른 진짜 거부(巨富)이다. 그리고 다른 일이라면 황금을 아끼나, 호위무사를 쓰는 데에는 황금을 아끼지 않는다!
금적산은 그러한 말을 한 후, 당시 자신의 호위무사 서른세 명을 잇따라 죽이고 자신의 무공을 자랑한 혈도를 바라봤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혈도의 반응이었다.
-금적산 노인(金積山老人), 내게 필요한 것은 자극(刺戟)이오! 고수에게 편안한 잠자리는 필요하지 않소! 훗훗, 목이 아니라 비파골(毘琶骨)에 쇠사슬을 채운다 해도 참겠소. 물론, 나를 쓰는 청부대금은 상당해야 할 것이오!
기인(奇人)과 광인(狂人).
둘은 주인과 종으로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천진표행에는 야적(夜賊)이 들지 않았다.
아니, 들지 않았다기보다 들었다는 소문이 나지 않고 처리되었다고 해야 좋을 것이다.
혈도 마운의 두 눈, 그 눈은 죽은 눈(邪眼)이었다.
침침한 저녁 무렵 같은 두 눈은 지금 백무엽의 위아래를 가볍게 쓸어 보고 있다.
어떠한 감정도 나타나지 않는 두 눈.
'야수(野獸) 같은 놈! 저 놈의 눈만 보면… 구역질이 난다.'
백무엽은 입가에 비웃음을 매달았다.
'짐승 노릇을 자처하다니…….'
그는 속으로 외치다가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하긴……!'
왜 갑자기 기세가 누그러진 것일까?
백무엽은 혈도 마운의 시선을 받으며 철창 쪽으로 다가갔다.
황국향(黃菊香)이 코에 배어 든다.
지금, 노인의 손답지 않게 아주 희고 아름다운 손이 수반에 국화를 세우고 있다.
지문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게 다듬어진 그 손은 바로 천진표행의 총국주(總局主)인 동시에, 표방의 일개 관사(一介管事)를 겸비하는 금적산의 손이었다.
아주 낡은 옷을 걸치고, 눈에서 늘 진물을 흘리는 금적산!
그는 무정태공(無情太公)에 비해 수배 많은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지내는 것이다.
국화의 향은 싱그러웠다. 구리 내음 가득한 곳에서 국화향이 난다는 것은 미묘한 일이었다.
백무엽이 소리내어 조금 더 다가갈 때였다.
"백서생(白書生)은 좋겠수다. 큿큿, 부자 친척을 두고 있으니!"
금적산이 중얼거리는 말이다.
손은 가지를 잡고 파르르 떨리더니… 아아, 황금귀의 솜씨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꽃의 배열이 나타났다.
화산(花山), 화해(花海)!
국화 다섯 송이로 국화의 산, 국화의 바다가 만들어졌다.
가장 적은 꽃송이로 가장 아름다운 조화를… 그것이야말로 금적산 노인의 상술(商術)에 기초된 원예법이라 할 수 있었다.
"큿큿… 그러나 그것이 나쁜 것일 수도 있소. 왜냐하면, 도와 주는 부자 친척을 두면 마음이 나태해지는 법이니까!"
금적산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진물 흐르는 눈으로 자신이 만든 작품을 꼼꼼히 바라보며 웃기 시작한다.
꽤나 징그러운 웃음, 거기서 동심(童心)이 한 조각 엿보이는 것은 어인 이유일까?
"백서생의 물건은 미리 꺼내 두었소! 이번 것은 보따리가 꽤 크구려!"
"음……!"
백무엽은 가벼운 숨소리를 내며 한 곳을 봤다.
서탁(書卓) 위에 붉은 보자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
보자기에는 독특한 문양이 가득했다.
꽃이 없는 나뭇가지의 무늬, 바로 무화과(無花果)의 무늬가 아닌가?
'이번에는 또 누구를……?'
백무엽은 주먹을 가볍게 쥐며 보자기를 취한다.
"하여간 고맙소!"
백무엽은 금적산을 힐끔 보는데, 그는 이미 수판(數板) 하나를 손에 쥐고 열심히 셈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샛별처럼 반짝거렸고, 손은 번개처럼 주산알을 퉁겼다.
그의 산술(算術)은 백무엽이 보기에도 백무엽을 능가했다.
백무엽은 아주 야릇한 금적산과 그의 호법 혈도 마운을 보다가는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그리고 벙어리보다도 말이 없던 혈도 마운이 말을 툭 뱉어냈다.
"용(龍)인데, 자신을 새(鳥)로 아는 불쌍한 녀석!"
용(龍)! 조(鳥)!
백무엽은 이미 없다. 아마도 그는 그가 즐겨 가는 운화다루(雲華茶樓)의 구석진 곳에서 보따리를 풀기 위해 바삐 가고 있을 것이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어깨에 맞아 가면서…….
운화다루(雲華茶樓).
열다섯 가지의 차를 파는 곳이다. 그 곳의 차는 모두 천야농원(天野農園)에서 나온다.
백무엽이 거기 잘 가는 이유는 차향(茶香)이 좋고 분위기가 아늑해 좋기 때문이라기보다, 거기 가면 타인의 눈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새벽의 다루는 한산하기 십상이다. 특히 창 밖이 찬바람에 쓸리고 대설(大雪)이 내리는 이런 날의 새벽은…….
손(手), 장부(丈夫)의 손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연약하다.
손가락이 아주 길어 꼭 미인의 손과 같다.
쇠붙이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손, 그 손은 지금 무화문(無花紋) 가득한 보자기를 천천히 끄르고 있었다.
다른 한 구석에는 중노미가 있었는데, 백무엽의 습관을 잘 아는 듯 와서 참견하려 하지도 않았다.
백무엽은 천천히 보따리를 끌렀다.
남경에서 붙여진 보따리 안에는 고서(古書) 스물다섯 권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길쭉한 갑(匣)도 하나 놓여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백무엽은 고서를 하나하나 세기 시작했다.
정확히 열 번째의 고서(古書), 그것은 스물다섯 권의 고서 중에서 가장 얇았다.
백무엽은 천천히 그 책을 끄집어냈다.
<무옥경(浮玉經)>
만들어진 지가 얼마 안 되는 듯 표제(表題)가 아주 깨끗했다.
백무엽은 용정차(龍井茶)를 천천히 들며 책장을 넘겼다.
겉장 바로 뒷장에는 백지(白紙)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백무엽은 그 흰 표면에 눈길을 유난히도 깊게 담그었다.
'이번에는 또 누구의 심장에 칼을……?'
아주 짧은 순간, 그의 눈에서 섬광(閃光)이 솟아져 나왔다.
설마, 그가 내공(內功)을……?
백지 속에는 글이 숨겨져 있었다.
내력(內力)이 이 갑자(甲子) 이하라면 발견하지도 못할 그러한 글이.
<제십좌(第十座) 무화령(無花令)!
최근 들어 네게 소식물을 전하지 않았던 이유는 우리에 대한 적(敵)의 방어가 치밀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을 먼저 유념하라!
마화삼(魔花衫)과 옥화삼(玉花衫)이 우리들을 노린다는 것을!
특히, 가장 활약이 많은 인문제십좌(人門第十座)인 너를!>
글의 시작은 그러했다.
아아, 인문(忍門)!
그 이름은 무림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이름이다.
또한 인문은 당금 천하무림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육대조직(六大組織)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었다.
인문살수(忍門殺手),
무정위사(無情衛士),
황실(皇室) 화영친위대(華影親衛隊),
정법비전(正法秘傳) 일천열사(一千烈士),
동영(東瀛) 부풍인자단(扶風忍者團),
변황(邊荒) 사천황대(死天皇隊).
여섯 조직은 당세에 있어 가장 강한 조직이었다.
특히, 인문의 살수들과 무정위사들은 당세를 좌지우지하는 양대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무정위사들! 그들이야말로 피의 대명사들이었다.
<마화삼(魔花衫) 휘하 무정위사(無情衛士)의 명단(名單)에 적히는 자는 어떻게 하든 죽는다.>
마화삼(魔花衫)!
그는 당세에 있어 가장 가공할 대명사이다.
마도의 지배자 마화삼, 그가 누군지 자세히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그는 단지 악마(惡魔)였다.
마화삼, 그는 마도의 전통에 따라 정말 많은 일을 저질렀다.
마병마창주(魔兵魔倉主) 마병지존(魔兵至尊),
공동장문인(攻洞掌門人) 유성우사(流星羽士),
혈마방주(血魔幇主) 천마성(天魔星),
곤륜명숙(崑崙名宿) 종대선생(鐘大先生) 종운학(鐘雲鶴)…….
마화삼이라는 이름 아래 제거된 사람들!
마화삼!
부르기조차 역겨운 악마의 이름이 글의 서언을 장식하다니…….
백무엽의 눈에는 떨림이 없다. 그에게는 이러한 일이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한 일이 된 듯했다.
그는 그저 그런 눈으로 글을 계속 읽었다.
<이번 일은 단독으로 처리해야 한다!
특히, 네게 맡기는 이유는 너의 임기응변이 인문의 십 인 중에서 가장 탁월하기 때문이며, 네가 젊은 덕에 피부에 탄력을 잃지 않아 변환절기(變幻絶技)를 쉽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은 매우 쉬운 살행(殺行)이다.
죽을 자의 이름은 철비검(鐵飛劍)!
그는 너의 경공이라면 두 시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산다.
그는 무림인이 아니라, 귀족(貴族)이다. 그를 죽이기 위해서는 침사곡(沈沙谷)이라는 고대 방파의 경공절기를 꼭 익혀야만 한다.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리 없이 나오기 위해서!
네게 침사비급(沈沙秘給)과 함께 한 자루 인검(忍劍)을 보냈다.
철비검이라는 자의 심장(心臟)에 그것을 꽂아라!
인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죽음의 미학(美學)을 이룩하라!
검(劍) 이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마라!
실행은 삼 일 후에 하라!
철비검(鐵飛劍)이 구문제독(九門提督)의 장중주(掌中珠)와 혼례식을 올리는 그 날!
물론 너는 철비검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천면공자(千面公子) 능혈우(凌血羽)라는 자를 죽이게 되는 것이지만…….>
백무엽은 글을 끝까지 다 본 뒤, 다음 장을 넘겼다. 순간, 그의 망막으로 책의 진짜 표지가 들어왔다.
<침사비급(沈沙秘給)>
그것은 묘강(苗彊)에 있었던 전설적 방파의 비전진경이었다.
침사곡은 가라앉은 모래의 땅이다. 거기서 사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경신술을 터득해야만 했다.
그 덕에 그들의 경공, 특히 승천비기(昇天秘技)와 잠형둔신형(潛形遁身形)은 단연 일품으로 꼽혔다.
그것은 경공 중의 삼대절기라는 곤륜(崑崙)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 무당(武當) 제운종(蹄雲踪), 천산(天山) 칠금신법(七擒身法) 세 가지를 능숙히 시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겨우 흉내낼 수 있는 상승경공이었다.
어극승천공(馭極昇天功).
두 발바닥 아래 용천혈에서 진기를 뿜어 내어 위로 떠오르는 술법이다.
내공이 막강해야 시전할 수 있으며, 임독양맥(任督兩脈)이 타통되어 경공운신(經功運身)하는 가운데 호흡이 자유로워야 시전할 수 있다.
몸에 익히기 어려운 반면, 터득한다면 누구보다 신형을 빨리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잠형둔신형(潛形遁身形).
음파(音波)를 발하지 않고 허공에서 방향을 트는 수법이다.
역시 임독양맥이 타동되어야 시전할 수 있다.
내공의 기초 없이 시전하려 한다면 자신을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화를 입으리라!
침사비급 안에 수록된 절기들은 하나같이 가공할 경공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 중 한 가지라도 익힌다면 경공의 대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백무엽은 차를 마시며 비급 한 권을 다 봤다.
"이번 일은… 조금 심심하겠다!"
그는 중얼거리며 책장을 덮었다.
타인이 보면 아마도 시권(詩卷)을 본다 오해할 것이다.
창 밖에는 대설(大雪)이다. 밖으로 나간다면 눈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 * *
일월(一月) 십 일(十日).
북경(北京) 일대에는 서설(瑞雪)이 내려 세상이 온통 흰빛이었다.
자금성(紫禁城)의 지붕 위에도 백설은 있다.
하늘마저도 눈빛으로 뒤덮이고 있는 정오(正午).
북경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고관(高官)들은 이 날따라 고운 옷을 꺼내 입고 나들이 길에 올랐다.
북경철가(北京鐵家).
구대(九代)에 걸쳐 명조(明朝)에 충성을 한 명문이다.
이 날, 그 곳에서 혼례식이 거행되는 것이다.
신랑은 북경철가(北京鐵家) 소가주(家主) 철비검(鐵飛劍).
신부는 구문제독(九門提督)의 독녀(獨女) 오청우(吳靑雨).
둘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이다.
세속의 정(情)은 남녀 간의 교통을 자유롭게 놔 두나, 귀족계급의 예법은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문반(文班)을 대대로 점거한 북경철가의 후예, 그리고 병권(兵權)을 점한 구문제독의 후예.
이들은 세 달 전, 먼 거리에서 힐끔 서로를 한 번씩 봤을 뿐이다.
철비검은 문무겸비한 수재로 소문난 청년이었다.
그는 오늘 꽃보다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게 되었다.
회랑(回廊) 아래, 화복 걸친 노인들이 대거 모여 있었다.
"허허… 어서 나오십시오. 하객(賀客)들이 재촉을 합니다!"
"헌헌(軒軒)한 모습을 어서 보여 주십시오!"
철가(鐵家)에 기가 죽어 지내는 노인들이다.
밖에 나간다면 그래도 노야(老爺) 소리를 들을 것이나, 여기서는 하인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북경철가는 귀족 중의 귀족가문이 아닌가.
황실(皇室)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서는 북경철가 사람을 거역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여간 많은 사람들은 한시빨리 신랑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방 안, 그는 오래 전부터 거기 앉아 있었다.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 입을 가볍게 벌린 채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핏물을 줄줄 흘리면서…….
피가 바닥에서 검게 굳은 것을 보아 이미 죽은 지 오래 지난 듯했다.
북경철가 내에서도 가장 깊은 곳, 열 겹의 호위를 지나야 이를 수 있는 곳이다.
보라, 방 천장에 아주 작은 구멍 하나가 뚫려 있는 것을!
그리고 태사의(太獅椅)에 걸터앉은 자의 심장에 정확히 두 치 장검(長劍)의 날(刃)이 틀어박힌 것을!
장식이 별로 없는 장검이었다.
<인(忍)>
검자루에 글자 하나가 새겨진 검!
그 검인은 이미 그의 피를 흠뻑 빤 후였다.
검게 마른 핏더미 가운데, 이상하게도 매미 날개보다 얇은 면구(面具)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아아, 태사의에 앉아 죽은 사람은 북경철가의 소가주 철비검이어야 하는데… 사실은 다른 사람이었단 말인가?
천면공자(千面公子) 능혈우(凌血羽).
과거 흑도맹(黑道盟)의 부표파자(副杓把子) 자리까지 올랐던 칠십 세 노마가 아닌가?
그가 철비검 행세를 하고 있다가 죽다니……?
"어서 나오십시오! 신부가 기다립니다!"
"소공자(少公子), 이제 나오셔야 합니다!"
노인들은 밖에서 웃는 표정으로 얘기한다.
눈(雪), 북경에도 눈은 내리고 있었다.
구문제독(九門提督)의 딸과 북경철가 소주의 혼례식이 갑자기 취소된 것은 이야깃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금부고수(禁府高手)들이 대거 철가에 모였다던가?
아주 이상한 공기가 감도는 가운데, 구문제독은 침식을 끊었다던가?
그리고 신부가 되었어야 했던 오청우 낭자는 머나먼 아미산(峨嵋山)에 가서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던가?
공자대부(公子大夫)들은 향차(香茶)를 마시며 그러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남의 이야기라 여기며 곧 시문(詩文)을 비교하는 즐거운 내기를 할 것이다.
보라! 산야(山野)에는 서설(瑞雪)이지 않은가.
이런 날은 그냥 걸어다니기만 해도 좋을 것이다.
눈을 맞으며 걸어가다 보면 아마도 잃어 버렸던 동심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침묵(沈默), 밀실(密室) 안은 침묵에 휘감겼다.
황촉(黃燭)조차 없는 밀실이다. 그래도 미광(微光)이 흐르는 이유는 돌천장에 호안(虎眼)만한 야광주(夜光珠) 하나가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도합 삼 인(人). 아니, 반듯한 자세로 석상(石像)에 누워 있는 자까지 따진다면 모두 네 사람이다.
<제이외단(第二外壇)>
벽에는 그러한 글이 적힌 혈번(血幡) 하나가 걸려 있었다.
암흑(暗黑)보다도 더한 무거움이 드리워진 밀실.
그리고 한순간 목소리가 있었다.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우리 제이외단은 인문의 암살극에 휘말려 지리멸렬될 것이다!"
아주 차고 나직한 목소리는 청사(靑絲)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몽면여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 나왔다.
"놈들은 뿌리가 매우 깊고, 발이 지극히 넓다. 놈들은… 우리들이 하는 일을 삼 년에 걸쳐 방해했고,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여인의 눈은 석상 위쪽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그 곳, 발가벗겨진 시신 하나가 누워 있었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난 듯 살결은 청동(靑銅)색으로 변해 있었으며, 사지는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자의 몸에는 단 한 곳의 상흔(傷痕)이 있었다.
바로 심장(心臟)에 난 살흔(殺痕) 하나!
마치 피부 위에 피꽃 하나가 피어난 듯한 정교한 검흔(劍痕)이었다.
세 사람은 그것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놈들의 발호를 막지 못한다면 우리는 마화삼(魔花衫)의 노여움 아래 으스러져 죽는다. 그분은 출관(出關)을 목전에 두고 계시다."
여인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가 일그러지고 있는 이유는 죽은 자의 표정 때문이었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가짜 철비검(鐵飛劍)은 공포스러운 표정도 아니고 아픈 표정도 아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너무나도 빠른 검초(劍招)다. 인검(忍劍)이 없다 하더라도 이것은 분명 인문(忍門)의 고수가 저지른 일이다. 그는 천면공자가 웃는 표정을 찡그리기도 전에 그의 가슴에 구멍을 뚫었다. 우리는 만에 하나, 인문이 나타날까 우려해 북경철가 주위에 열 가지 보호망을 쳤는데… 놈은 모든 것을 간단히 돌파했다. 놈은… 분명 제십좌(第十座)이다. 인문에서 가장 잔혹하고 가장 영리한 놈, 바로 그 놈이다!"
몽면여인은 치를 떨며 손을 내리쳤다.
팟-!
둔탁한 소리가 나며, 태사의 대리석(大理石) 모서리가 일순 흰 모래로 부서졌다.
보라! 여인의 두 눈에서 뿜어지는 핏빛 광망을.
"놈을 꼬옥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놈을 잡지 못할 경우, 우리가 마화삼 어르신네께 주살(誅殺)될 테니까!"
여인은 치를 떨며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여인의 손에서 꽃무늬가 가득한 은패(銀牌) 하나가 튀어나가 석상 모서리 속으로 반쯤 파고들었다.
붉은 수술이 탐스러운 은패 표면에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제이외단주(第二外壇主)에게!
너의 호접세가(胡蝶世家) 휘하는 특히 많은 실수를 했다. 너희들로 인해 전 마가(全魔家)의 명예가 실추될 정도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벌을 받으리라!
백도(白道)와 관부(官府)를 책임지는 제이외단주의 사소한 과오로 인해 전 마가의 천년대업(千年大業)이 방해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무슨 수를 쓰든지 인문을 처단하라!
그런 강호(江湖)의 피라미 떼를 치기 위해 본좌가 친히 나가게끔 하지 말길 바란다!>
은패(銀牌), 그것은 마화령(魔花令)이라 불린다.
그것은 닷새 전, 여인에게 전해졌다.
여인은 그것을 받은 직후, 하나의 함정을 팠다. 그것이 바로 철비검을 이용한 함정이었다.
"함정을 파고 기다렸는데, 놈들은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마저 빤히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유유히 해치웠다. 으으, 어쩌면… 놈들은 상상보다 천 배 강할지도 모른다!"
여인의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땀에는 지분향(脂粉香)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사향보다 짙은 마뇌향(魔腦香)의 내음이었으나, 지금 향내를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밀실에는 진득한 죽음의 그림자만이 깔려 있을 뿐이다.
"하여간 이 겨울 안에 결판을 내야만 한다. 이 겨울 안에 인문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가 제명(除名)된다. 마화삼은 노하셨다. 그분의 저주 아래 죽지 않으려면… 보다 치밀한 함정을 파서 살수(殺手)를 처단해야 한다."
* * *
천진부(天津府)는 백설에 포위되었다.
천만대군(千萬大軍)이 백색전포(白色戰袍)를 걸치고 나타나 수천 줄의 원형진을 펼친 듯, 천진부 일대는 백설천하로 변화했다.
이번 겨울은 춥고 오래 이어지리라는 것이 천기(天氣)를 조금 아는 노인들이 한결같이 하는 소리였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천진부 일대였으나 단 한 곳, 겨울(冬)을 잃은 곳이 있었다.
천야농원(天野農園).
열천(熱泉)이 지하수로 숨어 있는 축복받은 땅이다.
그 곳에 가면 한겨울이라도 기화요초(琪花瑤草)를 볼 수가 있다.
철목하(鐵木河) 기슭.
가죽신 하나가 단단하게 언 눈발을 밟고 걸어가고 있었다.
조금 가벼운 발자국을 눈에 찍으며 황삼(黃衫)자락에 덮인 백색 바지 가랑이가 천천히 벌어진다.
또 한 걸음이 내딛어지며 사람의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훗훗… 언제나 이런 짓을 하지 않게 될지. 훗훗, 이것이 나의 운명(運命)이라는 것이어서… 영원히 이 짓을 하며 풀잎 위의 이슬이 햇빛 아래 사라지듯이 사라져야 하는 것인가?"
휘청이며 걸어가는 미소년이 하나 있었다.
늘 봉두난발(蓬頭亂髮)한 지저분한 모습이고, 화삼은 벌써 수 년째 한 번도 빨아 입지 않았다.
바로 백무엽(白武葉).
그는 낮 동안 죽림(竹林)에 가서 시(詩)를 읊으며 돌아다니다가 신시(辛時)가 되자, 철목하 기슭에 나타난 것이다.
바람이 가벼이 불어 온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리며 매우 매력적인 검미(劍眉)가 나타났다.
귀끝까지 이어지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썹 아래 대체 무슨 의미를 그리도 깊게 담고 있는지 모를 유심(幽深)한 호수(湖水)의 두 눈이 박혀 있었다.
바람은 다시 불었고, 백무엽의 얼굴은 검은 머리카락에 의해 감추어졌다.
백무엽은 허공을 보고 있었다.
지난밤부터 시작된 눈은 아주 탐스러운 함박눈이 되어 천지간을 온통 잿빛 장막처럼 뒤덮고 있었다.
'감춰진 저 하늘은 나의 마음과 같다. 아아, 나는 누구이고… 나는 왜 밤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가?'
백무엽은 눈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
낮 동안 그는 어디에 갔다 온 것일까?
신발이며 바지가 깨끗한 것으로 보아, 먼 곳을 다녀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휘청거리듯 묘한 걸음걸이로 소로(小路)로 들어섰다.
"기왕이면 두견화(杜鵑花)로 주세요, 천야농부(天野農夫)! 오늘 밤 제가 모실 어르신네는 꽃 중에서도 붉은 꽃을 사랑하시는 강호기인(江湖奇人)이시니까요. 호호! 만사통(萬事通)이라고 하는 분으로, 강호계에는 이름이 높은 분이지요."
백무엽은 길이 휘어진 곳에 이르러 그러한 목소리를 들었다.
'저 목소리는……?'
백무엽은 영롱(玲瓏)한 목소리에서 한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설향도 농원에 왔단 말인가? 늘 화림(花林)에서만 사는 줄 알았는데?'
백무엽은 천야농원 근처에 이르러 있었다.
천야농원은 백 묘(百畝)의 너비를 갖고 있다. 이 곳은 천야농부라고 불리는 벙어리 노인의 땅으로, 겨울에도 꽃을 파는 유일한 장소였다.
백무엽은 천야농원에 가는 길이 아니라, 천야농원을 지나쳐야만 이를 수 있는 곳에 가는 참이었다.
이것 역시 그가 하는 일상적인 행동이었다.
천야농원은 야트막한 죽책에 의해 다른 장소와 분리되어 있었다.
농원 안은 화향(花香)에 뒤덮여 있었는데, 온갖 꽃이 한데 어울려 흐드러져 있는 화원(花園)에는 늘 두 가지 훈무(薰霧)가 흐르고 있다.
하나는 화장(花裝)이라고 하는 꽃잎이 썩은 연기이고, 또 하나는 화원 아래에서 스며 나오는 열천(熱泉)의 연기였다.
천야농부(天野農夫)는 호미를 손에 쥔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늘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계피학발의 늙은이,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호미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 곁, 전신을 타는 듯한 혈삼(血衫)으로 휘감고 있는 절세가인(絶世佳人)이 하나 서 있었다.
손에 파초선과 비슷하게 생긴 자옥선(紫玉扇)을 들고, 또 한 손에는 붉은 치맛자락을 잡고 있는 요요(妖妖)한 여인.
그녀의 상체는 그녀 뒤에 서 있는 체구가 큰 노인이 쳐들고 있는 은산(銀傘)에 의해 가려져 있었다.
은산을 든 노인은 바로 제노인(帝老人)이었다.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고 하품하다가는 죽책 너머에서 바라보는 두 개의 젊은 눈동자를 보고 말았다.
키가 후리후리한 황삼소년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아주 퇴폐적인 허무함 가운데 서 있었다.
그의 어깨 위에는 흰 눈이 소담스럽게 쌓여 있었다.
옥기린(玉麒麟)같이 영준(英俊)하나, 늘 감추고 있는 미소년 백무엽.
제노인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었다.
"백서생(白書生), 오늘도 군영각(群英閣)에 가시오? 헤헤, 아까보니 군영각주 석노야(石老爺)가 바둑판을 마련해 두고 백서생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던데……."
제노인의 목소리는 늘 유쾌하기만 했다.
"……!"
백무엽은 그의 말을 듣고 말 대신 입가에 미소를 보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의 귀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흥! 세상을 쉽게 사는 서생놈! 네놈 상판만 보면 구역질이 난다."
은산(銀傘) 아래서 흰 얼굴 하나가 살짝 나타나고 있었다.
박속처럼 흰 살결 위에 오똑한 콧날, 핏물을 찍어 바른 듯이 붉고 탐스러운 입술, 흑진주 두 개처럼 영롱히 빛나는 까만 눈동자를 가진 여인.
쾌활화림의 교방일화(敎方一花) 설향(雪香).
그녀는 십만금(十萬金)을 선금으로 받고 쾌활화림에 왔다.
삼 년 간 몸을 맡기는 대가로 그녀는 선금을 받은 것이다.
그녀는 본시 귀족 집안 여인이라던가?
그리고 그녀가 기녀가 된 것은 그녀 집안 사람도 모르는 일이라던가?
하여간 설향은 작은 소리로 욕을 한다.
"저 놈의 얼굴만 보면… 오장이 뒤틀린다! 우리들이 몸을 판 돈을 받아 먹고 빌붙어 사는 놈!"
그녀는 백무엽이 그 소리를 알아들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두견화(杜鵑花)를 사러 나온 기녀 설향의 요염(妖艶)이 오늘따라 더욱 돋보였다.
화림 안에서 늘 바라보던 모습보다 더욱 아름다워 보였고, 천생의 색기 또한 눈부실 정도였다.
백무엽은 그녀의 얼굴이 다시 은산 속으로 감추어지는 것을 보며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폈다.
'설향(雪香), 세월(歲月)이 흐르고 나서 언제고 네가 따라 주는 술을 마시며 나의 진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 물론,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겠으나…….'
백무엽은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그는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걸어가는데, 그의 두 팔은 다른 사람의 팔 길이에 비해 유난히 길어 보였다.
상승검도(上昇劍道)를 익히기에는 정말 좋은 체형이 아닌가?
백무엽은 족인(足印)을 눈에 찍으며 걸어갔다.
그리고 설향은 오랫동안 그의 등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그의 모습이 아련히 사라져 갈 때까지.
"번뇌(煩惱)할 것은 없는데… 나라면 번뇌하지 않을 텐데! 하여간 모를 사람이다."
그녀의 눈빛은 요염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눈빛은 매우 슬픈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