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장 백색(白色)의 공포
백방생은 그 금표를 텁석부리의 손위에 올려주며 말했다.
"네, 잘... 잘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만일 호걸의 것이라면, 하하 그냥
가지셔도 좋습니다."
텁석부리는 백방생이 심하게 쩔쩔매는 것을 바라보며 눈알을 부라렸다.
그는 금표를 받은 즉시 그것을 보지도 않고 다시 품속에 집어 넣었다.
"네 놈은 감히 나의 말을 의심한다는 말이냐?"
백방생은 허리를 굽신거렸다.
"아, 아닙니다. 호걸께서는 어서 그것을 가지고 안녕히 가십시오. 모두
호걸의 것이니까요."
"으흐흐흐!"
텁석부리는 한차례 흉소를 터뜨리더니 이윽고 다시 말했다.
"이 녀석! 너는 비록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뉘우치는 감이 있으니
이 호걸께서 잠시 용서해 주도록 하겠다. 너는 오늘 운수대통했다는 것
을 알아야 하느니라!"
백방생은 안색이 흙빛이 되어 연신 허리를 구부렸다.
"예, 예. 소생은 운수가 대통한 것이지요. 그럼 어서 호걸께서는 안녕
히 가십시오!"
그러나 그 텁석부리는 왠지 아직 미련이 남는지 몸을 돌리지 않고 머
뭇거렸다. 그는 다소 주저하다가 이윽고 백방생에게 다시 말했다.
"이 녀석, 네놈은 정말로 본 호걸에게 솔직하게 대했겠지?"
백방생은 일시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의아해 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순간 텁석부리는 쇠낫으로 다시 탁자를 후려쳤다. 이내 그 탁자는
쾅하는 소리와 함께 두동강이가 나서 흩어졌다. 그 쇠낫의 날은 시퍼렇
고 텁석부리의 위협은 결코 장난이 아니라 무시무시했다.
"어서 네 놈의 주머니를 모두 털어서 탁자위에 올려 놓으라는 말이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실로 그것은 갈수록 태산이었다. 백방생은 순간적으로 이미 계산을
마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회가 쉽게 올 줄은 몰랐다. 백방생은
즉시 안색을 변화시키며 말했다.
"아이쿠, 그것만은 제발 안됩니다! 불과 얼마 남지 않은 그 은자들은
반드시 있어야 소생이 집으로 돌아갈 것이 아닙니까? 제발 용서해 주
십시오?"
텁석부리는 발로 부서진 탁자를 걷어차며 흉악하게 소리쳤다.
"정말 말로 해서는 안되는 녀석이로군. 본 호걸이 너를 호송해 주겠다
는데도 감히 말을 듣지 않아?"
텁석부리는 다가들어서 백방생의 멱살을 움켜쥐려고 했다. 헌데 그때의
일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한 줄기의 앙칼진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그 사람을 놓아주지 못하겠느냐?"
바로 그 청의소녀였다. 그녀는 이제까지의 상황을 보다 못해 마침내 장
검을 뽑아들고 정식으로 나선 것이었다. 그녀는 비록 하얗게 변한 입
술을 가늘게 떨고는 있었으나 일단 행동을 취하기 시작하자 제법 그럴
싸한 기도를 풍겨주고 있었다. 백방생은 문득 그것을 보고 생각했다.
(알고보니 제법 귀여운 아가씨로군!)
하지만 이미 그의 신형은 부지런히 대한들을 피해서 한쪽으로 달려가
고 있었다. 바로 다름아닌 그 황삼서생의 앞이었다.
"살려주십시오. 부디 살려주십시오. 그들은 소생을 죽이려고 합니다.
만일 소생을 도와주신다면 나중에 필히 후사하겠습니다?"
백방생이 입술을 덜덜 떨면서 그렇게 말하자 그 황삼서생은 처음에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미소를 지었다.
(어이쿠, 웬 남자가 이렇게 예쁘게 웃는다는 말인가?)
백방생이 그 조용한 미소에 넋이 달아나려고 하는데 그 황삼서생이
입을 열어 말했다.
"걱정 마시오. 그들은 당신을 해칠 수가 없을 테니."
황삼서생의 그 음성은 한없이 부드럽고 또한 한없이 따뜻한 것 같았다.
백방생은 그런 음성을 처음으로 들어보는 것 같았다. 그는 사실 대담하
게 행동하기는 하나 역시 위험한 것은 사실이었다. 상대방이 일단 그렇
게 말해주자 내심 기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지옥에서 지장보살(地藏菩
薩)을 만난 것과 같았다.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선생께서 저들을 물리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황삼서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복우파(伏牛派)의 도적들인데 무공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닙니
다."
백방생은 황삼서생의 눈빛이 지극히 맑고 부드러운 것을 보고 내심
이상하게 생각했다.
(세상에 아무리 잘난 남자가 있다고 해도 눈빛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백방생은 은근히 그의 체구를 살피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만일
그들이 듣고 화라도 난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기분좋은 일은 아니지 않
습니까?"
그런데 그 세 명의 대한은 이때 백방생 등을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
다. 그들은 조금전에 청의소녀가 나서는 것을 보고 약간 긴장하여 마주
손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계단이 가볍게 울리더니 서너명의
사내들이 빠르게 올라와 청의소녀와 아는 체를 했던 것이었다.
"사매(師妹), 무슨 일이야?"
그 네 명의 사내들은 삼 사십대의 인물들이었는데 한결같이 두눈에서
날카로운 정광을 발산시키고 있었다. 대한들은 그들이 나타나자 저마다
시선을 교환하며 주춤거렸다. 청의소녀는 반색하며 그 네 명의 사내들을
맞았다.
"아, 가셨던 일들은 잘 되었나요?"
사내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중년사내가 말했다.
"음, 헌데 저들은 대체 누구지?"
그 세명의 대한은 자신들이 결코 새로 나타난 자들의 상대가 안된다
고 생각했는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느릿하게 창가
로 다가가는듯 하더니 갑자기 창밖으로 몸을 날려 사라져 버리는 것이
었다. 청의소녀는 일시 뭐라고 얘기해야 할 지 몰라서 주춤거리고 있다
가, 문득 그것을 보고 아, 하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녀는 대한들을
놓치는 것이 자못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고 다른 사내가 말했다.
"사매, 지금의 상황은 실로 복잡하고 또한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야.
우리는 방금전에 그 소식을 알아보고 왔는데, 지금 그런 시정잡배들과
노닥거릴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야. 무슨 특별한 일이 없다면 어서 가도
록 하자?"
청의소녀는 다소 머뭇거리는듯 했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
내들은 급히 올라왔다가 다시 급하게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청의소녀는
그들을 따라 내려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백방생을 바라보았는데, 백
방생도 마침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참이라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왠지 청의소녀는 안색이 다소 붉어지는듯 하다가 뭔가 말을 하려
는듯 하더니 이내 곧장 뒤따라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주루안의 상황은 이내 진정되고 정리되었다. 사건은 아주 멀쩡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점원들이 부서진 탁자들을 치우는 것을 보고 백방생
은 그들에게 탁자위의 음식을 자기쪽으로 옮겨달라고 했다. 점원들이
음식을 날라다 주자 이윽고 백방생은 엽차를 마시고 목을 축이면서 다
시 황삼서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소생을 도와주셨으니 실로 고맙기 이를데 없습니다. 반드시 후
사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삼서생은 가볍게 미소하며 말했다.
"제게 후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을 도운 사람은 제가 아니라 아까
의 그 왕옥파(王屋派)의 소낭자(少娘子)이니까요."
백방생은 비록 강호인물록을 숙지하기는 했으나 그런 나이어린 사람들
까지 모두 알 수는 없었다. 그는 약간 놀라며 말했다.
"아까 그 사람들이 그럼 왕옥파의 사람들이었습니까?"
황삼서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도 무림의 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왕옥파(王屋派), 이 문파는 바로 도가의 성지라고도 하는 왕옥산(王屋
山)에 거주하고 있는 문파를 말하는 것이었다. 백방생은 이미 그 문파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왕옥파는 구파일방 오대세가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어서 그에 버금가는 문파라
고 할 수가 있었다. 백방생은 문득 아까 그 청의소녀가 나갈때 보여주던
그 눈빛이 떠올랐다.
(혹시 이곳에서 엉겁결에 그들과 인연을 만들게 된 것이 아닐까?)
(제가 무슨 관심이 있겠습니까?)
백방생은 거의 형식적으로 말을 받은 다음에 이어 말했다.
"다만 왕옥산이 여기서 멀지 않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황삼서생은 말했다.
"왕옥산은 여기서 낙양을 거쳐 황하(黃河)를 건너면 바로 볼 수가 있는
곳이지요. 만일 당신이 그곳을 유람하고자 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백방생은 그가 은근히 그 청의소녀를 들추는 것을 보고 다소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화제를 바꾸었다. 그는 마악 음식을 먹으려던 참이라 황삼
서생에게 말했다.
"저어 함께 드시지 않겠습니까?"
백방생이 시킨 이 음식들은 비단 고급품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양도
매우 많았다. 세 사람이 함께 먹어도 남을 정도였다. 백방생은 자신이
시킨 음식을 그에게 먹으라고 하는 것은 약간 무례한 짓이라고 생각되
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황삼서생은 성격이 다소 소탈한 것 같았다. 백
방생이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미소하더니 즉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 음식은 매우 맛이 좋군요."
황삼서생의 탁자에는 이미 몇가지의 간단한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백
방생은 그 식단을 보고 그가 다소 검소한 성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방생은 음식그릇들을 그가 있는 쪽으로 밀어주었다.
"아 그런가요? 저도 이곳에는 처음으로 와 보는데 음식이 맛있다니
다행이로군요."
말과 함께 백방생은 자신도 그 닭고기조림을 집어들어 먹기 시작했다.
두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그 두사람은 매우 친근해
진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물론 백방생이 일부러 꾸민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황삼서생에게는 독특한 기질이 있는 것 같았
다.
그는 일단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쉽게 친해지게 하
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백방생은 그와 나이 차이가 다소 있기는 하지
만 금방 친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황삼서생은 잠시 음식을 먹더니 문득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정말로 낙양까지 호위해줄 사람을 구하십니까?"
백방생은 그가 뜻밖에도 그렇게 물어오자 다소 의외의 심정이 되었
다. 백방생은 수건으로 입을 닦고 물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직 복이 없어서 그런 분을 만나지 못하는
군요."
황삼서생은 역시 수건으로 입을 닦고 미소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낙양까지 호송해 줘도 보수는 주실 것입니
까?"
백방생은 약간 어리벙벙해 졌다. 그는 본래 어떻게 해서 이 황삼서생의
호위를 받을까 궁리하던 차에 그런 제의를 받게 되자 뭔가 이게 너무
일이 쉽게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귀하께서요? 정말 그래주시겠습니까?"
황삼서생은 가볍게 웃으며 변명하듯이 말했다.
"소제는 어차피 낙양 쪽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만일 형께서 돈을 벌
게 해 주신다면 그야 다행한 일이기 때문이죠. 사실 저도 강호를 혼자
유람하고 있는데 마침 노잣돈이 약간 부족했던 참이었거든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렇다면 얼마를 원하십니까?"
황삼서생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말했다.
"보수는 형께서 마음대로 주십시오."
백방생은 일이 이렇게 쉽게 풀려가자 다소 어리둥절한 느낌이 있었으
나 이미 더이상 생각하고 주저할 상황은 아닌것 같았다. 그는 즉시 품
속에서 백냥짜리 금표 석장을 꺼내서 탁자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황삼서생은 그것을 보고 액수가 커서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형장께선 아까 이 많은 돈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백방생은 웃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개 장삿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은 믿을수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소생은 비록 힘이 없어도 그리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이 몸이 소중
해도 단지 그런 이유로 모든 재산을 탕진하지는 않습니다. 아까는 소생이
잠시 그들을 장난한 것이지요."
황삼서생은 약간 뜻밖이었는지 백방생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하하, 형장께선 알고보니 매우 재미있으신 분이었군요!"
백방생은 말했다.
"소생에게는 그밖에도 약간의 재산이 더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솔직
히 그렇기 때문에 귀하와 같은 호위를 구하려는 것이고요."
황삼서생은 주위의 시선이 다시 그 금표들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
고 얼른 그것을 집어서 자신의 품속에 갈무리했다. 이어 그는 웃으며
말했다.
"형장께서는 소제를 처음 만났는데 그래 소제를 믿을 수가 있겠습니
까?"
백방생은 말했다.
"소생이 비록 오래 살지는 않았으나 사람보는 눈은 약간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미 귀하께서 정인군자(正人君子)라는 것을 내다
보았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저의 재산을 밝히지는 않았을 것입
니다."
황삼서생은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약간 감복한 듯 즉시 일어서며 포권
과 함께 말했다.
"실로 과찬의 말씀입니다. 소제는 황의(黃儀)라고 합니다."
백방생은 즉시 일어서며 포권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저는 백방생입니다."
황삼서생 황의는 백방생을 향해 다소 기이하게 웃더니 이어 말했다.
"소제가 이미 백형(白兄)의 은자를 받았으니 앞으로 낙양까지 무슨 일
이 있더라도 잘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백방생은 이어 모두 자리에 앉자 다시 말했다.
"황소협과 같은 분이 호위해 주신다면 저로서는 전혀 위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황의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다가 말했다.
"낙양에는 무슨 일로 가십니까? 그곳에 혹시 친척이라도 계십니까?"
백방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저 친구들이 있을 뿐입니다."
황의는 백방생이 왠지 그런 일에 대해서는 말하기 싫어하는 것을 보
고 말했다.
"근래 이 부근에는 강호상의 많은 변화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
다. 백공자께서는 그런 일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백방생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와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그런 일에 관여하겠습니까?"
황의는 말했다.
"백공자는 남쪽지방의 분이신가요? 말투가 그렇게 들리는군요."
백방생은 그의 식견에 다소 놀라며 말했다.
"예. 저는 복주가 고향이지요. 실례지만 황소협의 출신지는 어디인지 물
어봐도 되겠습니까?"
황의는 말했다.
"저는 호남성(湖南省)에서 왔습니다."
백방생은 아, 하며 말했다.
"바로 동정호가 있는 곳 말입니까? 듣기에 그 곳은 풍광이 매우 수려
하다고 하여 제가 한번 놀러가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지요."
이미 해가 많이 기울어서 저녁때가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백방생
은 비록 급하지는 않으나 일단 숙박할 곳은 정해두어야 하겠다고 생각
했다. 그는 마부에게 객점을 알아보게 할 생각으로 잠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혹시 마부가 신통하게 그의 마음을 알아채고 주루의 이층으로
올라오지 않나 해서였다.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주루의 입구에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백방
생은 일시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바로 다름아닌 진소유가 거기
에 서있었던 것이었다.
진소유는 낙양에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백방생이 서찰을 보낸 것은
아직 하루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그를 마중하러
나올리가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보아서인지 그녀의 인상이
약간 달라보였다. 그 백의소녀(白衣少女)는 잠시 백방생을 응시하는 듯
하다가 이내 신형을 돌려 도로 밖으로 내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진낭자!"
백방생은 이에 일순 크게 놀라 소리치며 일어났다.
"무슨 일이오?"
황의의 묻는 말에 백방생은 말하고 그 백의소녀를 뒤쫓아 가기 시작했
다.
"나의 친구를 만난 것 같소."
황의도 그말에 다소 어리둥절해 하더니 즉시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
했다.
백방생은 곧장 밖으로 달려나와 진소유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그
백의소녀는 이미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마치 신기루와
도 같았다. 백방생은 마치 한순간 눈의 착각을 일으킨 것 같았다. 백방
생은 급히 주위의 골목길이나 대로상을 둘러보며 찾다가 마침내 찾지
못하자 내심 어리벙벙해 하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정말로 진낭자였을까? 혹시 그녀와 닮은 사람을 본 것이 아닐
까? 허나 그녀가 진낭자가 아니라면 어째서 나를 보고 그렇게 황급히 도
망쳐 버렸을까? 아니, 그녀가 정말 진낭자였다고 해도 나를 보고 그렇게
달아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이 알 수 없는 수수께끼
때문에 마치 자신이 홀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야. 사실 생김새는 약간 닮기는 했으나 어딘가 진낭자와 약간 다
른 것 같았어. 혹시 그녀는 진낭자의 쌍둥이 형제가 아닐까?)
백방생이 그렇게 넋을 놓고 중얼거리고 있을 때 황의가 다가와서 물었
다.
"친구분을 찾으셨소?"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잠시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소."
그 때 마부와 주루의 점원이 그를 향해 함께 달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백방생은 이윽고 주루의 점원에게 모든 계산을 치르고 나서 마부와 함
께 객점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 작은 마을에는 객점이 그다지 많지 않았
고 또한 대부분이 허름하고 작은 곳들 뿐이었다.
백방생은 그래도 일찍부터 방을 구했기 때문에 두 개의 허름한 객방
을 구할 수가 있었다. 마부는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서 내일 아침에 객점
으로 다시 오겠다고 했다.
황의가 옆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백방생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아까 보았던 그 백의소녀
에 대한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백형의 친구분은 매우 미인이신 모양이오."
황의는 아까 그 백의소녀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었다. 과연 그녀는 정
말 진소유일까, 아닐까? 만일 그녀가 진소유라면 어째서 그녀는 백방생
을 보자 달아나 버리고 만 것일까?
백방생은 점원을 불러서 약간의 술과 안주를 시켰다. 옛말에 천가지의
시름을 술로 씻어버린다고 했었다. 그러나 백방생은 술을 마실수록 마
음속의 시름이 깊어지는 것 같았다.
(혹시 그녀는 내가 그 돈을 돌려달라고 할까봐 그러는 것일까? 아아,
그것은 그녀의 오해다. 나는 그런 돈은 필요하지도 않고 따라서 돌려달라
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 그 날 나는 그녀에게 그 돈을 선물삼아 주
었던 셈이 아니겠는가?)
백방생은 결코 술과 친근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왠지 술
이 잘 받았다. 그는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술 한병을 비우고 다시 점
원을 불러 술을 주문하려고 했다.
그는 일단 큰일들을 겪고 나자 사람이 달라져서 술주정뱅이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막상 술을 주문하려고 신형을 일으켰던 때였다.
갑자기 반쯤 열려진 창밖으로 눈에 익은 백색의 눈부신 의삼자락이 보
이는 것이 아닌가? 순간 백방생은 마치 본능처럼 소리치며 밖으로 달
려나갔다.
"진낭자!"
백방생은 급히 달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진소유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백방생은 마악 창밖에 도달했을 때 다시 멍해지고 말
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과연 그는 환각을 본
것일까?
(환각이 아니다. 바로 진낭자였다!)
백방생은 내심 소리치며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그
러자 과연 아니나 다를까? 좌측의 건너편 지붕위에 예의 그 희끗한 그림
자가 번뜩하며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닌가?
"진낭자, 왜 나를 피하는 것이오? 이리 와서 나와 얘기 좀 합시다?"
백방생은 소리치며 즉시 그 쪽을 향해 달렸다. 그는 지금 무공을 전혀
사용할 수가 없었다. 만일 혼자서 움직인다면 위험이 뒤따르겠지만,
그러나 그는 황의가 뒤를 따르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무공도 없는 백방생이 정말로 진소유를 추격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상대는 정말로 진소유인지도 알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객점의 주위에 많은 농가들이 산재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이 마을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백방생이 방향을 정하고 잠시 달리자 이내 마을에
서 벗어나 어느 한적한 벌판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 벌판은 사방이 탁 트여 있어서 시야에 장애가 별로 없었다. 단지
많은 나무들이 곳곳에 숲을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백방생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 때 갑자기 다시 좌측의 숲에서 백색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아닌가? 백방생은 즉시 그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진낭자, 달아나지 마시오?"
이미 황혼녘이었다. 백방생이 그 숲에 뛰어들었을 때는 주위가 약간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그런데 백방생이 마악 그 백색의삼에 가까와졌을
때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우측에서 한 자루의 칼날이 튀어나와 그의 목에
들이대는 것이 아닌가?
(아니?)
백방생은 순간 목이 섬뜩하고 등골이 오싹해져서 깜짝 놀랐다. 그는 너
무나도 진소유만을 생각하던 나머지 설마하니 이 곳에 적들이 매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백방생이 고개를 돌리자 그의 주위에서 세 명의 대한들이 다가들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매우 낯익었다. 뜻밖에도 아까 그 주루에서
백방생의 금표를 두 장이나 가져갔던 무뢰한들이었던 것이었다. 백방생
은 뜻밖에도 그들을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되자 이거야말로 어이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흐흐흐! 애송이가 정말로 걸려들었군!"
뱀눈의 사내가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백방생의 목에 귀두도(鬼頭
刀)를 들이댄 사람은 흉터가 있는 사내였다. 흉터가 있는 사내는 마치
겁을 주기라도 하듯이 칼날을 가볍게 움직이며 으시시하게 웃었다. 그
칼날에는 아직 피가 약간 묻어 있었다. 그 피는 백방생의 것이 아니었
다.
백방생은 문득 아까 그가 보고 뛰어들었던 그 백색의삼을 생각했다. 즉
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니 눈앞에 한 명의 백의소녀가 쓰러져 있었
다. 그녀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에 얼굴은 알 수가 없
었으나 그 피는 그녀의 것인듯 했다. 짙은 피비린내가 그녀에게서 흘러나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백의소녀는 그렇다면 죽은 것일까?
"흐흐흐, 이 계집이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말이냐?"
뱀눈의 사내가 다가가서 그 백의소녀의 몸을 발로 뒤집었다. 그러자 그
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얼굴이 비단 곰보에다 약간 살이 쪄 있
었다. 진소유는 아니었다. 아마도 이 근방의 처녀인 것 같았다. 처녀의
가슴은 쩌억 벌어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시뻘건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오
고 있었다. 황혼무렵에 그 모습은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백방생은 문득 안도감과 함께 가슴이 허전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
다면 아까 그가 본 것은 환상이며 진소유가 아니라는 말인가? 하기는
정상대로라면 그녀는 서찰을 받고 내일 쯤 그를 찾아오게 될 것이다.
백방생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이토록 절실하다는 사실에 놀랐
다. 하지만 이 현실은 그로 하여금 도저히 그런 감상에 젖어 있게 하
지 않았다. 백방생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들은 내게 무엇을 원하시오?"
텁석부리가 음산하게 말했다.
"우리가 네게 무엇을 원할 것 같으냐?"
백방생은 말했다.
"나의 은자를 노린다는 말이오?"
백방생은 그렇게 일단 말을 해놓고 나서 문득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보아하니 이들은 방금전에 백의소녀를 죽인 것 같았다.
백의소녀는 그 외의 부분은 멀쩡했으며 결코 폭행을 당한 흔적이 없었
다. 이런 도적들이 강간을 하기 위해서 여자를 납치해다 살해한다면 그것
은 강호상의 흔하게 있는 일이다.
헌데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그 백의소녀가 도적들과 무슨 원한이라도
맺었다는 말인가? 백의소녀의 용모를 보더라도 결코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단순히 나의 은자를 빼앗기 위해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도
말이 안되지 않는가?)
그 텁석부리는 그러나 기이하게 웃으며 단순히 그것을 시인했다.
"그렇다. 네놈은 감히 지금에 와서도 수작을 부릴 셈이냐?"
백방생은 다소 어리둥절해 졌다.
필시 이번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대담하게 임
기응변하기로 했다.
"아니 나에게 은자가 더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소?"
그 텁석부리 등은 일순 눈빛을 기이하게 번뜩였다. 흉터있는 사내가 칼
을 들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우리를 순 바보멍청이로 아느냐?"
백방생은 그 주먹을 가슴에 얻어맞아서 뒤로 벌렁 나뒹굴게 되었다. 그
러나 그는 그 바람에 귀두도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백방생은 상
황이 그렇게 되자 금방 일어나지 않고 급히 머리를 굴렸다. 그는 즉시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많은 은자를 모두 찾으려면 반드시 나의 충고를 듣지 않으
면 안 될 것이오. 그 은자는 바로 내가...."
순간 백방생은 두 주먹으로 가득 움켜쥐고 있었던 흙뭉치를 두 사내
에게 뿌리면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런 황량한 벌판에서 저런 삼류의
도적들에게 죽음을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우라질!"
텁석부리와 흉터있는 사내는 백방생의 얘기에 은연중 귀가 솔깃하여
다가오다가 두 눈에 흙이 들어가서 소리치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 벌판
의 흙은 누런 황토(黃土)여서 그들은 일시 눈을 뜨지 못하고 아파서
두 손으로 눈을 감쌌다.
다만 남은 것은 뱀눈의 사내였는데 그도 역시 뜻밖의 일을 당하게
되어 어리둥절 했다. 백방생은 흙을 뿌려서 두 명을 처치하고 나서 즉시
몸통을 날려 그 뱀눈의 사내에게 덮쳐들어갔다.
백방생의 머리는 순식간에 그 뱀눈의 사내를 들이받아서 그로 하여금
뒤로 벌렁 나뒹굴게 했다. 비록 뱀눈의 사내는 무공이 적지 않았으나
백방생의 기습적인 회심의 일격에 그만 허를 찔리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백방생도 무공이 너무나도 없는 편이었다. 그는 일단 뱀눈의
사내마저 물리친 다음에 더이상 그를 당할 자신이 없어서 즉시 달아나
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몸을 돌려서 미처 삼 장도 채 달리지 못했을
때였다. 갑자기 등뒤에서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채찍이 날아오는 것
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그 뱀눈의 사내가 자신의 병기로 백방생을 공격해 온 것이
었다. 백방생은 일시 아득해졌다.
만일 그 채찍에 얻어맞게 되면 전신이 저려와서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
일 것이다.
백방생은 그만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채찍을 잡아갔다. 그것은
바로 그의 거의 본능적인 동작이었다. 그는 과거에 무공을 지니고 있었
기 때문에 위기의 순간에 과거의 행동을 취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지금 거의 내공을 운용할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만약 과거였다면 그가 한순간에 채찍을 잡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
다. 그러나 그는 순간 손을 헛짚고 채찍이 도리어 자신의 손목을 휘감
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따끔하고 화끈한 통증과 함께 강한 기운을
느꼈다. 백방생은 그것을 느끼자 크게 당황하여 즉시 손을 빠르게 흔들었
다.
헌데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백방생은 몸을 무리하게 뒤로 젖혔기 때문
에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귓가에는 한줄기의
고통스런 비명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아악!"
백방생은 일순 고개를 돌려 살펴보고는 다소 어리둥절해 졌다. 그 뱀
눈의 사내는 이 순간 자신의 채찍의 손잡이에 맞아서 머리통이 터져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조금전의 일은 괴이했다. 백방생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과거에 배웠던 무학들 가운데 하나를 펼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량
발천근(四兩撥千斤)으로 운좋게도 효과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반탄(反彈)의 원리에 의해 교묘하게 넉냥의 힘으로 상대의 천
근의 힘을 되돌린다는 것으로서 가히 운기법문(運氣法門)의 극치라고도
할 수가 있었다.
조금전에 뱀눈의 사내가 채찍으로 휘감아 백방생을 당기자, 백방생은
사량발천근의 초식으로 상대의 힘을 되돌림으로써 그를 반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즉 파도같은 힘이 되돌아 가자 뱀눈의 사내는 채찍을
놓치게 되었고 그것은 도리어 그의 머리를 후려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것은 그의 손아귀가 약간 찢어져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아도 능히
알 수가 있는 일이었다.
백방생은 순식간에 그러한 사정을 훤히 알 수가 있었다. 그는 마치 갑자
기 이상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눈이 휘둥그래져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한가지의 놀라움이기도 했다. 아니 어떤 서광을 보는 것이라고나
할까?
과거 백방생은 무공이 거의 대홍락의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그 대홍
락의 단계는 마음으로 깨치는 단계이니, 비록 그가 내공이 상실되었다고
는 하나 그러한 무학의 오의(奧意)에 대한 깨달음마저 상실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내공은 사라졌으나 무학에 대한 안목은 물론 그 이치에
대해서는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다만 그는 내공의 상실을 극심하게 겪
었기 때문에 이미 모든 것을 잃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한 선입견으
로 그는 자신이 최소한의 무학지식도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무학의 최고경지라는 대홍락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과거 내공이 없었을 때에도 약간의 운기법문을 사용할 수가 있었다. 하물
며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육신이 거의 죽어가던 때는 전혀 무공을 펼칠 수가 없었으나, 이제는
그래도 약간이나마 전신에 기운이 돌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러한
상황에서 백방생이 그런 무공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과거 백방생을 잔혹하게 파괴시키려고 했던 그 이상한 노인들은 백방생
의 두뇌마저 망가뜨려서 그를 바보로 만들려고 했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실로 의외의 일도 있는 법이다. 백방생은 그러한 수법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그의 정신은 오히려 멀쩡하게 남아있게 되었던 것이었
다.
결국 백방생은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자신의 능력을 이 세 명의 도적들
을 만남으로써 알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였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