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와 위선 / 양선례
얼마 전 ‘김씨 문중’ 단톡방에 여행 일정이 떴다. 자카르타, 반둥, 발리까지 여행지에 들어 있다. 패키지에는 나오지도 않는 자카르타와 반둥도 그렇지만 세계적인 휴양지 발리까지 이어진다고? 게다가 반둥은 자유여행이 아니고서는 가볼 수 없는 곳 아닌가. 욕심이 생긴다. 둘째 시누이 가족이 반이나 되어 싫다는 남편을 설득했다.
마흔 넘어서 결혼한 큰 시누이 딸이 인도네시아에 자리 잡은 지 올해로 13년째다. 조카사위는 결혼 전부터 그곳에서 사업을 해 왔고, 한국인이 많이 사는 찌까랑이라는 도시에 집을 지은 지 오래다. 10명 이상의 대가족이 모두 묵어도 될 정도로 집이 크다고 했다. 1년에 한 번씩 아이들과 들어와서 약 한 달을 친정에 머물다 가는 조카는 그때마다 삼촌(남편)이나 숙모(나)도 꼭 한번 놀러 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간다, 간다 하면서도 서두는 사람이 없어서 날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작은 시누이와 자녀들이 모인 망년회 자리에서 그 말이 나와 불과 한 달을 남겨 두고 급하게 성사가 된 것이다.
내년이면 팔순이 되는 큰시누이를 선두로 시누이 셋과 남편, 또 시누이의 아들, 며느리, 손녀 등 3대에 걸쳐 무려 열한 명이 인도네시아로 날아갔다. 찌까랑에서 하루를 묵고, 조카 부부에 아이 둘까지 더해 열다섯이나 되는 대가족이 버스 한 대를 빌려서 온천 휴양지인 반둥에서 이틀을 묵었다. 발리 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다시 자카르타로 나와야 했다. 인구 2억 7천만인 인도네시아의 새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나흘 앞둔 날이라서 도로는 말할 수 없이 막혔다.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깃발을 들고 알아들을 수 없는 구호를 외쳤다. 막바지 선거 유세가 열리는 도심 한복판에 있는 호텔까지 가면서 방콕과 더불어 아시아 최고라는 이 도시의 교통 지옥을 경험했다. 앞과 뒤, 옆에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오토바이 행렬로 도로는 이미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이 나라에서는 운전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열 번도 넘게 들었다.
결국 목적지를 800미터쯤 남겨 두고 버스에서 내렸다. 숙박지인 리츠칼튼은 위에는 호텔과 리조트지만 아래는 퍼시픽 플레이스 소핑몰이었다. 버스가 와야 짐을 들고 체크인할 수 있기에 그때까지는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지하에 있는 커다란 슈퍼에서 저녁에 먹을 과일도 사고, 반둥에서 거하게 우리를 대접해 준 조카사위의 티셔츠도 하나 샀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우리와 함께 있던 둘째 시누이의 며느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단톡에 사진 한 장이 떴다. 쇼핑몰 1층 루이비통 귀빈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며느리 모습이 담겨 있었다.
둘째 시누이는 작년에 칠순이었다. 그 기념으로 봄에는 뉴질랜드, 가을에는 북유럽을 부부가 다녀왔다. 아들이 셋이지만 큰아들이 여행비 대부분을 댔다고 했다. 이번에도 그럴 테니 대신 시아버지가 며느리 명품 가방을 하나 사 주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 큰아들에게서 들어왔다. 아무리 부부지간이라도 친가 쪽으로만 돈을 쓰니 아내한테 좀 미안하더란다. 그리하여 똥 시리즈의 가방을 며느리가 골랐는데, 하필 우리나라에는 들어오지 않는 디자인이란다. 인맥을 총동원하여 수소문한 끝에 호주에서 보낸 것을 바로 이곳에서 받는다고 했다.
한 편의 무용담 같은 둘째 시누이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슬슬 벨이 꼬인다. 직장 생활 35년 넘게 했으나 변변한 가방 하나 없는 나는? 그 며느리, 시집 와서 겨우 딸 하나 낳아 키운 것 말고는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착한 건 나도 인정! 시부모나 시동생에게 잘하는 것도 알겠어. 그래도 나처럼 직장 생활을 해 봤어, 시어머니를 모셔 봤어, 아이를 셋이나 키워 봤어? 가정주부로 지내면서 겨우 아이 하나 키우는 일, 누군들 못 하겠어. 흥!
그래도 째째하고 속 좁은 티를 내면 안 되겠지? 아니, 누가 가방 사지 말랬냐고? 외국 나갈 때마다 들어간 여행비 5분의 1만 썼어도 가방 몇 개는 샀겠다. 그거 살 돈 있으면 차라리 견문을 넓히겠다고 큰소리친 게 누구더라. 오픈 런(명품 등의 원하는 물건을 사려고 매장 앞에서 기다렸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 들어가는 것) 하는 여자들을 속없다고 비웃은 적도 많았지. 내 돈 내어 사 주는 것도 아니면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속은 부글부글 끓어도 얼굴은 평정심을 유지할 것. 이럴 때는 사회생활 오래 한 게 도움이 된다. 버스는 1km도 안 되는 거리를 두 시간 반이 지나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저녁에 실물을 영접했다. 오, 가방이 내 마음에 쏙 든다. 우리나라에서 구하기 어렵다더니 명품을 잘 모르는 내 눈에도 세련되고 고급스럽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나도 슬쩍 묻어서 주문할걸. 살짝, 아니 많이 후회가 인다. 시아버지한테 5백만 원 넘는 명품 가방 받는 그녀가 부럽다. 무겁고 허리에 안 좋아서 가죽으로 된 가방은 저만치 던져 버리고 천으로 된 에코백만 들고 다니는 나는 어디로 가 버리고 없다. 이참에 나도 하나 저질러? 똑같은 걸로 고르면 속 보이겠지? 그래도 내 돈으로 사는 거랑 선물 받은 게 어디 같냐고.
내 고민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두 마음이 다툰다. 이럴까, 저럴까. 그 경계는 단단하지 않아서 백지장보다 가볍다. 옆에서 누가 살짝만 거들어도 쉽게 흔들린다. 이번에도 그랬다. 부러워서 질투하는 고까운 마음과 그런 마음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위선이 동시에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