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차시 과제][발표] 수정본
이 바보들아!
발표 : 성장나무
엄마는 늙지 않는 줄 알았다. 1934년생인 엄마는 올해 88세의 알츠하이머치매를 9년째 친구처럼 달고 산다. 엄마는 하얀 피부의 고운 얼굴과 달리 고된 삶을 사셨다. 가난한 농부 집에서 3남 3녀의 장녀로 태어나 술로 사는 아버지와 남의 집살이 하는 어머니 밑에서 동생들을 돌보느라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18세에 4살 많은 아빠를 만나 결혼하여 열아홉에 첫아들을 시작으로 4남 3녀를 낳았다. 엄마의 가슴에는 세 개의 무덤이 있다. 가난의 대물림보다 더 지독한 고통 속에서 어린 자식 셋을 가슴에 묻었다. 갓돌이 지난 둘째 딸을 원인 모를 병으로 잃고 상처를 덮듯이 나와 남동생을 두 살 터울로 낳았다. 하지만 막둥이 남동생은 2~3세경 홍역을 앓다가 숨을 거두었다. 죽은 남동생의 시신을 가마니로 덮고 지게 싣고 산으로 가는 아버지와 오빠들의 뒷모습 아련하게 떠오른다. 엄마의 구멍 난 가슴은 어땠을까? 두 개도 부족하여 엄마가 가장 의지했던 셋째 아들마저 스물한 살 꽃다운 나이에 군 복무 중 순직하였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오빠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듣고 엄마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마당을 나뒹굴며 울부짖었다. 그 이후 나는 엄마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엄마는 그 버거운 짐들을 어떻게 다 감내하고 살았을까? 아빠가 죽고 엄마는 늘 혼자였다. 살아있는 자식들이 여럿 있어도 바람처럼 왔다 가는 나그네였다. 아무도 진득하게 엄마 곁에서 말벗이 되고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우리는 바보처럼 엄마의 세월은 흐르지 않고 늘 그 자리에 그대로 묶여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세월은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엄마 앞에 치매를 내 세워 묻는다 “너는 누구냐?”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는 엄마의 기억 창고 속에서 누구를 그렇게 찾고 계실까?
엄마의 치매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였다. 일 년에 1~2번 정도 가족 행사나 친인척 자녀들의 결혼식으로 서울에 올라오시면 우리 집에서 시어머니와 하루 주무시고 가시곤 했다. 어느 날 밤새 엄마와 함께 하셨던 시어머니께서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사부인도 이제 깜박깜박하는 것을 보니 치매 증세가 있는 것 같아요.” 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던 순간 엄마는 언짢은 표정을 내비쳤고 극구 부인하며 시어머니에게 서운하다며 이후로는 우리 집에 발길을 끊으셨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시골 엄마 집에 다녀온 언니가 “엄마가 이상해, 깔끔한 양반이 걸레를 부엌 행주로 쓰고, 방바닥도 하루에 수십 번 쓸고 닦는 분이 누워만 계신다.”며 걱정했다. 엄마랑 자주 통화하는 큰이모는 내게 전화하시어 “기분 나빠하지 말고 엄마 병원 한 번 모시고 가봐라”하셨다. 결국은 언니와 함께 엄마를 설득하여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치매 전문의 진료를 받고 각종 검사결과 2014년 78세의 나이에 알츠하이머병 초기진단을 받았다.
처음 치매 진단을 받았을 때 엄마는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내면서 약 투여와 병원 진료까지도 거부하셨다. 겨우 설득하여 진단 직후 3~4년은 치매 전문의에게 통원치료를 통해 약물 처방을 받고 시골집에서 혼자 계시니 약 복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 식사도 부실하여 체중이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혼자서 생활이 어려워졌다. 엄마를 겨우 설득하여 서울로 모시고, 병원이 가까운 언니 집에서 지내며 낮 동안은 치매 데이케어센터에서 평일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서비스를 받았다. 하지만 주말에 언니가 집을 잠깐 비우기라도 하면 현관문을 열고 나가시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더 이상 언니 집에서도 돌봄이 어려워졌다. 엄마는 평소 마른 편이고 골다공증이 심하여 살짝 부딪치기만 해도 쉽게 멍이 들고 갈비뼈에 금이 갔다. 이후 엄마의 안정을 위해 요양원을 물색했다. 엄마는 평소에 “나는 죽어도 집에서 죽는다. 요양원은 절대 안 간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어쩔 수 없이 오빠, 언니와 상의하여 지인이 직접 운영하는 평택시 요양원에 모셨다. 치매를 처음 겪는 우리는 생판 모르는 남보다는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낫겠다 싶어서 지인을 믿고 입소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지인이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부산에서 오빠가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고 언니와 나도 직장이 쉬는 주말을 이용하여 서울에서 평택시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장기화가 되면서 모두가 지치고 코로나 19까지 겹쳐 엄마의 대면 시간이 줄어들다 보니 엄마의 증세가 몰라보게 나빠졌다. 침상 생활을 의무화하게 되면서 혼자 걷는 것도 기억력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나빠져 초기진단 8년 만인 2022년 알츠하이머치매 4등급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알츠하이머치매는 다른 장애와 달리 장애진단을 받기 위해 1년마다 한 번은 환자가 병원을 방문하여 전문의 진료와 치매 관련 검사를 받아야 한다. 치매 장애진단 검사결과를 보는 날 전문의는 우리 형제를 바라보며 “아무리 좋은 시설보다 자식들이 가까이에서 자주 찾아뵙고 얼굴 보여 주는 것이 환자에게 최고의 입니다” 라며 엄마를 가까이 모시도록 권유하였다. 그 즉시 언니와 우리 집에서 도보 20~30거리인 시립동부노인전문요양센터에 접수하고 대기등록 1년 만인 2023년 3월에 입주하게 되었다. 코로나 19 때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코로나가 어느 정도 풀리고 주 1회 정도 찾아가 외출을 신청하여 점심을 함께 먹고 차도 마시며 산책을 꾸준히 하다 보니 2024년 3월 진료 때에는 몰라보게 인지검사 수치가 회복되고 기억력도 되살아나 우리를 곧잘 알아보셨다. 역시 사람에게는 사람이 최고의 보약이였다.
치매 환자라도 최대한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하는데 요양원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엄마를 돌보지 못했고 남의 손에 맡겨야만 했다. 엄마의 무거운 기저귀를 갈아드릴 때마다 안타깝고 죄스러운 마음이 크다. 그토록 야무지고 고운 엄마도 긴 세월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윤기 하나 없는 도드라진 얼굴의 검버섯, 솟아오른 광대뼈, 움푹 들어간 눈가와 입 주변의 깊은 팔자주름, 손등의 얇은 표피 위로 힘없이 뻗어 있는 혈관 정맥들이 무질서하게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내 모습과 행동들이 엄마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엄마의 모습 속에서 30년 후의 내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아무리 강직한 사람도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대화상대 없이 365일을 10년 가까이 지낸다고 상상해보라. 엄마의 긴 외로움이 우울증을 넘어 치매까지 몰고 왔을 것이다. 어느 자식 하나라도 엄마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만큼이라도 곁에서 함께 했다면 엄마의 치매는 정지선에서 넘어졌을 수도 있었다. 엄마는 가끔 언니와 나에게 “너희들도 자식 낳아서 길러봐야 내 마음을 안다.” 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때는 그 말이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고 썰물처럼 휙 빠져나갔다.
2024년 5월부터 코로나 19 감염사태가 해제되어 6월 초 언니와 함께 병동을 방문했다. 엄마가 계신 곳은 치매 병동으로 4인실에 배정되어 병실을 들어서는 순간 두 분은 거의 침상에 누운 ‘와상 상태’였고, 엄마의 맞은편 침상의 어르신은 엄마처럼 휠체어 이동이 가능했다. 그나마 그중에서 엄마의 상태가 가장 양호해 보였다. 엄마는 언니와 나를 볼 때마다 “너는 누구냐?” 잠시 멈칫하고는 “큰딸 외순이, 작은딸 미숙이 우리 딸들 이쁘지”라며 요양보호사들에게 자랑하듯 말한다. 요양보호사가 엄마에게 장난스레 아기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할머니! 큰딸이 이뻐? 작은딸이 이뻐?” 엄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똑같이 이쁘지, 내 강아지들인데, 그려 안 그려, 이 바보들아!” 엄마의 대답에 우리는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첫댓글 글이 정리되니까 훨씬 깔끔하고 문제의식이 보다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네요. 마지막 문단과 제목이 주는 재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엄마와 자식들의 관계가 앞부분에 조금이라도 나와줘야 할 것 같아요. 원래는 어땠는데, 지금은 이러하다 라는 대비감을 주기 위해서요. 그래야 마지막 문단의 '바보들아!'가 재밌게 살아날 것 같아요. 기록으로서의 글쓰기로도 훌륭하지만, 이것이 나의 이야기를 넘어 사회적 이야기가 되려면 엄마의 증세와 병이 사회적으로 어떤 상황을 맞딱드릴 수 있는지에 대한 상황과 서술도 있으면 글이 풍부해질 것 같습니다.
오빛나리님~ 바쁜 일상에서도 틈을 내어 이렇게 귀한 의견 주셔서 넘 감사해요. 다시 수정해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