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조경
극동 미술은 인간이 아닌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러므로 그 활동의 대상에서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 자신, 즉 인간을 가장 추앙하고 연구해 온 것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꽃과 얼굴은 각각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과 물질에 영향을 미치는 마음으로 대변되는 바, 이 둘은 반대되는 원천에서 싹튼다. 예술 또는 감정을 영구히 재생산하고 싶은 욕구는 물론 그 감정의 성격에 달려있다. 극동에서는 자연이 중요하고, 몰개성과 여성의 낮은 지위의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보다 인간이 덜 중요하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성은 결코 그들에게 감성을 일깨워준 적이 없다.
그들은 여성의 모습에 감탄하지도 않았고, 여성이 상상력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이러한 무시 중 첫 번째가 어떤 거짓 겸손 때문도 아니라는 사실은 같은 위도의 세계 어느 지역보다 여성의 몸매가 더 노출되지만 덜 드러나는 일본의 상황으로부터 단번에 명백하게 드러난다. 단지, 여성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인상을 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한편, 정신적으로 그들은 여성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만큼 여성에게 관심을 준 적이 없다.
그들의 여성에 대한 무시가 직접적으로 이루어낸 것에 못지않게, 몰개성도 간접적으로 강력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 중 하나는 우리에게서 자극을 앗은 반면, 다른 하나는 그들이 더 쉽고 완전하게 자연에 의지하고 자연에게서 존경과 사랑에 대한본능적인 갈망을 충족시키도록 도왔다.
그러나 나는 일본이나 조선 예술에 대해 수필을 쓰려는 의도는 없다. 그 주제는 재미있지만 너무 방대하고 섣불리 다룰 수 없고, 너무 동양적이어서 단번에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그것의 한 형태인 조경의 특이한 예시들을 지적하고 싶다. 이 예시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일종의 물의 정원인 연못이다.
여성의 깊은 눈이 아니라 자연에 드리워진 미소로부터 시적 영감을 끌어내는 사람들에게, 물은 모든 풍경의 으뜸가는 영광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이 특히 타당하다. 그들이 "풍경에 있어서 물은 얼굴에 있어서 눈과 같다”는 말로 표현하려는 영향력을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에게 이 단어는 더 이상 유추의 대상이 아니라, 늘 직접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인류는 자연을 사랑한다. 시냇물의 반짝임이나 연못의 표면에 나타나는 변화무쌍한 표정보다 인간의 눈빛에 더 가까운 것은 무엇일까? 고요하고 어두운 물에는 프랑스인들이 천을 뒤집어 쓴 여인의 눈에서 찾는 것과 같은 신비로운 매력이 있지 않은가? 비밀을 찾듯이 깊이 들여다보면, 둘 모두에서 놀리듯이 당신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극동 사람들은 단지 자연을 구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자신을 그들에게 보여주도록 설계하고, 자연을 신봉하며, 자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극동의 일상적인 정원 가꾸기는 보통 꿈에도 생각지 못한 완벽한 아름다움에 이른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퍼져나갔으며, 조선이 그 정도까지 아니더라도, 조선은 여전히 같은 정신에 젖어 있으며,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많은 예술을 보여줄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은 조선의 완전한 발전을 막기 위해 공모했다. 추운 기후, 즉 살인적인 겨울의 영향을 받아 왔다. 사람들은 해협 건너처럼 조선반도에서도 자유를 누릴 기회를 갖지 못했다. 서민들이 아름다움을 위해 노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부족하다. 그들이 창조한 것이 그들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웃 섬나라의 그것과 다르긴 하지만 유사한 욕망은 무엇인가 표현하는 것을 촉진한다.
우리가 조선에서 발견하는 것 중 한 가지 종류는 적절하게 수경 정원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 그것은 효과의 측면에서 땅보다 우선한 발군의 원예다. 일본에서는 가능하면 못이 중심이지만 조선에서는 못이 전부다. 한 뼘의 땅을 그렇게 부를 가치가 있다면, 땅은 단지 그림의 배경일 뿐이다.
그 정원은 못이고, 연못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인공수역에서 연꽃을 재배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연못이라는 독특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자라지 않는 곳에서도 존재한다고 생각되며, 못은 마찬가지로 연못이라고 불린다.
못은 어떤 형태라도 될 수 있지만 대체로 원의 형태에 가깝다. 그것은 작은 대야에서부터 넓은 물까지 모든 크기를 망라한다. 못의 가장자리는 때로는 흙과 접한 채 남아 있을 뿐이고, 때로는 큰 화강암 벽돌을 층층이 쌓아 두르기도 한다. 하지만, 못이 조금만 크더라도, 그 중앙에 하나의 섬이 서 있다. 이 섬은 완벽하게 원형 이며, 그 한가운데에는 외딴 나무가 솟아 있다. 섬 둘레는 못의 경계처럼 처리되어, 흙이면 흙으로 돌이면 돌로 마감한다. 나무는 멋있고 오래된 보통 식재이며 낙엽성이며 상록수가 아니다.
그것의 가지는 작은 집의 경계 너머로 펼쳐져 있고, 물 위로 걸쳐 있다. 등근 섬 위의 외딴 나무인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이 독특한 대칭이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에, 첫눈에 이것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것은 불가사의하게 인위적인 효과가 있다. 장난감 노아의 방주에서 온 나무 중의 하나처럼 보인다. 그것은 예술 속의 예술을, 즉 당신을 속여 나무가 스스로 자라났다고 순간적으로 믿게 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 있다. 그것은 그 뻔뻔스러움으로부터 관심을 끌며 구애한다. "그게 무슨 뜻일까?”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아름다움이 아닌 실용성이 그것의 존재의 원인이다. 그 생각은 색다른 착상이 아니다. 그것이 정확히 그 형태를 취한 그럴 만한, 예술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유가 있다. 이게 바로 그 존재 이유다.
그 즐거운 특징들에, 즉 작은 호수에서 조선인이 찾는 자연의 선물에 조선인들은 낚시의 매력을 더했다. 이 연못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이 연못이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 이 연못의 가장 큰 속성은 낚시 연못이다. 연못의 주인인 고상한 낚시꾼의 즐거움을 위해 잉어가 풍부하게 비축되어 있는데, 실제로 사료를 먹는 애완용이 아니라 잡아먹히는 사냥감으로다. 이제, 연못가에서 이것들을 낚아채는 것은 물론 언제나 가능한 소일거리 이지만, 그런 것은 조선 사람들에게 놀이로서 최고의 즐거움은 아니다. 그들의 생각에, 변두리에 머무는 것은 그곳의 영주나 주인이 아닌 나그네 느낌이 든다. 그 자신이 전체의 중심에 있는 것은 그에게는 품위 있는 행복의 절정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앉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섬을 만들고, 주인 느낌을 즐기는 동안 햇빛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를 심었다. 이쪽에 있어도 저쪽만큼 비바람막이가 있고 그늘진다. 따라서 그런 대칭의 필요성이 자리를 원형으로 만든다. 이 행위로 대표되는 것 보다 더 즐거움을 주는 동양적 특징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즐거움을 주면서 동시에 그것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편안함을 주려는 자연의 강요다.
덥고 고요한 여름날 오후, 조선인은 지팡이와 책을 들고 밤나무 그늘 아래, 짧게 자란풀밭에 자리를 잡는다. 하인이 힘들게 작은 배를 저어 두꺼운 물풀들을 헤치고 나가는데, 물풀들로 인해 유리 같은 호수가 겉보기에 땅으로 변한 것 같다. 연꽃이 피는 계절이다. 봄에는 넓고 검푸른 잎사귀만이 떠다닐 수 있을 만큼 생기가 넘치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는 따뜻한 봄 공기의 나른함을 그대로 반영하여 수면 위에 나른하게 떠 있던 곳, 지금은 식물의 무성한 풍성함으로 덮여 있다.
다른 잎들은, 앞서 난 건장하고 두꺼운 잎들과 달리, 물 위로 2피트 높이 줄기를 곧게 세우고, 서로 밀치며, 질투심에 가득한 채, 위풍당당하고 고독한 꽃들을 품에 안는다. 멀리 떨어져 물 아래로 기둥, 즉 깊은 물속에 숨어 있는 줄기의 미로 사이로 게으른 잉어들이 주위를 헤엄치며, 연못이 햇빛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는 곳에서는 이따금 꼬르륵 소리를 내며 떠올라, 운명을 의식하지 못한 채 물 가장자리로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가는 어떤 부주의한 곤충을 가로챈다.
나른한 열기가 움직이지 않는 공기에 퍼지고,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는 것을 잊으며, 사람 자신도 그것들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조용히 명상에 잠긴 채 앉아 있다. 짧은 순간 동안, 먹이를 야금야금 수없이 잡아먹은 후, 그의 공상을 방해하기엔 너무 게을러진 물고기가 마침내 잡히기를 고집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의 긴 백일몽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낚시꾼에게는 백일몽은 적어도 평화로운 꿈이고, 연꽃은 속세로부터 그를 차단하는 장벽이다. 그의 연못이 크든 작든, 아니면 그날 밤, 자연과의 교감을 끊고 다시 한 번 인간과의 교류를 유도할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칸트와 달리, 그에게 시간과 공간은 인식의 형태가 아니다.
조선 조경술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바위세공법이 있다. 잘 정돈된 모든 정원에 3피트 높이에서 5피트 높이의 기이한 모양의 바위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것들은 땅에 박히거나, 아니면 다듬은 돌로 만든 납작한 판 위에 놓여 있다. 바위가 이루는 물질은 과하게 단단하지 않다. 벌집 모양인데 이는 물의 작용으로 가장 환상적인 모양이 되었다. 이러한 모양으로 보아 바위가 현재 있는 곳에서 난 바위는 아니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으며, 사람의 손이 간 받침대의 경우에도 그렇다.
처음에, 예사롭지 않은 바위들의 위치가 종교적인 의도를 암시하지만, 그것들의 신성함에 대한 본능적인 헌사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들은 단순히 장식용으로 올려져 있다. 나그네가 외딴 땅에서 신비로운 모든 광경의 열쇠 인 종교를 발견하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종교가 없는 땅에서 끊임없이 그는 자신이 습득한 예지에 속기 쉬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동양적인 미에 대한 관념은 약간 환상적이다. 그것의 많은 표현물에는 기이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상한 것이 약간 있다. 이것은 이러한 암석 형태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 눈에는 그것들은 아름답기보다는 괴기스럽다. 이러한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것들은 구멍의, 즉 컵 모양의 구멍과 닻고리의 중심과 같은 천공된 구멍의 덩어리고 그로 인한 효과는 흐르는 물의 소용돌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상세하게 표현하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전체의 효과는 놀라울 정도로 각이 져 있다. 전체는 부분의 합과 상당히 다른 것을 보여주는 놀라운 예다.
극동 예술에 대한 외국의 가장 흔한 비평 중 하나는 그것이 상투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다. 만약 상투적이란 말이 예술에 의해 대표되는 생각이 수적으로 적다는 것을 의미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극동 예술의 본질에서 비롯된 사실일 것이다. 극동 예술은 자연이 그 주요 원천이고, 인간이 원천인 경우는 전혀 없거나 또는 아주 드물어서, 우리에게 혹은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마르지 않는 보물창고는 극동인 들에게는 닫혀 있다.
장르의 주제는 극도로 제한적이며, 도입되어도 가장 높은 형태의 예술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 위치에 설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 가장 초라한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이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진정으로 예술적 인 것, 아니 차라리 가장 예술적인 것을 지나치고, 무시하고, 심지어 알지 못한다. 자연만 연구되고 사랑 받는다.
이것은 곧 감정의 표현인 예술을 인간이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제한한다. 그러한 감정은 자연 자신의 용어로 표현되어야한다. 서로에 대해 반응하는 이 두 요소는 말하자면 제한된 범위의 상징만을 남긴다. 그러나 만약 상투적이란 말이 주제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의도된 인위적인 표현방법을 의미한다면, 그 말은 단순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는 그럴듯하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있다. 그것을 계속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그들의 진술을 사실과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위적이기는 커녕, 극동의 미술은 단연 자연스럽다. 처음에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 원인 때문이다.
첫 번째는 매우 간단하다. 극동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서 보는 것은 우리에게는 없다. 눈 봉우리를 그린 그림은 평생을 평야에 살면서 백두산과 같은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위의 의미에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상투적으로 보일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은 그의 풍경의 매우 두드러진 특징들이 멀리 동양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덜 두드러지지만 어쩌면 더 흔한 다른 풍경들을 부분적으로 무시했기 때문이다. 모든 여행자는 예술 이외의 다른 것에 있어서 이것의 효과를 알고 있다.
해설자들은 일부러는 아니더라도 어떤 나라든 중요한 곳을 골라 그 곳이 미지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 나라에 대한 견해를 알려준다. 그 결과, 알고 보면, 몇 가지 놀라운 사실에 의존한 상상력이 묘사한 만큼 이상해 보이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들은 완벽하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국 땅에 대한 견해를 주기위해 하는 일을, 극동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자신의 땅에 대한 견해를 주기위해 한다. 이 강한단순성 때문에 극동의 예술은 더 높은 예술이다.
바위의 모습은 상투적인 말이 잘못 평가된 아주 좋은 예다. 그것들은 조선 그림에서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섣부르게 그리면 낯선 사람에게는 무분별한 붓놀림의 모음이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러나 어색함은 그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있다.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변화해야하는 것이 예술에서 항상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 효과는 오직 그만큼만 두 가지에서 차이가 난다.
이것의 또 다른 예는 마디가 있고, 앙상하며, 이상한 극동 소나무에서 보인다. 그것은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이며, 익숙해지면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의 하나다. 나무껍질을 보면, 캘리포니아의 누런 소나무가 생각나고, 아마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품종일 것이다. 하지만이 점에 대해서는 권위적으로 말하는 척할 수는 없다. 누런 소나무는 독특한 나무껍질 때문에 악어소나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이 이름은 듣기에는 불편한데 잘 지은 이름이다. 극동 종의 껍질은 모양은 비슷하지만 색이 더 짙어 청동색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무의 특징 중 가장 작은 특징이다. 그것이 특히 이상한 것은 가지에 있다. 보통 몇 개 밖에 없는 가지가, 빈약하고 가난에 찌든 겉모습과는 상관없이,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줄기에서 뻗어 있다. 때때로 그것들은 위로 성장하기도하고, 때로는 아래로 그리고 위아래 사이의 아무 각도에서 성장하기도 하며, 환상이 그것들을 사로잡을 때 그것들의 이전 방향을 바꾸는데 잠시도주저하지 않다.
그 결과, 그것들이 단지 우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암암리에 모양의 아름다움에 대해 칭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단순히 말해, 그것들은 불가능할 정도로 기이하다. 이것이 바로 외국의 비평가들이 그것들을 충실하게 그린 초상화 같은 그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일본화를 상투적 이라 낙인찍는 가장 좋은 경우 중 하나가 바로 이 나무다. 우리는 그들의 예술에서 끊임없이 그것을 보지만, 있다면 복사본보다 더 이상한 원본을 우리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그림이라고 믿는다.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안개가 밑을 감싸고 있는 험준한 바위를 그림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화가들의 상상속에서만 존재할 거라고 생각한다.
조금도 그렇지 않다. 안개가 자욱한 아침에 밖에 나가면 그런 장면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중국, 일본, 조선 사람들에게 이상한 점이 아름다움의 큰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듯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풍경을 표현할 일을 맡으면 그 생각을 따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