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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민 1990년의 독일유학시절-비로소 변곡점을 맞은 90년대 초반
김재민 추천 0 조회 423 23.02.12 16:15 댓글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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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3.02.12 20:04

    첫댓글 재민아 오랫간 만이다.
    아직 학부생이니 시간내기
    힘들건데.
    그래도 자주 들러시라

  • 작성자 23.02.12 20:14

    백교장 오랜 만이요. 지금은 방학 중이라 여기 자주 들락거릴 여유가 좀 있소이다. 부탁대로 그리 하리다.

  • 23.02.12 22:14

    한편의 드라마네! 기억력이 어찌 이리 좋으신가? 고생은 했지만 해외에서의 오랜 가족과의 생활이 늘 부럽구려.
    그라고 박성조교수는 9회로 천재급 학자! 아마 경고도 1,2등으로 졸업하신거 같은데...

  • 작성자 23.02.13 09:57

    긴 글 읽어주느라 고생이 많았심다. 기억력도 자서전을 시작한 5년 전에 비해 한해가 다르게 가물가물해지니 요즘은 글쓰면서도 우울한 기분을 자주 느낌미다.

    박성조 교수가 9회라니 우리보다 18회 선배였네요. 당시에도 어학능력에서 과연 천재급으로 보입디다. 쿠마교수처럼 독일인 부인과 살고 있다 했는데 지금은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함다. 아마 세상을 떳을 수도있겠다 여겨지기도 하네요.

  • 23.02.13 10:01

    @김재민 생존해 계십니다

  • 작성자 23.02.16 18:06

    @김수인 아, 그렇구나.. 우리 쿠마선생은 97년 현대경제연구원 시절의 나보려 한국에 며칠 온 뒤 내 소개로 연구원 부소장 팀과, 그리고 연세대 정구현 교수 팀과의 인맥쌓기 모임들을 갖고 떠난 게 마지막이 되었네요.. 2000년 봄 어느 날 독일에서 조깅하다 심근색으로 급사했다는 비보를 받았심다. 나의 가장 중요한 독일 연결고리 끈이 허무하게 떨어져 버린 셈이지요. 참으로 허망하고 액통합디다. 아무튼 그때부터 독일과는 뜸하게 지내라는 운명적 계시라 받아들이고 있심다. ..

  • 23.02.13 11:48

    재민공 반갑고 오랜만이외다. 글을 읽다 보니 이건 참 드문 귀하고도 생생한 자료라고 여겨지네요. 해외 유학한 사람은 많지만 그리 흔하다 보니 그런지 이런 생활사적이고 개인적인 기록은 참 드문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나는 물론 미국에서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봤는데 그 당시 거래처에 있던 독일 친구가 어찌나 부럽던지...., 우리도 십년 안에는 해야 될낀데 했는데 어느덧 삼십년이 더 흘렀군요. 그러고도 더 엇길로만 가려 하고 있으니 참으로 맹한 민족이로고...
    나머지 기록도 챙겨서 틈 봐 가며 세세히 연재해 주소.

  • 작성자 23.02.13 12:43

    나도 법사와 오랜만임다.. 잘 지내고 있지요? 역시 내가 이런 기록문을 이어가려는 맘을 알아주시는구료.. 격려에 힘입어 계속 열심히 쓰겠심다.

    독일재통일이니 한소수교 같은 대사건들이 어제아레 무렵 이루어진 것 같았는데 벌써 한 세대인 30년이 지나간 역사적 사건이 되어버렸네요. 글을 쓰며 그 당시를 반추해봤더니 내 개인적 일상들과 맞물려 참 감회가 새롭습디다. 우리 동기들도 모두 그리 생각하겠지요?...

  • 23.02.13 18:51

    김박사께서 영산대에서 기어코 4년 졸업장을 받는 과정을 힘들게나마 현재 계속 진행하고 있다는
    앞의 댓글 소식과 더불은 이 본문글이..김박사의 오랜 학문적 이력과 왠지 서로 관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우선, 삶의 대부분을 거의 학문의 전당에서 보내고 있는 그 엄청난 특혜적(?) 행운이 부럽습니다.

    그리고 이번 글은..원익법사 말슴대로..여러면에서 유익한 내용을 더욱 많이 담고 있어
    은근히.. 묻고 싶거나, 할 말이 많이 생기는 느낌마저 듬미다.

    근덕지가 잡히는 대로..하나씩 함께 풀어나가 보도록 하입시다.^^

  • 작성자 23.02.14 05:34

    서토도 건강체크 여념없이 하며, 서민들에게 살아가기 좀 더 팍팍해진 여러 경제적 역경들을 요리조리 잘 헤쳐나가는지 궁금하요. 서토가 지적한대로 내 唐사주는 천문(天文), 천고(天孤)가 들어있어 평생 배움은 운명적 팔자 속에 해내야 할 듯 함다. 그간 살아온 경로를 반추해보니 그리 틀린 것 같지는 않아 보입디다.

    어째 많이 배웠다지만 세속적 출세와 부귀영화와는 동떨어지게 살아왔으니 이것 또한 팔자라 여기고 후회나 아쉬움 없이 앞으로도 남은 여생 계속 꿋꿋하게 살아갈 요량임다. 대신 배우며 건진 것들을 세상에 대가없이 내어놓는데 대한 뿌듯함과 즐거움을 느끼니 서토 말대로 특혜적 삶이라고도 하겠네요. 항상 자중하며 감사하게 여기겠심다.

    본 글 내용들에 대한 질의적 화두들을 날려주면 상응하는 배경설명들을 성심껏 하겠네요.

  • 23.02.14 09:11


    김박이 만프레드 페를리츠란 양반을 한 10년후에만 만났더라도 일이 훨 쉽게 풀렸을겁니다. 요는 개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때를 잘 만나야 되는데 한국경제의 위상이 그때만해도 극소수의 학자나 업계에 인식이 되었던 탓일꺼요. 쿠마교수가 김박을 받아들인 것은 크게보면 김박이 덕을 본게 아니고 자기자신이 덕을 봤을겁니다. 그만큼 시야가 넓고 똑똑한 분이라 여겨집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김박의 최대 강점은 낙관주의에 근거한 엄청난 뚝심입니다. 타고난 것도 있고 소싯적부터 부모님의 물질, 정서적인 풍부한 지원 아래에서 그런 것이 키워졌는 갑다 싶소이다.

  • 23.02.14 09:40

    지박사의 평가가 타당하게 여겨지는군요.

    지난번 한국에서 두 분이 함께 같이 회동한 적이 있은 이유겠지만
    김박사의 심신이.. 마치 차돌처럼 단단하게 여겨지던 바..

    이는 지박사의 추측대로..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받게된 풍부한
    사랑과 물질적 지원에 바탕된 것이 아닐까.. 함께 동감해 봅니다.

  • 작성자 23.02.15 09:10

    지박사도 그간 안녕하셨능교? 말마따나 요즘 같이 한류 문화가 전세계에 크게 어필하는 이런 분위기가 좀 더 일찍 찾아왔었다면 페교수같은 사람이 나를 잡으려 버선발로 쫒아왔을건데 말임다. 아무튼 때가 여물지 않아 지도교수 잡는데 애먹은 것은 변명이 아닌 사실이었다 하겠네요.

    이 몸이 택도 없는 낙관론에 잘 빠지는 것은 제 모친이 어릴 때부터 니는 뭔가 특별한 점지를 받고 태어났다고 줄창 세뇌한 덕분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그리 믿어온 상황 때문이라 하겠심다. 지박과 서토가 공감해준 의지의 한국인 유전자가 내게 틀림없이 내포되었을거라는 견해는 너무 잘봐준 해석이라 여김다. 어쨌든 고마운 말씀이네요..

  • 23.02.14 09:58

    이곳에서 보노라면, 카펫을 새로 가는 일은..전문가가 아니면 쉬이 할 수 없는 일인데..
    유학생 선후배들이 나서서 직접 해결했다니..그게 참 용하게 여겨지는군요.

    하기야 나성에 계신 원익법사도, 카펫은 모르겟지만..목재 마루를 까는 작업을
    건축재료를 구입하여 직접 잘 해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슴미다만- ^^

    그리고 읽다보니..저는 특별한 학위에 도전한 적이 없기에 관련 사항을 전혀 잘 모르고 있어
    정식 박사학위를 얻게되는 형식이나 절차가...한국과 독일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집디다.

    주변인들로부터.. 독일같은 나라에서 박사학위 받기가 비교적 어려운 것으로 들어왔기에...
    (유시민, 진중권 등- ^^) 물론 일단 그쪽 국가의 언어를 해결하는 점이 애로가 되기도 하겟지만

    실제적 과정에서 가장 다른 점은 어떤 것인지..얻어듣고 싶네요.

  • 작성자 23.02.15 09:45

    중국 제나라 맹상군처럼 평소 박애숙을 통해 식사대접 자리를 자주 만들어주었더니 이런저런 재주를 가진 식객같은 유학동료들이 생각도 안한 장면들에서 우리 가족을 많이 도와줍디다. 어떤 친구는 이삿짐 싸주는 솜씨가 어찌나 프로같던지 한국의 숙련된 이삿짐센터 직원처럼 야물딱지데요.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양반들 얼굴이 떠오르며 같이 보낸 시간들에 대한 감회가 새로와짐다.

    독일박사 학위는 인내의 세월을 탄탄히 보낼 환경적 구조가 되어있어야 건져볼 만 할거라 생각되네요. 서토가 언급한 유시민이나 진중권은 시간을 투자했다면 충분히 학위 하나 건질 수 있는 학문적 재능이 출중한 인물들이라 여겨지지만 한국에 빨리 와 자기분야에서 바로 한가락해야 했기에 그런 시간투자를 할 요량이 없었을거라 사료됨미다.

    몇명의 독토란트를 지도하는 독토아파터에게 자기 논문만 봐달라고 할 수 없어 이 양반 만나는 Term 기간이 상당히 긴데다 한두번 챕터 전체 보완과 내용 수정을 요구받으면 거의 새로 쓰는 격이 되어 시간이 한없이 늘어남미다. 내 경우에도 첫논문 빠꾸먹고 한 1년 걸려 수정논문 최종본을 제출했는데 통과되어 구술시험까지 가는데 또 1년의 기간이 더 소요됩디다.

  • 23.02.15 17:58

    김박사 말슴을 듣고보니..결국은, 특별한 이공계 계통이 아닌 한, 현지 언어를 얼마나
    유려히 습득하느냐의 여부에 그 속도가 크게 좌우 되겠군요.
    겸손한 대답으로 사료되며..아무튼 큰 뚝심으로..좋은 결과를 얻었다 여겨집니다.

  • 23.02.15 17:57

    사실 저의 경우, 1989-90 년도 전후는, 한국으로 귀환해야 하는 시기였는 바..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 남기를 선택하게 되면서...그 과정에서 생긴 혼돈 중에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라스베가스를 자주 다니며 도박에 열중할 때이기도 했지요.

    그 때만 해도 현지 CES 쇼(소비자 가전제품 전시회)에는 일본 회사들이 주로 판을 치고 있은 것으로
    기억합니다만..그 이후부터는 점차로 해가 갈수록 이 쇼가 열리는 시기에는 라스베가스 도시 전체가
    거의 대다수 Samsung 과 LG 선전물로 도배가 되는듯 보이더군요.

    듣자니..올해 CES 에도.. 전세계에서 약 2000여 회사들의 참여에..그 중 약 500개 회사가
    한국회사였다 하더군요. 여전히 한국의 약진이 대단한 상황임을 보여주는 수치겠지요.

    90년대 초반 당시 한국 회사들의 약진이 아주 대단하다 생각했던 바...위 김박사의 글에 비치는 내용들이
    실감이 되며..김박사의 학위 도전시기와.. 한국의 폭팔적 성장시기가 잘 맞아 떨어졌다는 김박사의 글이
    아주 현실감 있게 읽히게 됩디다.

  • 작성자 23.02.16 20:47

    아, 서토에게도 90년 전후가 한국 귀환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놓고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던 모양이구려.. 뭔가 소환되지 않기를 바랐던 맘이 더 컸을성 싶은 서토의 내적 분위기가 감지되외다. 라스베가스 들락거리며 도박으로 시름을 잊고자 했다니.. 서토를 둘러싸고 무슨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한번 읊어줄 수 있능교? 궁금증 많은 우리 독자제위들을 위해서 말임다.

    삼성과 LG의 가전제품들은 88 올림픽 이후부터 함부르크 대표 가전점인 Brinkmann에서 슬슬 보이더니 90년 무렵부터는 일본제품들보다는 한 끗발 밀렸지만 가성비 좋은 경쟁력으로 저소득 구매자층에서는 일정 인기를 확보하기 시작했지요. 난 그때 비디오 공테입을 일제 TDK나 Sony, Panasonic 등에서 국산 SKC와 새한전자 비디오테입 구입으로 바로 갈아탔네요. 일제 메이커들이 한국 경쟁품들 때문에 가격 다운을 많이 해도 국산보다 낮지 않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심다.

    여전히 세계 가전계의 옥황상제 같았던 Sony 브랜드가 유럽시장에서 2000년대 초까지 그 명망을 유지하며 군림했지만 중반부터 삼성과 LG에 밀리는 시대를 맞을거라고는 90년대 내내 상상도 하지 못했네요.

  • 23.02.16 10:31

    본 글에서, 당시 동서독 통일전후의 과정이 비교적 소상히 잘 정리되었다 생각됩디다.

    사실..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는 사람들은..공산주의/자본주의 라는 두 개의 극히나 상이한
    체제가 어떻게 통일이 될 수 있었는지..그것도...무력아닌 평화적 절차로써 말이지요.

    더군다나...전쟁에서 승리한 패권국이 고의로 갈라놓은 체재인데..
    그들의 동의는 어찌 순조롭게 받을 수가 있었는지 등등 말임미다.

    법사/김박사 두 분의 말슴처럼...우리도 과연 그리할 수 있는 것인지..참으로 애닯은 주제라 하겠습니다.
    더군다나 그당시 개최된 월드컵에서.. 통일된 독일이 우승을 했다 하니...

    당시 독일국민 전체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가 참으로 대단했던 것이 아닌가 함미다.

    이후 통일 독일의 수상을 오래 맡았던 메르켈 총리도.. 과거 동독 출신의 관료였다니..
    나라의 지적 수준이 지속 성장해가고.. 국민들의 열망이 받쳐주기만 한다면
    한반도의 남북도.. 언젠가는 통일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희망과 예측을 해보게 됩니다.

  • 작성자 23.02.16 20:32

    89년 여름 동독 수상 에리히 호네커가 서독 콜수상의 초청으로 본을 방문해 극진한 대접과 함께 많은 경제적 지원 선물을 받고 기세등등하게 귀국했심다. 호네커의 정치적 위신을 콜이 제대로 세워줬지요. 당시 서독 국민들과 정계에서 콜이 과도하게 호네커에게 퍼줬다는 비난 같은 것은 거의 없었고, 코끼리 콜의 노회한 구슬리기 외교술이 더 그럴 듯했다는 칭찬 분위기가 대세였지요.

    그런데 동구권에서 위신이 한껏 고조된 호네커가 동독으로 귀환해 상당히 느슨해진 대외 여행책을 펼치는 와중에 일반 동독여행객들이 헝가리를 여행하다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역에서 열린 무슨 평화축제에 참가했는데 이때 헝가리정부가 오스트리아쪽 국경을 일부 개방하자 동독인 600명이 넘어가 서독이송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발했심다.

    콜정부가 요원들을 급파해 이들 모두를 서독으로 데려오자 동독 전역에서 국경을 맞댄 다른 동유럽형제국으로 동독인들이 넘어가 서독망명을 요구하는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터지며 양독통일의 실마리가 된 호네커 실각과 여러 동독도시들에서의 자유투쟁시위들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네요. 호네커 정부의 잠깐 방심 속에 돌이킬 수 없는 시민저항운동이 동독내에서 만연해 버렸심다.

  • 작성자 23.02.17 09:56

    코끼리처럼 굼뜬 이미지의 헬무트 콜 수상이 무슨 전광석화라도 된 양 외교무대에 몸을 재빨리 날려 소련의 고르비와 여러차례 담판회담을 가지며 고르비를 띄워주고 경제지원책을 왕창 내밀어 서독의 동독합병을 묵인하게 만들었심다. 그 다음은 미국 부시의 똥꼬를 건질어주며 미국 동의도 받았고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통일을 반대했지만 오랜 밀월관계를 다져온 콜-미테랑 간 인간적 신뢰에 힘입어 프랑스도 중립을 지키게 하는 외교술 신기를 보였심다. 영국 대처수상이 마지막 극렬 반대론자였지만 이미 대세는 통독으로 기울어졌심다. 1차 독일통일을 가져온 비스마르크의 외교술을 방불케 한 콜의 묘기였네요.

    거기에다 콜은 동독의 무명 정치신인이었던 화학박사이자 정치 및 경제감각이 있어보인 앙엘라 메르켈을 발탁해 자신의 당 기민당에 후계자감으로 전격기용해 서독 정적들의 공격방패용 호위무사로 잘 활용했심다. 하지만 손바람이 좀 지나쳐 동독인들의 환심을 또 한번 사려 1대4의 당시 동서독 마르크 환율을 1대1로 교환해주는 자기도취의 포퓰리즘적 실책을 범하고 말았네요.

  • 작성자 23.02.16 20:43

    입각 초기 메르켈은 서독정계에서 콜이 엄청 오버했다는 질투어린 비난의 화살을 많이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대기만성형의 정치인으로 대성하며 자신을 키워준 콜이 2000년대 초 정치자금 스캔들에 휘말리자 그를 퇴임시키는 엄정함을 보이면서 공과 사를 구분하며 공평무사한 최장수 인기 총리의 발판을 다졌지요. '유럽의 여제'라는 명성까지 획득하며 재작년 퇴임할 때까지 지지율은 우리의 문통보다도 더 높았을 정도였심다.

    콜의 정치경제적 최대실책은 많은 경제전문가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그동안 외교적 성공에 취해 동서독 화페를 1대1로 교환해주는 대동독 선심성 정책을 전격적으로 펼쳐 동독기업들의 줄도산과 동독인력의 대규모 실업을 야기시켜 200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통독경제의 지독한 부진을 불러온 일등공신이 되게 했네요.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고사를 여기서도 실감케 만들었심다.

    난 지금도 남북관계가 좋았던 2018년 가을 문통의 평양 스타디움에서 있었던 대평양시민 연설 사건에서 어떤 계기가 올 수도 있겠다 하는 고무적 감정을 품었는데 '트럼프-김정은' 하노이 회담의 결렬로 꼬이기 시작한 남북관계 흐름이 상당히 아쉽습디다. 동독 무너짐이 재현되는가 했는데..

  • 23.02.16 15:23

    재민아
    오랫만에
    오후의 나른한 오륙도 바다바람과 봄빛을 받으며 폭신한 의자에 앉아 커피를 생각하다 우연히 동기카페를 들어가니 재민이의 8년 고생담이 어제 그제 일처럼 깨알같이 묘사되고 있었더구나.
    내 생각에 이 친구 글솜씨는 타고난데다 조련과정이 보통이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되어 눈이 번쩍 떠지는구나.
    신춘문예에 수많은 탈락후에 등단되는 문학도처럼 말일세.

    카페에 출입하는 친구들과 인사한지도 오래되었네.

    다들 안녕하시겠지.

    글이란 게 오랜 기간의 간절한 기다림 정도는 있어야 어느 순간 일필휘지식으로 끝없는 생각들이 타이핑되는 경험이 가능하겠는데 재민박사가 그런 경우인가봐.
    재밌는 경험을 하고 있네.
    90년 초의 상황에 대한 기억이면 30년 세월 너머 기억이 아닌가?
    이를 한문으로는 귀밝고 눈밝은 '총명(聰明)'이란 표현을 쓸터인데
    그 당시에 보고 들은 세상사를 이렇케 분명하게 기억하고 묘사하다니 글재주가 보통이 넘음이 틀림없는가 보다.
    글솜씨에 감탄한다.
    묶으면 독자들에게 호평받는 좋은 책으로도 탄생될
    것같다.

    글 중에 독일 자유베를린대학 정교수인 박성조 교수는 나도 우리대학에서 만나본 적이 있지.
    마산에서 부산으로 동행하기도 했었고..

  • 작성자 23.02.16 20:28

    아, 강호교수가 진짜 오랜만에 왕림하여 과분한 답글을 달아주셨네.. 고맙소이다. 침침해 간다던 눈 건강은 어떻소?.. 수년 전 언급하던 대상포진에서도 좀 회복되었는지 궁금하요.

    그리고 강호 교수도 2000년도 이후 박성조 교수와 교분을 맺었는갑소.. 참 사람간의 관계가 서로 이리저리 겹칠 때가 제법 되는 모양임다..

  • 23.02.17 03:03

    김교수, 오랜만에 보네요. 반갑습니다.

    여전히 셀폰으로 글을 올리는 지는 모르겟으나 만약 사실이라면..
    참으로 대단한 정성이라는 생각이 듬미다. 틀린 철자를 거의 발견할 수가 없군요.^^

    이제 다친 다리도 다 완치되어.. 정상적 활동을 하고계신 모양이네요.
    이후로..동기웹에서나마 자주 볼 수 있도록 하십시다.

  • 23.02.17 08:42

    @김의철 셀폰으로 지금도 올리고 있지요.
    서토가 제주 동기모임에 참석 못한다는 공지를 봤는데 매우 아쉽군요.
    다친 다리는 완치됐지만 덧붙인 쇠 부목은 아직 제거하지 못하고 있소.
    항상 건강을 고민하며 매일 산책을 1시간 정도 하며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번 모임에 참석하면 해외에 사는 고민같은 걸 직접 들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아쉽군요.

  • 23.02.17 08:51

    @김재민 박성조 교수는 고교 선배라서 존경심으로 대했는데 대학에서 독일기술센터 같은 걸 설립하여 그 선배를 이용하려는 속셈을 보고 안타까와 했었지요.
    결국 그 선배도 대학의 도움을 뿌리치고 떠나더군요.
    그후 서울대에서도 활동하는 걸 보니 재목은 재목이구나 싶더이다.

  • 23.02.17 17:28

    @김강호
    좀 무리를 해서라도 오랜 동기들 만나보고자 꼭 참석해 보고자 했지만..
    사는 형편이 워낙에 어렵다 보니..결국은 참석이 어렵게 되더군요.

    어찌보아 일생에 한 번 있는 기회인데...많이 아쉽지만 머 우짜겟슴미까.
    그럴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는 것을-

    언젠가 모두들 만나볼 수 있도록..계속 노력하겠슴미다.

  • 23.02.17 03:33

    미국에 주저앉느냐 마느냐의 결단을 선택하는 고뇌의(?) 과정은.. 그간 이 웹에서
    비교적 소상히 표출한 적이 있기에..특별히 달리 더 언급할 내용은 없슴미다만..
    굳이 하나를 더 들어 본다면..

    지금이야.. 직원들이 해외주재를 외려 꺼릴 정도 경향의..상당수준 발달한 한국적 여건이다 보니..
    서토같은 경우를 오히려 반가와 할 수 잇엇겟지만..

    근 40년 가까운 이전의 그때만 해도..해외주재를 일종의 특혜로까지 여기는 추세였다 보니
    발령에 따라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그대로 눌러 앉으려는 상황에 대해..
    마치.. 매국노/배신자(?)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나 회고 됨미다.

    윗사람들 보다도..한국에 있던 동료 직원들 사이에 훨씬 더 그런 평가가 돌더라는 말을 전해듣기도 햇지요.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그 당시 그랫던 이들의 상당수가.. 서토와 똑같은 선택을 결국 하더라는 사실-^^

    하지만 이들은 모두가.. 서토가, 많은 곤욕과 손실을 감수하며 이미 닦아놓은 길을
    여유있고 손쉽게 선택하여 걸어갈 수 잇었던 것-

    세상사..타이밍이 중요함은... 아래 글에서도 그 예가 있지않을까 생각해 봄미다.

  • 작성자 23.02.17 13:47

    서토의 얘기를 들어보니 당시의 귀환 건이 당연히 고민거리였으리라 공감됨미다. 나라도 남는 쪽을 택하며 현지에서 자력갱생하는 길을 모색했을거라 확신함다.

    그런데 어찌보면 별 고민할 거도 없는 선택을 두고 서토를 고뇌에 찬 인물 역할을 하게 한 또 다른 숨은 이유가 있을 법도 한데 그게 뭔지 궁금하외다. 그 때 결혼한 가족들이 미국에서 같이 살고 있었는지의 여부가 중요 단서가 될법도 한데.. 상황봐서 노 코멘트로 패스해도 좋겠심다.

  • 23.02.17 17:44

    @김재민
    회사의 발령에 어깃장을 놓는다는 자체가 큰 부담이었기에 고뇌가 되었지요.
    그 외 여타의 숨은 내용은 없슴미다.

    주재원으로 나와서 계속 가족들과 함께 살았고..와이프도 미국에 계속 있기를 원했지요.
    머..그 당시는 회사와의 관계 외에는, 특별히 패스하고 말고 할 다른 사항은 없었네요.^^

  • 23.02.17 03:58

    김박사도 본국으로 귀환한 이후.. 대학쪽에 적을 두려 하지않았을까 추측되는 바..
    그러나 실제로는 기업에서 세월을 많이 보낸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아는 지인 한 분은, 85년도 저와 거의 같은 시기에 미국으로 유학와서, 택사스주의
    University of Texas 에서 영문학 학위를 받은 후.. 제가 귀국발령 받은 90년도에
    한국으로 돌아갔지요.

    이후 한 1년 정도 서로 간간이 연락하는 중..귀국후 대학에서 자리를 얻지못해 애로가 많으며..
    교수직을 얻는 자리에 금전이 개입되는 등.. 상당한 부정적 현상이 많음을 지적하며
    그러한 한국의 현실에 대해 개탄을 많이 하더군요.

    그러더니 지방의 어느 대학에서 어렵사리 자리를 얻고 난 이후로는..결국은, 쌓아진 실력의 저력인지..
    대학을 옮겨가며 한국 영문학계에서 승승장구 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엇습니다.

    생각키에..김박사가 만약 90년도 전후로 학위를 얻어 곧바로 귀국할 수 있었다면
    지금쯤은 학계에서 내노라 하는 원로교수의 입지를 점해 있을 것으로 저는 거의 확신합니다.

    이후에 보노라니..95년도 이후로 한국으로 돌아간 해외 유학생의 대개가..매우 어려움을 겪은듯-

  • 작성자 23.02.17 14:30

    추후에 쓸 타임이 닥치면 귀국 후 당시의 상황을 가감없이 기록할 것임다. 하여튼 만 나이 40에 함부르크 택시운짱하다 박사쯩 하나 따고 전가족이 귀국했는데 한국대학에서의 임용문은 아주 좁았고, 민간경제연구소들에 어플라이 하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들어갔네요.

    독일박사의 아우라 속에 야당당수하며 재미있게 지냈지만, 98년 초 IMF 금융위기 때 퇴출 0순위로 찍혀 울산 현대중공업으로 유배가게 된 사실은 일전에 와이프가 올린 '금의야행하는 김재민을 만나서'라는 글에서 이미 전한 적이 있었심다. 연구원과 중공업 시절에 연세대, 중앙대, 한국외대, 그리고 울산대 등에 외래강사로 출강하여 교단 맛은 제법 봤네요.

    서토 말대로 93~94년 시기에 들어올 수 있었다면 그당시 YS정권이 '세계화 정책'을 표방하자 국내 각 대학에서 국제경제와 국제경영 전공자를 싹쓸이 하듯 영입했는데, 그 물들어오는 타임을 놓치는 바람에 대학전임이 될 수 있는 길을 한 끗 차이로 놓치고 말았네요. 이 또한 '인생만사 새옹지마'가 아닙디까..

  • 23.02.17 17:55

    @김재민
    만약 쿠마 교수가 계속 생존해 있었다면..김박사가 한국의 대학에서 자리를 얻는 일에
    일부나마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요?

    당시 전해오는 말로 듣기로는..최소 소나무 두그루(?) 정도 해당 대학교정에 심을 수 있는
    성의를 내보여야.. 자리가 만들어 질 수 있었다 합디다만- ^^

  • 작성자 23.02.18 17:23

    @김의철 뭐 그리 생각하지 않네요.. 쿠마 교수가 한국 대학에 영향을 미칠 인적 네트웍은 크게 없었심다.

    소나무 한그릇이라면 1억이란 말 같네요.. 내가 그런 돈을 바치고도 자리 하나 있다면 하고 기웃거리지 않았더니 내게는 뭐 그리 현실적인 사안은 되지 않았심다. 현대경제연구원이나 중공업에 들어갔기에 교수짜 아니고서도 시급한 경제적 자립은 할 수 있었으니까 말임다.

  • 23.02.18 02:31

    김강호 교수의 댓글이 반갑네요. 글이 좋으니 뒷얘기들도 흐뭇하고 풍성하네요.

  • 작성자 23.02.18 09:48

    글보다 몇몇 친구들의 호의어린 댓글장 참여 덕이라 여김다. 소생도 본문 글 외적인 뒷담화 교류가 더 그럴 듯해 중요고객 맞듯 적극 대응하고 있네요..

  • 23.02.19 16:38

    이법사님 잘 지내죠?
    '어깃장'은 소논문이더군요.
    미쿡에서 발견한 한국전통의 미학이랄까.
    아무튼 흥미진진하게 읽고 댓글을 여기서 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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