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작년 한해동안 이 한편 써놓고 이런저런 사유로 마무리를 짓지 못해 여기에 못올린 제 우물쭈물 자서전 '23편-비로소 변곡점을 맞은 90년대 초반'을 오늘에사 드디어 소개하네요. 세월 더 빨리 지나기 전에 남은 자서전 편들도 더 많이 기술해 놓아야 하겠다는 기록자의 책무을 느낍니다. 모쪼록 '90년에 있었던 여러분의 얘기도 기억나는대로 많이 들려주시길 바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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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비로소 변곡점을 맞은 90년대 초반
<1990년의 독일유학 시절>
1. 욀뮬렌벡 기숙사로 이사
도르트문트대 마이스너 교수와의 박사과정 면담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후줄근한 기분으로 함부르크에 돌아왔다. 와이프는 많이 안타까와 하면서도 내 심기를 조금이라도 북돋워주기 위해 기회는 계속 올 것이니 너무 이번 면담결과에 연연하지 말자고 다독거려 주었다.
일단은 가족의 힘 속에 운기조식하면서 모든 게 여의치 아니하여 한국행을 받아들일 때가 오더라도,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마음가짐으로 글로벌 경영전략과 관련된 박사 논문 테마와 프로포잘을 좀 더 구체화하고 정교하게 만들기 위해 관련 문건이나 서적들이 발견되면 부지런히 복사하여 읽어 내려갔다.
연말이 가까와 오는 중에 이사를 위해 신청해 놓았던 욀뮬렌벡 기숙사에서 가족용 집이 하나 나왔으니 들어와도 좋다는 허가서(쭈라쑹)가 날아들었다. 그간 살았던 캐머러우퍼 기숙사는 4년 이상 살아 거주 허용연한을 넘어섰기에 조만간 비워주어야 했는데 때맞추어 옮기고 싶어했던 기숙사로부터 제 때 입주허가서가 오니 요건 정말 멋진 소식이라 할 만 했다.
큰 일이 잘 안풀려 답답하던 차에 그래도 거주 문제가 가성비 좋게 해결되는 듯 하니 그나마 이풍진 세상사에서 큰 힘과 용기를 받는 것 같았다. 이사 가는 날이 되어 유학생 지인들에게 연락하니 너도나도 자기 일처럼 달려와 주었다. 아, 내가 함부르크 학생사회에서 큰 인심 잃지 않고 쌓아놓은 공덕이 좀 있긴 한 모양이다 하고 제법 많이 뿌듯했다.
<이사한 욀뮬렌벡 집 내부(1992년경)>
열여 명의 사람들은 세패로 나뉘어져 한 팀은 들어갈 집의 카펫을 새로 까는 작업을 시작했고, 또 한 팀은 포장한 이사짐을 몇 대의 이동 차들에 옮겨 욀뮬렌벡으로 수송했으며, 마지막 팀은 떠나는 집에서 미처 못싼 짐들을 최종적으로 싸주거나 버려주며 집 청소를 도와주었다.
내가 할 일은 마트와 한국식품점에 들려 이사 작업이 끝난 뒤 이 양반들에게 한끼 대접할 식자재들과 맥주 및 과일류를 와이프가 작성해준 구입 목록에 따라 부지런히 사서 박 주방장 옆에 날라오는 것이었다. 중간 새참은 한국계 임비스(간이음식점)에서 만들어 파는 숙주나물 볶은 춉소이나 탕수육 같은 것을 사가지고 와 대접했지만, 일 끝나고 모든 이들이 모여 먹는 집들이 저녁 메뉴는 박애숙표 육개장이었다.
함부르크 살아오며 이 육개장을 한 두 번씩 시식한 사람들은 마지막 만찬 주 메뉴가 이것임을 알기에 박은 낮부터 이사짐에서 주방기구를 바로 꺼내 육개장과 기타 반찬 준비에 완전 몰두하였다. 마침 지난번 헝가리 여행 같이 다녀온 김YB집이 우리 이사온 집 바로 아래에 있어 모자라는 식기나 김치 같은 것은 쉽게 조달할 수 있었다.
마지막 짐까지 대충 들어오자 거실 공간을 비워 우리집 판과 YB집 판을 바닥에 펼쳐 식사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주 메뉴가 나오기 전에 맥주와 음료들을 돌리며 이삿짐 수송작업에 참여해 준 유학 동료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사람들은 어쩌면 각자가 자신의 좁은 공간에서 내핍생활하며 유학일상의 외로움이나 막막함을 견뎌내다 모처럼 이런 이사짐 나르기 행사를 통해 공동체적 삶의 냄새를 맡으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자리가 상당히 그럴 듯한 듯 했다.
<둘째 은명이 생일에 초대한 욀뮬렌벡 킨더가르텐 아그들(1993년 경)>
나 역시 오랜 만에 이런저런 시름을 잊고 사람들과 어울리니 이 날은 기분이 모처럼 고조되었다. 사람들에게서 큰 도움을 받고, 주인장으로써 식사자리를 마련해 대접하니 그 기분이 뿌듯하기 짝이 없었다. 내 자신에 대한 자존감도 다시 회복한 듯 하고.. 사람들과 모처럼 즐겁게 음식과 맥주 나눠먹고 마시며 환담하다보니 시간이 후딱 갔다. 헤어질 시간이 되어 이들을 배웅하고 집에 들어오는 중에 지금의 내 상황이 독일생활에서 거의 밑바닥이고, 이젠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생각에 근거없는 낙관심이 슬쩍 떠올라졌다.
2. 한번 더 거부 당한 지도교수 모시기
집정리를 하며 12월 중순부터 나를 박사과정에 받아주어 국제경영학 분야 학위논문을 쓰게 해줄 지도교수(독토어파터)를 찾아 보았다.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보쿰대 경영학과의 만프레드 페를리츠 교수와 함부르크 분데스붸어대(국방대)의 니노 쿠마 교수였다. 두 사람 다 학회지에 국제경영학계의 주된 이슈들에 대한 페이퍼(소논문)들을 비교적 자주 발표했기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외국인 교수인 듯한 쿠마 교수보다 페교수가 첫 감에 더 끌렸다. 그는 그 무렵 독일기업의 해외직접투자에 관한 저서를 출간했고, 그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해 봤기에 이 양반을 만나면 이 책의 내용을 갖고 한국기업에도 원용할 연구를 하겠다고 제안하면 뭐 좀 어필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연결되어 먼저 이 교수에게 내 학력 소개와 함께 당신 아래서 국제경영학 관련 박사논문을 쓰고 싶으니 한번 만나줄 의향이 있느냐는 편지를 써 보냈다.
열흘이 안되어 그로부터 답신 연락이 왔다. 나와 아시아 경제 및 아시아 기업에 대해 관심이 있으니 자신의 크리스마스와 신년 휴가가 끝나는 1월 초에 한번 만나보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아직 내가 살아있네!’라고 하는 쾌재를 부르며, 당신의 우호적 반응에 너무 감사한다는 인사와 함께 1월 첫주나 둘째주 어느 날이 당신에게 편한지 알려달라는 서신을 다시 보냈다.
일주일 만에 페교수로부터 1월 둘째 주 평일에 보쿰 근교에 있는 자기 집으로 방문해 달라는 내용을 집주소 및 전화번호와 함께 보내왔다. 나는 전화를 걸어 교수님의 호의어린 면담시간 내줌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모일 2시가 괜찮다면 찾아뵙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그의 동의를 받았다.
<함부르크와 비교한 보쿰의 위치>
보쿰의 위치를 찾아보니 지난 번 방문했던 도르트문트에서 서쪽으로 한 30킬로 더 가는 곳에 있었다. 차로 간다면 초행 길이라도 3시간에서 3시간 반이면 도달할 듯 싶었다. 이번에는 혼자 가지 않고 식구 모두를 태워 가기로 했다. 떠나기 전날 빈 손으로 가기가 어째 허전해 마트에서 20마르크짜리 레미 코냑 한병을 사서 포장지에 넣었다. 이 양반이 먼 길 오며 스승에게 인사 선물도 할 줄 아는 코레아너 제자를 모쪼록 잘 봐주기를 바라면서..
아들 두 놈은 뒷좌석에, 와이프는 앞 조수석에 앉혀 가는 도중에 길안내도 받고 말동무도 하며 갈 심산이었다. 가는 길은 순조로왔다. 중간에 휴게실이 나오면 커피와 담배 한 대 시간을 가졌고, 아그들은 박이 사온 우유와 주스, 주전부리들을 저그 엄마와 함께 잘도 먹었다. 하지만 가는 내내 내 마음 속에서 한 가지 크게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만족스럽지 못한 디플롬 졸업고사 총평균 성적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개도국 발전론’ 이외의 과목들에서는 거의 3점대를 넘어 총평균은 3점 중반에 달했다. 통상적으로 독일대학에서 박사코스에 들어가려는 학생은 독일 디플롬을 수료한 경우 1점 후반대에서 2점 중반의 성적을 기록해야 교수들에게서 자신의 학문적 내공을 큰 문제 없이 증명할 수 있는 학점관리를 했다고 인정받는 것이었다.
나같은 경우에는 이것을 넘어서는 특별 매력 포인트들, 예를 들어 학문적 열정, 유창한 독일어, 그리고 학위테마 프로포잘의 매력도 등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런데 유창한 독일어는 내가 갖지 못했으니 오히려 핸디캡으로 작용할 듯 했고, 그런 상황에서 페교수의 눈에 들려면 학문적 열정과 프로포잘 및 김재민이라는 인간의 매력도로 밀어부쳐야 했는데 생면부지의 초면에 이를 잘 보여줄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드디어 페교수가 만나자는 그의 단독주택 근처에 도달했다.
나는 집과 좀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40대 후반의 안경 쓴 수더분한 인상의 교수가 직접 문을 열어주며 나를 맞이했다. 날카로움과는 거리가 먼 편안함이 그의 얼굴에 묻어 있었다. 인사를 악수와 함께 공손하게 하고 거실로 들어서니 가족들은 안보이고 혼자서 따로 떨어져 생활하는 것 같았다. 내게 ‘뭐 마실 것 제공할까요?’ 하는 첫 질문을 접하며 그 ‘제공하다(anbieten)’라는 단어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독일어 표현이지만 그 장면에서는 어쩐지 사무적인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커피 한잔 부탁한다 하자 원두커피 머쉰에서 미리 끓여놓은 커피를 큰 잔에 가득 담아 내게 건네주었다. 자신도 같은 양의 커피를 부어가지고 내 앞 소파에 앉았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며 내게 자기 소개와 함께 어떤 테마에 대해 논문을 쓰고 싶은지 얘기해 보라고 했다.
나는 독일에 어떻게 왔으며, 한국과 함부르크에서 경영학 디플롬을 큰 문제없이(einwandfrei) 마쳤기에 이제 당신에게서 해외시장 지향기업의 글로벌 경영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한편 써내려 한다고 내 프로필과 함께 앞으로의 학문적 포부를 피력했다. 페교수는 내 말을 주의깊게 경청하더니 ‘헤어 킴, 함부르크대에서의 졸업시험 총평균 학점(Note)은 어찌 되지요?’ 하고 물었다.
나는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여기면서 비교적 담담한 어조로 ‘3.6 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디플롬 학위는 어떤 테마로 썼으며 평점은?’ 하는 두 번째 물음이 다시 돌아왔기에 ‘함부르크대 상경대에는 국제경영학 파트가 아직 개설되지 않았기에 마케팅 분야에서 ’광고에서의 짜증효과와 반발효과‘에 대한 디플롬 아르바이트를 작성해 제출했으며 3.0의 평점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교수의 얼굴에서 일견 어두운 표정이 지나가는 듯 했다. 그 다음부터는 일본기업과 중국시장이 자신의 최근 관심 테마들이라며 사실 한국시장과 한국기업들은 아직 잘 모른다고 말하면서 이쪽 테마를 갖고 내가 학위논문을 쓴다면 자신은 지도할 의향이나 자신이 없음을 시사했다.
내가 다시 독일기업의 입장에서 중국과 일본시장을 어떻게 공략하며 글로벌 경영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 모색 같은 것은 테마감으로 어떤가 하고 물으니 그건 그럴 듯하다고 동의를 해주었다. 그러면서 오늘 면담시간 유익했다며 일주일 안에 숙고해서 자신의 수락여부를 서신으로 통보해 주겠다 하며 이번 만남을 끝내려 했다.
‘아, 이번에도 쉽지는 않겠구나!’ 하는 예감을 갖고, ‘교수님, 제가 최종적으로 문하생이 될 가능성은요?’ 하고 푹 찌르듯 질문하니 끔쩍 놀라며 ‘Fifty-Fifty!’라는 속마음을 전해 주었다. 마음을 다 내려놓은 채 ‘교수님, 제가 작은 선물 하나 가져왔네요’ 하고 레미 코냑주를 탁자에 내려놓으니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으니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술을 드시지 않는다면 다른 지인에게 선물해도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코냑술을 내려놓은 뒤 작별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터덜터덜 걸어 차로 돌아오니 마누라가 먼발치에서 내 표정을 읽고 ‘이번에도 시원찮은 대답을 들은 모양이네’ 하고 장사 한 두번 하는 게 아니라는 포즈를 취했다. 난 그래도 ‘교수가 50 대 50으로 본다더라’는 말을 전하니 ‘예이, 아저씨야.. 그게 못받겠다는 얘기가 아니고 뭐고..’ 하며 ‘신경 끄고 다음 버스 올 때까지 또 기다리자!’ 하고 위로를 해주었다. 마누라의 보수적인 예측대로 페교수는 ‘설마 연락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하는 듯 서면 답신마저 제꼈다.
3. 마침내 받아들여진 독토란트 과정
함부르크에 돌아와 그래도 작은 기적이라도 혹시 일어나는가 싶어 페교수의 수락 전갈을 한 일주일간 기다렸다. 와이프 말이 맞음이 점점 확실해지자 이제 마지막 남은 쿠마 교수에게 서신 연락을 취했다. 페교수에게 보냈던 편지 내용 문맥을 조금만 바꾸면 되었으니 작성상의 노고와 품은 그리 들지 않았다.
교수의 이름에서 인도나 파키스탄, 아니면 이란계 출신 같았다. 그 때만 해도 내가 독일 유학 와서 독일인 교수에게 논문 지도를 받아야지 어찌 제3세계 출신 교수에게 지도를 받는다는 게 좀 격이 떨어지는 것 같아 캥기는 구석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아 물좋고 경치좋은 정자 타령할 때가 아닌 듯 했다.
그저 내게 독일 땅에서 박사학위 논문 지도해 줘 박사쯩 하나 받게 해주는 독토어파터가 있다면 그의 국적이 어디이든 나는 그를 기꺼이 학문적 스승으로 모실 작정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쿠마 교수로부터도 간택을 못받을 때를 대비해 마지막 히든 카드를 딱 하나 더 남겨놨는데 그건 베를린 자유대에서 국제경영학을 오랜 기간 강의해온 한국계 박성조 교수였다. 프로필을 더 파고드니 나의 고교 선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한국계 교수에게서 독일어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는 것은 외국유학까지 와서 뭔가 학문적 근친상간을 저지르는 것 같아 진짜 다급할 때 써야 할 최후의 선택지로 남겨 놓았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심적으로 한결 나아 쿠마 교수에게 너무 저자세로 애원하는 듯 매달리지 않는 평상심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드디어 쿠마 교수로부터 한번 보자는 면담 수락 서신이 와서 2월이 저물어가는 어느 날 함부르크 국방대로 향했다. 그의 연구실에서 처음 만나본 그의 인상은 소탈함 그 자체였다. 그간 면담해본 독일인 교수들에게서는 아시아의 한 귀퉁이에서 온 한국인 학생에게 뭔가 위압적인 권위의식 같은 게 풍겼는데, 그는 체구는 아담했지만 인도 귀족층에 속해 소시적부터 유럽식 교육을 받아 얼굴에 지성과 재능이 철철 흐르는 듯한 분위기를 담아 나를 맞아주었다.
내게는 어째 50대 초반의 재기있어 보이는 이 양반의 첫 인상이 바로 맘에 들었고, 그 역시 그간 외국인 지도교수라고 제법 뻑뻑하게 굴었을 독일인 제자들을 건사하다 좀 예의도 바르고 인간미도 풍성해 보이는 한국인 제자감에 그 어떤 호감을 갖고 대한다는 게 시간이 가면서 확연히 느껴졌다. 내 소개와 향후 박사논문 프로포잘에 대한 내 설명이 끝나자 그는 내가 독일대학에서 디플롬 수학을 마쳤고, 그 전에 한국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까지 취득했는가의 사실을 한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그리고 나의 영어 텍스트 해독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인지 덧붙여 물었다. 내가 한국 대학원에서 거의 영어 텍스트로 공부했다 하니 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기는 현재 한국 대기업들이 선진국 시장에 과감한 해외직접투자를 통해 진출하는 현상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며 한국인 제자와 함께 그 원인 분석과 향후 전망에 대한 연구들을 계속 한다면 학술적으로 상당히 그럴 듯한 작업이 될거라 여긴다는 것이었다.
<사자성어 '고진감래'가 딱 떠오른 순간>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콧등이 다 시큰거리며 이 순간을 맞기 위해 독일 땅에서 7년 간이라는 오랜 세월을 우회하며 시간 투자를 해왔던가 하고 생각하니 그 감회가 장난이 아니었다. 드디어 오래 기다렸던 학문적 귀인을 제대로 만났다 싶어 내 기필코 이 아재가 원하는 한국기업들의 글로벌 경영전략에 대해 박사학위 논문과 기타 페이퍼들에서 샅샅이 보여줄거라 다짐했다.
다른 한편, 세상에는 모든 일이 그 이루어지는 때가 있고, 그 때가 숙성할 때까지 우리는 자기담금질을 계속하여 도약의 기회가 왔을 때 거침없이 웅비해야 함을 한번 더 깨달았다. 속으로 ‘야, 김재민! 니 오래도 어둠 기간을 잘 버텨왔다. 이제사 니 타임이 왔는갑네.. 원도 한도 없이 한번 잘 해봐라!..’ 하는 자기칭찬의 내심 기합도 크게 불어넣었다.
쿠마 교수는 당시 런던정경대에 재직하며 ‘제3세계의 다국적기업’ 책을 저술한 같은 인도계 산자야 랄 교수 등을 통해 한국기업들의 해외경영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짐작되었다. 아마도 이쪽에 연구 파트너가 될 만한 한국인 제자를 물색하던 차에 김모가 제 발로 찾아오니 커다란 하자만 없다면 자신의 독토란트로 받아들이겠다는 우호적인 자세로 나오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당장 독토란트로 받아들일 수는 없고, 일정기간 자신의 연구 파트너로 같이 학회지에 페이퍼를 써내면서 내 연구역량에 대한 확신이 섰을 때 진정한 독토란트로 삼아 나의 학위논문(Dissertationsarbeit)을 작성하는데 지도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조건부 약속을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동의하고 그날부터 그의 예비 독토란트 후보가 되었다.
<쿠마교수를 만난 분데스붸어 대학의 교정 정경>
집에 와서 이 소식을 전하니 와이프는 한국으로 박사쯩 없이 보따리 싸서 가는 큰 고비는 넘겼다면서 아주 기뻐했다. 이제는 당신과 가족을 위해서라도 어영부영 탱자탱자하는 유학한량 놀음은 자제하고, 당신이 잘하는 분야에서 물만난 고기처럼 학문적 역량을 제대로 보여봐라 하며 제법 총기있게 그간 많이 위축된 내 자존감을 북돋워 주었다. 나 역시 사람이 그냥 죽으란 법은 없구나 하며 기사회생한 내 운빨을 지지대로 삼아 독일유학생활의 마지막 수확기로 삼으려 했다.
4. 쿠마 교수와 베를린 국제경영학회 다녀오기
쿠마 교수와는 원칙적으로 2주에 한번씩 국방대 연구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교수는 젊은 시절 영국 런던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마치고, 그 시절 의사인 독일인 부인을 만나 결혼한 뒤 독일로 넘어와 바이에른 주 소재 뉘른베르크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는 이 대학 경영학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고 했다.
현재는 가족이 있는 뮌헨에서 살며 이번에 임용된 국방대에는 격주 간격으로 올라와서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는 생활패턴을 보였다. 슬하에는 당시 대학생이 된 딸을 하나 두었다고 하며 자신의 학력과 가족관계에 대해서 내가 궁금해 하면 상황이 허락할 경우 별 거리낌 없이 좌악 알려주었다. 사람이 따뜻하고, 권위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소탈함과 유머 감각이 내면 깊이 배어 있었다. 나와는 여러 면에서 잘 맞았다.
<분데스붸어 대학의 교정 야경>
독일군 군사참모 장교와 전문직업 하사관들을 대학수준의 교육을 통해 양성하는 국방대에는 민간인에게도 박사과정은 열려있었다. 따라서 쿠마 교수 밑에는 독일 민간인 남녀 독토란트가 각 1명씩 이미 있었다. 하지만 이 친구들과는 그 후 수년을 쿠마 교수 아래 지냈으면서도 같이 동문사숙한다는 유대감은 별로 없이 그저 각자의 논문을 교수의 지도하에 쓰는 것 외에 서로 따로 놀았다.
나도 논문 한편 빨리 쓰고 독일을 떠나려는 마음에 나보다 10살 정도 어린 친구들과 학부시절처럼 밥 사먹이거나 집에 초대하는 이벤트를 통해 적극적으로 교우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아그들이 어째 첫대면 때부터 사람냄새가 희박한 축들이라 나역시 그냥 데면데면한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3월 초 연구실을 방문한 내게 쿠마 교수는 ‘헤어 킴, 4월 초에 우리 둘이 베를린 자유대에서 개최되는 국제경영학회 세미나에 페이퍼 하나 준비해 발표하고 참석자들과 토론 공방을 펼치려는 학술대회에 주최측 초정장이 와 참석하려 하네요. 난 당신과 함께 ’한국기업들의 경쟁력과 해외시장 진출‘에 대한 소논문을 작성하려 하니 다음 만남까지 페이퍼 목차와 주요 핵심내용들이 포함된 초고 하나 만들어 오면 좋겠어요.’ 하며 첫 수행과제를 내어주었다.
마수걸이 과제를 받고 좀 긴장이 되었지만, 테마 자체는 내가 앞으로 작성하려 하는 박사 논문 주제와 다 연결되는 바였기에 뭔가 짜릿하다는 느낌이 더 컸다. 당시 삼성전자, LG전자, 대우전자로 구성되어 한국 가전업계를 세계시장으로 이끌어가던 3사와 현대차, 대우차, 기아차 등 한국 자동차업계를 수출과 함께 해외직접투자(Foreign Direct Investment, FDI) 움직임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양 산업계 3총사에 대한 경쟁력 근원을 쿠교수와 함께 밝히려는 게 학회 발표 페이퍼 내용의 요체였다.
당시 우리 국내 가전업계와 자동차업계는 글로벌 시장에 직접투자(FDI)를 가장 활발하게 시도하려는 업종들이었다. 한국기업들이 제품 한 단위당 국내생산비용보다 높은 미국과 유럽시장에 직접투자에 의한 현지생산에 나서는 움직임들이 당시 구미 선진 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받는 일탈적 현상이었다. 소위 ‘역 직접투자’(Reverse Direct Investment)로 불리며 그 원인들에 대한 규명에 학술적 관심이 고조되었다.
전통적인 직접투자 이론들에 의하면, 기술력과 브랜드력, 조직생산성 같은 기업특유의 독점적 경쟁우위가 있는 선진기업들이 그런 경쟁우위를 다른 해외시장들에서 향유하기 위해 선진국과 중후진국 시장에 직접투자 형태로 진출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특별한 독점적 경쟁우위가 없는 한국의 가전이나 자동차기업들이 선진국 시장에 현지생산을 위해 과감히 뛰어드는 것은 기존의 FDI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구석이 많았다.
그저 한국기업들이 가진 저임금에 의한 저생산원가에서 도출되는 중저가 보급품들에서의 가격경쟁력 때문일 거라는 점이 가장 일반적인 설명요인이었다. 하지만 쿠마 교수는 나를 통해 좀 더 깊숙한 설명요인들을 발견하고자 했다. 나는 한국 국제경영학계에서 발간되는 관련 페이퍼들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 읽었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정구현 교수와 전용욱 교수의 페이퍼들이었다.
전교수는 직접투자 이론들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했으며, 특히 과점적 우위 이론으로써 당시 한국의 가전업체 세 회사가 국내시장에서의 과점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 선진시장들에 전략적으로 진출한다는 점을 보완적으로 부각시켰다. 물론 더 큰 이유는 미국시장의 경우 특정 제품(컬러 TV와 전자레인지)의 소나기 수출로 덤핑관세를 크게 맞자, 차후로는 이를 피하려 방어적 차원에서 미국시장에 현지생산을 감행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한편 정교수는 자신의 어느 페이퍼에서 한국기업들이 가진 원가경쟁력은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생산인력의 저임금 수준에도 있지만, 사실 더 큰 부분은 R&D나 설계파트 고급 인력들이 선진기업내 동일 분야 인력들에 비해 30~40%나 적은 연봉을 받고도 거의 필적하는 연구생산성을 보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높은 역엔지니어링 능력으로 7, 80년대의 일본기업들처럼 서구 선진기업들의 혁신제품을 금방 모방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분적으로 원제품을 능가하는 개선까지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포인트들을 정리해 갔더니 쿠마교수는 전체적으로 그럴 듯하다고 아주 흡족해 했다. 특히 정교수가 지적한 한국 R&D인력들의 가성비 높은 연구생산성에 대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Herr Kim, dieser Punkt ist verdammt neugierig!!’(헤어 킴, 이 포인트가 우라질 정도로 호기심을 왕창 끄네요) 하며 커다란 흥분감을 감추지 않았다. 자기는 내가 정리해 간 핵심내용 포인트들을 베를린 학회에서 발표할 영문 보고서에 모두 인용할 것이라 말하며, 나의 노고에 대해서도 적지 않게 치하했다.
<국제경영학 학술대회가 열린 베를린 쿠담 거리>
일주일 후 우리는 박성조 교수가 모두(冒頭) 발언 오프닝 인사를 한 베를린 학회장에 같이 가 쿠마교수가 작성한 페이퍼 내용을 발표했고, 나는 그 옆에 앉아 질의응답 시간에 제기된 질의자들의 질문에 대해 쿠마 교수에게 도움말을 주거나 직접 답변을 했다. 세 갈래로 나뉘어 진행된 세션별 토의장에서 우리 팀 발표에 학회 참가자 중 가장 많은 이들이 몰려들어 커다란 관심을 보여주었다. 박성조 교수와 일본 본토에서 날아온 일 교수단도 우리 팀 발표장에 많이 와 경청과 질문을 하며 발표 내용에서 의미있는 부분이 상당했다고 긍정적인 소감들을 피력해 주었다.
박교수 역시 나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알맹이 있는 내용 작성에 내가 많이 관여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며 노고를 치하해 주었다. 쿠마 교수와도 이전 학회에서 자주 만나 서로 잘 아는 사이라며 쿠교수가 오늘 한국인 제자 덕분에 한 건 제대로 한 것 같다고 눈을 찡긋거려 주었다. 당시 국내 신문지상에서 예리한 경제컬럼 글로 유명했던 경북대 경제학과 김영호 교수도 이날 우리 세션에 참석해 발표문을 접하고는 내게로 다가와 한국기업들의 경쟁력 바구니를 제대로 소개해 주었다고 과분한 격려를 보내 왔다.
함부르크로 돌아오는 길에 쿠마 교수는 이번에 자신의 낯을 많이 세워준 페이퍼 작성에 적지 않은 공을 세운 내게 이제 자신의 정식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말로 흐뭇함을 표시했다. 내가 그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범하며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다 드디어 오늘에야 독토란트 자리에 안착했구나 하며 하루 빨리 박사논문 한편 쓰고 박사쯩을 건져 길고도 길었던 독일 유학생활에 종지부를 찍으리라 다짐했다. 다른 한편 내게 멋진 내용거리를 제공해준 전교수와 정교수께 진심어린 내면의 감사를 바치며 한국 들어가면 꼭 뵈어 학문적 스승으로 평생 모시겠다는 마음도 굳혔다.
5. 와해되는 함부르크 사교 모임
내가 함부르크에서 좋은 초기조건을 갖고 유학생활을 시작했음에도 자만의 자충수에 걸려 학생 본연의 치열한 학구적 생활보다 무슨 지역유지처럼 야구대회를 개최하고 농구시합에도 적극 참석하며 주말마다 사람들을 불러모아 맥주 파티를 하는 등 느슨한 라이프 스타일을 만끽하다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 채 7년의 세월을 후딱 보내었다.
<때가 도래할 때까지 인내의 시간 거침>
변명을 하자면 경영학 파트에서 내가 전공하고 싶었던 국제경영학 분야가 80년대 초중반까지는 독일대학들에서 아직 활성화되지 않아 나를 기꺼이 독토란트로 받아들여 이 분야 논문작성을 지도해줄 교수들과의 접선 자체가 아주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 분야가 독일 경영학계 주류권에 올라설 때까지 때를 더 기다려야 하는 형국이었다.
그나마 공을 들였던 ‘84년 여름 기센대 파우젠베르거 교수와의 독토란트 면담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자 다른 교수 찾기의 대안을 이루지 못한 채 독일대학에서 경영학 디플롬 과정을 다시 이수하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했다. 당장 국제경영 분야에서 박사논문을 쓰는 코스가 여의치 못하다면 독일식 경영학 공부의 배경지식들을 디플롬 과정에서 탄탄히 배워놓아 박사과정을 밟을 다른 전공 분야를 모색하든가 국제경영 과목을 좀 더 많은 독일대학들에서 제공할 때까지 그냥 손놓고 있지는 말자는 계산 때문이었다.
비경영학도로써 한국 대학원에 들어가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기는 했지만 4년 간의 학부 코스를 제대로 밟지 않아 경제학과 경영학의 배경 지식이 만족할 만큼 충실하지 못하다고 나 스스로 느낀 것도 이 결정에 한 몫을 했다. 이렇게 시작한 함부르크대에서의 경영학 디플롬 과정은 뭐 그리 맨 땅에 헤딩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수학한 부분들이 많아 어쩐지 남보다는 해내기가 널널할 것 같다는 느낌이 더 들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가짐이다 보니 인생만사가 그렇듯 절박한 상황 속에 죽기살기로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는 자만의 독기가 내 마음과 생활 속에 서서히 배이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기는 하는데 사람들과 어울릴 구석이 있으면 크게 마다하지 않고 놀자판을 다 받아주었다. 둘째 놈까지 태어나자 학업에 몰두할 절대시간은 더 줄어드던데다 사람들과 어울릴 건수는 더 자주 발생했다.
육아 전념을 위해 미술사 공부를 두 학기인가 하다 그만 둔 마누라도 파리 살롱문화계의 여왕이라던 쇼팽 연인 조르주 상드처럼 우리 집에 유학생들 초대해 밥과 안주 및 술대접하며 환담 노가리 자리 만드는 데는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그 결과 우리집을 함부르크 유학생 사회의 사교 명소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 덕분에 박사학위 취득기간은 하염없이 길어졌지만 지금 와서 그것도 한 인생이라 돌이켜 생각하자 뭐 그리 액통할 것도 없었다. 도리어 공부 빨리 안 끝낸다고 애탄개탄 사람을 쪼아붙인 적 없이 찾아오는 손님들 대접 확실하게 하며 자신의 매력적인 존재가치를 보여준 와이프의 비범한 활약이 그저 든든하고 대견스럽기만 했다. 물론 그러다보니 댓가를 지불할 때가 다가와 디플롬 수학기간도 예상 외로 늘어났고, 졸업 클라주어 시험도 그리 썩 잘 치지도 못해 급기야 독일내 어느 학교에서도 독토란트로 발탁되기가 어려운 지경으로까지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베푼 게 있어서 그런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한 두 번의 독토어파터(논문지도 교수) 물색 좌절에도 불구하고 나를 찾는 인도계 귀인 교수를 만나 드디어 함부르크 국방(Bundeswehr)대에서 국제경영 분야 독토란트 과정에 들어가는 날을 맞게 되었다.
이제 학업에 새로운 마음으로 전념하라는 환경을 확실히 만들어 주려는 하늘의 뜻이 닿은 듯 우리집 단골 방문 멤버 3인 중 한 사람은 중독 지방으로 학교를 옮겼고, 2인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어 자연스레 함부르크 사교 모임이 해체되는 일이 발생했다.
< '도광양회' 정신 속에 은인자중하며 실력을 키움>
아, 모든 일에는 이루어질 수 있는 때가 있는 법이고 그 기운이 모여질 때까지는 너무 인위적으로 파닥거리지 말고, 어둠 속에서 실력을 쌓으며 때를 기다리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정신 속에 삶에 대한 긴 호흡을 배우며 은인자중과 유유자적의 생활 자세를 유지해야 함을 이 장면에서 한번 더 깨달았다.
6. ‘90년의 국내외 주요 사건
○ 한소 수교
88 올림픽에 선수단을 보내 참가한 소련의 고위층 인사들은 경제적으로 발전된 한국을 보고 충격을 크게 받았다. 오랫동안 미국의 하찮은 제3세계 식민지국 정도로 여겼는데 세계적 수준의 스포츠 콤플렉스 시설과 사회간접자본(SOC) 인프라, 그리고 전세계적 규모의 올림픽 게임을 물흐르듯 운영하는 IT 기술수준이 자기네들보다 훨씬 나아 보였기에 하루빨리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관계 개선을 해야 한다는 중론을 모았다.
80년대 중반에 있었던 체르노빌 원전 사고 수습과 미 레이건 정부의 군비확산 경쟁에 말려들어가 경제적 파탄상태에 이르자 고르바초프 정부는 서방에 거듭된 군축회담 제안을 했고, 내부로는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대외 개방정책을 추구했다. 경제 재원을 확보하려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의 개발을 서둘렀는데 소련측은 개발 파트너로 일본을 점찍었으나 북방 4개 섬 문제로 일본과의 교섭이 여의치 않았기에 혜성처럼 나타난 한국 카드에 새로운 대체재의 역할을 맡기려 했다.
한국의 노태우 정권 역시 서울 올림픽을 기화로 동유럽국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던 와중에 그들의 맹주국인 소련과도 수교관계를 튼다면 그 북방정책의 화룡점정을 찍는 것이라 여겨 반색하며 한소수교에 커다란 공을 들였다. 소련이 긴급히 필요로 하는 경협자금을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정부의 지불보증으로 30억불을 빌려 제공하고는, 현대그룹 등 한국 민간기업들이 시베리아와 연해주 개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 쪽의 적성국에 대한 제도적 장애요인들도 철폐했다.
물론 이 과정 속에 오랜 동맹국 간이었던 북소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지만 소련 측이 크게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자국에 닥친 경제적 파탄을 막는 게 더 시급했다. 당시 국내에서 ‘여소야대’의 정국으로 내치에서 여러 한계를 드러내었던 노태우 정부 역시 야당 두 곳과의 ‘3당 합당’으로 정국의 돌파구를 얻는 한편, 동구국들의 맹주인 소련과의 빠른 수교를 통해 정권존립의 모멘텀을 확보하려는 이해가 서로 딱 맞았다.
양국은 원래 ‘91년 1/1일에 맺으려던 수교일을 한국측의 요청으로 ‘90년 9/30일 석달이나 앞당겨 맺게 되었다. 이로써 해방 이후 냉전시대 내내 적대적인 비교류를 한 양국관계가 45년 만에 재교류의 물꼬를 틀었다. 하지만 경제적 파탄으로 해체수순에 들어가기 시작했던 소련은 ‘91년 12월까지 한국을 통해 제공받았던 지원금 30억불 중 절반에 못미치는 14억7천만불 정도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상환여력이 없어 탱크, 헬리콥터, 퇴역 항공모함(무기와 전자장비 제거), 미사일 부품들을 90년대 내내 지불했다.
<'91년 한소수교 현장>
이러한 소련제 무기시스템의 국내 제공은 2000년대를 지나 한국 방산산업에 자생적 발전기반의 밀알이 된 반면, 북한과는 ‘96년 조소 동맹조약의 파기로까지 가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후 해체된 소련의 적장자로 자리매김한 러시아는 시장자본주의 도입의 대혼란 속에 對북한 영향력을 잃어버리며 북한이 일자리 잃은 소련 핵과학자들과 우크라이나 등에 산재된 개발시설들을 반입해 독자적인 핵개발을 하는 것을 거의 제어할 수 없었다.
<노태우-고르비 샌프란시스코 회동>
나는 당시 독일에서 받아볼 수 있었던 한국신문들을 통해 한소수교가 맺어지고, 그후 노태우-고르바초프의 샌프란시스코 및 제주도에서의 정상회담 보도를 참 감회어린 눈으로 지켜보며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적과 우방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83년도만 해도 우리 국적 민항기가 미소양국의 정보전 각축 속에 소련 전투기에 의해 속절없이 격추 당해도 변변한 항의 사과나 배상도 못받았는 데 근 7년 만에 準 갑의 입장에서 이 무작스러운 불곰국을 비적대국으로 만든 경제적 발전과 ‘개발독재’형 성장 꼬리표를 떼게 한 정치적 민주화도 동시에 이룬 우리 국민들의 저력에 적지 않은 자부심을 느꼈다. 이제 오랜 기간 보잘 것 없었던 극동의 변방소국에 드디어 새로운 변곡점적 국운상승 기운이 샘솟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 독일 재통일
‘89년 여름부터 시작된 동독인들의 폭발적인 민중항쟁에 굴복하여 철권통치자였던 에리히 호네커가 ‘89년 10/18일 사임하고 칠레로 망명하자 후임 서기장이 된 에곤 크렌츠는 유화책을 쓰려했지만 공산당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아 44일 만에 국민들의 불신임을 받고 퇴진당했다.
크렌츠 정권시절인 11/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인들의 서독지역에의 자유왕래가 노도처럼 이루어지자 동독 공산당 정권의 주체적 통제력은 상실되었다. 모든 동독 군대와 경찰은 기능을 상실했고, 악명높았던 비밀경찰 슈타지(요원수 100만명)의 본부청사는 시민들의 습격으로 파괴당했다. 하루에 약 2,000명의 동독주민이 서쪽으로 넘어갔고, 동독 마르크의 가치는 1/10로 폭락했다.
크렌츠가 물러간 후 그 뒤를 이은 한스 모르도프 서기장은 공산당내 비판 인사답게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과감한 개혁을 수행하며 서독정부와의 체제차이 마찰을 최소화핳 통합을 위한 발판을 깔기 시작했다.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으며, ’90년 3/18일 동독에서 사상 처음인 자유비밀선거가 실시되어 공산당인 SED(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오랜 일당독재체제를 폐기했다.
서독 헬무트 콜 수상은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단도직입적인 담판을 통해 강력한 경제적 지원의 댓가로 동독과의 흡수통일을 맞교환하는데 성공했다. 통독을 달가와 하지 않는 영국, 프랑스, 폴란드 등에 대해서도 외교적 설득과 경제적 이익 제공 및 영토적 수복의지 포기를 통해 이들의 묵시적 동의를 받아내었다. 미국은 지리적으로 먼 비유럽국가인데다 독일계 자국민들의 통독 지지세를 보고 통일독일이 나토에 잔류한다는 조건으로 가장 먼저 재통일을 승인했다.
3월의 자유선거 이후 동독지역의 5개 주가 부활하여 각주가 서독인 독일연방공화국(BRD)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통일방식이 결정되었다. 법적으로는 ‘동독(DDR)’이 ‘서독’에 흡수통합된 게 아니라 ‘동독’이라는 실체는 공중분해되어 사라지고, 그 구성원이던 5개주가 서독에 가입하는 통합형식을 취했다. 8/23일 동독의회는 10/3일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되는데 동의했으며, 그 전인 7/1일 양독 간 경제통일이 실천되어 서독 마르크가 통독 마르크로 확정되며 동독 마르크는 서독 마르크로 1대1 교환 속에 폐기되었다.
90년 8/31일 양독간 통일조약이 베를린에서 서명되었고, 9/12일 ‘2+4 조약’을 통해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으로부터 통일을 승인받고 동서 베를린의 주권을 되찾았다. 통일 이전까지 국제법상 서베를린은 미영프 3국에 의해, 동베를린은 소련에 의해 형식상 주권이 미치지 않는 점령지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재통일을 선포하는 봐이체커 대통령과 콜수상 등 양독 요인들>
<재통일을 축하하기 위해 의회의사당 앞에 운집한 독일 군중들>
마침내 이해 10/3일 독일의 재통일이 비스마르크 시절인 1871년 이후 다시 선언되었다. 독일은 ‘45년 2차대전 패전으로 분단된 지 45년 만에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은 이제 함께 자랄 것’(Jetzt waechst zusammen, was zusammengehoert)이라는 봐이체커 대통령의 연설로써 통독을 만방에 선포했다.
통독 헌법으로 서독의 헌법인 기본법(Grundgesetz)을 채택했지만 주변국들에 통독후 국체의 정체성을 확실히 보이기 위해 통일을 적법화하는 헌법수정을 두 번이나 했다. 헌법에 ‘통일된 영토 바깥에 독일영토는 없다’라는 내용을 추가했다. ‘90년 12/2일 통일된 동서독 총선이 실시되어 기독교민주당(서독)과 자유당(동독) 연정이 집권했다.
나는 이런 통독의 스펙타클한 과정을 90년 당시에는 띄엄띄엄 접했다. 베를린 국제경영학 학술모임에 참석했을 무렵에도 쿠마교수에게 제공할 한국기업들에 대한 자료 및 문헌들 찾고 읽어내기에 바빠 독일 신문 보도들을 세세하게 따라갈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쿠마 교수와 국제경영학 컨퍼렌스에 참석차 베를린행 익스프레스 버스로 가는 길과 현지에 도착해 보니 ‘87년 통독 전 서베를린에 갈 때와는 그 경직되어 살벌했던 분위기가 사못 다 사라지고 여느 서유럽 이웃국들에 갈 때와 차이가 전혀 없었다. ’87년 당시 서독 측이 건설해준 고속도로에 2기통 동독제 트라비 승용차가 서독차들과 나름 가속경쟁하다 엔진과열로 도로 곳곳에 퍼질러졌었는데 이번에는 동독인들도 거의 모두 서독차들을 구입해 같이 쌩쌩 달리는 광경이 펼쳐졌다.
엄숙한 분위기로 서독차들을 규제하고 검문하던 동독경찰들도 다 사라지고 서독 표지판 시스템이 같이 설치되어 동독영역에서 차타고 드라이빙한다는 의식이 생겨나지 않았다. 베를린에 도착하니 1년 전 양독인들에 의해 부숴졌던 장벽 파편들이 말끔하게 치워지고 동베를린 구역에서 서독건설기업들에 의해 건물들의 신축과 개축들 속에 도로망 확충작업들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 통독을 축하하는 듯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제패한 독일국대축구단(대 아르헨티나 1:0 승)>
여름에는 이태리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구동독 대표팀 선수들이 보강되어 전력이 강화된 서독 주축의 통독팀이 결승에서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팀을 1대0으로 꺾고 ‘54년, ’74년에 이어 3번째 우승을 차지하자 구동독을 포함한 독일 전역에서 폭발적인 승리의 가두 행진들이 정말 가관이었다. 유럽을 제패할 듯한 ‘게르만족 부활’ 움직임의 가속 페달이 본격적으로 밟혀지는가 싶었다.
아, 우리 한반도에도 이리 통쾌하고 신나는 역사적 사건이 언제 쯤 일어날건지 기대하면서도, 다른 한편 1, 2차 대전의 처참한 패배 이후 다시 초강국으로 고개를 치든 독일이란 나라의 웅혼한 저력이 당시 참으로 부러웠다.
7. ‘90년에 대한 소회 정리
독일생활에서 가장 아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여겼던 ‘89년을 보내고나자 비로소 반등의 기운을 맞이한 해가 바로 ’90년이었다. 디플롬 졸업성적으로는 거의 절망적이었지만 그래도 운이 다하지는 않았는지 한국기업들의 세계시장에서 존재감 증대로 이에 적지않은 관심을 보인 쿠마 교수 같은 귀인을 7년 만에 만나 기적처럼 원하던 국제경영 분야에 박사과정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국내외적으로는 소국 한국이 경제적 지원국의 포지션에서 미소경쟁에 패배해 몰락한 초강국 소련을 자기 발로 접근하게 해 외교적 수교까지 이끌어내는 역사적 사건을 지켜봤고, 국제간 역학관계상 빠른 시일내에는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던 독일 재통일이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지는 것도 살필 수 있었다.
이제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다!’라는 독일의 금언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심기일전해 남은 독일생활을 본격적인 학업수행으로 유감없이 보내볼 거라는 다짐을 90년 내내 다졌다. ‘고대하던 판이 드디어 천우신조로 바뀌었으니 물들어왔을 때 후회없이 노를 저어보자’ 하는 희망과 야망을 동시에 품으면서 말이었다.
와이프 역시 서방이 계속 미끄럼만 타다가 모처럼 올라가는 커브를 타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새로운 힘이 나는 듯 나와 아그들 뒷바라지에 더욱 더 최선을 다했다. 또래에 비해 성장 발전이 더딘 듯한 둘째놈에 대한 특별한 보살핌에 미국의 선천적 장애녀로 태어나 인생역전을 불러온 헬렌 캘러를 가르친 레전드 설리반 선생처럼 이 해에는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
<후명이의 초등시절 담임 및 동료어린이들과 행사 다과회 모임>
한편 상대적 신뢰를 많이 받던 큰 놈은 기대대로 총기 폭발감을 보이며 자기 길을 잘 헤쳐갔다. 킨더가르텐도 졸업하고 집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야무지게 독일담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우수 학생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내가 어릴 때 초등 어느 순간부터 머리가 깨여져 공부빨로 사람들의 관심을 빨아들이던 그 시절 '김재민 2' 같았다. 시리즈 전집류의 독일 도감들 좋아하고 특히 자연과학 쪽에 관심이 많은 것은 나와 좀 달랐지만, 사고의 집중력이나 질문들에 대한 유연한 설명력은 와이프를 자주 깨갱거리게 할정도로 그 당시의 나보다 더 나아보였다.
동생이 또래들에 비해 말도 늦게 트이고, 사리분별력도 한참 아래라 혹시 지적장애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와중에도 이놈의 총명함은 와이프와 내게 적지 않은 위안과 자랑거리가 되었다. 시간이 가며 한국어보다 독일어 표현력이 더 앞서 가는게 대견하기도 하고, 저러다 한국어를 망각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되었지만 우리부부와 의사소통에 큰 문제는 없을 정도로 우리말을 까먹지 않아 다행이라 여길 정도로 마음을 놓게 해주었다.
아무튼 큰놈이 독일 초등교에서 우수생으로 담임과 다른 학우들로부터 적지 않은 호감을 얻는 생활을 하고, 나도 긴가민가하던 쿠마 교수에게서 확실한 독토란트 자격을 인정받은게 너무 뿌듯했다. 앞 시절 속절없이 보낸 시간들이 한참 아까왔지만 '늦었다고 여길 때가 가장 빠른 때다'라는 독일 속담을 뇌까리며 '이제 물만난 고기처럼 한번 제대로 해보자!'하는 자기다짐의 기합을 팍팍 넣으면서 말이었다. 모처럼 독일에서 좋은 기운을 듬뿍 받은 한 해였다.
첫댓글 재민아 오랫간 만이다.
아직 학부생이니 시간내기
힘들건데.
그래도 자주 들러시라
백교장 오랜 만이요. 지금은 방학 중이라 여기 자주 들락거릴 여유가 좀 있소이다. 부탁대로 그리 하리다.
한편의 드라마네! 기억력이 어찌 이리 좋으신가? 고생은 했지만 해외에서의 오랜 가족과의 생활이 늘 부럽구려.
그라고 박성조교수는 9회로 천재급 학자! 아마 경고도 1,2등으로 졸업하신거 같은데...
긴 글 읽어주느라 고생이 많았심다. 기억력도 자서전을 시작한 5년 전에 비해 한해가 다르게 가물가물해지니 요즘은 글쓰면서도 우울한 기분을 자주 느낌미다.
박성조 교수가 9회라니 우리보다 18회 선배였네요. 당시에도 어학능력에서 과연 천재급으로 보입디다. 쿠마교수처럼 독일인 부인과 살고 있다 했는데 지금은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함다. 아마 세상을 떳을 수도있겠다 여겨지기도 하네요.
@김재민 생존해 계십니다
@김수인 아, 그렇구나.. 우리 쿠마선생은 97년 현대경제연구원 시절의 나보려 한국에 며칠 온 뒤 내 소개로 연구원 부소장 팀과, 그리고 연세대 정구현 교수 팀과의 인맥쌓기 모임들을 갖고 떠난 게 마지막이 되었네요.. 2000년 봄 어느 날 독일에서 조깅하다 심근색으로 급사했다는 비보를 받았심다. 나의 가장 중요한 독일 연결고리 끈이 허무하게 떨어져 버린 셈이지요. 참으로 허망하고 액통합디다. 아무튼 그때부터 독일과는 뜸하게 지내라는 운명적 계시라 받아들이고 있심다. ..
재민공 반갑고 오랜만이외다. 글을 읽다 보니 이건 참 드문 귀하고도 생생한 자료라고 여겨지네요. 해외 유학한 사람은 많지만 그리 흔하다 보니 그런지 이런 생활사적이고 개인적인 기록은 참 드문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나는 물론 미국에서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봤는데 그 당시 거래처에 있던 독일 친구가 어찌나 부럽던지...., 우리도 십년 안에는 해야 될낀데 했는데 어느덧 삼십년이 더 흘렀군요. 그러고도 더 엇길로만 가려 하고 있으니 참으로 맹한 민족이로고...
나머지 기록도 챙겨서 틈 봐 가며 세세히 연재해 주소.
나도 법사와 오랜만임다.. 잘 지내고 있지요? 역시 내가 이런 기록문을 이어가려는 맘을 알아주시는구료.. 격려에 힘입어 계속 열심히 쓰겠심다.
독일재통일이니 한소수교 같은 대사건들이 어제아레 무렵 이루어진 것 같았는데 벌써 한 세대인 30년이 지나간 역사적 사건이 되어버렸네요. 글을 쓰며 그 당시를 반추해봤더니 내 개인적 일상들과 맞물려 참 감회가 새롭습디다. 우리 동기들도 모두 그리 생각하겠지요?...
김박사께서 영산대에서 기어코 4년 졸업장을 받는 과정을 힘들게나마 현재 계속 진행하고 있다는
앞의 댓글 소식과 더불은 이 본문글이..김박사의 오랜 학문적 이력과 왠지 서로 관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우선, 삶의 대부분을 거의 학문의 전당에서 보내고 있는 그 엄청난 특혜적(?) 행운이 부럽습니다.
그리고 이번 글은..원익법사 말슴대로..여러면에서 유익한 내용을 더욱 많이 담고 있어
은근히.. 묻고 싶거나, 할 말이 많이 생기는 느낌마저 듬미다.
근덕지가 잡히는 대로..하나씩 함께 풀어나가 보도록 하입시다.^^
서토도 건강체크 여념없이 하며, 서민들에게 살아가기 좀 더 팍팍해진 여러 경제적 역경들을 요리조리 잘 헤쳐나가는지 궁금하요. 서토가 지적한대로 내 唐사주는 천문(天文), 천고(天孤)가 들어있어 평생 배움은 운명적 팔자 속에 해내야 할 듯 함다. 그간 살아온 경로를 반추해보니 그리 틀린 것 같지는 않아 보입디다.
어째 많이 배웠다지만 세속적 출세와 부귀영화와는 동떨어지게 살아왔으니 이것 또한 팔자라 여기고 후회나 아쉬움 없이 앞으로도 남은 여생 계속 꿋꿋하게 살아갈 요량임다. 대신 배우며 건진 것들을 세상에 대가없이 내어놓는데 대한 뿌듯함과 즐거움을 느끼니 서토 말대로 특혜적 삶이라고도 하겠네요. 항상 자중하며 감사하게 여기겠심다.
본 글 내용들에 대한 질의적 화두들을 날려주면 상응하는 배경설명들을 성심껏 하겠네요.
김박이 만프레드 페를리츠란 양반을 한 10년후에만 만났더라도 일이 훨 쉽게 풀렸을겁니다. 요는 개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때를 잘 만나야 되는데 한국경제의 위상이 그때만해도 극소수의 학자나 업계에 인식이 되었던 탓일꺼요. 쿠마교수가 김박을 받아들인 것은 크게보면 김박이 덕을 본게 아니고 자기자신이 덕을 봤을겁니다. 그만큼 시야가 넓고 똑똑한 분이라 여겨집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김박의 최대 강점은 낙관주의에 근거한 엄청난 뚝심입니다. 타고난 것도 있고 소싯적부터 부모님의 물질, 정서적인 풍부한 지원 아래에서 그런 것이 키워졌는 갑다 싶소이다.
지박사의 평가가 타당하게 여겨지는군요.
지난번 한국에서 두 분이 함께 같이 회동한 적이 있은 이유겠지만
김박사의 심신이.. 마치 차돌처럼 단단하게 여겨지던 바..
이는 지박사의 추측대로..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받게된 풍부한
사랑과 물질적 지원에 바탕된 것이 아닐까.. 함께 동감해 봅니다.
지박사도 그간 안녕하셨능교? 말마따나 요즘 같이 한류 문화가 전세계에 크게 어필하는 이런 분위기가 좀 더 일찍 찾아왔었다면 페교수같은 사람이 나를 잡으려 버선발로 쫒아왔을건데 말임다. 아무튼 때가 여물지 않아 지도교수 잡는데 애먹은 것은 변명이 아닌 사실이었다 하겠네요.
이 몸이 택도 없는 낙관론에 잘 빠지는 것은 제 모친이 어릴 때부터 니는 뭔가 특별한 점지를 받고 태어났다고 줄창 세뇌한 덕분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그리 믿어온 상황 때문이라 하겠심다. 지박과 서토가 공감해준 의지의 한국인 유전자가 내게 틀림없이 내포되었을거라는 견해는 너무 잘봐준 해석이라 여김다. 어쨌든 고마운 말씀이네요..
이곳에서 보노라면, 카펫을 새로 가는 일은..전문가가 아니면 쉬이 할 수 없는 일인데..
유학생 선후배들이 나서서 직접 해결했다니..그게 참 용하게 여겨지는군요.
하기야 나성에 계신 원익법사도, 카펫은 모르겟지만..목재 마루를 까는 작업을
건축재료를 구입하여 직접 잘 해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슴미다만- ^^
그리고 읽다보니..저는 특별한 학위에 도전한 적이 없기에 관련 사항을 전혀 잘 모르고 있어
정식 박사학위를 얻게되는 형식이나 절차가...한국과 독일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집디다.
주변인들로부터.. 독일같은 나라에서 박사학위 받기가 비교적 어려운 것으로 들어왔기에...
(유시민, 진중권 등- ^^) 물론 일단 그쪽 국가의 언어를 해결하는 점이 애로가 되기도 하겟지만
실제적 과정에서 가장 다른 점은 어떤 것인지..얻어듣고 싶네요.
중국 제나라 맹상군처럼 평소 박애숙을 통해 식사대접 자리를 자주 만들어주었더니 이런저런 재주를 가진 식객같은 유학동료들이 생각도 안한 장면들에서 우리 가족을 많이 도와줍디다. 어떤 친구는 이삿짐 싸주는 솜씨가 어찌나 프로같던지 한국의 숙련된 이삿짐센터 직원처럼 야물딱지데요.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양반들 얼굴이 떠오르며 같이 보낸 시간들에 대한 감회가 새로와짐다.
독일박사 학위는 인내의 세월을 탄탄히 보낼 환경적 구조가 되어있어야 건져볼 만 할거라 생각되네요. 서토가 언급한 유시민이나 진중권은 시간을 투자했다면 충분히 학위 하나 건질 수 있는 학문적 재능이 출중한 인물들이라 여겨지지만 한국에 빨리 와 자기분야에서 바로 한가락해야 했기에 그런 시간투자를 할 요량이 없었을거라 사료됨미다.
몇명의 독토란트를 지도하는 독토아파터에게 자기 논문만 봐달라고 할 수 없어 이 양반 만나는 Term 기간이 상당히 긴데다 한두번 챕터 전체 보완과 내용 수정을 요구받으면 거의 새로 쓰는 격이 되어 시간이 한없이 늘어남미다. 내 경우에도 첫논문 빠꾸먹고 한 1년 걸려 수정논문 최종본을 제출했는데 통과되어 구술시험까지 가는데 또 1년의 기간이 더 소요됩디다.
김박사 말슴을 듣고보니..결국은, 특별한 이공계 계통이 아닌 한, 현지 언어를 얼마나
유려히 습득하느냐의 여부에 그 속도가 크게 좌우 되겠군요.
겸손한 대답으로 사료되며..아무튼 큰 뚝심으로..좋은 결과를 얻었다 여겨집니다.
사실 저의 경우, 1989-90 년도 전후는, 한국으로 귀환해야 하는 시기였는 바..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 남기를 선택하게 되면서...그 과정에서 생긴 혼돈 중에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라스베가스를 자주 다니며 도박에 열중할 때이기도 했지요.
그 때만 해도 현지 CES 쇼(소비자 가전제품 전시회)에는 일본 회사들이 주로 판을 치고 있은 것으로
기억합니다만..그 이후부터는 점차로 해가 갈수록 이 쇼가 열리는 시기에는 라스베가스 도시 전체가
거의 대다수 Samsung 과 LG 선전물로 도배가 되는듯 보이더군요.
듣자니..올해 CES 에도.. 전세계에서 약 2000여 회사들의 참여에..그 중 약 500개 회사가
한국회사였다 하더군요. 여전히 한국의 약진이 대단한 상황임을 보여주는 수치겠지요.
90년대 초반 당시 한국 회사들의 약진이 아주 대단하다 생각했던 바...위 김박사의 글에 비치는 내용들이
실감이 되며..김박사의 학위 도전시기와.. 한국의 폭팔적 성장시기가 잘 맞아 떨어졌다는 김박사의 글이
아주 현실감 있게 읽히게 됩디다.
아, 서토에게도 90년 전후가 한국 귀환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놓고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던 모양이구려.. 뭔가 소환되지 않기를 바랐던 맘이 더 컸을성 싶은 서토의 내적 분위기가 감지되외다. 라스베가스 들락거리며 도박으로 시름을 잊고자 했다니.. 서토를 둘러싸고 무슨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한번 읊어줄 수 있능교? 궁금증 많은 우리 독자제위들을 위해서 말임다.
삼성과 LG의 가전제품들은 88 올림픽 이후부터 함부르크 대표 가전점인 Brinkmann에서 슬슬 보이더니 90년 무렵부터는 일본제품들보다는 한 끗발 밀렸지만 가성비 좋은 경쟁력으로 저소득 구매자층에서는 일정 인기를 확보하기 시작했지요. 난 그때 비디오 공테입을 일제 TDK나 Sony, Panasonic 등에서 국산 SKC와 새한전자 비디오테입 구입으로 바로 갈아탔네요. 일제 메이커들이 한국 경쟁품들 때문에 가격 다운을 많이 해도 국산보다 낮지 않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심다.
여전히 세계 가전계의 옥황상제 같았던 Sony 브랜드가 유럽시장에서 2000년대 초까지 그 명망을 유지하며 군림했지만 중반부터 삼성과 LG에 밀리는 시대를 맞을거라고는 90년대 내내 상상도 하지 못했네요.
본 글에서, 당시 동서독 통일전후의 과정이 비교적 소상히 잘 정리되었다 생각됩디다.
사실..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는 사람들은..공산주의/자본주의 라는 두 개의 극히나 상이한
체제가 어떻게 통일이 될 수 있었는지..그것도...무력아닌 평화적 절차로써 말이지요.
더군다나...전쟁에서 승리한 패권국이 고의로 갈라놓은 체재인데..
그들의 동의는 어찌 순조롭게 받을 수가 있었는지 등등 말임미다.
법사/김박사 두 분의 말슴처럼...우리도 과연 그리할 수 있는 것인지..참으로 애닯은 주제라 하겠습니다.
더군다나 그당시 개최된 월드컵에서.. 통일된 독일이 우승을 했다 하니...
당시 독일국민 전체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가 참으로 대단했던 것이 아닌가 함미다.
이후 통일 독일의 수상을 오래 맡았던 메르켈 총리도.. 과거 동독 출신의 관료였다니..
나라의 지적 수준이 지속 성장해가고.. 국민들의 열망이 받쳐주기만 한다면
한반도의 남북도.. 언젠가는 통일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희망과 예측을 해보게 됩니다.
89년 여름 동독 수상 에리히 호네커가 서독 콜수상의 초청으로 본을 방문해 극진한 대접과 함께 많은 경제적 지원 선물을 받고 기세등등하게 귀국했심다. 호네커의 정치적 위신을 콜이 제대로 세워줬지요. 당시 서독 국민들과 정계에서 콜이 과도하게 호네커에게 퍼줬다는 비난 같은 것은 거의 없었고, 코끼리 콜의 노회한 구슬리기 외교술이 더 그럴 듯했다는 칭찬 분위기가 대세였지요.
그런데 동구권에서 위신이 한껏 고조된 호네커가 동독으로 귀환해 상당히 느슨해진 대외 여행책을 펼치는 와중에 일반 동독여행객들이 헝가리를 여행하다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역에서 열린 무슨 평화축제에 참가했는데 이때 헝가리정부가 오스트리아쪽 국경을 일부 개방하자 동독인 600명이 넘어가 서독이송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발했심다.
콜정부가 요원들을 급파해 이들 모두를 서독으로 데려오자 동독 전역에서 국경을 맞댄 다른 동유럽형제국으로 동독인들이 넘어가 서독망명을 요구하는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터지며 양독통일의 실마리가 된 호네커 실각과 여러 동독도시들에서의 자유투쟁시위들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네요. 호네커 정부의 잠깐 방심 속에 돌이킬 수 없는 시민저항운동이 동독내에서 만연해 버렸심다.
코끼리처럼 굼뜬 이미지의 헬무트 콜 수상이 무슨 전광석화라도 된 양 외교무대에 몸을 재빨리 날려 소련의 고르비와 여러차례 담판회담을 가지며 고르비를 띄워주고 경제지원책을 왕창 내밀어 서독의 동독합병을 묵인하게 만들었심다. 그 다음은 미국 부시의 똥꼬를 건질어주며 미국 동의도 받았고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통일을 반대했지만 오랜 밀월관계를 다져온 콜-미테랑 간 인간적 신뢰에 힘입어 프랑스도 중립을 지키게 하는 외교술 신기를 보였심다. 영국 대처수상이 마지막 극렬 반대론자였지만 이미 대세는 통독으로 기울어졌심다. 1차 독일통일을 가져온 비스마르크의 외교술을 방불케 한 콜의 묘기였네요.
거기에다 콜은 동독의 무명 정치신인이었던 화학박사이자 정치 및 경제감각이 있어보인 앙엘라 메르켈을 발탁해 자신의 당 기민당에 후계자감으로 전격기용해 서독 정적들의 공격방패용 호위무사로 잘 활용했심다. 하지만 손바람이 좀 지나쳐 동독인들의 환심을 또 한번 사려 1대4의 당시 동서독 마르크 환율을 1대1로 교환해주는 자기도취의 포퓰리즘적 실책을 범하고 말았네요.
입각 초기 메르켈은 서독정계에서 콜이 엄청 오버했다는 질투어린 비난의 화살을 많이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대기만성형의 정치인으로 대성하며 자신을 키워준 콜이 2000년대 초 정치자금 스캔들에 휘말리자 그를 퇴임시키는 엄정함을 보이면서 공과 사를 구분하며 공평무사한 최장수 인기 총리의 발판을 다졌지요. '유럽의 여제'라는 명성까지 획득하며 재작년 퇴임할 때까지 지지율은 우리의 문통보다도 더 높았을 정도였심다.
콜의 정치경제적 최대실책은 많은 경제전문가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그동안 외교적 성공에 취해 동서독 화페를 1대1로 교환해주는 대동독 선심성 정책을 전격적으로 펼쳐 동독기업들의 줄도산과 동독인력의 대규모 실업을 야기시켜 200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통독경제의 지독한 부진을 불러온 일등공신이 되게 했네요.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고사를 여기서도 실감케 만들었심다.
난 지금도 남북관계가 좋았던 2018년 가을 문통의 평양 스타디움에서 있었던 대평양시민 연설 사건에서 어떤 계기가 올 수도 있겠다 하는 고무적 감정을 품었는데 '트럼프-김정은' 하노이 회담의 결렬로 꼬이기 시작한 남북관계 흐름이 상당히 아쉽습디다. 동독 무너짐이 재현되는가 했는데..
재민아
오랫만에
오후의 나른한 오륙도 바다바람과 봄빛을 받으며 폭신한 의자에 앉아 커피를 생각하다 우연히 동기카페를 들어가니 재민이의 8년 고생담이 어제 그제 일처럼 깨알같이 묘사되고 있었더구나.
내 생각에 이 친구 글솜씨는 타고난데다 조련과정이 보통이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되어 눈이 번쩍 떠지는구나.
신춘문예에 수많은 탈락후에 등단되는 문학도처럼 말일세.
카페에 출입하는 친구들과 인사한지도 오래되었네.
다들 안녕하시겠지.
글이란 게 오랜 기간의 간절한 기다림 정도는 있어야 어느 순간 일필휘지식으로 끝없는 생각들이 타이핑되는 경험이 가능하겠는데 재민박사가 그런 경우인가봐.
재밌는 경험을 하고 있네.
90년 초의 상황에 대한 기억이면 30년 세월 너머 기억이 아닌가?
이를 한문으로는 귀밝고 눈밝은 '총명(聰明)'이란 표현을 쓸터인데
그 당시에 보고 들은 세상사를 이렇케 분명하게 기억하고 묘사하다니 글재주가 보통이 넘음이 틀림없는가 보다.
글솜씨에 감탄한다.
묶으면 독자들에게 호평받는 좋은 책으로도 탄생될
것같다.
글 중에 독일 자유베를린대학 정교수인 박성조 교수는 나도 우리대학에서 만나본 적이 있지.
마산에서 부산으로 동행하기도 했었고..
아, 강호교수가 진짜 오랜만에 왕림하여 과분한 답글을 달아주셨네.. 고맙소이다. 침침해 간다던 눈 건강은 어떻소?.. 수년 전 언급하던 대상포진에서도 좀 회복되었는지 궁금하요.
그리고 강호 교수도 2000년도 이후 박성조 교수와 교분을 맺었는갑소.. 참 사람간의 관계가 서로 이리저리 겹칠 때가 제법 되는 모양임다..
김교수, 오랜만에 보네요. 반갑습니다.
여전히 셀폰으로 글을 올리는 지는 모르겟으나 만약 사실이라면..
참으로 대단한 정성이라는 생각이 듬미다. 틀린 철자를 거의 발견할 수가 없군요.^^
이제 다친 다리도 다 완치되어.. 정상적 활동을 하고계신 모양이네요.
이후로..동기웹에서나마 자주 볼 수 있도록 하십시다.
@김의철 셀폰으로 지금도 올리고 있지요.
서토가 제주 동기모임에 참석 못한다는 공지를 봤는데 매우 아쉽군요.
다친 다리는 완치됐지만 덧붙인 쇠 부목은 아직 제거하지 못하고 있소.
항상 건강을 고민하며 매일 산책을 1시간 정도 하며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번 모임에 참석하면 해외에 사는 고민같은 걸 직접 들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아쉽군요.
@김재민 박성조 교수는 고교 선배라서 존경심으로 대했는데 대학에서 독일기술센터 같은 걸 설립하여 그 선배를 이용하려는 속셈을 보고 안타까와 했었지요.
결국 그 선배도 대학의 도움을 뿌리치고 떠나더군요.
그후 서울대에서도 활동하는 걸 보니 재목은 재목이구나 싶더이다.
@김강호
좀 무리를 해서라도 오랜 동기들 만나보고자 꼭 참석해 보고자 했지만..
사는 형편이 워낙에 어렵다 보니..결국은 참석이 어렵게 되더군요.
어찌보아 일생에 한 번 있는 기회인데...많이 아쉽지만 머 우짜겟슴미까.
그럴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는 것을-
언젠가 모두들 만나볼 수 있도록..계속 노력하겠슴미다.
미국에 주저앉느냐 마느냐의 결단을 선택하는 고뇌의(?) 과정은.. 그간 이 웹에서
비교적 소상히 표출한 적이 있기에..특별히 달리 더 언급할 내용은 없슴미다만..
굳이 하나를 더 들어 본다면..
지금이야.. 직원들이 해외주재를 외려 꺼릴 정도 경향의..상당수준 발달한 한국적 여건이다 보니..
서토같은 경우를 오히려 반가와 할 수 잇엇겟지만..
근 40년 가까운 이전의 그때만 해도..해외주재를 일종의 특혜로까지 여기는 추세였다 보니
발령에 따라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그대로 눌러 앉으려는 상황에 대해..
마치.. 매국노/배신자(?)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나 회고 됨미다.
윗사람들 보다도..한국에 있던 동료 직원들 사이에 훨씬 더 그런 평가가 돌더라는 말을 전해듣기도 햇지요.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그 당시 그랫던 이들의 상당수가.. 서토와 똑같은 선택을 결국 하더라는 사실-^^
하지만 이들은 모두가.. 서토가, 많은 곤욕과 손실을 감수하며 이미 닦아놓은 길을
여유있고 손쉽게 선택하여 걸어갈 수 잇었던 것-
세상사..타이밍이 중요함은... 아래 글에서도 그 예가 있지않을까 생각해 봄미다.
서토의 얘기를 들어보니 당시의 귀환 건이 당연히 고민거리였으리라 공감됨미다. 나라도 남는 쪽을 택하며 현지에서 자력갱생하는 길을 모색했을거라 확신함다.
그런데 어찌보면 별 고민할 거도 없는 선택을 두고 서토를 고뇌에 찬 인물 역할을 하게 한 또 다른 숨은 이유가 있을 법도 한데 그게 뭔지 궁금하외다. 그 때 결혼한 가족들이 미국에서 같이 살고 있었는지의 여부가 중요 단서가 될법도 한데.. 상황봐서 노 코멘트로 패스해도 좋겠심다.
@김재민
회사의 발령에 어깃장을 놓는다는 자체가 큰 부담이었기에 고뇌가 되었지요.
그 외 여타의 숨은 내용은 없슴미다.
주재원으로 나와서 계속 가족들과 함께 살았고..와이프도 미국에 계속 있기를 원했지요.
머..그 당시는 회사와의 관계 외에는, 특별히 패스하고 말고 할 다른 사항은 없었네요.^^
김박사도 본국으로 귀환한 이후.. 대학쪽에 적을 두려 하지않았을까 추측되는 바..
그러나 실제로는 기업에서 세월을 많이 보낸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아는 지인 한 분은, 85년도 저와 거의 같은 시기에 미국으로 유학와서, 택사스주의
University of Texas 에서 영문학 학위를 받은 후.. 제가 귀국발령 받은 90년도에
한국으로 돌아갔지요.
이후 한 1년 정도 서로 간간이 연락하는 중..귀국후 대학에서 자리를 얻지못해 애로가 많으며..
교수직을 얻는 자리에 금전이 개입되는 등.. 상당한 부정적 현상이 많음을 지적하며
그러한 한국의 현실에 대해 개탄을 많이 하더군요.
그러더니 지방의 어느 대학에서 어렵사리 자리를 얻고 난 이후로는..결국은, 쌓아진 실력의 저력인지..
대학을 옮겨가며 한국 영문학계에서 승승장구 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엇습니다.
생각키에..김박사가 만약 90년도 전후로 학위를 얻어 곧바로 귀국할 수 있었다면
지금쯤은 학계에서 내노라 하는 원로교수의 입지를 점해 있을 것으로 저는 거의 확신합니다.
이후에 보노라니..95년도 이후로 한국으로 돌아간 해외 유학생의 대개가..매우 어려움을 겪은듯-
추후에 쓸 타임이 닥치면 귀국 후 당시의 상황을 가감없이 기록할 것임다. 하여튼 만 나이 40에 함부르크 택시운짱하다 박사쯩 하나 따고 전가족이 귀국했는데 한국대학에서의 임용문은 아주 좁았고, 민간경제연구소들에 어플라이 하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들어갔네요.
독일박사의 아우라 속에 야당당수하며 재미있게 지냈지만, 98년 초 IMF 금융위기 때 퇴출 0순위로 찍혀 울산 현대중공업으로 유배가게 된 사실은 일전에 와이프가 올린 '금의야행하는 김재민을 만나서'라는 글에서 이미 전한 적이 있었심다. 연구원과 중공업 시절에 연세대, 중앙대, 한국외대, 그리고 울산대 등에 외래강사로 출강하여 교단 맛은 제법 봤네요.
서토 말대로 93~94년 시기에 들어올 수 있었다면 그당시 YS정권이 '세계화 정책'을 표방하자 국내 각 대학에서 국제경제와 국제경영 전공자를 싹쓸이 하듯 영입했는데, 그 물들어오는 타임을 놓치는 바람에 대학전임이 될 수 있는 길을 한 끗 차이로 놓치고 말았네요. 이 또한 '인생만사 새옹지마'가 아닙디까..
@김재민
만약 쿠마 교수가 계속 생존해 있었다면..김박사가 한국의 대학에서 자리를 얻는 일에
일부나마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요?
당시 전해오는 말로 듣기로는..최소 소나무 두그루(?) 정도 해당 대학교정에 심을 수 있는
성의를 내보여야.. 자리가 만들어 질 수 있었다 합디다만- ^^
@김의철 뭐 그리 생각하지 않네요.. 쿠마 교수가 한국 대학에 영향을 미칠 인적 네트웍은 크게 없었심다.
소나무 한그릇이라면 1억이란 말 같네요.. 내가 그런 돈을 바치고도 자리 하나 있다면 하고 기웃거리지 않았더니 내게는 뭐 그리 현실적인 사안은 되지 않았심다. 현대경제연구원이나 중공업에 들어갔기에 교수짜 아니고서도 시급한 경제적 자립은 할 수 있었으니까 말임다.
김강호 교수의 댓글이 반갑네요. 글이 좋으니 뒷얘기들도 흐뭇하고 풍성하네요.
글보다 몇몇 친구들의 호의어린 댓글장 참여 덕이라 여김다. 소생도 본문 글 외적인 뒷담화 교류가 더 그럴 듯해 중요고객 맞듯 적극 대응하고 있네요..
이법사님 잘 지내죠?
'어깃장'은 소논문이더군요.
미쿡에서 발견한 한국전통의 미학이랄까.
아무튼 흥미진진하게 읽고 댓글을 여기서 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