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옮긴 글은 ‘삶의 향기’라는 코너에
실린 글인데 같이 생각하고 공감할 부분이
있어 일부내용을 추려 옮겨봤습니다.
오래된 한옥에 사는 시인이 어느 날
닳아서 삐거덕 대는 나무 대문의 망가진 빗장을
다시 고쳐 달면서 문득 떠올린 생각을 쓴
내용인데, 각 잡히게 네모반듯한 성냥갑을
세워놓은 것 같은 도시의 빼곡한 아파트 속에
살면서는 좀처럼 보고 느끼기 힘든,
철마다 변화해가는 자연의 품에 안겨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고요하면서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풍성하면서도 유연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자로 잰 듯한 직선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 이외에
자연의 모든 것들에는 직선이 보이지 않습니다.
산 나무 바위 달 계곡 수평선 구름 무지개 꽃...
직선처럼 보여도 가까이 가보면 틈이 보이고
조금씩 들고 남이 있어 금을 긋듯이 사람을
밀어내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신입 사원의 목에 옥죄어 맨 넥타이 마냥
살면서 매사에 너무 꽉 채우며 살지 말기를,
빈 여백의 공간을 두어 바람이 드나드는 길을
만들어 숨 쉬는 집을 지을 줄 알았던 조상들은
그들의 삶의 지혜를 구불구불 자연을 닮은
바람길 위에 슬며시 얹어둡니다.
빠르게 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니
조금 돌아가더라도 많은 걸 품어보라고,
나 아닌 다른 생명들도 두루두루 살피며
하늘도 바라보고 흐르는 물길도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함께 사는 아름다움을 느껴보라고
말입니다.
직선에는 하느님이 없다고 했는데
하느님 부처님은 사랑이시니 나도 너도
품을 수 없는 직선에는 사랑이 머물 곳이
없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특히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나무의 말 없는 말씀에 늘 귀 기울여야
하리라.’는 표현은 자연의 파장을 체험해본
저희로서는 공감이 가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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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에는 하느님이 없다> 고진하 시인. 목사
『내 나이보다 연륜이 높은 대문.
우리 집 보물 1호인 솟을대문.
저 깊고 푸른 숲의 아름드리나무였을 적,
햇살과 바람, 비와 눈, 낮과 밤, 하여간
저 사계의 족적이 대문(大紋)으로 새겨진
대문(大門)의 문양도 사랑한다.
저 아름다운 문양이 나무에 새겨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계절을 구불구불 통과했을까.
나무들이 자란 숲길도 구불구불하지만,
나무의 나이테를 만든 시간 또한 구불구불하지
않았을까.
나 역시 문명에 길들어 느림을 견디지 못하고
빠른 직선의 삶을 선택할 때가 있지만,
나무의 시간, 자연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이 자연의 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구불구불한 것을 견디지 못해 구불구불한
것을 기어이 직선으로 펴고 말 것이다.
직선이 무엇이던가.
우회하는 삶을 용납하지 않는 완고함,
다른 생명을 살필 줄 모르고 앞만 향해
분주하게 내달리는 마음.
직선으로 곧게 뚫린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내달리면서 도로 옆의 풍광을 즐길 틈이 있던가.
달리는 자동차에 야생 동물이 치여 숨지는
사고인 로드킬을 우리는 자주 목도하지 않았던가.
오스트리아 화가 훈데르트바서는
“직선에는 하느님이 없다”고 했다.
하느님이 없다는 말은 생명의 원천에서
차단되었다는 것.
직선을 애호하는 사람은 자기가 생명의
원천에서 차단되었다는 것조차 모른다.
이런 사람은 오직 가속과 직진의 욕망뿐이다.
나무의 아름다운 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그 아름다운 결이 불편과 아픔의
구불구불한 시간을 통과하면서 생긴 것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매일 솟을대문을 여닫으며 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문장을 갈망하지만, 그런 문장을
얻으려면 ‘사람보다 더 많은 사후(死後) 생’을
갖는 나무의 말 없는 말씀에 늘 귀 기울여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