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혹은 생각의 파편들
- 시가 탄생하는 자리 2
오 홍 진
김광섭의 「생의 감각」이라는 시가 있다.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아픈 몸을 이끌고 산책을 나간 시인은 무너지는 둑 기슭에 무더기로 핀 채송화를 목격한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장소에서 무심(無心)하게 제 생명의 꽃을 피운 채송화를 보며 시인은 자신의 ‘생의 감각’이 뒤흔들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생의 감각이 흔들린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시인에게 생의 감각은 무엇보다 시-언어의 감각과 다르지 않다. 생의 감각이 뒤흔들리는 순간 시인은 일상 언어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각(의 세계)와 조우하기 때문이다. ‘채송화’라는 감각의 대상이 시로 화하는 순간을, 정확히 말하면 채송화라는 시적 대상에서 한편의 시가 탄생하는 순간의 감각을 김광섭은 ‘생의 감각’이라는 시구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생의 감각을 향한 시적 열망은 지금 이곳의 시인들에게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생의 감각을 잃은 존재를 시인이라 부를 수는 없으리라.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건 곧 이러한 생의 감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돌려 말하면 시인은 생의 감각과 마주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계의 감각을 시라는 양식적 공간을 통해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전차가 있던 시절 60년대의 서울은 그런대로 사람이 살 만한 도시였다. 땡그랑 땡그랑 신호를 울리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달리는 전차는 그때부터 이미 도시교통의 지청꾸러기였지만 벚꽃 활짝 핀 4월 창경원 앞에 손님을 잔뜩 부리던 전차의 위용은 당당했다. 미니스커트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 전차 안에서였다. 한껏 멋을 부린 여대생들이 다리를 뽐내며 건너편 의자에 앉아 책으로 하얀 무릎을 가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원효로를 출발해 남대문역을 거쳐 을지로 원남동 삼선교를 지나 돈암동 태극당 앞까지 가는 전찻길은 내가 애용하는 노선. 거기서 내려 고개 하나를 넘으면 학교였다. 입학식 날 전차에서 내리자마자 병아리처럼 종종거리며 뛰던 하이힐 차림의 여학생들도 생각난다.
그런데 그 전차가 없어진 것은 1968년 11월경의 어느 밤. 길음동 시장 카바이트 막걸리에 취한 우리들은 “아니 전차가 없어지다니!”를 외치며 눈 속을 뚫고 돈암동 보문동 신설동을 걸어 종전차가 들어온다는 동대문역에서 기다렸다. 마포종점에서 서대문로터리 종로를 지나 자정 무렵 종전차는 마지막 경적을 울리며 동대문으로 들어왔다. 운집한 사람들이 다가가 그동안 수고한 전차의 앞머리에 꽃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땡그랑 땡그랑 놋쇠 종을 울리며 늙은 기관사와 차장들이 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내렸다. 한동안 그 종전차는 철책을 두른 숭의문 옆에 댕그라니 전시되어 있었는데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의 어리숙한 60년대도 그렇게 끝났다. 거대한 팔의 포클레인이 굉음을 울리며 시내의 모든 철로를 걷어내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발걸음이 아주 빨라졌다. 그리고 자동차들이 쌩쌩 달렸다. 이른바 ‘조국근대화’의 시대가 온 것이다.
- 이시영, 「전차」(문학동네 2016년 봄호)
이시영은 위 시에서 1960년대에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던 ‘전차’의 감각을 불러내고 있다. 시인에게 전차는 실물이 아니라 하나의 감각, 곧 기억 속에 드리워진 하나의 감각-대상으로 다가온다. “전차가 있던 시절 60년대의 서울은 그런대로 사람이 살 만한 도시였다.”라는 진술에 나타나듯, 시인은 기억 속에 새겨진 전차의 감각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진실에 접근하고 있다. 이를테면 “땡그랑 땡그랑 신호를 울리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달리는 전차”의 이미지는 무한 속도의 경쟁에 휩싸인 한국사회의 현실-감각을 에둘러 비쳐준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대생들이 다리를 뽐내며 건너편 의자에 앉아 책으로 하얀 무릎을 가리던 모습”의 감각 또한 이러한 전차의 시대감각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시영의 기억 속에 새겨진 전차의 기억이 1968년 11월경의 어느 밤,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요컨대 시인은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물’을 기억함으로써 2016년 현재의 한국사회에 부재하는 어떤 감각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한다. 전차가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하나둘 종전차가 들어온다는 동대문역에 모인다. 자정 무렵 종전차가 마지막 경적을 울리며 동대문으로 들어오고, 운집한 사람들이 전차의 앞머리에 꽃목걸이를 걸어준다. 땡그랑 땡그랑 놋쇠 종을 울리며 전차에서 내리는 늙은 기관사와 차장을 향해서는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박수를 치는 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시인은 단순히 그 시대의 ‘낭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 전차의 앞머리에 꽃목걸이를 걸어주는 시민들의 낭만(?)과 함께 “우리의 어리숙한 60년대도 그렇게 끝났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한국사회의 60년대가 이런 낭만의 시대는 아니었다고 힐난할 필요는 없다. 시인 또한 전차가 사라진 바로 그 자리에서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조국 근대화’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 근대화의 결과로 우리는 경제적 풍요로움을 얻었다. 하지만 전차의 앞머리에 꽃목걸이를 걸어주던 시민들의 그 마음을 지금 우리는 과연 간직하고 있을까? 시인은 ‘전차’라는 사물을 기억함으로써 우리가 잊은 ‘생의 감각’이 무엇인지를 에둘러 보여준다. 그것은 60년대의 서울을 그런대로 사람이 살 만한 도시로 만들었던 윤리 감각과 다르지 않다. 60년대의 전차를 바라보는 이 윤리 감각이 「전차」라는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키는 미적 원리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조그만 종이박스 하나를 놓고 껄렁하게 앉은 사내를 보았다 그 무성의가 마음에 들어 얼른 지폐 한 장을 그의 아가리 속으로 내동댕이쳤다 무척 화가 난 듯 새로 생긴 폐기물 처리가 걱정이라는 듯 굴러들어온 돈을 그가 미심쩍게 내려다보았다
코 푼 휴지처럼 버려진 지폐를 사이에 두고
오래전의 약속인 듯
그와 나는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 최영철, 「동감」(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조그만 종이박스 하나를 놓고 껄렁하게 앉은 사내가 있다. 거지인 것 같은데, 당당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무성의가 마음에 들어 시인은 지폐 한 장을 그의 아가리 속으로 내동댕이친다. 무성의에는 무성의로 답해야 한다는 것일까? 그런데, 거지의 표정이 묘하다. 무척 화가 난 얼굴인 것도 같고, 새로 생긴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는 얼굴인 것도 같다. 굴러들어온 돈을 미심쩍은 눈으로 내려다보는 이 거지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봐야 할까? 하긴 그가 예사 거지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거지의 목적은 돈을 얻은 것인데, 그는 돈을 보고도 본체만체한다. 최영철의 시작(詩作)은 바로 이 지점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돈을 돈으로 보지 않는 거지라면, 그를 단순히 거지로만 대할 수는 없다. 그는 돈을 얻기 위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니다. 그럼 왜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일까?
이 시의 2연에서 시인은 코 푼 휴지처럼 버려진 지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두 사람의 이심전심(以心傳心)에 시안(詩眼)을 집중하고 있다. 이신전심의 세계이므로 그것은 “그와 나는/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라는 시적 정황만으로 묘사된다. “오래전의 약속”이라는 시구가 붙어 있지만, 사실 이 시구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오래전의 약속이든, 아니든 지금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씩 웃고 있기 때문이다. 조그만 종이박스를 깔고 ‘껄렁하게’ 동냥질을 하는 사내만큼이나 시인 또한 껄렁하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본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흐를 만한데, 시인은 그것을 1연과 2연의 여백에 침묵으로 담아내고 있다. 요컨대 두 사람은 마음과 마음으로 통했고(시의 제목이 ‘동감’이다), 그렇게 통한 마음을 웃음(부처와 가섭 사이에 펼쳐진 ‘염화미소’가 생각난다)의 형식으로 표출한다. 할 말이 없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 마음으로 통했는데 굳이 말을 하는 건 췌언(贅言)일 뿐이다. 지폐를 코 푼 휴지조각처럼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니 거지는 말이 없어야 하고 시인 역시 말없이 씩 웃어야 한다. 말 없음의 감각이 시를 낳는 희유(稀有)한 경우를 우리는 최경철의 이 시에서 분명히 목격할 수 있다고 하겠다.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지 못한 여자와 남자가
카멜레온형 인재가 되지 못한 여자와 남자가
문어숙회를 사이에 두고 도란거린다
또 한 번의 봄은 턱 밑까지 차오르는 중이고
여자가 맥주에 소주를 만다
넘치지 않게 술 따르는 법은 용케도 익힌 듯하다
생이란 게 변변치 못해 팔팔한 적 없어
서로에게 숙회감도 되지 못하였으나
귀는 순하여 참도 잘 들어준다
한참만에야 문어 한 점 입에 넣다가
사람이나 문어나 사는 게 애옥살이라는 듯
혼자서는 무엇을 해도 안 되는 세상이라고
중얼거리는 남자의 행간에 노후가 펄럭인다
여자와 남자가 합쳐야 고작 팔완목이겠으나
여덟 개의 다리로도 육지로 끌려나온 돌문어
가난을 합쳐본들 늙음뿐이 더 늘겠는가마는,
함께 일할 생각 없냐고 묻는 남자 앞에서
같이 살자는 말로 해석해 버릴까
늙은 여자 더딘 계산을 하는 밤이다
- 최광임, 「문어숙회 먹는 밤」(시와표현 2월호)
최영철의 시적 존재가 세속의 바깥을 지향하고 있다면, 최광임은 위 시에서 세속의 안쪽에 터를 잡으려는 시적 존재를 내세우고 있다.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지 못한 여자와 남자가 만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카멜레온형 인재가 되지도 못한 여자와 남자니, 서로의 마음에 들기 위해 온갖 잡설을 내뱉기도 힘들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문어숙회를 사이에 두고 도란거린다”. 변변치 못한 삶을 살아 서로에게 좋은 숙회감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귀는 순하여” 서로의 말을 참 잘도 들어준다. 혼자서는 무엇을 해도 안 되는 세상이라고 남자가 중얼거리자, 여자는 여자대로 중얼거리는 남자의 행간에서 노후에 대한 불안을 읽어낸다. 여자와 남자가 합쳐야 고작 다리 여덟 개의 팔완목(八腕目) 인생에 그치겠지만, (늙은) 여자는 “함께 일할 생각 없냐고 묻는 남자 앞에서/ 같이 살자는 말로 해석해 버릴까” 하는 ‘더딘 계산’을 하기도 한다. 또 한 번의 봄이 턱 밑까지 차올랐으니 이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최광임이 묘사하는 여자와 남자의 세계는 ‘어리숙한 60년대’(이시영 「전차」)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 있다. 함께 일할 생각이 없냐는 남자의 말을 같이 살자는 말로 해석하려는 여자의 더딘 계산은 어리숙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리저리해도 세상은 어차피 이들에게는 ‘애옥살이’가 될 수밖에 없다. 이성을 유혹하는 기술도 없고, 상황에 따라 얼굴을 달리하는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이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리자가 되는 건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시인의 말마따나, 여자에게는 남자의 순한 귀가 있고, 남자에게는 여자의 순한 귀가 있다. 그런 귀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세계를 시인은 어리숙한 두 늙은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삶에 지친 사람들 앞에 풀어낸다. 문어숙회를 먹는 밤이라는 일상적 삶이 한 편의 시로 화하는 과정에는 이처럼 서로에게 순한 귀가 기꺼이 되어주는 여자와 남자의 윤리 감각이 스며들어 있다. 시인은 일상의 감각이 시의 감각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한다. 시(어)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다는 말이다. 시에 대한 그 감각이 어찌 보면 일상의 감각을 시의 감각으로 뒤바꾸는 근본적인 바탕일지도 모르겠다.
밤새도록 당신을 들락거리는 생각들
당신을 잠 못 들게 하는 생각들
당신의 천장을 쿵쿵거리는 생각들
당신을 미치게 하는 생각들
미쳐가는 당신을 조롱하는 생각들
당신을 침대에서 벌떡 일으키는 생각들
당신을 고무鼓舞시키는 생각들 순식간에
당신의 고무를 무화시키는 생각들
당신을 돌처럼 굳어가게 하는 생각들
당신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생각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신을 무덤으로 만드는 생각들
무덤 속에서 당신의 머리칼을
손톱을 자라게 하는 생각들
죽어도 죽지 않는 생각들
관 속의 뼈들을 달그락거리게 하는 생각들
무덤이 파헤쳐지고 장대비가 쏟아져도
백 년 이백 년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생각들
당신의 텅 빈 해골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가차 없는 생각들
- 황병승, 「생각들」(현대시 3월호)
앞서 살펴본 세 편의 시들과는 다르게, 황병승의 위 시는 생각의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에게 시는 “밤새도록 당신을 들락거리는 생각들”과 다르지 않다. ‘나’라는 존재가 있어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들이 있어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그에게 ‘시를 쓰는 시인’은 ‘생각들’의 연쇄를 통해 표현되는 그 무엇이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생각들의 나열이 시를 만들고, 시인을 만든다. “당신의 텅 빈 해골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가차 없는 생각들”을 기록함으로써 시인은 시가 생각의 파편들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시를 쓰는 이들일 수도, 시를 읽는 이들일 수도 있다)에게 각인시킨다.
그런데, 정작 황병승의 이 시를 읽다 보면 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시인만이 생각의 파편들을 기록하는 건 아니다. 시를 읽는 사람 또한 생각의 파편들에 휩싸여 산다. 이를테면 “당신을 잠 못 들게 하는 생각들”을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생각이 생각을 낳는다. “당신을 고무鼓舞시키는 생각들 순식간에/ 당신의 고무를 무화시키는 생각들”로 돌변하는 걸 시인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들’이라는 말을 욕망하는 주체로 바꿔 표현해도 좋겠다. 생각은 생각을 욕망한다. ‘생각들’이라는 제목에 암시되어 있는 생각의 무한성은 생각을 통어할 수 없는 (시적) 주체의 상황을 에둘러 드러낸다. 시인의 말마따나 “당신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생각들”이 이 시의 본령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황병승의 이 시는 단순히 생각의 파편들을 기록한 글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죽어도 죽지 않는 생각들/ 관 속의 뼈들을 달그락거리게 하는 생각들”에 드러나는바, 그의 생각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사유하는 과정 속에서 뻗어 나오고 있다. 언어 자체가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는 것은 곧 언어로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인은 언어로 삶의 너머를 끊임없이 응시하는 존재이다. ‘생각들’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시인은 죽음의 세계에 한 발 더 다가선다. 그는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그 생각을 풀어낸다. “죽어도 죽지 않는 생각들”의 언어 감각은 이렇게 황병승의 시적 사유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무덤이 파헤쳐지고 장대비가 쏟아져도/ 백 년 이백 년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생각들”이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언어의 무덤(시의 무덤이라고 말해도 상관없다)이 파헤쳐져도 언어-시는 남는다. 수많은 사물들의 죽음을 바탕으로 생성된 언어의 그 강렬한 생명력이, 시인의 말대로라면 “가차 없는 생각들”이 황병승 시의 밑자리에 아름드리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시》2016년 3월호 리뷰
오홍진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공저로 경계와 소통, 지역문학의 현장, 한국문학과 대중문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