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정구 선생寒岡 鄭逑 先生
1, 새로운 학통(學統)을 세웠다.
2,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학문을 육성하는 임무에 심혈을 기울였다.
3,한려학파寒旅學派를 형성하였다.
4,예학禮學’을 체계적으로 구성해서 독립된 학문영역으로 확립하였다.
5,근기 남인학파近畿南人學派란 학파(學派)를 형성하는데 선구가 되었다.
1, 새로운 학통(學統)을 세웠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활발히 진출하면서 정치적으로 안정기를 이루었고, 내부적으로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과 같은 치열한 학문논변이 벌어졌다. 조선 성리학은 이 논변과정을 통해이 ․ 기理氣개념을 파악해서사단 ․ 칠정구조가 정밀하게 분석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이해수준을 심화시켜 학문적 성숙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에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년-1572년)과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년-1570년)은 영남 지역에서 활발한 학문 발전을 이루어 영남 유학에 우뚝 솟은 양대 학파를 형성하였다. 같은 시기에 낙동강을 경계로 해서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좌도에퇴계학파退溪學派를, 그리고 진주와 합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남명학파南冥學派를 형성하여 그 시대를 빛내는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었다.
남명에게 수학하였던 사람이 퇴계를 찾았고 퇴계에서 다시 남명을 찾기도 하면서, 일찍이 보기 드문 학문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그 시대는 학문의 절정기에 이르렀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그의 저서「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상도는 인을 위주로 하고, 하도는 의로움을 숭상하고 목숨을 가볍게 여긴다. 퇴계 학문이 바다처럼 넓다면, 남명의 기질은 태산처럼 솟았다. 이제야 우리 문명이 여기에서 절정에 이르렀다於是乎 文明之極矣!라고 비교하였다. 이 절정기에 태어나서 두 양대 학풍을 이어받아 다시 수많은 인재에게 학문을 전수한 학자가 있었다. 다름아닌 바로 한강 정구 선생(寒岡 鄭逑, 1543-1620)이다. 고향 성주는 낙동강 중류 지역에 있으므로, 경상좌도 안동권에서 활동하였던 퇴계학파와 경상우도 진주 ․ 합천에서 활동하였던 남명학파라는 양대 학통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 한강은 두 대학자에게 배웠던 학문을 그대로 이어받는데 그치지 않고, 두 학맥을 나름대로 통합 계승해서 새로운 학통(學統)을 세웠다. 또한예학禮學이란 학문적 기초를 세웠고 체계적으로 구성하는데 전념하여 독립된 학문영역으로 형성시켰다.
일찍이 낙동강 중류 지역에서 야은 길재(冶隱 吉再)가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참여를 거부하고 선산에서 은거하였고, 길재의 학풍을 계승한 김숙자를 비롯해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경상도 선산에 본향을 두고 성리학을 보급해서 훈구파에 대응하는 사림파의 형성을 주도하였다. 점필재의 문하에서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 선생을 비롯한 숱한 사림파의 거두들이 달성과 성주 등에서 쏟아져 나왔다. 한강의 학문 연원은 당대 영남 성리학을 주도하였던 퇴계와 남명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한편으로는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리는 한훤당에게 연결된다. 선생이 실천적 성격이 강한 수양론과 연결되는예학禮學에 관심을 집약하고 있는 사실도 바로 이 학맥과 깊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기호 서인계 예학을 대표하는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을 만큼, 영남 남인계 예학은 한강에 의해 체계가 이루어졌다.
정구 선생은 본관은 청주로, 자(字)는 도가(道可)이며 호를 한강으로 스스로 지어 불렀다. 선생은 중종 38년(1543)에 성주군 대가면 사월리(지금 칠봉리 유촌)에서 태어나서, 광해군 12년(1620) 향년 78세로 사양정사 지경재(泗陽精舍 持敬齋, 지금 대구광역시 칠곡군 사수동)에서 생애를 마감하였다. 이 시기는 네 차례 사화(士禍)가 끝나고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활발히 진출하면서 정치적으로 안정기를 이루고, 영남 사림 사이에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라서는 분열현상을 드러나는 시기에 해당한다. 선생의 할아버지 정응상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는데, 조선 전기에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세웠던 한훤당 김굉필의 딸과 혼인해서 사위였던 관계로 해서, 한강은 한훤당에게 외증손이 된다. 이 영향을 받아 그는 소년시절부터 기상이 높고 포부가 컸다.
스스로 반성함(自省)
大丈夫心事 대장부 마음은
白日與靑天 맑은 해와 푸른 하늘
磊落人皆見 툭 트인 기상 누구나 바라보니
光芒正澟然 번쩍이는 빛 참으로 늠름하도다.
부친 판서공 정은중 공(公)이 달성군 현풍 솔례 마을 외가에서 살다가, 성주 이씨를 부인으로 맞이해서 서울로부터 성주로 옮겨 살게 되었다. 9세 때 일찍이 부친을 여의었고, 18세에 성주 향교 교수로 부임한 덕계 오건 선생(德溪 吳健)에게서『주역』을 배웠다. 2l세(1563) 되던 해에 진사(進士) 초시에 합격하고 광주(光州) 이씨와 혼인하였다. 이듬해에 과거시험에 응시하려다가 포기하고 평생도록 학문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해에 퇴계 이황 선생이 있는 도산서당으로 퇴계를 찾아가서 학문하는 방법과 수양하는 도리를 배웠다. 퇴계는 한강을 만나본 뒤에, 문인 이정(李楨)에게 보낸 답장 편지에서자질이 영민해서 학문에 뜻을 두고 선(善)을 좋아하는 선비이다. 한훤당 선생의 외증손으로 영향을 어찌 받지 않았으리오라고 하였다. 23세에 덕계의 소개를 받아 남명 조식 선생을 찾아 경남 산청 산천재에서 학문을 배웠다.
한강은학문과 인격을 수양하는 자세가 퇴계를 닮았고, 더 높은 기상은 남명 모습 그대로이다라고 알려졌다. 남명에게서 선비가 가져야 할 더 높은 기상을 배웠고, 또한 벼슬에 나아가고 나아가지 않는출처出處의 의리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이처럼 퇴계와 남명 두 선생을 태산북두처럼 우러러 보았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서 퇴계(1570) ․ 남명(1572) ․ 덕계(1574)등 그의 스승이 차례로 생애를 마감함으로써, 정구의 수업은 사실상 32세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지역학교를 세우고 학문을 부흥시키는 임무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조 6년(1573) 31세에 되던 해에 같은 고향 출신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이 천거해서 사빈시 참봉에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한강은 동강과 함께 평생에 걸쳐 도의를 닦으면서 사귀었다. 근처 창평산에 주자의한천寒泉의 뜻을 따서 한강정사(寒岡精舍)를 짓고 강학하기 시작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해서 산림처사로 지냈다.한천寒泉이란『주역』「정괘井卦」에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우물물이 맑고 깨끗해서 사람이 차가운 샘물을 마신다九五, 井冽寒泉食.우물물은 아무리 길어 올려도 마르지 않으며, 긷지 않는다고 해서 넘치는 일도 없다. 이 우물의 쓰임에 근거해서 인재를 기르는데 힘써 노력한다.
38세(1580)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창녕현감으로 임명받았다. 한강은 지방수령을 맡아 먼저 그 지역에 학교를 세우고 학문을 부흥시키는 임무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곳에서 고을 선비들과 함께「여씨향약呂氏鄕約」과「백록학규白鹿學規」를 본받아서 강학계(講學契)를 만들고 여러 곳에 강학장소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는 곳마다 그 지역에 역사와 지리 및 문물을 자세히 기록해서 읍지(邑誌)를 편찬하였다. 최초의 향토지「창산지昌山誌」를 발간 사업에 시작이 되어, 그 뒤로「함주지咸州誌」「통천지通川誌」을 비롯해 7종의 지방 향토지를 비롯해 1개의 도지「관동지關東誌」를 계속해서 발간하였다. 뒤에 부임하는 후임자들에게 참고자료로 쓰게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함주지」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심지어 고을 안에서 전후에 있었던 일은 기록하여 그 자취를 고증할 수 있으며, 비록 전할 것이 못되고, 역시 전하지 않을 수도 없는 거리에서 떠도는 속담이다 라고 할지라도 세상 교화에 관련된 것이라면 감히 사라져 버리게 할 수 없다.
「한강집」,권10,「함주지서」
선조 16년(1583) 41세 때에 문인들과 더불어 지금 회연서원 자리에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짓고, 매월 초하루 이른 아침에 학문을 강학하는 모임,월삭강회계月朔講會契을 조직해서계학입의契學立議를 제정하였다. 이계契는 일종의 독서계이며, 부조계(扶助契)이다. 당시에 지역 곳곳마다 시행되고 있는「여씨향약」을 본받아 독서계를 마련하였다. 회연초당은 지금 성주군 수륜면 신정동 양정마을 해인사 가는 길 258번 국도에 지어졌는데, 1627년에 그 자리에 선생을 향사하는 회연서원(檜淵書院)이 세워졌다. 50세(1592년) 때에 강원도 통천현감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창의를 촉구하고 왜병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65세에 안동도호부 부사로 임명받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해에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명받았다. 그러나임해군을 죽여서는 안된다는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며 상소를 올렸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곧 사직하고 말았다.
그리고 당시에 남명학파를 대표해서 이끌었던 내암 정인홍 선생(來庵 鄭仁弘, 1536-1623)과 절교하였다. 내암이 정통 남명학을 계승하고 고수하는 데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상대적으로 반대세력에게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남명학파와 퇴계학파가 서로 극한 대립을 일으키고, 남인과 북인으로 완전히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에 대북파가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영창대군을 죽이려고 하자불가하다라는 반대상소를 계속해서 올려서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광해군 시대에 정인홍, 이이첨 등 북인계열 대북파(北人 大北派)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28년에 걸친 관직생활을 마감하였다.
같은 남명학파 동문이었던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과 정치적 노선을 갈라서자, 그로부터스승을 배반하였다라고 하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선생은그때 사정은 후생이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입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1623년에 인조반정이 단행되어 광해군은 몰려나고, 퇴계학파에 대해 대결의 기치를 표방하던 정인홍의 흔적을 철저히 청산되었다. 정구의 학문이 정인홍을 대신하여 남명학파를 대표하게 되면서, 점차로 하나의 영남 남인계으로 통일되었다.학문의 정통성 문제를 둘러싸고 남인 사이에서 퇴계에 대한 존경이 거의 신격화까지 이르렀다.
72세 때 그동안 거처하였던 노곡정사(廬谷精舍, 지금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에 불이 나서, 젊은 시절부터 집필해온 저서와 책마저 대부분 불타버리고 아들까지도 죽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이듬해에 병환중에도 불구하고 힘든 가운데서도 남은 서책을 정리하ㄷ고 저술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광해군 12년(1620) 향년 78세로 사양정사 지경재(泗陽精舍 持敬齋, 지금 대구광역시 칠곡군 사수동)에서 생애를 마감하였다. 묘소는 성주읍 금산동 인현산에 모셨다. 선생은 인조 원년(1623) 이조판서로 추증받았고, 2년 뒤에문목文穆으로 시호를 받았다. 1627년 선생을 향사하는 회연서원(檜淵書院)이 창건되었고, 숙종 16년(1690년)에 조정에서 편액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으로 격을 올리고, 노비와 땅을 주어 서원으로서 품격을 높이었다. 효종 8년(1657)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광해군 14년(1622)에 대구 선비들이 연경동 연경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모셨고,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 등 곳곳마다 그 학문을 숭상해서 배향하는 서원 수가 열 곳을 넘는다.
3,한려학파寒旅學派를 형성하였다.
한강은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온 뒤에 임진왜란으로 많은 선비들이 피해를 당하고 지방 교육기관이 붕괴되어, 후학들이 배우지 못하는 것을 심히 안타깝게 여겼다. 향리에서 후학을 모아 양성할 필요가 절실하였다. 선생은 회연초당 앞마당에 백 그루 매화와 대나무를 심고백매원百梅園이라 부르면서, 찾아오는 후학들에게「심경心經」과「근사록」을 가르쳤다. 겨울에도 지조를 잃지 않는 매화처럼, 고고한 선비의 향기를 널리 퍼뜨리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제 그 매화는 온데간데없고 그가 썼다는 시만 남아서 전한다.
작은 산 앞에 조그만 집을 지었다. 小小山前小所家
뜰에 매화 국화 해마다 불어 가득하고 滿園梅菊逐年加
시냇물과 구름이 그림처럼 둘러졌네 更敎雲水粧如畵
세상사는 내 삶이 사치스럽기 그지없네 擧世生涯我最奢
비록 세속의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더라도, 차라리 자연을 마음껏 자신 생활을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럽다고 하였다. 선생이 자연조차 사치스럽기 그지없다라고 하였던 백매원 그 자리에 선생의 후학들이 사당을 짓고 회연서원을 창건하여 그를 제향하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지금 서원은 고종 8년(1871년)에 대원이 서원을 대대적으로 철폐할 때에 정리되었고, 1984년에 다시 후손들이 노력해서 복구되었다. 한강의 위패를 주향으로 모시고 선생의 문인 석담 이윤우(石潭 李潤雨, 1569-1634)를 배향해서, 해마다 봄 ․ 가을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7세기 초기에 현풍 ․ 성주 ․ 고령 ․ 대구 등 경상도 중부지역에 한강(寒岡)과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문인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의 학파,한려학파寒旅學派를 형성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들은 퇴계 이후로 뚜렷한 학문적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던 안동권을 대신해서, 영남 중부지역에서 학문 분위기를 주도하였다. 대구 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자리하는도동서원道東書院은 조선오현(朝鮮五賢) 첫머리로 존경받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향사지내는 서원이다.정구가 서원 건립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였고, 또한 배향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강 문인들과 관계가 깊다. 중건 초기에 서원을 방문한 내방객 명단을 적은「심원록尋院錄」을 살펴보면, 첫 등재자 한강을 비롯하여 장현광 ․ 이윤우 ․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 ․ 나세겸 ․ 곽재겸 ․ 곽주 ․ 박정완 ․ 박정번 형제(고령) ․ 문경호 ․ 서사원 ․ 손처눌(대구) 등 한강 문인을 비롯한 경상도 각 지역에서 대표적인 인사들이 찾아 방문하였다.
장현광 선생은 명종 9년(1554)에 칠곡군 인동면(지금 구미시 인의동)에서 태어나서, 이미 18세에「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짓고, 학문의 방향을 설정하였다. 이 책에서 우주 속에 있는 삼라만상 변화 원리를 밝히고 인간 사회법칙과 역대인물 및 학습지침 등을 담고 있다. 그의 일생은 국가적으로 개인적으로도 불우와 수난을 겪는 일생이었지만, 학문적으로 뛰어난 천재성을 발휘하였다. 중 ․ 장년 시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 국가가 큰 위기를 당하였고, 인조반정이나 이괄의 난을 겪어야만 하였다. 여헌은 26세에 한강 정구의 질녀에게 장가들었으나 사별하였다. 3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으로 피난하였으나 가야산 소백산 등을 옮겨 다니면서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가족을 이끌고 1년에도 2-3차례씩 옮겨 다니는 나그네 신세였다. 피난생활을 하면서도『주역』공부를 그치지 않고 역학에 몰두하면서, 뒷날에「역학도설易學圖說」과 같은 방대한 저술을 이룰 수가 있었다. 여헌은 학문 탐구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일생을 바쳤고. 영남의 대표적인산림처사山林處士로 알려졌다. 인조 때 사헌부 대사헌과 의정부 좌참찬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곧 사직서를 올리고 사양하였다.문강文康으로 시호를 받았고,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여헌은 역학도설易學圖說」․「만학요회晩學要會」․「경위설經緯說」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 모든 저서들이 역학을 근거로 해서 편찬한 우주철학서이다. 이 가운데「역학도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견으로 학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여헌과 미수 허목은 그 시대에 활발히 연구되었던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 치중하기 보다는, 독특하게우주론宇宙論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여헌은 퇴계학파주리론主理論입장에서도일원론道一元論이란 독자적인 성리설을 주장하였다.도일원론이란 형이상자로서도道로부터 우주와 천지가 생성되어 나온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이 이론 체계를 더욱 쉽게 풀이하기 위해서경위설經緯說을 도입하였다. 이는 날줄(經系)이며 기는 씨줄(緯系)로, 그 기능만 다를 뿐이지 결국 날줄과 씨줄은 같은 실로써 이물(二物)이 아니고 일물(一物)이다.이 ․ 기가경위에 비유해서 설명함으로써 양단을 하나의 존재로 구성되는불가분성不可分性으로 인식하고 있다. 미수 허목도 우주생성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이 ․ 기의 근본이 하나임을 강조하였다.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하였던 경남 진주 출신 성리학자 하겸진(晦峯 河謙鎭, 1870-1946) 은 그의 저서「동유학안東儒學案중책中冊 제12편에서 한강과 여헌을 중심으로 하는「한려학안寒旅學案」으로 독립시키고 있다. 하겸진은 성주에서 활동한 유학자 한주 이진상(1818-1886)에게 학문을 계승한 면우 곽종석(1846-1919)의 문인이다. 노년기에 신라 향가로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시와 문장을 모아「동시화東詩話」를 편찬하기도 하였다.「동유학안」은 1938년에 저술하여 1970년에 간행되었다. 우리나라 유학 각 학파의 연원과 학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학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4, 예학禮學을 체계적으로 구성해서 독립된 학문영역으로 확립하였다.
한강은 퇴계에게 주로「심경心經」과예학禮學에 관해 질문하면서, 그의 학문 방향을 확립하였다.「심경」은 중국 남송시대에 진덕수가 마음을 수양하는 공부와 관련된 내용들을 경전과 학자들의 가르침에서 가려 뽑아 편찬한 책이다. 심학(心學)을 가장 체계적인 학문으로 분석하였던 학자가 퇴계이다. 퇴계는 마음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양상을 수양론과 관련시켜,경敬철학을 통해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분석하였다.경건함이란 오로지 마음을 모아 하나 되도록 해서 타고난 순선(純善)한 본성을 되찾아 간다는 수양 방법이다. 한강은 이「심경」을 심학의 대본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주석을 붙여「심경발휘心經發揮」를 저술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마음을 다스리는 요령은 오직경敬한 글자에 있음을 역설하면서, 수양론에 있어서경건함을 성학(聖學)의 강령이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천리가 내재하고 있으며, 순선한 본성을 지키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몸이 편안함을 좇아 추구해서 천리 본연의 본성을 저버리고 사욕에 빠지어 금수로 전락할 수도 있다. 악의 근원은 우리의 욕망, 특히 사사로운 욕심에서 비롯된다. 사람 개개인이 자기 욕망과 이기심을 없애고 천리에 근원하는 본성을 되찾는 것이 곧예禮이며,예는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이 된다.예는 천리에 근거를 두었고, 자신의 수양정도에 따라 천리와 합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교는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통해 스스로 성현의 경지에 오르기를 기약(聖賢自期論)하는 학문이다. 이 천리를 실현시킨 사람을 성인(聖人)으로 추앙하고 있다. 수양론을 목적으로 하는 심성론은 실천윤리 내지 사회윤리로서예학禮學에 관한 연구가 필연적으로 요청되었다.
특히, 조선은 임진왜란에 이어서 병자호란을 거듭해서 겪으면서, 그 사회를 지켜주던 신분질서마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무너진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피폐해진 심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유교이념이 가장 구체적으로 실현되는예에 연구가 절실히 요구되었다.예란 그 행위가 적절함을 벗어나지 않도록 조절해서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객관적인 의례를 준수해서 사회 안정과 조화를 이루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개개인의 삶을 완성시킨다는 의미이다.예학은 성리학 이념을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사회통합을 강화시키려는 시대적 요청에 맞추어 성장하였다.
17세기에예학의 발전은 사실상 이러한 현실적 요청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조선 사회에서 예치(禮治)를 이루어 의식과 문화생활을 유교적 체계로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 사회와 국가의 안정을 실현하자는 것이 예학자들에게 공통된 사상이다. 그 시대에 예서가 줄이어 출판되었고, 왕실의전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예송논변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예학이 성리학 체계를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큰 역할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과 정치가 긴밀히 결합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학자들 사이에 원활한 의사소통과 학문 ․ 사상의 활력을 저해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한강은예학을 체계적으로 구성해서 독립된 학문영역으로 확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61세 때 충청도 목천에 있으면서「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사마광, 장횡거, 정명도 ․ 정이천 형제, 주자 등 다섯 송나라 성리학자가 주장한 예설을 정리하였다. 그는 이 책 서문에서예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사람들은 개인 가정 나아가 국가생활에 이르기까지 진실하고 경건한 생활태 도가 필요로 한다. 이에 참고할만한 책이 없어 내 감히 붓을 들어 생활의 본보기로 하고자 이 책을 엮는다.
이 책은 화재를 당해 한차례 불타버리고, 76세 때(1618년)에 다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인조 7년(1629년)에 그의 문인 이윤우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선조가 승하하여 국상을 맞게 되자, 예조판서가 그에게국상복제國喪服制에 대해서 질의를 물어와 답장을 쓰기도 하였다. 그의 예학은 허목 등 문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5,근기 남인학파近畿南人學派란 학파(學派)를 형성하는데 선구가 되었다.
한강의 학문은 숙종 때 남인을 이끌었던 미수 허목에게 전해져서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실학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조 때 영의정을 지냈던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이 쓴 성호 이익 선생의 묘비에서, 성호의 학문 계통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퇴계는 우리 조선의 선생이다. 그 학문을 한강에게 전하였고, 한강은 그 학 문을 미수에게 전하였다. 선생은 미수를 본받아서 배우고, 퇴계의 근본에 다 가섰다.
退溪我東夫子也. 以其道而伝寒岡, 寒岡以其道 而伝眉叟. 先生私淑於眉叟者, 學 眉叟而以接退溪之緖.
미수 허목 선생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연원이 된다. 미수는 처음에는 한강의 문인 문위(文緯)에게서 수학하다가 문위에게 추천을 받아 한강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허목은 고향이 경기도 연천이지만, 그의 나이 16세 되던 해(광해군 2년, 1610)에 부친이 고령현감으로 제수받아 벼슬길을 따라다니게 되었고, 23세에 거창현감으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거창으로 가서 한강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령으로 피난을 다니면서, 경상우도 지역에 남명학파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뒷날에 남명 조식의 신도비문까지 짓게 되었다. 그는 평생을산림처사로 지내다가 벼슬길에 올라 숙종 대에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고, 기호남인(畿湖南人)을 대표하는 영수가 되었다. 현종과 숙종 대에 왕실 상복(喪服)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예송논변禮訟論辯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예송논변은 결국 서인과 남인 사이에 붕당정치에 핵심문제로 대두되면서, 정치적으로 정국변동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허목은 이익의 부친과 학문적으로 서로 교류하였다. 성호는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으로부터 실학정신을 이어받기도 하였지만, 미수에게서도 학문을 사숙해서 영향을 받았다. 성호는 다시 이를 순암 안정복(順庵 安鼎福)에게 전하고, 이어서 성재 허전(性齋 許傳)에게 전해졌다.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의 학파(學派)를 형성하는 학맥이다. 한강이 퇴계의 학맥을 이어받아 집대성해서, 다시 성호에게 전해져서 그 학통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 학파를근기남인학파近畿南人學派라고 불렀다. 따라서 한강의 학문은경세치용經世致用을 중요시하는 근기학파의 선구가 되어 학통(學統)을 수립하였다.
근기남인학파는 정통적 경학으로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던 의리론적 경전해석에서 벗어나서, 공자와 맹자의 유가(儒家) 근본정신을 추구하는 독창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또한 경세치용의 실학자는 조선의 현실 문제에 깊이 관계되는 학문을 연구하였고, 철학적인리기설理氣說을 벗어나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이익은 많은 문인들을 배출하여, 실학은 점차로 학계에 주도적인 학문으로 자리잡았다.
이 글은 제가 대구시 문화유산해설사로 달성군 도동서원에서 활동하면서 내방객과 대학생에게 한강 정구 선생에 관한 자료를 여러 번 문의를 받았습니다. 여러 책을 참조해서 이 자료를 감히 만들어 보았습니다만, 여러 가지로 매우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부디 제대로 배우지 못한 후학에게 넓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저희 선조님의 족적과 사상을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탁월하셨던 조상님의 철학과 가르침을 오늘을 사는 자손으로서 잘 계승하고 실행하지 못하는 듯하여 부끄럽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중선조님의 글 잘 보았습니다. 덕분에 궁금하였든 여려가지 알게되었습니다.자주 접하는 성주이씨. 광주이씨. 유명하신
김굉필님은 외증조부님이셨고요.그리고 퇴계선생님과 남명선생님과의 관계며 사헌부 대사헌 으로 역임하신일이며. 회연초당은 34년만에 회연서원으로 건립된 모두가 대단한 내용을 보고 또보고 할겁니다 감사합니다.
가르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박지훈선생님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도동서원을 여러번 다니면서 도동서원에는 한강선조에 대한 내용이 좀 적다는 생각을 하곤 하였습니다.
도동서원 뒷산에 환훤당선생님 묘역 밑에 우리가 묘사를 모시는 서흥김씨 할머니(환훤당선생 따님이 우리집에 시집 오심)가 계시는데 우리 할머니이시기때문에 묘역관리와 묘사를 당연히 우리가 모시는데 ...
그리고 한강선조께서 도동서원을 지을때 얘기 등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주향으로 모시는 환훤당선생님 이야기를 중심으로 도동서원 얘기를 하기만 하니 한강선조의 후손인 저의 입장에서는 한강선조 얘기도 조금은 다루어 줬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이렇듯 관심을
가져주시니 고맙습니다.
기회가 되어 뵙는다면 좋을 텐데요 ...
언제 한강선조의 무흘구곡이나 회연서원 그리고 한강선조 종택이 있는 성주 갖말등등을 방문 하신다면 연락 하십시요
제가 시간을 맞출수 있다면 길안내라도 해 드리겠습니다. 저도 길안내하면서 선생님들께 귀동양으로라도 공부도 좀하구요
저는 한강선조 후손들 중에서 청장년회 총무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찾아뵙고 인사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