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들, 영양 자작나무숲을 찾아, 자작나무 추억
내게 있어 자작나무는 특별한 추억의 나무다.
그 나무로 인한 추억이 한둘 아니기 때문이다.
맨 처음 추억은 책 한 권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소위 ‘나무의사’로 불리는 우종영 선생이 지은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라는 에세이집이 바로 그 책이었다.
책은 우 선생이 키운 30여 개의 나무들을 소개하고, 그 나무들로부터 배운 삶의 지혜를 담고 있었다.
1954년생인 우 선생은 서른여섯 나이가 되던 1990년 유월에 백두산을 찾아서 자작나무를 처음 봤다고 했지만, 1948년생인 나는 그보다 스무 해를 더 넘긴 쉰여섯의 나이가 되던 2004년 가을에 당시 서울서부지방법원에 근무하는 심성용이라는 후배 수사관으로부터 그 책 한 권을 선물 받아 읽으면서 자작나무의 존재 그 자체를 처음 알았다.
그 책에 소개되는 나무들 중에 자작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자작나무/밤새워 연애편지를 썼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그 글 전문이다.
물에 젖은 채로도 불에 넣으면 ‘자작자작’ 하며 타들어 간다는 자작나무, 하얀 수피가 너무나 아름다워 옛날 우리 조상들이 무척 귀하게 여겼지만, 워낙 추운 곳에서만 자라는 탓에 남한에서는 그동안 좀처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영화 ‘닥터 지바고’의 눈부신 설경을 기억하는 사람은 자작나무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눈이 시릴 만큼 하얗게 펼쳐진 설원 위에 하얀 수피를 입고 하늘로 곧게 뻗은 자작나무 숲을.
내가 자작나무를 처음 본 것은 1990년 유월 백두산에서였다. 아직도 겨울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백두산의 하얀 자작나무는 어느 시에서 표현한 것처럼 ‘나무의 여왕’ 그 자체였다. 잎 하나 달지 않은 나목(裸木)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다운 나무도 흔치 않으리라.
예로부터 내려오는 자작나무에 관한 전설 하나. 자작나무의 하얀 수피를 조심스럽게 벗겨 내 그 위에 때 묻지 않은 연정의 편지를 써서 보내면 사랑이 이루어진단다. 이루지 못할 사랑일수록 자작나무로 만든 편지가 힘을 발휘한다나.
자작나무의 수피를 보면 그 전설이 생겨난 것이 이해가 간다. 겉보기와는 달리 자작나무의 수피는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를 어떻게 견뎌 낼까 싶을 정도로 무척 연하고 부드럽다. 추위를 잘 견디기 위해 수피 밑에 지장을 잔뜩 비축해 놓다 보니 그리 된 것인데 그 덕분인지, 아니면 정말 전설이 효험이 있어서인지 자작나무는 오래 전부터 사랑의 매개 역할을 해왔다.
백두산에서 자작나무를 보았을 때 내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사랑하는 이에게 밤새워 편지를 쓰는 한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사랑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자작나무의 수피 위에 말 못할 속마음을 적어 내려갔을까.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애틋하게 솟아나는 그 연정만큼은 막지 못했을 것이다.
한겨울 밤 흔들리는 촛불 아래서 펜촉을 호호 불어 가며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눌러 쓴 편지,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완성된 편지는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볼까 조심스럽게 서랍 안에 감춰졌을 것이다. 수줍음에 보낼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결국 서랍 안에서 세월과 함께 묵혀진 편지도 적지 않았으리라.
백두산에서 돌아와 자작나무에 대한 그리움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는데, 최근 들어 강원도 등지에 자작나무를 많이 심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북유럽이나 만주, 아니면 백두산에서나 볼 수 있던 자작나무를 이제 가까운 곳에서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반갑던지. 아니, 자작나무 자체보다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그 전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가슴 설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부푼 마음을 안고 딸아이에게 자작나무의 전설을 얘기했더니 아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요새 아이들은 답답하게 연애편지 같은 거 쓰지 않는단다. 대신에 즉석에서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로 사랑을 확인한다나.
“나, 너 좋아해.”라는 말을 쓰고, 보내고, 상대가 확인하는 것까지 십 분이 채 안 걸리는 사랑 전달법, 편지를 받고 괜찮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OK. 아니다 싶으면 그 직시 NO라고 자기표현을 한다고 한다.
내가 촌스러워서 그런가. 사랑을 쉽게 주고받는 신세대들이 한편으로 부럽지만, 그만큼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가 퇴색되는 게 아닌가 싶어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보다는 자작나무 껍질 위에 편지를 쓰는 그 마음이 더 애틋한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쓰고, 지우고, 고민하고, 포기하고 접었다가 다시 꺼내 들어 밤을 새며 연애편지를 쓰던 그때가, 그 마음이 말이다.//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해서 그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하얀 그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겨 연애편지를 썼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때부터 자작나무는 내 가슴에 소중한 감동으로 자리 잡게 됐고, 자작나무로 비롯된 추억이 쌓이게 됐다.
내 국민학교 중학교 동기동창으로 나보다 십여 년 먼저 고향땅 문경으로 귀향해서 ‘만촌’(晩村)이라는 이름으로 농원을 가꾸어 가고 있는 안휘덕 내 친구네 농원 건너편 동산의 자작나무숲에서 떠오르는 아침 태양도 그 추억 중의 하나고, 15년 전으로 거슬러 아내와 같이 러시아 바이칼 호수로 여행을 했을 때 그 호수 주변으로 빼곡한 자작나무숲의 그 하얀 풍경에 빠졌던 것도 그 추억 중의 하나고, 몇 해 전에 우리나라 자작나무숲의 원조라고 소문한 원대리 자작나무숲을 찾은 것도 그 추억 중의 하나다.
그 추억들에, 또 하나 추억을 보탰다.
‘사랑하는 사람들’ 그 패거리와 함께 영양 자작나무 숲을 찾은 이번의 여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파리 파랄 때, 또 다시 찾아야겠다는 속다짐을 하면서, 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