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과 한국군은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평택∼삼척선까지 철수했으나, 중공군과 북한군이 공세 후 휴식 및 재편성을 실시하기 전에 공세를 취해 이를 격멸한다는 미8군사령관(리지웨이 장군)의 방침 아래 위력수색작전(Op. Wolfhound·1951. 1. 15∼22)으로 한강 이남의 공산 측 전력이 약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반격작전(서부 Op. Thunderbolt·1951. 1. 25∼2. 10, 동부 Op. Roundup·1951. 2. 5∼2. 10)을 실시해 양평∼횡성∼평창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에 공산군은 신정공세를 분석하고 휴식과 재편성을 실시할 목적으로 소집된 작전평가회의(군자리 1951. 1. 25∼29)를 유엔군의 진격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공세(2월 공세)를 위한 작전회의로 전환해 공세(1951. 2. 11∼18)를 실시했으나, 오히려 지평리 전투(1951. 2. 13∼16)에서 소모전을 강요당하는 결과를 감수해야만 했다.
작전의 주도권을 확보했다고 판단한 미8군사령관은 철수하는 공산군을 격멸하고 가능하면 전선을 추진시킨다는 의도 아래 중동부 전선의 미9군단을 원주∼횡성∼홍천 도로, 미10군단을 제천∼영월∼평창 도로를 따라 공격하도록 하고, 서측방 미1군단과 미9군단 예하 미24사단은 한강 남쪽에서 적극적인 방어에 임하고, 한국군 3군단은 7사단을 영월∼평창∼창동리 방향으로 진출시켜 미10군단의 우측방을 엄호하고, 주력을 속사리∼하진부리∼유천리 도로를 확보하는 작전(Op. Killer)을 지시했다.
이와 같은 유엔군사령부의 구상과 구도 아래 한국군 3군단이 실시한 전투가 하진부리∼속사리 지역 전투(1951. 3. 1∼4)다.명령을 받은 한국군 3군단(유재흥 소장)은 7사단을 평창∼창동리 방향으로 공격하도록 하고, 수도사단 1기갑연대(김동수 대령)를 속사리, 26연대를 횡계리, 1연대를 강릉에 배치하고, 9사단을 예비로 보유해 작전을 실시했다.
그러나 5일간이나 계속된 폭설로 3월 2일 전에는 공격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수도사단(송요찬 준장)의 보고와 7사단 정면 적(북한군 27사단)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출이 어렵다는 보고를 동시에 접수한 3군단장은 수도사단장에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3월 1일까지 속사리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수도사단장은 1기갑 연대장에게 3월 1일 이내로 속사리를 점령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제1기갑연대장은 1대대를 오른쪽, 2대대를 왼쪽, 그리고 3대대를 예비로 1951년 3월 1일 06:00시 폭설과 영하의 악조건을 무릅쓰고 공격을 개시했다. 1대대는 필사적인 공격으로 월정동과 하진부리 중간, 2대대는 광천 근방까지 진출했으며, 3대대는 용산동의 연대 진지를 후속한 26연대에 인계하고 공격제대에 합류함으로써 3월 1일 24:00시쯤 1기갑연대는 1대대 구산동, 2대대 광천∼무명고지 중간 지점, 3대대의 주력은 용산동∼무명고지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1기갑연대의 진지를 인수한 26연대는 진지를 강화하고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1기갑연대의 화력지원 임무를 부여받은 10포병대대 3중대는 대관령을 넘어 차항리로 이동 중이었으나 적설로 인한 도로 사정의 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기갑연대 1·2대대는 3월 2일 09:00시, 3대대는 11:00시에 공격개시선을 통과해 이날 21:00시쯤에는 속사리 고개까지 진출해 그 일대를 점령하고 사주방어에 들어갔다.
10포병 3중대도 차항리로 이동해 화력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북한군 2군단 예하 2·7사단 및 24연대 병력 6000여 명이 3월 2일 야간침투를 실시해 1기갑연대를 포위하고 유천리에 배치된 26연대를 압박하고 있었다. 3월 3일 미명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1기갑연대는 오히려 사방으로부터 적의 공격을 받아 2대대 지휘소까지 습격을 당하기도 했으며, 후방의 26연대 3대대가 다른 지역으로 진지를 이동함에 따라 연대의 측후방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사단장은 1기갑연대에 유천리로 철수하도록 지시하고, 26연대는 유천리를 공격해 1기갑연대와 연결하도록 조치했으며, 사단 수색중대로 하여금 1기갑연대의 철수를 엄호하도록 명령했다. 악천고투를 거듭한 1기갑연대는 3월 4일 횡계리 부근으로 철수했으며, 1기갑연대와 연결작전을 실시하지 못한 26연대도 횡계리 부근으로 철수하게 됐다.
이로써 4일간에 걸친 하진부리∼속사리 전투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이 전투에서 306명의 적 사살과 많은 무기·장비를 노획했으나, 1기갑연대는 61명(5/56), 26연대는 126명(1/125)의 전사자와 120여 명의 부상자 및 700여 명의 실종자, 많은 무기·장비를 손실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우선 전방의 적 전력을 과소평가한 점, 통신이 두절돼 인접 부대와의 협조가 어려웠고, 악천후로 인한 기동과 보급 및 화력지원의 제약, 그리고 예비대 부족과 종심진지의 부실이 적의 사면포위를 가능케 했다는 점을 작전실패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국지적인 작전 결과에도 불구하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한강 남안에서 횡성을 거쳐 강릉에 이르는 연결된 방어선을 확보했고, 차후 작전수행에 있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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