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달고나’
엄마는 동네 공터 한쪽 구석에 큰 우산같은 파라솔을 펴고, 그 기둥을 아래에 놓인 사과궤짝같은 나무 상자에 묶었다. 그리고 무거운 돌을 두어개 바닥에 둘러 놓아 파라솔을 넘어지지 않게 고정시켰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달고나 주걱을 작은 연탄화로에서 녹여 사과궤짝같은 나무 상자 위에 놓인 도마같은 평평한 곳에 탁! 쏟았다. 그리고 철판 틀을 그 위에 놓고 호떡 뒤집개처럼 생긴 것으로 살짝 눌렀다. 그러면 설탕과 소다가 섞여 부풀어진 동그란 달고나 판에 별이나 동물 모양 과자가 만들어졌다. 동네 아이들이 그 달고나에 새겨진 모양대로 부서지지 않고 떼어내면 하나를 더 해주었다.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히트친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달고나는 나에게 아주 오래 전 어릴 때 엄마가 좌판 장사를 하던 시절로 돌아가 이제야 마음 아프게하는 기억으로 다가왔다. 정작 그 시절에는 나는 너무 어렸고 우리 집 생존을 해결하던 엄마가 그저 고마웠다. 그 동네 공터에 놀던 코흘리개들의 때묻은 돈을 벌어오는 가장이 된 엄마는 아버지의 대책없는 서울상경의 후폭풍으로 온 지독한 가난을 몸으로 버텨야 했다. 외갓집 수출공장의 공장장으로 꿈에 부풀어 시골집을 그저 주다시피 당시 세들어살던 사람에게 서울행 고속버스비만 받고 넘겨주고 왔는데… 공장은 어려움에 부딪혀 실직자가 되고 돌아갈 집도 없어진 불행의 시절이었다.
가난은 무시무시하고 지긋지긋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여리고 호리한 몸에도 그렇게 가족생존의 일선에 나섰다. 꼬인 결과로 분노만 쌓인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못하고 어린 아이들은 넷이나 되어 밥때면 배가 고픈 채 엄마만 바라보았다. 아침이면 동네 공터 구석에 파라솔과 장비들을 옮겨 설치를 도와주고 해가 지는 저녁이면 가서 철수를 돕는게 고작이었다. 내 나이가 겨우 14살. 그 아래로 두살 세살 터울로 동생이 둘이나 있었고 가장 어린 막내는 두살인가? 세살인가? 그랬다. 아무도 뭘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의 서울 생존전쟁 참여는 시작되었다. 아침이면 도시락을 싸서 버스비를 아끼느라 1시간이 넘게 추운 길을 걸어 요꼬기계라고 불리는 스웨터를 짜는 기계를 두어대 가진 가정집 공장에 출근했다. 종일 실을 연결해 열심히 배우며 좌우로 기계를 흔들며 스웨터를 짰다.
그렇게 작은 돈을 받으며 지내다 도저히 돈벌이가 안되어 아는 분 소개로 남대문 시장 문구도매점에 점원으로 가게되었다. 손을 입김으로 불어 녹여야할 정도로 추운 겨울 어느날 처음 간 남대문 시장안에 있는 문구도매점은 종일 사람이 들락거리고 지방 소매점들로 보낼 물건을 포장하느라 바빴다. 계산서에 적힌 물건을 차곡차곡 찾아 보따리에 묶는 걸 돕다가 밤 늦어 끝나 저녁을 먹고 잠자리라고 먼저 있던 고참을 따라 간 곳은 목조창고 이층 마루바닥이었다. 그곳에서 나의 하루는 새벽부터 밤까지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서울 생존전쟁에서 나는 가난이나 처지를 비관할 정신도 없었다. 너무 바쁘고 너무 고단해서 밥먹고 좀 쉴 시간이 소원이었고 한달에 하루 쉬는 날이 꿈같기만 했다. 신세타령도 좀 형편이 여유가 있고 가족생계를 짊어지지 않은 팔자 좋은 사람이나 하는 거지 하루 앞 먹거리와 월세 벌기도 급급한 사람들에게는 사치였다.
월급은 받는데로 전부 가족에게 보내고 가끔 생기는 용돈이나 심지어는 가게에 와서 물건 사가는 사람들에게 더 올린 비싼 값을 받는 바가지나 거스름돈을 적게 주고 생기는 소위 ‘챙긴 삥땅’ 같은 걸로 버텨야 했다. 같이 생활하는 너댓명의 점원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그렇게 산다며 고참이 가르쳐주는대로 배워 따라했다. 다 그런줄 알았고 달리 생활할 방법도 없었다.
그후로 청년기를 보내고 온갖 일을 다 하며 그래도 미련이 남은 공부를 한다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신문배달을 하며 지내면서도 심각할 정도로 가난한 형편이나 그렇게 몰린 처지를 한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너무 얽힌 실타래가 완전히 꼬여버린것처럼 시험계획이 빗나가고 좌절해서 자살을 시도한 이후, 가난과 죽음이 내내 후유증처럼 그늘이 되어 따라 다녔다.
나이가 더 들어 죽을 때까지도 가난은 벗어나지 못할거라는 비관적인 짐작이 자리를 잡았고 그 무거운 감정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자로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꼭꼭 다지게 했다. 가장으로 살 자신이 없었다. 아내와 자녀들이 생기면 평생 무사히 먹여살린다는 막중한 책임이 도무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도무지 마음먹고 계획한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은 독신으로 결혼 안해야지 하는 그것조차 빗나가게했다. 어쩌다보니 결혼해 있었고 어느날 보니 아이들이 둘이 되고 셋이 되었는데 가난에 대한 지겨운 그늘은 계속 따라붙고 있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점점 내속의 질긴 아카시나무 뿌리처럼 자리를 잡고 자라고 있었다. 신앙인이라는 방패와 도피처를 가지고도 벗어나기 힘든 이유는 순전히 나약한 믿음의 수준때문이거나 얄팍한 행운을 기다리는 욕심? 뭐 그런 속물 정신을 못벗어나기 때문이었을거다.
‘가난은 주어지면 안고 가고, 죽음은 그저 통과할 문일뿐…’
그런데… 그렇게 수십년, 반백년에 가까운 묵은 가난과 죽음의 족쇄는 어이없게도 더 심한 불행의 터널로 들어서면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극복할 용기가 생기는 거짓말같은 체험을 하게되었다. 보통 약으로는 고치지 못하는 심한 질병에 사용하는 약 처방법이 비상이라는 독이라더니… 독으로 독을 제거하는 비결같은 게 진짜 효력이 있었나보다. 질기고 지겨운 가난이 사랑하는 가족이 죽게 될 지경앞에서는 시시해졌다. 더 큰 고민과 싸울 대상 앞에서는 피래미가 되었고 관심 순위가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두려움도 한편 차라리 빨리 죽으면 좋겠다는 극한 소원을 가질 정도가 되니 무기력해지는 것 같았다. 죽음의 입구가 이전과 같은 큰 아구를 벌린 컴컴한 동굴이 아니고 고난을 끝내고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문턱처럼 느껴졌다.
하나님은 무슨 스케줄을 가지고 우리를 이끌고 계실까? 늘 궁금했던 하나님을 향한 질문이 점점 오래된 집의 바랜 벽지 색처럼 흐려지더니 가끔은 궁금하지도 않게 되었다. 알아서 하시겠지 뭐! 지금보다 더 나쁜 곳으로 데려가시기야 하겠어? 그런 마음도 들었다. 간뎅이만 부어서 그런 건 아니고 좀 믿는 구석도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무슨 정리된 공부로 그런게 아니라 생존일상의 작고 큰 경험들이 만들어낸 막연한 신뢰같다. 설명 못하면 어떠랴! 어차피 생각한대로 진행되지도 않고 그 생각, 소원이라는 것도 제대로 맞는건지 모르는 판에 뭔들 대수일까? 내 결론대로 해달라고 주장하기도 자신없으니!
그 이후 새로 생기는 버릇? 태도중에 이런 것도 있다. 그냥 내 기도보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먼저 말해주세요! 제가 들을게요. 그게 시행착오 줄이고 빠른 길이니 그렇게 하시지요? 그런 맘으로. 예수님이 40일동안 광야에서 금식기도하실 때도 그랬다는 기억이 난다. 역시 예수님은 그 정곡을 알고 계셨나보다. ‘아버지! 말씀하소서. 제가 듣고 따르겠어요!‘ 하셨으니…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예수님을 훙내라도 내면 혹시 그 보석같은 진리가 슬쩍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