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박승직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5. 26.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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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기행 박승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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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0. 14:38조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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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목상에서 출발한 두산 창업주 ‘박승직’(1864~1950)
한국에서 근대 기업의 역사는 1세기 안팎이다. 근대적 의미의 기업체는 1876 개항과 더불어 시작됐고, 1880년대에는 주로 상점 형태의 민간기업들이 생겨난 데 비해 1890년대부터 제조업 분야의 회사들이 등장했다.
이처럼 봉건과 근대가 한국사회를 물갈이 하던 구한말에 근대 이후를 꾸려나가는 가장 중요한 경제단위로 출현한 민간기업들 가운데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업체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식민시대의 시작과 끝, 내전, 공화국의 교체 등 몇차례 전면적인 역사적 단절을 거치면서 끄떡없이 살아남은 민간기업은 흔치 않았던 것이다. 흔히 '재벌‘로 불리는 주류 기업군에 진입해 있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두산그룹은 바로 그러한 드문 경우이다. ‘두산’이라는 이름은 박용곤 전 그룹회장의 부친 박두병씨대에 와서 만들어졌지만 1896년 조부 박승직이 배오개장터에 열었던 박승직 상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두산의 줄기는 한국근대경제사 100년을 관통한다. 그 줄기에는 한국근대사의 빠른 행보와 오욕스런 파행의 흔적들이 함께 무늬져 있다.
글방 나와 보부상 시작
두산의 박씨 3대 가운데 첫 대인 박승직의 생애는 탁월한 이재감각으로 자본의 미로를 찾아나가는데 성공한 근대자본가의 입지전이면서 동시에 한국근대경제사의 출발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보부상을 해 번 돈으로 포목점을 열어 한말에 거부를 이룬 박승직은 식민시대에 이미 금융과 유통면에서 서로 긴밀히 연결된 몇 개 기업체를 거느림으로써 50년대 이후 일반화된 재벌의 원형을 구축했다.
박승직이 포목상을 열었던 배오개시장은 지금의 종로4가에서 동대문에 걸쳐 있었다. 세종로에서 보신각, 광교에 이르는 시전이 궁중과 양반계급에 물품을 조달한 데 반해 배오개시장은 조선조의 전통적인 서민장이었다. 이곳에서는 동대문을 통해 들어오는 여러지방의 곡물·청과·잡화·포목·수산물 등이 거래됐다.
그가 배오개시장 네거리에 상점을 연 것은 1896으로 그의 나이 33살 때였다.
박승직의 고향은 경기도 광주군 이매리, 당시‘임의실’이라 불렸던 골짝마을이었다. 몰락한 양반의 집안으로, 형편이 곤궁했음을 그는 나중에 ‘심야중자필’이라는 글을 통해 밝히고 있다. “본래 우리 아버지 생시에 시골 광주 임의실 사실 때에 전답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남의 위토를 자농하여 밥은 굶지 아니하였으나 재산이라고는 은일푼도 없었다.”
그가 보부상으로 나선 것은 1885년, 21살 때다. 임의실에서 30리 떨어진 한강 송파장터에 가끔 드나들었던 게 그가 상업에 눈뜨게 된 계기가 됐으리라고 추측된다. 처음에는 송파장을 중심으로 조랑말 허리에 포목을 싣고 장터를 도는 행상을 시작했으나, 이듬해부터 경기도 내륙과 강원도까지 진출했다.
“그때 나는 글방에서 책을 읽다가 어떠케 생각이 들었던지 환포장사나 하겠다고 뛰어나와 경상도·전라도·평안도로 도라다니기 시작한 때가 갓 스물입니다. 당시 백목을 특산지던 경상도 의성, 전라도 나주·강진에 가서 한필에 양두돈을 주고 무역해다가 산길로 들길로 서울에 와서 한필에 양너돈씩 팔엇습니다.”<동아일보 40년 4월5일자 ‘나의 20세 청년시대’중에서>
배오개의 박승직상점은 번창했다. 개항과 함께 국내 면포시장은 급속히 수입면에 잠식돼 갔고, 박승직 상점도 영국·일본산 수입 면직물을 팔았다. 경기도·강원도 등지에 지점도 열었다. 이 무렵 그의 상업수완은 널리 알려졌고, 이토오 통감이 이치하라 조선은행 총재에게 “듣는 바에 의하면 포목상의 백윤수와 박승직 두사람은 상당히 유력하며 유망하다고 하니 이들을 도와주라”고 했다. (1940년판 <한상룡군을 말함> 중에서)고 한다.
박승직 상점의 성공을 배경으로 그는 관직에도 진출했다. 1900년 성진 감리서 주사로 출발해 1906년에는 정삼품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과 함께 화폐·금융제도의 정리작업에 착수하면서 식민정책을 본격화했다. 특히 백동화 등 대한제국시대의 화폐를 일본의 원화로 교체한 1905년 6월의 화폐개혁으로 공황이 닥쳐와 크고 작은 상회·회사들의 도산이 속출했다.
“..아국의 상업이 조잔하고 인민의 산업이 피폐하예 전국 상황이 거의 파산의 비운을 당하였다.”(<황성신문> 1905년 7월12일자)
곡물상에까지 손뻗쳐
그러나 배오개 거상 박승직상점이 한층 활기를 띠어간 것은 오히려 이 무렵부터다. 1905년 7월 동대문시장 상인들이 자본금 7만8천원으로 동대문시장 관리회사인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연쇄도산 위기 속에서 하나의 자구책이었다. 그는 이 주식회사의 대주주로, 취체역에 선입됐다. 광장주식회사는 대표이사 이름만 수십번 바뀌어가며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1906년 1월 한국인 기업가들로 사상 최초의 경영인 단체인 ‘한성상업회의소’가 설립된 것도 이처럼 급변하는 경제환경에 적응하려는 자구노력의 하나였다. 설립 발기인이었던 박승직은 1909년 상임의원에 피선됐다. 한성상업회의소는 회원사들의 자금난에 숨통을 트기 위해 의정부와 탁지부에 3백만원의 구제금융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이미 재정권을 장악한 통감부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905년 이후 한국시장은 급속히 일본상품의 하역장화해갔다. 특히 수입의존도가 높은 면직물에서 폭리를 취하기 위해 상에이조합이라는 판매동맹을 결성하고 그들의 제품을 미쓰이물산에 위탁해 한국에 대한 면포수출을 독점했다. 이에 따라 일본산 수입직물 가격이 폭등했다.
1907년 박승직은 42명의 동대문 포목상 및 일본인 무역업자들과 함께 합자무역회사인 ‘공익사’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선출됐다. 경제학자 조기준씨는 ‘공익사’를 상사로서는 최초의 합자회사라 보고 있다.
동대문 포목상들이 만든 공익사는 고바야시회사를 통해 후지방적·키비방적·가네부치방적 등의 면사를 수입해 판매함으로써 활로를 찾았다. 공익사는 1914년 자본금 50만원의 주식회사로 개편됐다. 증자 과정에서 일본 이도추상사의 주식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자 1915년 박승직은 ‘사장은 영구히 조선인으로 하며, 일인 주주는 횡포를 자제할 것’등 이도추쪽을 견제하는 각서를 받기도 한다.
그뒤 공익사는 크게 번창해 인천·평양,`강경, 중국 봉천·장춘·하얼빈 등에 지점을 개설하고, 직물과 석유 등을 수입하는 한편 쌀·콩·쇠가죽 등을 수출했다. 박승직은 한산·서산 등 7개 저포 산지들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개량 저포를 만들게 해 수출하기도 했다. 그가 저포 개량에 약 30만원을 들였다거나, 백정 수백명을 명월관에 초청해 쇠가죽가공법을 강습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선일보> 1936년 1월 10일자)
공익사는 1940년 일제가 전시체제로 들어가 면직물 배급제를 실시하면서 유명무실해졌고 박승직도 이사장직에서 사임했다.
포목상으로 출발한 박승직은 17년 동대문시장 안에 곡물상이자 정미업소인 공신상회를 열어 사업영역을 직물에서 곡물류로 확대했다. 21년 자본금 1백만원으로 일인들이 세운 ‘경성곡물신탁주식회사’에 유일한 한국인으로 참가한 것도 곡물시장의 유통로를 장악해 공신상회의 물품수급에 안정을 기하려는 그의 상업적 착안이었다.
입는 것과 먹는 것은 산업사회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소비재 시장의 가장 큰 품목이었음을 감안할 때 곡물과 직물상계의 거상 박승직이 당시 상업계에서 차지한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부인이 만든 ‘박가분’ 유명
그는 1905년 한성상업회의소에 이어 18년 경성 포목상조합 결성을 주도했고, 19년의 직물상공제회와 30년 경성상공협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됐다. 1919년 고종 장례식과 26년 순종 장례식에서는 그가 상민봉도단장을 맡았다. 그러나 챙이 좁은 패랭이갓을 쓴 상민봉도단장 박승직의 기념사진은 식민시대의 거부조차 사농공상의 맨 밑바닥 계급에 대한 당대의 멸시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박승직의 사업활동에서 독특한 것이 20년대를 풍미했던 박가분이다. 면직물 거래와는 동떨어진 이 박가분은 박승직의 부인 정씨가 집에서 부업삼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일찍 결혼해 두차례나 부인을 사별하고 1905년 42살에 새로 들인 19살짜리 아내가 정씨 부인이다. 정씨가 납과 돌가루를 섞어 만드는 재래의 화장품 제조법에 자신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곁들여 만든 박가분은 1915년부터 방물장수를 통해 가가호호 방문판매로 팔렸다. 박승직 상점은 면포를 사가는 여인들에게 박가분을 덤으로 얹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박가분은 금새 박승직상점보다 더 유명해졌고, 박가분 제조본포는 18년 특허국으로부터 상표등록증을 교부받아 어엿한 제조업체로 입신했다. 1920년 박가분 제조본포는 여직공만 30여명을 둘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박가분을 본떠 장가분·설화분·행분 등 경쟁 상품도 등장했다.
일본 기린맥주에 투자
한창 때는 하루에 20갑들이 상자 5백개씩 팔려 4천여원의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 박가분은 20년대 불황기의 박승직상점에 만만치 않은 돈줄이 돼주었다 한다. 하지만 20년대말 일본에서 고급 화장품이 밀려들고, 재래 화장품의 원료인 납에 유독성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박가분도 퇴조하기 시작해 37년에는 완전히 폐업했다.
현재 두산에서 가장 큰 매출을 차지하는 OB맥주와의 인연은 33년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로 시작됐다. 일본의 기린맥주주식회사의 자회사격으로 영등포에 들어선 소화기린에 박승직은 김연수와 함께 단 두사람의 한인주주로 참여했다.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는 해방과 함께 미군정 관장 아래 들게 됐고, 정부수립 뒤 동양맥주라는 이름의 정부 귀속재산이 됐다가 52년 완전히 민영화했다.
박승직이 한때 주주였던 인연으로 그의 아들 박두병이 미군정기 이래 이 회사의 대표를 맡게 됐다. 동양맥부는 그뒤 결코 위축되지 않는 알콜수요를 타고 두산그룹을 지탱하는 가장 탄탄한 업종이 됐다. 33년에는 소화기린 말고도 일본 아사히맥주의 한국지사도 생겨났는데 이것은 뒷날 크라운 상표의 조선맥주가 된다. 지금 한국 맥주시장을 분할하고 있는 양대 상표가 식민지 조선땅에 이식됐던 일본 맥주회사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공교로운 일이다.
박승직이 공익사 대표이사를 그만둔 1940년에 그의 나이는 77살로 희수를 맞고 있었다. 이미 37년부터 박승직상점은 경성고상을 졸업하고 은행에서 4년간 견습한 맏아들 박두병에게 거의 실무를 맡겨두고 있던 터였다. 박승직 상점은 48년 박두병이 ‘두산상회’라는 이름의 무역상사로 계승하면서 재벌그룹 ‘두산’의 단초를 놓게 된다.
박승직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남하하던 50년 12월 서울집에 아들을 남겨두고 경기도 광주 고향마을로 돌아가 죽음을 맞았다.
박승직은 생전에 아들에게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고 오직 가업에 충실하라”는 가훈을 남겼다고 한다.
산업자본으로 발전 못시켜
이 원칙은 유한한 집권세력을 표나게 거들지 않는 것은 물론 혹독한 식민시대에서조차 사업에만 일로매진하게 해 두산이라는 거대 기업군을 오늘까지 살아남게 한 하나의 안전판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된 시전상인 백윤수의 태창재벌이 자유당정권에 협력했다 해서 5·16쿠데타 뒤 철퇴를 맞고 사라진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불황을 타지 않는 주류·음료 등 소비재 장사, 그리고 외국기업과의 합자 등 안전한 투자생리 또한 정치중립의 생존논리 만큼 이 기업군을 보호해온 것으로 보인다.
경제사학자 허수열씨(충남대 교수)는 그런 두산그룹의 성격이 이미 박승직시대에 형성됐던 것으로 설명한다. 허씨는 “박승직의 사업이 상업자본을 보다 생산적이고 근대적인 산업자본으로 발전시켜 내지 못한 것이 한계”라면서 “유통과정에 밝은 상업자본의 성격이박승직 이래 오늘까지 내려오는 전통인 것 같다”고 지적했다.
박승직의 사업을 계승한 박두병은 73년에 타계했고 두산은 이제 박용곤, 박용성씨 등 박승직의 손자들 손에 맡겨져 있다. 그러나 지난봄 전국적인 OB불매운동을 불렀던 ‘페놀오염’의 여파 속에서 박용곤씨는 그룹회장직을 떠났다.
[출처] 박승직|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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