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의 사전적 의미는 집에서 만든 밥이다. 중국어로는 家常饭(찌아창판), 집에서 항상 먹는 음식이란 뜻이다. 의미와 글자 안에 특별함이라곤 조금도 없다.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음식이 집밥이다. 그래서 가치로움과는 어울리지 않고, 성과나 성취의 의미라곤 호리만큼도 없다. 산소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없으면 안 되지만 누구도 그 존재로움에 눈길을 주지 않는 것 말이다.
집밥 두 글자 적어놓고 떠오르는 기억을 소환한다. 여름날이면 엄마는 집 앞마당에서 기른 상추와 고추를 따오셨다. 그리고 손수 만든 된장과 고추장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만든 쌈장을 만드셨다. 식은 밥 한 덩이를 상추에 싸고 풋고추와 쌈장을 얹어 먹으면 더 이상의 반찬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특히 피어 오른 지 얼마 안 된 여들여들한 상추 잎을 좋아해서 연한 상추 잎을 여러 장 깔고 밥을 싸 먹었다. 때로 멸치볶음을 곁들이기도 했지만, 오로지 풋풋한 야채 향에 감싼 것만으로도 밥은 충분히 맛있었다. 식은 밥 한 덩이와 여린 상추를 함께 아울러주는 쌈장은 쌈밥의 화룡점정, 엄마의 쌈장은 특별했다. 마지막 코스에 시원한 냉수 한 사발로 입 안을 적시고 나면,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개운했다. 녹음이 푸르른 여름 날, 오로지 상추쌈 한 끼는 그야말로 제격이다.
나는 가족들 중에 유난히 엄마의 식성을 빼다 박아서 상추쌈 한 끼는 주로 다른 가족들이 없는 틈을 타 이루어지곤 했다. 생각하기에 따라 허름하디 허름한 한 끼를 불평은 고사하고, 게걸스럽게 뚝딱 먹어치우는 나를 엄마는 매우 기특해 하였다. 만면에 웃음을 짓고, "너는 나를 닮아 이런 푸성귀를 좋아한다니까" 라고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으니까. 자신을 닮은 자식이란 아무리 빈약하고 별 것 아닌 점이라도 존재의 긍정이다. 그러니까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소설이 휴머니즘류의 작품이지 않겠는가? 하하. 엄마의 만족스러움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으로 나 또한 한껏 즐거웠다. 지금에 와 생각하니, 엄마와 나는 상추 쌈밥 한 끼로 깊은 동질감을 주고받았던 것 같다.
새벽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일어나는 소리. 칼이 도마에 닿는 소리다. 다다다다!!!! 그 어떤 알람보다 정겹게 잠을 깨운다. 엄마는 한 때 도시락 여덟 개를 싸야했다. 칠남매인 우리 집은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이 줄줄이 있었다. 그 때는 초등학생도 도시락을 싸던 때였다. 오빠들 도시락 두 개씩, 어린 자식들 도시락까지 싸려면 달걀 프라이만 해도 여덟 개. 새벽부터 아침상은 물론이거니와 도시락까지 싸야했다. 엄마의 손이 얼마나 재빨랐는지는 도마 위에서 여지없이 확인되었다. 노곤한 의무이기도 했지만 새 아침을 알리는 희망, 집밥의 힘을 알리는 소리였다.
나는 엄마가 교회의 구역식구들을 먹이고, 수련회 때가 되면 백 명이 넘는 식구들을 단체로 먹이는 것을 줄곧 보아오며 자랐다. 어느 날은 대학부 청년들이 불시에 집을 찾았다. 신년 인사는 핑계고, 기실은 밥을 먹을 요량이었다. 얼추 열 명이 넘는 청년들에게 엄마는 재빠른 손의 재능을 무기 삼아, 꼬르륵 허기진 소리로 막 식욕이 폭발할 즈음, 재깍 집밥을 차려주었다. 이 정도는 엄마에게 별스런 일도 아니었다. 한 후배는 가지나물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마침 그 반찬을 먹고 너무나 감사했다며, 하나님이 자기 맘을 알아주신 것 같다고도 했고, 표고버섯 볶음이니, 김치, 불고기, 고기전 등에 기쁜 안색을 비추며 돌아간 사람들은 분명 집밥이 연결한 인연이다.
집밥은 엄마가 내게 전수해준 가장 귀중한 유산이다. 엄마의 밥을 먹고 돌아간 사람들의 표정에서 나는 기쁨을 보았고 만족을 보았다. 음식을 사이에 둔 만남엔 불화와 불평이 사그러들고 슬픔과 근심이 스러진다. 8주 동안 구역 식구들에게 집밥을 지어준 적이 있다. 8주 동안 한 번도 메뉴가 같았던 적은 없다. 각종 해물을 볶아, 간장으로 기본 간을 하고, 굴소스로 감칠맛, 전분 가루로 농도를 조절해 미끄덩, 부드럽게 목을 넘기게 한 해물 덮밥, 묵은 김치를 설탕과 참기름에 볶고, 각종 야채를 잘게 썬 것을 토핑, 마지막에 날치알과 김가루 얹어 내놓은 돌솥날치알밥은 유독 칭찬을 많이 받은 메뉴다. 국수나무(음식체인점)의 메뉴를 벤치마킹한 아쿠아돈까스, 채썬 양배추를 접시 바닥에 깔고, 노릿노릿, 바삭바삭하게 튀긴 돈까스를 얹은 후, 채칼로 길쭉하게 썬 오이와 옆으로 얇게 채 썬 양파를 토핑하고, 마지막에 감자채를 튀겨서 올려놓으면 비주얼 막장이다. 간장과 발사믹을 기본으로 한 소스를 부어주면 끝장이다. 이 음식을 산에 올라가 함께 먹으며 많이 수다하고 많이 웃었더랬다.
그랬다. 나는 그들과 웃고자 함이었다. 8주간의 노고를 자청한 것은 기쁨을 누리고자 함이었다. 의무와 당위에 매여 기쁨이라곤 상실해버린 얼굴들을 보았다. 그리스도인의 얼굴에서 말이다. 얼마 전 가족예배를 하던 중 짱구가 불평을 제기한다. 하나님은 하지 말라는 게 너무 많다고. 내가 물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뭐라 하시더냐, 사람을 지으시고 뭐라 하시더냐, 보시기에 좋았더라. 너는 하나님을 너무나 오해하고 있구나. 하나님은 누리는 분이시고, 기쁨의 근원이시란다. 누리지 못하고는 하나님이 하라는대로 살 수 없는 거란다. 희생과 봉사 이전에, 의무와 금기 이전에 향유하고 누리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오해를 풀거라 하였다. 누림으로 주신 것이 있음을 기억하고자 했다. 집밥이 도구가 돼주길 바랐다.
2019년 8월 중국에 와서, 9월부터 소주대학 해외교육원에 다녔다. 중국어를 배우기 위함이다. 우리 반에는 11개국에서 온 외국인들이 있었고, 나는 무슨 오지랖인지 집밥을 나르기 시작했다. 20명이 넘는 학생들과 함께 먹으려고 김밥을 날랐고, 비빔밥을 날랐다. 오뎅국과 떡볶기와 김치를 날랐다. 그들 중에 김치를 싫어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고, 사이프러스 출신의 한 친구는 김치 국물까지 들이키며 그릇을 비웠다.
누군가는 사서 고생이라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유별나다고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가장 자연스럽게 알릴 방법,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표현할 방법도 집밥을 대접하는 것 외에 별다른 것이 없었다.
한번은 미국인 학생이 생선요리가 먹고 싶다 길래, 집에 초대를 했다. 어색할까 싶어 친구들과 같이 오라 했다. 베트남, 키르키즈스탄, 카자흐스탄, 베트남, 호주 친구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한국인 가정에 방문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매우 설레였고, 특별히 달걀말이를 좋아했다. 양껏 배를 불리고 케이팝과 춤으로 한참을 유쾌하게 떠들다 돌아갔다. 나는 곧 그들 사이에서 이모로 불리게 되었다. 집밥의 추억이다.
나의 집밥을 꽤나 좋아하던 호주 청년이 2020년 신년 메시지를 보냈다. "너를 만난 것은 내 인생의 행운이다. 너는 미처 깨닫지 못했겠지만 너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너를 통해 배웠다" 라고. 최고의 신년 메시지였다. 그 녀석은 아마도 나의 음식을 기억해 줄 것이고,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기억할 것이다. 언젠가 절대자의 힘이 필요할 때, 그가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다면 나의 집밥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집밥의 보람이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판이 그립다(중략)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인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판/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후략) (어머니의 두레밥상, 정호근)
영성이란 일상의 것이 반복될 때 피어나는 꽃이다. 사시사철, 희노애락오욕의 모든 순간에 밥은 반복되고 반복되어 우리 곁에 있다. 어머니의 밥상은 이름을 발하지 않는다. 집밥은 명예를 말하지 않는다. 명분을 말하지 않는다. 성과를 추구하지 않는다. 다만 여전하게 말할 뿐이다. 너는 오늘도 내가 해주는 이 밥을 먹어 마땅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