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김사량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5. 28. 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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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기행 김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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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0. 16:14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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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포화속에 스러진 문학적 열정 ‘김사량’(1914~1950)
1914년 식민지 조선의 평양에서 대부르좌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남, 39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독문학과 졸업, 40년 단편 ‘빛속에’로 아쿠타가와상 이석(二席)입선, 45년 ‘재지(在支) 조선출신학도병 위문단’의 일원으로 중국여행중 화북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의 거점인 연안지구로 탈출해 태항산채 본거지에 도착, 일제 패망 때까지 항일전에 복무, 46년 김일성대학 강사, 50년 내전의 북측 종군기자로 남하, 미국과 남측의 반격으로 후퇴하던 중 남한강 상류부근에서 실종.
이 짤막한, 그러나 화려하고 극적인 연보의 주인공 김사량이 남과 북에서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87년에 들어서이다. 이 해에 서울의 열음사에서는 재일동포 안우식씨의 김사량 평전 <김사량>이 시인 최하림씨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져 <아리랑의 비가>라는 제목으로 출간됐고, 평양 문예 출판사에서는 <김사량 작품집>이 나왔다. 한켠에서 김사량의 삶과 문학에 대한 거리낌을 떨쳐버릴 만큼 자신감으로 회복할 즈음에, 공교롭게도 또 한켠에서는 자신들의 평양중심주의를 위한 김사량의 쓸모를 새롭게 발견해낸 듯하다.
40년대 민족지성의 행로
김사량의 죽음은 물리적으로 그해 가을과 겨울, 폭격과 굶주림과 질병과 추위가 야기한 수십만의 죽음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그의 짧은 삶의 마지막 10년은 40년대 민족지성의 가장 섬세한 행로를 보여준다.
생전의 그가 자신의 정치적 충성심을 건냈던 정권을, 그 정권의 40년 뒤의 모양새를 지금의 우리가 결코 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러한 평가를 뒤집는 것은 아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하층계급과 그 자신의 출신계급의 표 나는 어긋남, 그가 사용한 일본어와 그 일본어 소설이 묘사하는 민족정서 사이의 길항, 반도에 살고 있는 그가 피하기 어려웠던 소극적 친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쓴 연안으로의 탈출과 환희에 찬 개선, 자신이 ‘민족해방전쟁’이라고 믿었던 내전의 위험스러운 취재와 그 와중에서의 죽음, 이 모든 사실은 망설임과 결단, 자의식과 세계, 로맨티시즘과 냉혹한 현실 사이에서 동요하면서도 궁극적으로 당대의 역사와 자신의 삶 사이의 틈새를 좁히고자 했던 한 순정한 정신의 옥타브에 다름 아니다.
평양 갑부집안서 태어나
김사량이 태어난 곳은 평안남도 평양부 육로리 102번지, 그의 본명은 시창이다. 그의 지인인 일본인 호고 미사코의 기록에 따르면 김사량의 집안은 평양의 양반으로 대단한 갑부였다. 평양의 미션계 학교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그의 어머니는 평양시내에서 백화점을 경영했는데, 그 지점이 만주 여러 곳에까지 뻗쳐 있었다고 한다.
김사량의 손위로는 일곱 살 터울의 형 시명과 다섯살 터울의 누이 특실, 손아래로는 서너살 차이의 누이동생 오덕이 있었다. 그의 형 시명은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행정·사법 양과에 합격한 뒤 강원도 홍천군수, 평창군수, 황해도 농상부장을 거쳐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총독부 전매국장에 이르는 친일 관력(官歷)의 소유자였다.
유복한 유년기를 보내고, 평양고보에 진학한 그는 5학년 때인 1931년 조선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인교사를 배척하기 위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처분을 당한다. 이 동맹휴학과 퇴학은 대다수의 동족들과 달리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자라던 김사량이 세계와 불화하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으로 기록됨직하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큐슈 사가현의 사가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짬짬이 시도한 문학습작 외에는 공부에 배달려 36년 도쿄제국대학 독문학과에 입학한다.
그의 고교시절 중 특기할 만한 일은 그가 2학년 때 일종의 빈민소설이라 할 ‘토성랑’을 습작했다는 것이다. 김사량이 자랑스럽게 자신의 처녀작으로 꼽았고 뒷날 일본어로 다듬어져 동인지 <제방>에 발표되는 ‘토성랑’은 그의 제1차 피검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빈민 비극적 삶 그려
쓰루마루 다쓰오, 나카지마 기진, 다쿠가이 스스무 등 대학 동급생들과 함께 김사량이 참가한 동인지 <제방>은 1936년 6월 창간호가 나왔고, 그 이듬해 6월까지 1년 동안 5호까지가 나왔다.
<제방>이 창간될 즈음 도쿄는 황도(皇道)파 육군장교들이 일으킨 반란-세칭 2·26사건-의 여파로 계엄령 하에 있었고 뒤이어 메이데이행사 금지, 사상범 보호관찰법 공포, 좌익학자들과 문화단체 관계자들의 일제 검거 등이 이어지며 일본은 파시즘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제방>2호에 발표된 ‘토성랑’은 지게꾼·절름발이 거지·말더듬이 등 평양의 빈민지대인 토성랑에 흘러든 최하층민들의 비극적 삶을 그리며 일본자본가의 토지 수탈과 움막집 철거 등 평양부청의 횡포 따위를 비판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극으로 각색돼 조선어극단인 ‘조선예술좌’에 의해 공연되었고, 이에 때맞춰 김두용, 김삼규, 깁봉원 등 ‘조선예술좌’의 간부들이 일제 검거될 때 김사량도 이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조선예술좌는 재일조선인들이 1931년에 만든 ‘동경프롤레타리아 예술연구회’의 후신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기초로 하는 진보적 민족연극을 통해서 재일본 조선민중으로 하여금 비판적 정신을 지도 앙양케 해 해방전선으로 유도할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검거 이전부터 김사량은 이미 세클먼트운동(빈민지구에 정주해 주민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하면서 생활향상을 꾀하는 사회운동) 등에 열성적으로 참가해 ‘문제학생’으로 지목받고 있던 터였다.
‘빛속에’로 아쿠타가와상
석달 가량의 구류 끝에 풀려난 김사량은 그뒤 별 탈 없이 학교를 다녔고, 1939년 3월 <하이네, 최후의 낭만주의자>라는 논문을 내고 학부를 졸업한다. 그는 졸업 직전 동향의 최창옥과 결혼한 상태였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서울 체류기간 동안 그가 쓴 일문서설 ‘빛 속에’가 40년 2월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으로 선정되면서 그는 일본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제국대학생이자 야학선생인 ‘나’(미나미 또는 남)와 혼혈소년 야마다 하루오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중요한 축으로 삼고, 하루오의 혼혈인 아버지 한메에, 조선인 어머니 데이준, 민족의식이 투철한 이군 등을 등장시켜 조선 민족의 아픔을 섬세히 그리고 있는‘빛 속에’에 대해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밀엽자’의 사무가와 코타로(본상 수상자)나 ‘빛 속에’의 김사량씨를 고르고 싶었던 것은 다른 위원들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빛 속에’를 공동수상작으로 할 것인가, 후보로 따로 우대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나는 ‘빛 속에’를 선외로 하는 것이 어쩐지 섭섭했다. 김사량씨는 좋은 것을 써주었다. 문장도 좋다”고 평했다.
그뒤로 그는 조선어와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계속하며 문명을 굳혔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그는 다시 사상범 예비구금법에 의해 검거됐고 친구들이 ‘군부의 힘을 빌려’그를 석방시켰을 때 일본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더 악화돼 있었다.
학도병 위문단서 탈출
비록 적극적 친일의 흔적을 남기고 있지는 않지만, 일제말의 상황과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서 김사량이 적지 않은 괴로움을 겪었을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는 마침내 1945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병사후원부가 파견한 ‘재지 조선출신 학도병 위문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건너간 기회를 이용해 연안으로 탈출한다. 조국을 떠난 지 일 개월 만에 일본의 봉쇄선과 유격지구를 지나 조선의용군의 근거지인 화북 태항산중으로 들어간 과정과 그것에서의 생활·견문·소감 등은 그가 기록한 <노마만리>에서 밝혀지고 있다.
기행문답게 속도감있는 문체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감동이 곳곳에 배어 있는 <노마만리>는 하루 두끼의 허기진 식사와 온갖 일용품의 결핍을 강요한 바로 이 태항산채야말로 ‘빛 속에’의 작가가 그리도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빛’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종이가 거의 없었던 그곳에서 회중시계와 바꾼 두 권의 편지지 위에 작은 글씨로 써내려간 이 단정한 조선어야말로, 그의 ‘입신’의 밑바탕이었던 일본문학 속에서의 성취를 중화시키고도 남는 해독제였다.
“이 기록은 언제 끝날 일인지, 혹은 어느 때에 중단될 일인지 필자 역시 예기치 못하는 바이다...하나 불행히도 조국독립의 향연에 참례치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필자 대신 이 기록과 그 외 몇 편의 창작물이나마 우리 용사들이 채찍질하며 내달리는 병마의 등에 실려 서울로 입성하여 주기를 바라마지않는다...실로 우리 조국의 자유와 민족의 해방은, 우리들이 피로써 싸워 빼앗아야만 되며 또 그래야만 그 광영도 보다 더 빛나는 것이다...조국의 영광이여, 민족의 해방이여, 영원하라!”는 구절을 담은 45년 6월 9일의 <노마만리> 초의 서언은 드디어 민족사와 자신의 개인사를 일치시킨 해방전사의 자신감과 비장함을 보여준다.
제2차대전 막바지의 그의 결단과 길지 않은 항일투쟁 덕분에 김사량은 국내의 많은 문인들과 달리 떳떳하게 해방을 맞고 자랑스럽게 귀국할 수 있었다. 45년 11월 그는 귀국선발대로서 서울로 돌아왔고, 그가 태항산에서 조선의 용군병사의 삶을 담아 집필한 희곡 <호접>이 아리랑 극단에 의해 공연되었다. 이 연극에는 지금 중국에 살고 있는 소설가 김학철씨도 배우로 출연했다.
형 시명이 미군정하 전매청장으로 있는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돌아간 그는 자기 집안의 부르좌적 기반을 근저에서 허물어뜨리는 북한 권력의 ‘민주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마식령> <차돌이의 기차> <칠현금> 등의 소설을 발표한다.
전쟁이 터졌다. 그를 생사 무기약의 연안으로 내몰았던 혁명적 로맨티시즘은 이번에도 다시 그를 전선으로 내몰았다.
‘우리들은 바다를 보았다’
그는 남진하는 인민군과 함께 단숨에 서울을 지나고 지리산을 넘어 마산에 다달았다. 이것이 9월 17일, 두 달 뒤의 최후를 예견할 수 없었던 그가 송고한 최후의 종군기 ‘우리들은 바다를 보았다’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바다가 보인다. 거제도가 보인다. 바로 여기가 남해바다이다. 진해만을 발 아래 굽어보며 마산을 지척간에 둔 남쪽하늘 한끝 푸른 바닷가의 서북산 7백 고지 위에 지금 나는 우리 군대동무들과 같이 진중에 있다. 바윗돌을 파내고 솔가지를 덮은 은폐호 속에서 저멀리 서남쪽으로 통영반도의 산줄기가 굼실굼실 내다보이며 정면으로 활짝 트인 바다 한가운데로는 거제도가 보인다. 그리고 올숭당술 물오리떼처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조그만 섬들은 안개 속을 가물거린다.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바다...”
[출처] 김사량|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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