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 이화 의료 이야기, my girls
자꾸만 눈물이 난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그런다.
바로 내 중학교 동기동창으로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전철 9호선 선유도역 인근에서 ‘김명래 치과의원’을 개업하고 있는 김명래 내 친구로부터 빌린 ‘이화 의료 이야기’라는 책이다.
지난 2024년 3월 13일 수요일부터 읽기 시작해서 일주일째 읽기를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딱 400쪽 짜리 책이어서 작정하고 읽으면 하루만에도 다 읽을 수 있었겠지만, 처음부터 울컥하는 감동의 내용이 담겨 있는데다가, 그 감동을 독후감으로 쓰다 보니 독파에 시간이 걸리고 있는 것이다.
어제도 눈물을 흘려야 했다.
보구녀관의 3대 병원장인 로제타 셔우드가 화상으로 손가락이 붙어버린 윤씨 소녀의 그 붙은 손가락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면서 자신의 피부를 이식시켜주는 그 헌신의 대목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려야 했고, 5대 병원장인 릴리안 해리스가 티푸스를 앓고 있는 소녀를 치료하다가 끝내 자신까지 그 병에 걸려 결국 자신으로서는 먼 이국땅인 조선에서 외롭게 숨을 거두어야 했던 순간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려야 했다.
더해서 형편이 어려워 돈을 내지 못하는 환자들이, 달걀이나 닭이나 과일이나 밤과 호두, 혹은 조선 음식 등의 자신만의 방식으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던 그 순진무구한 그때 여성들의 열악한 삶 속에서의 인간미를 생각하면서 또 눈물을 흘려야 했다.
같은 달 21일 목요일인 바로 오늘 이른 아침에 읽은 대목이 또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했다.
오늘 읽은 대목은 이화의료원의 1887년부터 1912년까지 이야기를 담은 2장 ‘보구녀관’의 2편인 ‘조선 여성의 새 미래를 위해 의학 교육을 시작하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다음은 ‘여성 자활을 위한 메타 하워드의 봉순 어머니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의 첫 대목이다.
W.F.M.S.의 기본 모토는 여성들의 ‘자활 自活’이었다. 1880년대에는 여성들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게 무척 힘든 시대였기에 여성들의 자활을 위해 세계 곳곳으로 날아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스크랜튼 대부인이 조선에 들어와 이화학당을 세우고, 여의사의 필요성을 피력하며 보구녀관을 만든 것도 W.F.M.S.의 자활과 맥락을 같이하는 활동이었다.
보구녀관의 초대 병원장인 메타 하워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의사로서의 의료 활동을 물론이고, 의료 보조 인력에 대한 의료 교육을 병행했다. 당시 메타 하워드에게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의료 보조 활동을 행던 사람은 봉순 어머니였다. 그녀의 딸인 봉순이는 이화학당 학생이었고, 봉순 어머니는 보구녀관에서 일을 도와 생계를 꾸렸다. 1891년 1월 25일, 봉순 어머니는 ‘사라 Sar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사라는 근대 교육 기관에 고용되어 급여를 받은 초창기의 직장여성으로 평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W.F.M.S.가 추구했던 여성 자활이었다. 봉순 어머니는 메타 하워드가 떠난 후에도 보구녀관에서 계속 일했다.//
이 대목에서 이름도 없는 한 여인을 챙겨서 이름을 갖게 하고, 그 가정을 먹고 살게 해준 메타 하워드의 헌신에 나는 또 눈물을 흘려야 했다.
메타 하워드의 뒤를 이은 3대 병원장 로제타 셔우드는 소위 ‘마이 걸스 my girls’라고 해서 소녀들 셋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김점동(박에스터), 여순이(여메례), 노수잔 그 셋이다.
다음은 그 셋의 이야기다.
노수잔은 결혼 직후 남편을 잃은 어린 과부였다. 과부에게 주어진 삶은 평생 수절하며 혼자 사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며 세례를 받아 노수잔이 되었다. 이후 노수잔은 로제타를 만나 의학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로제타는 그녀가 수술실에서 큰 종기에 드레싱하는 것을 지켜보며 외과 의사처럼 해냈다고 평가했다.
여메례는 여순이라는 본명이 있었지만 세례명 메리Mary를 한자로 표현한 메례로 불렸다. 부모와 함께 살면 단명한다는 점쟁이의 말에 따라 여메례는 스크랜튼 대부인의 양녀가 되어 이화학당에서 교육받을 수 있었다. 1891년 2월 3일에는 스크랜튼 의사의 비서였던 황현모와 결혼을 하며 남편의 성姓을 따라 황메리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미국 유학중이던 나면이 죽어 어린 과부가 되었지만 보구녀관의 통역사이자 간호원, 전도부인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김점동은 1891년 1월 25일 프랭클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 1845~1919)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아 김에스더가 되었고, 로제타의 마이 걸스 중 유일하게 로제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된 인물이다. 피를 봐야하는 수술실에서의 의료 보조 업무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로제타에게 언청이 수술을 받은 여성들의 삶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마이 걸스’ 이들의 시작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었지만 그녀들이 내딛은 한 걸음 한 걸음은 한국 근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김에스더는 1893년 5월 24일에 로제타 홀의 남편인 윌리암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을 돕던 20대 청년인 박여선(1868~1900)을 만나 결혼한 뒤에는 다른 선교사들처럼 남편의 성姓을 따라 박에스더가 되었으면, 훗날 미국 유학을 거쳐 조선 최초의 여의사이자 보구녀관 병원장이 되었다고 한다.
박에스더가 미국에서 의사가 되어 귀국할 때에는, 그녀의 귀국이 나라의 경사라고 해서 신문에 실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다음은 ‘신학월보’에 실린 그 기사다.
‘부인의학사 박소사 환국하심. 육 년 전에 박여선 시 부인이 이화학당에서 졸업한 사람인데 내외 간 부인 의학사 홀 씨를 모시고 미국까지 가셨더니 공부를 잘 하시고 영어를 족히 배울뿐더러 그 부인이 의학교에서 공부하여 의학사의 졸업장을 받고 지난 시월에 대한에 환국했나니라. 공부가 여러 해 됐느데 그동안 박여선 씨는 세상을 떠나시고 그 부인이 혼자 계시매 섭섭하온 마음을 어찌 다 위로하리오마는 미국에 가셔서 문견과 학식이 넉넉하시며 우리 대한에 무식한 부녀자들을 많이 건져내어 예수 그리스도교에 나오게 하시기를 바라오며 또 대한에 이 같은 부인이 처음 있음을 치하하노라. 또 부인께서 홀 의학사 부인을 모시고 평양으로 가셔서 사람의 육신병을 고쳐주실 때에 육신병만 고칠 뿐 아니라 영혼병까지 고쳐주시와 영생토록 무병케 고쳐주시고 하나님 앞에 큰 상 받기를 우리가 또한 바라노라.’
그러나 그녀의 명도 짧았다.
진료에 지쳐 병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녀는 그 병을 끝내 감당하지 못하고 1910년 4월 13일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끝 대목을 읽으며, 또 눈물을 훔쳐야 했다.
곧 그 대목이다.
고작 30년이 조금 넘는 박에서더의 삶은 너무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삶 속에서도 그녀가 남긴 삶의 의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 철저한 유교적 신분 시대였던 조선 사회에서 유력 가문의 딸도 아닌 평민 출신의 그녀가 이룬 성취는 인간의 평등, 남녀의 평등과 설파하는 기독교 정신의 살아 있는 증거였다. 또한 앞으로 교육을 받고자 하는 많은 여성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녀가 남긴 초초의 발자취는 한국 여성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고, 이후 수많은 한국 여의사 탄생의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