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 이화 의료 이야기,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
3장은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릴리안 해리스라고 하면 1897년 11월 10일에 조선 땅을 밟은 미국의 여의사이며 보구녀관 5대 병원장으로 티푸스에 걸린 소녀를 치료해서 살려내고는 자신은 도리어 그 병에 걸려 목숨을 잃은 헌신의 주인공이다.
처음에는 그 병원의 이름을 ‘코웬’이라고 지으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릴리안 해리스의 보구녀관 후임인 엠마 언스버그 6대 병원장이 미국에서 가졌던 어느 연설회에서, 그녀의 연설을 눈물을 흘리며 들었던 코웬Mrs. Cowen부인이 조선의 새로운 여성병원을 위해 거액의 건설기금을 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코웬부인이 한사코 거절하며 조선 환자들을 돌보다 죽은 릴리아 해리스 의사의 이름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Lillian Hrrris Memorial Hospital’으로 명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 병원이 지어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은 1908년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1908년 11월 대한제국 정부는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의 건립이 공공의 목적에 부합한다며 국가 재산인 보통학교 부지의 일부 소유권을 W.F.M.S.에 넘겨주었다.
감리교 해외선교회의 남자 선교사 찰스 로브Charles Loeber와 언스버거 의사가 새 병원 건설의 감독을 맡았다. 1909년 무렵 건물의 외형이 완성되었고, 이후 조명, 난방, 급수 설비를 갖춘 후 창문, 문, 마루가 설치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건축 자재의 비용이 크게 늘어나면서 건물 내부 난방 등의 설비 공사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이때 찰스 로버의 횡령 문제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엠마 언스버거는 1920년 말 미국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1911년 3월 그녀의 후임으로 메리 스튜어트(Mary Schermerhorn Stewart, 1862~1935) 의사가 왔다.
릴리안 해리스기념병원의 공사는 메리 스튜어트의 지휘 아래 재개되었다. 배선 작업과 수도 및 증기배관, 문과 창문의 마무리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드디어 19122년 가을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이 준공되었다.//
병원은 준공되었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 병원을 ‘동대문부인병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이라는 긴 이름을 당시의 한국 사람들이 발음하기에는 불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층 높이의 붉은 벽돌 건물인 그 병원은 언덕 위에 있어 눈에 잘 들어오기도 했지만, 주변의 낮은 한옥과 비교되어 더욱 찾기 쉬운 곳이기도 했고, 이 병원의 전등은 밤에도 꺼지지 않기로 유명해서 환자들이 한 눈에 알아보는 병원이 되었으며, 1919년 동대문을 지나는 고종 국장 행렬의 기록에서도 이 병원의 모습이 남아 있다고 한다.
다음은 이 병원의 초대 병원장이 된 메리 스튜어트가 1912년에 남긴 기록이다.
‘내가 한국에 온 첫 1년간은 공부와 병원 완공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도록 병원 일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픈 환자들을 보고 돕지 않을 의사는 없지 않은가? 동대문교회의 많은 신도들 중에는 병에 걸려 도와달라고 하는 이들이 항상 있다.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일할 시간을 내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이 기록에 따르면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은 정식으로 병원 문을 여리 전부터 아픈 환자를 진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즈음에 정동의 보구녀관과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이 완전히 하나로 통합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그 기록이다.
1912년 1월에 한국에 온 나오미 앤더슨 간호원장도 평양 광혜여원에서 지내다가 1912년 9월 20일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으로 임지를 옮겨왔다. 이때 광혜여원에 임시로 머물던 간호원양성학교도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으로 영구 이전하면서 병원은 점점 의료진의 규모를 갖추어갔다. 이 무렵 정동에 위치한 보고녀관은 리리안 해리스 기념병원과 완전히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