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 이화 의료 이야기, 현덕신 이야기
‘이화 의료 이야기’라는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할 때부터, 내 마음속에 담겨든 궁금증이 하나 있었다.
책표지에 표기한 ‘since 1887’이라는 그 숫자로 미루어봐서, 이 책에는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쓰던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로 지금에 이르는 이화의료원의 역사가 담겨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에는, 당시 보통의 여성들보다 앞서 개화되었을 이화의료원 초기의 여의사들은 과연 어떤 처신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피를 흘려야 했던 독립운동에는 어떻게 동참을 했을까 하는 점에 대하여 궁금증이 일었던 것이다.
언뜻 느낌에, 시대를 앞서 간 여성들이었기에 분명 적극적 가담이 있었겠다 싶었다.
역시 그랬다.
여의사로 여간호사로 독립운동에 나름의 참여를 했던 이야기들이 있었다.
1912년에서 1945년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3장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의 3편에 실린 ‘동대문부인병원, 독립운동과 함께하다’라는 제목의 글이 그랬다.
동대문부인병원 간호원양성학교에서 간호 교육을 받은 후 동대문부인병원과 평양 기홀병원의 간호원으로 십수 년동안 근무한 김태복(1886~1933)의 이야기도 있었고, 동대문부인병원 간호원양성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산파과 1년을 이수한 다음 간호원 및 산파 면허증을 모두 취득해서 이후 동대문부인병원에서 16년간을 근무한 박원경(1901~1983)의 이야기도 있었고,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진주에서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설득한 한신광(1902~!1982)의 이야기도 있었고, 진남포 신흥리교회 담임목사에 민족운동가로서 ‘진남포 만세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10개월 옥고를 치른 이하영 목사의 아내인 여의사 이그레이스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게 특별한 관심이었던 것은 현덕신 이야기였다.
얼마나 감동적인지, 그 대목을 읽다가 울컥 치미는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어, 뜨거워진 눈시울을 닦아내야 했었다.
다음은 그 이야기 전문이다.
동대문부인병원에서 1920년대 산부인과와 소아과 의사로 근무했던 현덕신(1898~1963)은 황해도 해주에서 1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한 후 로제타 홀의 권유로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유학을 가 동경여의전 초창기 한국인 졸업생이 되었다.
돈이 부족하고 문화가 달랐던 유학 생활은 녹록치 않았지만, 힘겨운 가운데에도 한국의 독립을 생각했다. “지금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언젠가 떳떳하게 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과 우리 민족의 존재를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오빠 현석칠 목사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1919년 2월 8일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남녀 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했고, 2.8독립선언 현장에 현덕신이 있었다. 1919년 2월 18일 일본 동경 기독청년회관에서는 3.1운동의 첫 신호탄이 된 조선청년독립단이 발족되었는데, 현덕신은 이때 2개월치 학비에 해당하는 40원의 자금을 보탰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20년 3월 1일 현덕신은 동경 하비야 공원에서 만세를 외쳤다. ‘재동경조선학생독립만세’ 사건이었다. 이때 현덕신은 검속되면서 일본 경무국의 12급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훗날 그녀는 “동경여의전 병원의 담요를 몰래 한국 학생들에게 가져다주고, 모금 활동에 동참했다. 조선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자 나에게는 생활이었다.”고 회고했다.
1920년 여름 현덕신은 여러 곳을 다니는 계몽 강연을 하며 새로운 여성 지식인이자 지도자의 면모를 보였다. 특히 이러한 활동은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동경여의전 졸업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1923년부터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같은 해에는 2.8독립선언을 함께했던 동아일보 최원순 기자와 결혼했다.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경대학 졸업생인 최원순은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는데, 고문 후유증 때문에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현덕신은 동대문부인병원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근우회 설립에 참여하며 항일구국운동 및 여성의 지위 향상운동에도 앞장섰다. 고등학생 시절까지 현덖신 선생과 함께 살았던 손자 최영훈 전 조선대 미대 학장은 꼿꼿하고 당당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했다.
‘우리 짐은 매번 할머니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할머니의 병원은 광주 시내에서 문학, 음악, 미술 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일종의 ‘문화 살롱’이었다. 흔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살기 어렵다고 하지ᅟᅡᆫ, 우리 후손들이 이만큼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가 이화학당에서 닥터 홀을 만나 의사가 되어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수련받은 덕분이다. 우리 후손들은 닥터 홀, 그리고 이화에 감사를 표한다.‘
그렇게 존경받는 삶을 살았던 현덕신은 1962년 11월 27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의사로 살며 여성 운동과 유아 교육에 앞장을 섰다 했다.
다음은 그녀의 묘비명이다.
‘여성을 위한 횃불-한 지사의 슬기로운 아내, 한 아들읭 알뜰한 어머니, 그리고 나라의 딸들을 길러 겸허한 삶을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