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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주석/일반자료 스크랩 23강. 사랑아! 내 사랑아!
제이원 추천 0 조회 172 19.06.15 16: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3강. 사랑아! 내 사랑아! (아가 7:1-10)

 

아 7:1-10=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꿰미 같구나 2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3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4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5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6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7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 8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9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10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그 사랑을 오늘도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를 통하여서 깨닫기를 소망합니다. 술람미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랑아!

내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답고!

어찌 그리 화창하고!

어찌 그리 나를 황홀하게 하느냐!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부른 사랑 노래입니다.

표준 새 번역으로 직역해서 읽으면 더 사실적이고 황홀합니다.

 

오! 나의 사랑!

나를 기쁘게 하는 여인아!

그대는 어찌 그리도 아리땁고 고운가!

그대의 늘씬한 몸매는 종려나무 같고!

그대의 젖가슴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

내가 이 종려나무에 올라가 이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리로다!

그대의 젖가슴은 포도송이요!

그대의 코에서 풍기는 향내는 능금 냄새이고!

그대의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달콤함 맛은 가장 맛 좋은 포도주와 같구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하는 찬사입니다.

그러자 술람미가 화답합니다.

 

님이시여!

내 입술에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그 포도주를 내 님에게 드리리이다!

나는 님의 것이고!

님의 나의 것이라오!

나는 님을 늘 그리워한다오!

 

한마디로 나의 모든 것을 그대에게 드리겠다는 고백입니다.

참으로 부창부수(夫唱婦隨)입니다.

솔로몬이 던져주면 술람미가 받고 술람미가 던져주면 솔로몬이 받습니다.

서로 밀고 당기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노래입니다.

서로를 그윽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부른 사랑가입니다.

요즘 식으로 불러 봅니다.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이리 보아도 내 사랑이로다!

저리 보아도 내 사랑이로다!

 

나는 너를 바라봄으로서 기쁘구나!

내가 너를 생각하므로 행복하구나!

네가 어찌 그리 예쁘고 화사하고 아름다우냐!

내가 너를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황홀하구나!

 

사랑하는 님이 얼마나 예쁘기에 이런 사랑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이런 사랑을 받아 보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모든 인간들이 바라는 사랑입니다.

 

인간들은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사랑타령입니다.

우린 일평생 누구 날 좀 사랑해 줄 사람 없소! 라고 찾아 헤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내가 바라는 사랑을 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사랑받고 싶어하지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어요.

마치 홍수 속에 생수가 없듯이 너도 나도 사랑타령이지만 정작 사랑은 없습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향하여 부르는 이런 사랑 노래를 불러줄 사람은 없어요.

이런 사랑은 세상에 없는 사랑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들 속에선 이런 사랑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아가(雅歌)서의 사랑이야기는 세상 밖 사랑이야기인 겁니다.

천상(天上)의 사랑이야기에요.

이런 사랑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솔로몬은 지금 성령의 감동으로 술람미에게 천상의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상에서 오신 그 분의 사랑을 미리 예표적으로 하고 있어요.

천상에서 오신 그 분이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슨 흠모할 만한 것이 있다고 이처럼 사랑하실까요?

 

우리가 과연 예수님이 흠모 할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을까요?

천둥벌거숭이 같은 노예인 술람미에게 과연 솔로몬 왕이 흠모할 만한 매력이 있었을까요?

단호히 말합니다.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존귀한 왕인 솔로몬이 천하디 천한 노예에게 이런 사랑가를 부른단 말입니까?

천사들도 흠모할 이런 사랑 노래를 부르느냐 이 말입니다.

오늘은 이 불가사의한 사랑가의 원천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천하디 천한 노예에게 고귀한 신분의 왕이 이런 사랑의 찬가(讚歌)를 부를 수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는 예수님과 성도의 예표적인 사랑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술람미를 향한 사랑가가 예수님이 성도를 향한 사랑가인 겁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성도에게 사랑가를 부를 수 있게 하였단 말입니까?

 

과연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사랑노래를 받을 수 있느냐 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러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몸을 버리면서까지 자기 백성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어요.

어떻게 사랑했는가 하면 자기 몸을 십자가에 죽이면서까지 사랑했어요.

이건 솔로몬 왕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것과 같아요.

그럼 어떻게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요?

그건 일방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합니다.

 

눈을 멀게 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에 대한 판단 능력을 상실케 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판단 능력을 상실케 하는가 하면 미움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을 멀게 만들어요.

이걸 편견이라고 합니다.

 

편견(偏見)이란?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뜻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기 자식을 보는 눈과 같아요.

부모의 눈엔 자식이 하는 모든 것이 예쁘게 보이는 것과 같아요.

왜? 부모의 눈엔 자식이 예뻐 보일까요?

 

이는 자식은 자기의 현현(顯現)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하나에요.

자식 속에는 부모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자식을 편견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흔히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고 합니다.

 

사랑에 눈이 멀게 되면 허물도 아름다움으로 보입니다.

모든 것이 다 예쁘게 보여요.

하는 짓이 다 아름다워요.

흠도 매력으로 보여요.

좋게 보이고 예쁘게 보여요.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다 덮어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은 안경과 같아요.

 

사랑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모든 것이 사랑으로 보이고!

미움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모든게 밉게 보여요.

내가 사랑의 안경을 쓰고 보면 상대가 사랑으로 보이지만!

내가 미움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상대가 밉게 보여요.

 

그렇다면 상대방의 형편과 처지와 상관없이 내가 어떤 안경을 쓰고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내가 사랑의 눈으로 보느냐!

미움의 눈으로 보느냐에 달린 겁니다.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랑과 미움이란? 상대방이 결정하는 것이 됩니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해 주면 사랑 받는 대상이 되는 것이고!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면 미움을 받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 주면 사랑받는 것이고 미워하면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이란? 사랑 받는 사람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의 조건에 있어요.

즉 사랑은 사랑받는 쪽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쪽에서 결정해요.

우린 그 결정에 의하여 팔자가 달라져요.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는 상대방의 마음에 따라 팔자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면 술람미처럼 천한 것이지만 왕의 사랑을 받는 팔자가 되고!

예수님이 나를 미워하면 내가 아무리 예쁘게 치장을 해도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결정을 해요.

 

예수님이 죄인을 사랑하는 것은 죄인에게 사랑받을 매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해 주는 겁니다.

우린 다행이도 예수님으로부터 베푸신 일방적인 그 사랑을 받았어요.

그러므로 내가 비록 술람미처럼 천하디 천한 노예 같은 죄인이지만 예수님이 솔로몬처럼 우리를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보여준 사랑이 이래요.

예수님께서 사랑의 눈으로 보는 자는 사랑을 받게 되고!

예수님께서 미움의 눈으로 보는 자는 미움을 받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조건과 전혀 상관없이 말이에요.

 

인간들 입장에선 불공평하다고 데모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을 알고 나면 그럴 수도 없어요.

우린 원래 다 저주 받은 자들이에요.

미움의 대상이란 말입니다.

그 누구도 사랑 받을 자격이 없어요.

그냥 미움 받다가 지옥으로 가야할 자들이에요.

 

그런데 그 미움 받는 자들 중에 얼마를 사랑하기로 한 겁니다.

일방적으로 너! 너! 하면서 불러 낸 겁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선택을 입은 자들은 횡재를 맞은 겁니다.

 

얼떨결에 부르심을 입은 겁니다.

그리곤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한량없는 사랑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펼쳐 보이는 겁니다.

 

봐라! 나는 이렇게 사랑이 많고!

자비롭고!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라고 하십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저 아멘 할렐루야!

주께서 하시는 일이 다 옳으십니다! 라고 찬양할 수밖에 없어요.

이걸 아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성도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 쪽에서 사랑받을 조건을 찾고자 할 이유가 없어요.

날 사랑해 달라고 단장하고 가꿀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조건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자기 쪽에서 사랑의 근거를 마련하려고 한다면 그건 사랑하는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할거야 라고 한다면 그건 예수님을 두 번 죽이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둘 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한 뱃속에서 한 날 한 시에 똑 같이 나온 똑 같은 자에요.

그래서 쌍둥인 겁니다.

차별이 없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어요.

인간적으로 보면 전혀 차별이 없는 자를 한 사람은 사랑했고 한 사람은 미워했어요.

그들에게 어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두 사람에게 각기 다른 안경을 쓰고 본 겁니다.

야곱은 사랑의 안경을 쓰고 보았고 에서는 미움의 안경을 쓰고 보았어요.

누가?

하나님이 그랬어요.

 

야곱과 에서는 예표에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야곱처럼 사랑하는 자가 있고 에서처럼 미워하는 자가 있어요.

사랑하는 자는 뭘 해도 사랑스럽고!

미워하는 자는 무엇을 해도 미워요.

그냥 사랑스럽고!

그냥 미워요.

이유가 없어요.

 

사랑과 미움을 구원과 멸망으로 봅시다.

그럼 구원과 멸망은 인간의 조건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말이 성립이 됩니다.

구원 받을 짓을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멸망 받을 짓을 해서 멸망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판단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쪽에서 구원을 위해서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을 다시 사랑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을 짓을 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야곱이 사랑받을 짓을 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사랑받을 짓을 하기도 전인 복중에서 이미 사랑하기로 결정했어요.

이게 하나님의 사랑 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이런 방식으로 주어졌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항의합니다.

이건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기회를 달라고 합니다.

우리도 사랑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데모하는 인간들에게 아니 너희들이 어떻게 사랑받을 기회를 달라고 하느냐? 라고 하니 우리도 착하게 살아서 사랑받고 싶다고 합니다.

인간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악한 짓을 해서 미워하는 줄 알고 있어요.

이는 자신들이 원래 악한 자임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럽니다.

야~ 이놈들아!

너희는 원래 악한 놈들이야!

너희에겐 착함이 없어!

그런데 어떻게 착하게 살아서 사랑을 받겠다고 하느냐! 라고 합니다.

이 모두가 죄가 눈을 가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야곱은 사랑받을 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은 사랑했어요.

야곱의 조건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말이에요.

그러니 야곱이 사랑받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인 겁니다.

 

이건 아주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에요.

은혜에요!

은혜!

 

그렇다면 야곱이 받은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야곱에겐 사랑받을 만한 조건이 나오면 안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미움 받아야 할 조건들이 나와야 해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한 것이 야곱의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신 은혜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께 사랑받은 사람들의 삶을 면면히 살펴보면 순종의 모습이 아니라 도리어 불순종의 모습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이건 아주 역설적이지만 너무도 중요해요.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불순종의 예표에요.

 

출애굽에서부터 가나안까지의 불순종의 역사였어요.

광야 시대를 보세요.

사사 시대를 보세요.

열왕 시대를 보세요.

모두가 불순종했어요.

결국 앗수르에 망하고 바벨론에게 망한 역사를 갖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순종한 역사를 안고 있지 않고 불순종의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이에요.

지독히도 말을 안 들었어요.

이게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유지 되었어요.

예수님이 오시자 확 드러났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면서 불순종의 역사가 만개(滿開) 한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어떤 식으로 불순종의 모습이 나타났나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인간의 행위가 난무하는 식으로 나타난 겁니다.

예수님이 주겠다는 사랑(의)을 거부하는 형식으로 나타났어요.

 

알다시피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해방이 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럼 유대인들 속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유대인들 속엔 하나님의 은혜는 없고 법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율법으로 나라가 세워져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킨 놈들은 대접을 받고 율법대로 살지 못한 자들은 죄인 취급을 당하며 살았던 겁니다.

 

이걸 상징적으로 두 부류의 인간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리새인과 세리와 창기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율법대로 살아서 큰소리쳤고 세리와 창기들은 율법대로 살지 못해서 주눅이 들어 살았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대로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율법대로 살지 못한 세리와 창기들에겐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대로 살았기 때문에 은혜가 필요 없다고 하던 바리새인들은 지옥으로 보내고 세리와 창기 같은 이방인들은 은혜로 그 나라에 불러들인 겁니다.

이걸 예수님은 나라의 본 자손은 쫓겨나고 이방인들이 그 나라를 차지한다고 하셨어요.

세리와 창기들에게 일방적인 사랑을 베풀어서 천국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를 사랑한 것은 하나님이 구약 이스라엘에게 일방적인 사랑을 베푸신 것과 같은 사랑을 하신 것이에요.

그러므로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간 것은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을 해서인 겁니다.

이걸 잊으면 안 되어요.

만약에 세리와 창기들이 유대인들처럼 잘난 척 자긍하면 그건 은혜를 모르는 자로서 짤려요.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은혜로만 구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지켰으니 천국에 간다고 하는 자들은 법 아래 있는 자들이고!

세리와 창기들처럼 자신들은 저주 받아 마땅하다고 하는 자들은 은혜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법 아래 있는 자들은 자기 조건으로 사랑을 따 낼려고 하는 자들이고!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자기 조건과 상관없이 사랑이 주어진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법 아래 있는 자는 자신이 사랑받을 짓을 했으니 사랑해 달라고 해요.

자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난 천국 갈 자격이 있다고 자신만만해 합니다.

결국 자기 행함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세리와 창기처럼 할 말이 없어요.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에요.

이들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해 주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 의(義)를 바탕으로 잘난 척 하는 인간은 저주하세요.

 

이걸 탕자 비유에서도 말씀해 주셨어요.

탕자 비유를 보면 아버지 명(命)을 어김없이 순종하며 살았던 맏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아버지의 속만 태운 못난 탕자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퍼부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맏아들은 잘난 척 하던 바리새인들이고, 탕자는 못난 세리와 창기들이에요.

맏아들은 선민이라고 자랑하던 유대인을 말하고, 탕자는 개 같은 이방인들이에요.

 

이렇게 되면 인간의 조건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은 죄로 드러나게 됩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을 인간의 조건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의 조건에 따라서 사랑을 주신다고 한다면 인간에게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선(善)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사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여도 소용이 없어요.

그건 어디까지나 내 바램이지 하나님의 요구가 아니에요.

신앙생활이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사랑이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 예쁘게 봐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뻐해 주지 않는데 나만 좋다고 쫓아다녀보아야 소용없어요.

그건 스토킹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정성을 보고 사랑해 주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사랑받을 짓이 없어요.

우리가 어떤 짓을 하면 하나님이 사랑해 준다는 것이 없어요.

 

흔히들 목사들이 사랑받을 짓을 하라고 하잖아요.

그따위로 신앙생활해서 복을 받겠느냐?

아니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니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하잖아요.

 

이건 다 공갈이고 사기(詐欺)에요.

하나님은 우리 형편과 조건을 보고 복을 주거나 사랑을 주시지 않아요.

만약에 우리 형편을 보시고 복을 주거나 사랑을 하면 그건 댓가이지 은혜가 아니에요.

그럼 우리 조건으로 복도 따내고 사랑도 얻어 낼 수가 있어져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형편이나 조건을 보시고 사랑하거나 복을 주는 일을 하시지 않아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은혜이지 댓가가 아니에요.

댓가로 주고 받는 것은 법이지 은혜가 아니에요.

그건 거래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선 사랑 받을 만 하니까 사랑받지! 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아요.

축복 받을 만 하니까 복을 받지! 라는 말이 될 수가 없어요.

은혜 받을 만 하니까 은혜 받지! 라는 것은 없어요.

구원 받을 만 하니까 구원 받지! 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받을 짓을 하니까! 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마음은 가상합니다.

그걸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진 않아요.

진심인 걸 알아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가 은혜입니다.

은혜란 거저 주어지는 겁니다.

거저 주어짐 속엔 인간의 것이 담겨져 있으면 안 되어요.

그럼 은혜성이 사라져요.

 

천국은 은혜의 나라에요.

그러므로 천국에 가는 성도에겐 하나님의 은혜만 담겨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왕의 아들에 혼인잔치로 비유하시면서 천국엔 왕이 준비한 예복을 입고 가는 곳이라고 말씀 하셨어요.

우리가 만든 옷이 아니라 왕이 주는 옷을 입어야 해요.

 

그러므로 천국 가는 성도에겐 온통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만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믿음도 은혜이고!

구원도 은혜이고!

사랑도 은혜입니다.

 

임수정이라는 가수가 부른 “연인들 이야기”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연인들의 사랑이야기를 말해주고 있는 내용이에요.

그 노래 말 중에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 이대로 옆에 있어 주세요” 라는 가사(歌詞)가 있는데 사랑의 정의를 말해주고 있어요.

 

사랑이 뭐냐?

 

무작정 좋은 겁니다!

그냥 좋아요!

이게 사랑이에요.

 

누가 왜? 좋은데! 라고 물으면!

그냥 좋아요! 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이런 마음은 그냥 자연적으로 일어나요.

사랑하는 마음은 막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랑은 국경을 초월하고 신분을 초월해서 목숨 걸고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이 뭐냐?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겁니다.

무작정 좋은 겁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행복해요!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편안해요!

그 사람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가 좋아요!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워요!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요!

 

너무도 사랑하므로 늘 곁에 있고 싶어요.

아프지 않게 보호해 주고 싶고!

편하게 해 주고 싶고!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어요!

이런 게 사랑이에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이에요.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이런 사랑을 하고 있어요.

아가(雅歌)서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행복한 것은 우리가 이런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이미 받았고 계속해서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성경속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들려주어요.

먼 나라 이웃나라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나의 이야기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그러므로 수천 년 전에 있었던 먼 나라에서 일어났던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가 지금 나의 이야기처럼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雅歌)서를 읽으면 내가 바로 술람미라는 것이 느껴져요.

내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이 느껴지고 믿어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술람미를 향한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이 술람미를 보고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어요.

술람미야!

“넌 어쩜 그리도 아름다우냐!”

“나는 그저 너를 바라만 보아도 좋단다!”

“네 모습을 보면 행복하다!” 고 노래하고 있어요.

 

누군가를 사랑 하거나!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행복해요.

그 행복이 노래를 부르게 하고 춤을 추게도 합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마하나임의 춤을 춘 것입니다.

 

춤이란? 기쁨의 표현입니다.

춤은 사랑을 받은 자만이 토해 낼 수 있어요.

그래서 솔로몬은 술람미가 추는 춤을 마치 천사들의 춤과 같다고 마하나임의 춤이라고 했어요.

술람미는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니 저절로 천사처럼 춤을 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사랑이 결국 술람미로 하여금 춤을 추게 만든 겁니다.

 

성경은 은유적으로 “하나님은 하늘”이라고 하고 “성도는 땅”이라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남자”라고 하고 “성도를 여자”라고도 해요.

“하늘을 창조주 영역”이고 “땅은 피조물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창조주”를 상징하고 “여자는 피조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늘이다! 혹은 남자! 라고 말하는 것은 “생명을 주는 분”이란 말입니다.

반대로 성도를 땅이다! 혹은 여자다! 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받는 존재”란 말입니다.

“하늘은 주는 자”이고 “땅은 받는 자”에요.

“남자는 주는 자”이고 “여자는 받는 자”에요.

그러므로 성도를 땅이다! 혹은 여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야 사는 존재란 말입니다.

 

땅은 독자적으로 살수가 없어요.

하늘에서 주어야 살아요.

햇빛도 주고!

산소도 주고!

비도 주어야 땅이 산물을 낼 수가 있어요.

 

이를 성도의 신앙에 적용하면 성도들도 하나님이 주는 것을 받아야 산다는 말입니다.

생명도 받고!

은혜도 받고!

사랑도 받으란 말입니다.

 

땅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마치 여자가 남자에게 씨를 받아서 자식을 생산하는 것과 같아요.

씨는 남자가 주는 것이지 여자가 독자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에요.

여자에게는 씨가 없어요.

씨는 남자로부터 받아야 해요.

 

씨란? 생명이고, 사랑이고, 구원이에요.

예수님 속에는 생명도 있고, 사랑도 있고, 구원도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게 받아야 하는 겁니다.

생명도 받고!

사랑도 받고!

구원도 받는 것이에요.

우리 힘으로 따 내는 것이 아니고 받는 겁니다.

 

예수님은 남자이고 우린 여자에요.

예수님만이 씨를 줄 수 있는 남자에요.

우린 다 여자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주는 것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받는 것을 순종이라고 하고 드리고자 하는 것을 제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않고 순종을 기뻐하신다는 말은 받는 것을 기뻐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받으세요.

받아서 누리세요.

주님의 사랑을 느끼세요.

 

사랑도 받고!

믿음도 받고!

죄사함도 받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 없어요.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모두 예수님에게서만 나오는 것이에요.

거저 주어지는 것들이에요.

 

신앙생활이 뭐냐?

예수님이 주는 것을 받는 겁니다.

믿음도 받고!

구원도 받고!

사랑도 받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선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교인들은 이 가르침에 따라 열심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는 것을 받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다 받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에요.

 

사랑이란? 애쓰고 수고하여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 자연적으로 토해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에요.

생명이 우리 안에서 살아서 뭔가 움직이며 일을 해요.

그럼 우리 몸은 어떤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 있어요.

기쁘면 기쁘다고 표현하고!

행복하면 행복하다고 표현하고!

맛이 있으면 맛있다고 표현하고!

황홀하면 황홀하다고 표현하는 것이에요.

마치 여자가 임신하면 입덧이 생기고 배가 불러 오듯이 육신에 반응이 나타나요.

 

그러니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자는 자연적으로 사랑이 토해지는 겁니다.

감사와 기쁨과 행복이 토해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내어 보이라는 말이에요.

없는 사랑을 만들어서 보여 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내가 준 것이 있잖아! 그걸 내어 보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자세도 그래요.

 

모든 말씀이 역설적 의미를 담고 있어요.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것은 너희는 우상숭배 하는 자라는 말이고!

도적질 하지 말라는 것은 너희는 도적놈이란 말이고!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너희는 살인자라는 뜻이고!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너희는 간음하는 자라는 말이고!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은 너희는 사기꾼이란 말입니다.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 떨어 졌다는 것은 우리 실존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없을 것 같으면 이런 명령을 할 필요가 없어요.

천사들에겐 이런 명령을 하지 않아요.

이런 명령은 죄인에게 떨어졌어요.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말라고 명령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린 모르고 있어요.

이를 알려주시려고 하나님께서 갖가지 명령들을 하시는 겁니다.

명령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성들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우린 죄성을 이길 수가 없어요.

죄성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죄인인 겁니다.

죄성이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성질이에요.

왜냐하면! 죄가 불순종을 타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겐 하나님의 말씀은 지킬 수가 없는 그림의 떡이에요.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명령대로 살아낼 수가 없어요.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탄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엔 성령의 충만으로 살아갈 때에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받으니 자기 안에 죄라는 놈이 말씀을 어기는 쪽으로 끌고 가는 겁니다.

바울이 이러면 안 되지! 라고 하면서도 죄라는 놈이 이끄는 것을 이길 수거 없어요.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탄식하는 것은 스스로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없기 때문에 탄식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바울의 시선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성령이 그러는 거예요.

바울아! 네가 말씀에 순종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네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고 알려 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마귀가 너 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느냐! 라고 하면 예수님이 내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고 하라는 겁니다.

예수님 피를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하고 깨달아가는 겁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땐 태산을 옮길 것 같다가도 나중엔 머리털 하나도 어찌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것이에요.

자기 힘을 빼는 겁니다.

자기 가능성을 죽이는 거예요.

 

율법 아래 있을 땐 혈기 방자하여서 하나님 말씀을 다 지켜 낼 수가 있다고 설치다가도 은혜를 입고 보면 한 말씀도 지켜 낼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아가게 되어요.

그리하여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덩어리임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엔 감사의 조건을 따졌지만 이젠 범사가 감사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지 않고 도리어 힘을 빼 가세요.

우리가 힘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은 외면하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들의 능력으로 이삭을 낳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라의 경수가 끊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삭을 주신 것과 같이 우리의 진(液)을 빼는 일을 하세요.

 

한마디로 죽은 자가 되게 하신단 말입니다.

죽은 자가 되었을 때 일을 하세요.

이는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주고자 함이에요.

죽은 놈에게 생명을 주어서 움직이게 만들어요.

 

그럼 그때부터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움직임이 아니고 하나님의 움직임인 겁니다.

이걸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어요.

성도의 행함이란? 모두가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에 의하여 발생된 사건이에요.

그러니 성도가 무슨 일을 하여도 그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도!

복음을 깨달은 것도!

교회에 다니는 것도!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도!

헌금하는 것도!

성도를 섬기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이 하게 하셔서 한 일이에요.

그러므로 성도는 무슨 일을 하여도 이러한 일을 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본래 죽은 자였으니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일을 하시지 않아요.

자기가 살았다고 하는 놈에게 줘 봐야 자기가 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가 살았다고 자기 능력으로 한 것이라곤 고작해야 이스마엘을 낳는 것이었어요.

이스마엘 같은 사람은 아무리 많이 낳아도 저주 받은 자이고 좇겨 날 자로서 유업이 없어요.

유업은 오직 이삭처럼 하나님이 낳아주는 자라야 해요.

 

하나님이 낳아주는 자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식을 생산 할 수 없는 죽은 자가 되어야 주어져요.

사라의 경수(月經)가 끊어졌다는 것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라가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여자기 되도록 죽을 때까지 기다린 겁니다.

사라가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죽은 몸이 되자 하나님은 죽은 사라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겁니다.

 

이렇게 죽은 자를 가지고 일을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방법이에요.

왜? 이렇게 일을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의 것만 남기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것에 인간의 것이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넌 그저 가만히 있고 내가 주는 것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생명도 받고!

은혜도 받고!

사랑도 받고!

구원도 받는 겁니다.

 

이를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천애고아와 같이 천하디 천한 노예를 왕이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가장 천한 자에게 가장 고귀한 왕의 사랑을 아낌없이 다 주고 계신 겁니다.

이처럼 사랑은 받는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는 것을 거부해요.

자신도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겁니다.

 

아까 하나님은 죽은 자를 가지고 일을 하신다고 했지요.

하나님은 죽은 자에게 하나님의 것을 채우세요.

죽었다는 것은 죄인이란 말입니다.

그럼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는 자기에게서 하나님의 의가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요.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아요.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지 않아요.

도리어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를 도와주소서! 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요.

룻이 보아스에게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어 주소서! 라는 고백을 한 것처럼 도와달라고 하게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설치면 설칠수록 숨어버려요.

받고자 하지 않으니 숨는 겁니다.

다 안다고 하고!

다 가졌다고 하고!

스스로 배가 불러 있는데 무엇을 주겠어요.

 

바리새인들처럼 다 가졌다고 생각해요.

자기들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해요.

자기들도 의(義)가 있다고 해요.

예수님이 의(義)를 주겠다고 하니 싫다고 거부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세리와 창기들에게 가서 자신의 의(義)를 주는 겁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주는 겁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을 받았어요.

 

솔로몬 왕이 천한 노예에게 자신의 사랑을 준 것이나!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에게 사랑(義)을 준 것이나 동일해요.

노예나 창기나 일방적으로 왕이 주는 사랑을 받았어요.

세리와 창기가 예수님이 주는 것을 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구원이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는 거예요.

무조건적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받을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죄인에겐 하나님께 사랑받을 만한 것이 없어요.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죄란? 독자적으로 살고자 해요.

자기 가능성으로 살고자 해요.

그러므로 죄인들은 자기 힘으로 살고 자아숭배로 살아요.

 

자아숭배란? 자기 가능성을 바탕으로 자기영광을 도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눈만 뜨면 자기 가능성으로 자아확장을 꿈꾸는 겁니다.

오늘보다 내일의 더 나은 꿈을 꾸며 사는 겁니다.

이건 본능이기 때문에 억제되지 않아요.

 

이런 자아숭배적인 본능이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가 지켜내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는 것입니다.

눈만 뜨면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 둘씩 지켜내고자 해요.

마치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을 한 점 두 점씩 올려 가듯이!

또한 산악인들이 히말라야의 14 고지를 하나하나 정복하려고 하듯이 하나님 말씀도 지켜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온통 뭔가 하여야 하는 것으로 붙잡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들이 마치 고승들이 고행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수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보게 되면 부담이 되어요.

말씀 하나 하나를 대할 때 마다 이걸 어떻게 지켜낼까 고민하게 되어요.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행함에 따라 웃다가 울게 되는 겁니다.

말씀을 지켰다고 생각하면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뿌듯하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낙심이 되어서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마치 무슨 고지(高地)를 하나 하나 정복하듯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 하나를 지키고 자아를 성취하는 것으로 하고 있어요.

보람을 느끼고 자기 영광을 챙기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군인들이 전투에서 하나 둘 전공을 세워서 받은 훈장을 가슴에 달고 자랑하듯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로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이런 사람이 되자고 합니다.

여러분! 술람미를 닮읍시다.

술람미처럼 단장합시다! 라고 합니다.

 

알다시피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술람미의 온 몸을 은유적으로 조목조목 들어가면서 아름다움을 극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건 솔로몬이 술람미를 바라보고 토해낸 이야기에요.

 

술람미가 이렇다는 말이 아니고 솔로몬이 이렇게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보든지 자기 안에 심미안(審美眼)으로 보아요.

즉 자기 안에 있는 마음에 눈으로 보고 있어요.

그러므로 사람마다 아름다움이 달라요.

 

아름다움이란? 주관적(主觀的)인 겁니다.

 

주관적이란? 자기 기준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아름답다고 하는 아름다움이 달라요.

마치 사람마다 좋아하는 색깔이 다르듯이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키가 큰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키가 작은 사람을 좋아해요.

 

어떤 사람은 뚱뚱한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마른 사람을 좋아해요.

 

어떤 사람은 피부가 흰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피부가 까무잡잡한 것을 좋아해요.

이건 그 사람의 미적(美的) 취향이에요.

 

처럼 솔로몬이 술람미를 바라보는 아름다움도 그건 솔로몬의 주관적인 미적(美的) 감각이지 객관적인 것이 아니에요.

솔로몬의 눈에만 술람미의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온 몸의 지체(肢體)들이 아름답게 보인 겁니다.

실제 술람미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솔로몬이 술람미의 몸매를 종려나무 같다거나, 목은 상아 망대 같다거나, 배꼽을 술이 담긴 둥근 잔과 같다고 한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솔로몬 혼자의 은유적 표현인 겁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제가 만약에 여러분의 눈을 보고서 당신의 눈은 호수 같고!

당신의 얼굴을 달덩이 같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건 내가 보는 안목(眼目)이지 다른 사람들의 안목이 아니에요.

내 눈에는 최고로 예뻐도 남의 눈엔 안 예쁠 수가 있어요.

 

그러니 솔로몬이 술람미의 신체적인 아름다움을 갖가지 형상으로 빗대어서 은유적으로 표현을 한다고 하여서 그게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안목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에이! 그건 아니지! 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들 나름대로 아름다움으로 보는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째서 솔로몬은 술람미를 극찬하면서 사랑노래를 부릅니까?

이는 솔로몬의 눈에 술람미가 예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예쁘게 보니 예쁜 것이지 실제로 술람미가 예쁜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술람미는 솔로몬이 온갖 좋은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써가며 자신의 몸을 아름답다고 칭찬한다고 해서 본인이 그렇다고 생각해서 자긍하면 안 되어요.

그래 난 예쁜 여자야!

난 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라고 자랑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아름답게 보는 것은 내 기준이 아니고 보는 사람의 기준이에요.

보는 사람이 예쁘다고 하면 예쁜 것이고 밉다고 하면 미운 겁니다.

속된 말로 보는 사람이 호박을 수박으로 보면 수박이고, 수박을 호박으로 보면 호박인 겁니다.

이걸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어떤 사람이냐는 중요치 않아요.

내가 아무리 갈고 닦아도 나를 보는 분이 밉다고 하면 나는 미운 자에요.

자기 딴엔 비싼 화장품으로 예쁘게 보이려고 메이크업을 하고 성형 수술을 하여도 보는 사람이 예쁘게 보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요.

 

이건 예수님이 성도를 사랑하는 것에도 동일해요.

예수님이 성도를 사랑한다고 해서 성도가 자기 자신에게 사랑의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어요.

예수님이 성도를 사랑하는 것은 성도에게 무슨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그냥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제 눈에 안경이에요.

예수님 눈에 아름답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지금 솔로몬 눈에 술람미가 그래요.

이건 솔로몬이 술람미를 보는 안목이에요.

 

그러니 이걸 오해해서 우리가 이렇게 가꿉시다! 라고 하면 안 되어요.

속된 말로 솔로몬이 술람미의 배꼽을 술잔이라고 했으니 우리도 배꼽을 술잔처럼 성형수술하지 말란 말입니다.

예쁜 것은 성형 수술 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예전에 아마존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터리에 보면 조에 족이라는 부족이 나옵니다.

조에 족의 여자들은 아랫입술을 뚫어서 긴 뿔을 달고 다녀요.

조에 족에겐 그게 최고의 아름다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 눈엔 아름다움이 아니고 추함이에요.

만약에 조에 족 여인이 저에게 사랑한다고 달려들면 전 기절할 겁니다.

왜냐하면! 전 그런 여자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조에 족 여자처럼 우리의 아름다운 기준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면 예수님은 기절을 해요.

그건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식으로 아름다움을 만들려고 하지 마세요.

 

술람미가 예쁜 것은 술람미를 보는 솔로몬의 눈에 달린 것이지 술람미의 외모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솔로몬에게 잘 보이려고 자기 외모에서 조건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럼 자기 조건으로 나아가게 되어요.

이건 자기식 사랑이지 솔로몬식의 사랑이 아닙니다.

 

솔로몬식 사랑은 술람미의 조건과 상관없어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눈으로 보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겁니다.

이걸 왜곡시키지 마세요.

왜곡시키면 죄에요.

 

솔로몬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반대로 술람미가 자기 쪽에서 예뻐하는 조건으로 만들어서 나아가는 것은 법이라고 해요.

법은 내가 이렇게 단장을 했으니 반드시 사랑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은혜는 나에겐 사랑 받을 조건이 없는데도 사랑을 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분의 일방적인 결과에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의로워서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다 여겨 주시기 때문에 의로운 겁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그 여겨주심이 곧 사랑인 겁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친 그물 속에 들어온 고기를 심판하는 것과 같다고 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이 그물 속에 들어온 고기 중에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의 판단 기준은 고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인에게 있어요.

주인이 어떤 고기를 좋아하느냐에 따라서 좋고 나쁨이 결정되어요.

예를 들어서 주인이 꼴뚜기를 좋아하면 꼴뚜기가 좋은 고기에요.

주인이 고등어를 싫어하면 고등어는 나쁜 고기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제가 자란 어촌에선 멸치를 저인망식으로 잡았어요.

강원도 말로 “후리질” 이라고 하는데 배가 멸치 떼가 있는 곳을 멀리서 그물로 둥그렇게 감싸서 바닷가에서 그물 이쪽과 저쪽에서 끌어당겨서 잡는 방식입니다.

 

그물을 양쪽에서 끌어당겨서 그물이 국자처럼 좁아지면 그 속에 멸치가 가득해요.

그런데 그 속에 보면 각종 고기들이 잡혀 있어요.

그럼 어부들이 멸치 이외의 고기는 다 골라내서 밖으로 던져내요.

그럼 밖에 있던 사람들이 다 주어가는 겁니다.

 

어부들이 골라내는 것은 그 고기들이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잡고자 하는 어종(魚種)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멸치잡이에서는 멸치가 좋은 고기에요.

다른 고기는 나쁜 고기에요.

그 고기가 나빠서가 아니라 잡고자 한 고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천국이 그래요.

천국의 주인인 하나님이 어떤 고기를 좋아 하느냐 에요.

하나님이 술람미나 세리와 창기 같이 자기 의라고는 전혀 없고 예수님의 사랑을 가득 담고 있는 자들을 좋아하면 세리와 창기들이 좋은 고기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바리새인들처럼 잘난 척 하는 인간들을 싫어하면 나쁜 고기인 거예요.

 

예수님이 바라는 고기는 세리와 창기들이에요.

자기 의(義)라곤 털끝만큼도 없이 죽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술람미처럼 불쌍한 자들이에요.

예수님이 사랑해 주지 않으면 천애고아와 같이 살다가 지옥으로 가야하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담아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좋아하세요.

죽은 자들에게 자기 생명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세요.

당신의 사랑을 나타나시기를 기뻐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그대로 하시고 계세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할 일을 맡기셨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세리와 창기 같은 자들에게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받은 사랑은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려 온 겁니다.

마치 쓰나미처럼 밀려 왔어요.

우리에게 어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눈처럼 내려 덮쳐온 겁니다.

내가 준비할 것이 없어요.

 

우린 그 사랑에 사로잡힌 것뿐입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온 세상을 창일하게 뒤덮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침몰 시킨 겁니다.

우린 그 사랑이라는 물결 속에 끌려 다니고 있어요.

우리를 감싸고 있는 분의 힘에 능력이 우리를 끌고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힘으로 따낼 방법도 없지만 부어진 사랑을 거부할 수도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면 우린 그대로 수용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냥 우리 속에 뚫고 들어와서 우리를 장악해 버려요.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아! 내 사랑아!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우냐고 감탄하고 있잖아요.

널 볼 때마다 기쁘다고 하잖아요.

넌 어찌 그리 화창한지 나를 쾌락케 한다고 하잖아요.

이는 술람미가 솔로몬이 주는 사랑을 받아서 마음 껏 만끽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화창하다는 것은 기쁨에 충만 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술람미가 솔로몬이 주는 사랑을 받아서 행복해 하는 모습을 엿 볼 수가 있습니다.

여인에게 있어 최고의 행복은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여인은 남자에게 사랑을 받으면 행복해집니다.

 

옛말에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했어요.

사랑을 하면 눈이 빛나고 얼굴에 화색이 돌아요.

술람미는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온 몸에 화색이 돌았어요.

 

솔로몬이 술람미의 발부터 머리까지 칭찬하는 것은 언행심사 모두가 신랑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향기가 토해진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삶 전체가 역동적이고 생기가 넘친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의 칭찬을 보면 술람미에겐 삶에 그늘이 없어요.

즉 근심걱정이 없어요.

건강한 삶에 모습을 좋은 은유를 들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들이 말합니다.

 

너는 귀한 분의 딸이라고 합니다.

이는 귀한 분에게 속하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귀한 분이란? 솔로몬 왕 자신을 말해요.

 

그래서 술람미는 솔로몬에게 속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속하였다 함은 한 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말과 같아요.

 

그러니 솔로몬은 술람미를 통하여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난 이렇게 자비로운 분이다!

난 이렇게 긍휼이 풍성한 분이다!

난 이렇게 사랑이 많은 분이라는 겁니다.

 

이러면 왜? 솔로몬이 술람미를 그토록 칭찬하고 사랑노래를 부르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술람미가 가진 모든 것이 솔로몬이 준 것이에요.

술람미 속엔 솔로몬이 준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요.

 

결국 솔로몬은 술람미를 통하여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천한 술람미를 사랑한 것은 곧 천한 노예를 통하여서 자기 자신의 자비심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예수님을 위하여서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한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기쁘려고 만물을 만든 것과 같아요.

 

쉬운 말로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으면서 자기 작품에 만족해하는 것과 같아요.

야! 멋지다!

잘 만들었어! 라고 감탄하는 것과 같아요.

 

창세기 1장을 보세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손수 만드시고 감탄하셨어요.

야! 멋지다!

누가 이렇게 잘 만들었을까!

자화자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도 이와 같아요.

예수님이 홀로 다하시곤 기뻐하시는 겁니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를 도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런 사실을 알았어요.

 

사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죄를 도말시키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잖아요.

이건 마치 자식이 병들어 있으면 부모의 마음이 불편하니 자식의 병을 고치는 것과 같아요.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 자신을 위해서에요.

자식이 아프면 부모의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죄인의 죄를 도말한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인 겁니다.

하나님 자신이 안식하기 위해서 자기백성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 아래 두고선 하나님이 안식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아들을 보내서 구원케 하신 거에요.

 

그러니 우리를 위한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구원인 겁니다.

이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되어요.

이걸 놓치면 구원이 나를 위한 구원이 되어버려요.

 

예수님은 마치 나를 구원해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은 것이 되고 말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입니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한 약속이 자기의 죽음으로 자기백성들을 살려내는 것이었어요.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이룬 약속을 이루다보니 생겨난 전리품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창세전 언약을 위한 구원인 겁니다.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창세전 언약을 위한 구원이기 때문에 성도는 창세전 언약을 위한 도구들인 겁니다.

도구들이니 구원을 자기 용도로 챙기는 것은 반칙이고 악이 되는 겁니다.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이 사실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앞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바울은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했어요.

즉 하나님께서 내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살라고 구원을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구원은 곧 하나님을 위한 구원인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백성의 죄를 도말하신 것이에요.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 속엔 하나님의 영광만 담겨 있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의 영광이 있으면 안 되어요.

오직 구원해 주신 분의 영광만 있어야 해요.

 

사 42: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보세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우상이란? 인간을 말해요.

그러니 구원의 영광을 인간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을 위한 구원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구원 속엔 인간이 자랑 받을 것이 없어요.

오로지 구원해 주신 분의 자랑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천국에 데리고 가는 것도 거기서 세세토록 어린양만 찬양하게 하기 위함이에요.

피조물은 어린양을 찬양하는데 동참하는 것이 영광이에요.

 

이를 사도바울은 만물은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고 말한 겁니다.

그러니 성도가 행하는 모든 영광은 예수님이 다 차지하세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위하여 성도를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찬송하게 하려고 지었다고 하잖아요.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뭐라고 합니까?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다고 하지요.

뭘 하려고 지었다고 합니까?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고 지었다고 하지요.

예수님을 찬송케 하려고 성도를 구원한 겁니다.

천국에 가면 세세토록 해야 하는 일이 뭔가 하면 예수님을 찬양하는 일이에요.

 

구원이란? 예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겁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보면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고 하지요.

목자가 잃은 양을 찾고 기뻐해서 잔치를 벌였어요.

잃은 양을 찾고서 자기가 기쁜 겁니다.

우린 예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에요.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를 그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술람미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기뻐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치장해 놓고 자기가 기쁜 겁니다.

조각가가 조각품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만족하며 기뻐하는 것과 같아요.

이걸 주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겁니다.

 

영광이란 말은 거울에 비췬 것과 같아요.

거울 속에 비췬 자기 모습을 기뻐하는 것과 같아요.

솔로몬은 술람미를 통해서 비추어진 자기 모습에 기뻐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 속에 비췬 자기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하는 사랑노래는 결국 메아리가 되어서 솔로몬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통하여서 마음껏 영광을 받고 있는 겁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기쁨조인 겁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기쁨조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통하여서 기뻐하세요.

예수님 홀로 기뻐하시려고 우리의 구원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홀로 다 이루신 겁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다 이루셨어요.

 

그러니 예수님은 성도를 보면 기쁜 겁니다.

이리 보아도 내 사랑이고!

저리 보아도 내 사랑인겁니다.

여기저기를 살펴보아도 온통 예수님의 흔적들로 가득한 겁니다.

 

그래서 그대는 나의 기쁨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대만 보면 황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라고 탄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꼬라지로 희비하면 안 됩니다.

꼬라지가 이래도 예수님의 피가 온 몸에 발려져 있어요.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고 살아야 하는 겁니다.

 

낙심하지 말고 담대하세요.

마귀가 그 어떤 것으로 참소하더라도 그 참소를 주님의 사랑으로 이겨내세요.

주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술람미가 자기 꼬라지를 본다면 늘 슬픔에 잠겨 살아야 했어요.

그러나 술람미는 솔로몬의 사랑의 약속을 믿었기에 자기 자신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감사하면서 춤을 추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여러분을 예쁘다고 합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사랑스럽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마세요.

 

예수님이 아름답다고 하면 아름다운 겁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예뻐함을 받은 자답게 담대하게 사세요.

그대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술람미입니다.

이 믿음으로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하디 천한 죄인을 아름답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모습 속에 예수님의 흔적들만 가득히 채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것만 오롯이 보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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