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합잡을 추구하는 여운형은 대통령 후보 지지율 1위 였다
여운형읗 시기한이는 노덕술 장택상 조병옥 한민당 등
고든 만나면 친일파 재산 환수법등이 통과되고 여운형이 대통령 될 시점에 테러가 일어난다
여운형 기념관을 부실하게 운영한 양평 김선교의원
김선교는 양평 몽양 기념관을 새마을 회로 넘김
여운형 죽인이 한지근
한지근은 윤봉길의 심정으로 테러했다고 함.친일을 숙명으로 여김
여운형의 경호원을 체포하는 경찰
김섭이 거액의 수임료을 받고 한지근 변호 수임료의 출처는 이승만 만 안다고
수사 경찰은 노덕술
여운형 테러에 검사는 조재천 검사
조재천 11대 법무장관을 표창하는 이승만
여운형
1947년 한반도 냉전을 끝낼수 있는 방법을 장택상 노덕술 조병옥이 망쳤다고 미는 판단
몽양에게 대한민국 1급 대한민국장 수상- 노무현
몽양기념회 초대회장 이부영
여운형은 8월 15일 당일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발족시키고 장권[36]의 치안대와 이정구[37]의 식량대책위원회를 통해 민생의 안정을 꾀했다. 여운형이 일본의 항복보다 며칠 앞서서 이러한 기구의 결성을 구상하였던 것이 분명한데, 일본 항복 4일 전인 8월 11일에 진주할 연합군에게 제출할 4개 항의 합의 초안을 작성해 놓았으며, 조선은 조선인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38] 즉 이러한 준비를 거쳐서 탄생한것이 조선건국동맹을 계승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였다는 것.
이에 따라 1945년 8월 16일 건준 활동으로 정치범이 석방됐다. 당시 남한에서 석방된 죄수는 합계 약 16,000명이나 되었다. 서울에서만 1만 명이었으며, 대구에서는 1,600명이 출옥했다고. 그리고 조선인 사병 15,000명이 일본군에서 전역했으며, 이러한 수많은 사람들 외에도 수만의 한인 청년들이 일본의 청년단체, 노동수용소 및 작업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며칠 사이에 수만 명의 한인이 해방되어 치안유지 임무와 정치적 동원에 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전국의 조선인들은 8월 17일에 정식으로 건준의 발족을 알게 되었고, 불과 5일 후 이것을 영도하는 긴 한인의 명단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39]
하지만 좌우익을 규합하는 통일적 기구로 조직되었던 당초의 뜻과는 달리, 송진우 등 동아일보계는 불참하고 임정 봉대를 선언했으며, 안재홍 등의 조선일보계 / 신간회 우파 세력은 사회주의 세력이 건준의 요직을 장악한데 불만을 품고 건준을 개조하고자 '전국 유지자대회'와 '건준확대위원회'를 연달아 제안했으나, 모두 무산되자 건준을 이탈했다.
건준의 결성 초기부터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게 된 것은 여운형•건국동맹과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적 친화성, 그리고 일제시기 이래 사회주의자들의 친분관계도 바탕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소련의 서울 진주 소식이 크게 작용했다. 여운홍에 따르면 여운형은 8월 15일 아침에 엔도를 만난 뒤 정백과 함께 돌아와 단독으로 담소를 나누었으여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이기 때문에 사태가 달라졌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중략) 이에 여운형과 건준 참여세력들은 사회주의 계열을 적극 참여시켜 소련군의 남한 진주에 대응하는 국가건설을 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1
미군정 실시가 임박하자 여운형은 군정청을 상대로 협상력을 얻기 위해 건준을 모태로 일종의 과도정부인 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했으며, 지방 건준 조직을 인민위원회로 개편시켰다. 그러나 미군은 군정 실시 이후 인공의 존재를 부인하고 협상을 거부했다. 군정 당국은 여운형도 불순한 좌익 정치인, 심지어 친일파로 인식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방의 건준 지부들은 많은 수가 지역 유지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연대로 조직된 일종의 좌우 합작적 통일 전선이었는데, 인민위원회으로의 개편을 전후하여 좌파에게 장악되고 말았다. [40]
그러나 인공의 수립이 조공의 일방적인 독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운형도 인공 수립에 적극 관여하였다. 여운형은 9월 6일의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개회사와 격려사에서 비상한 시기에 연합국의 진주에 대비하여 "연합국과 절충할 인민총의 집결체"로서 인공이 수립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여운형은 또한 "혁명가는 정부를 조직하고 인민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인민이 승인만 한다면 조선인민공화국과 그 정부는 그대로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여운형은 북한에서의 "소군정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국의 공동방침으로 해석"하여 남한에서 "미군 역시 조선인민에게 맡길 줄로 예상"하는 낙관적 정세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여운형은 일제시기부터 혁명단체와 혁명가들이 중심이 되어 과도정권을 수립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정권구상은 인공과 다르지 않았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5
여운형은 인공 수립에 합의한 뒤 건준 내부의 반발에 부딪치자 조각발표를 보류하려고 하였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여운형은 인공 대표대회에서 인사도 했고 인공 부주석의 지위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7
여운형은 아무것도 몰랐고 박헌영만이 주도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여운형이 요양중이었던 것은 맞으나 각료 명단은 여운형과 합의하였으며, 발표만이 박헌영의 독단이었다.[41] 발표도 여운형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다.
인공 수립 당시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각도 관공서와 일본인 공사 재산을 압수하고 일군을 무장해제시켜, 모든 것을 조선인민에게 맡길 뿐 그 목적이 없는 듯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소군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군의 공동한 최고방침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며 미군도 38도 이남에 진주하여 오면 역시 조선인민에게 모든 것을 맡으라 할 줄 예상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맡을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급히 인민대표회의를 열어 국호를 결정하고 정부조직법을 결정하며 인민위원을 선거하였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9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날 민주주의 조선을 건설함에 있어 구태여 빛깔을 문제삼을 필요가 어디 있느냐. 모두가 합력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면 그만이 아니겠느냐 … 조선인민공화국이라면 적색으로 아는 사람은 소학교 1학년과 같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여운형#
여운형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여운형을 박헌영과 같은 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이라기보다는 사회민주주의 혹은 진보적 민주주의[42] 쪽에 가까웠다고 평하고 있다. 《인민당의 신념》에서 그러한 그의 정치 노선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운형은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고 유물론을 신봉할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 임을 천명했고 근로자와 인민 대중의 이해를 대변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마르크스주의에 찬동하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과 계급 독재에 대해서는 찬동치 않는다"[43]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여운형은 뚜렷한 사회주의적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마땅히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미완의 통일 조선민주국가 건설을 위해 함께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44] 본디 구상이 어쨌든, 이는 궁극적으로 안재홍을 비롯한 우파 측의 이탈을 낳았다. 이와는 별개로 여운형은 상륙하는 미군을 맞이하기 위해 하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지 사령관 및 연합군 여러분!
나는 조선인민공화국을 대표하여 국제 파쇼 군국주의에 대하여 세계평화 민주주의 승리를 위하여, 따라서 우리 조선민족의 해방을 돕기 위하여 영웅적으로 싸워준 여러분께 최대 경의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인민공화국은 조선 전 민족, 해내해외의 각계각층의 대표자를 망라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선출한 인민위원 50명에 의하여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을 위하여 조선인민 대중의 생활을 확보하고 더 나아가 국제평화의 유지와 민주주의 국제적 연대성의 확보를 위하여 충실히 노력하려 합니다.
여러분의 특별한 협력과 원조를 희망하려 합니다. 또 여러분을 통하여 연합국의 국민 병사 대중에게 우리의 최선의 인사를 전하여주시기 바랍니다.[45]
9월에 미군정이 실시되고 나서 상황은 여운형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는데,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은 조선인의 정치 활동을 인정하지 않고 미군정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선언하였다. 이 때문에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는 지하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당시 미군정이 건준 산하의 치안대를 어떻게 대우했는지는 아래의 증언을 보자.
미군정은 치안대가 경찰서에 들어가서 치안을 맡고 있는걸 전부 쫓아내고, 전부 일제 경찰들을 오라고 하여 경찰을 조직해서 치안을 맡도록 했어요. 군인민위원회, 청년단, 치안대 이런 사람들이 모두 빨갱이들이다...
당시 장흥 치안대에 참여했던 강수의의 증언
또한 미군정 인사들(존 하지 등)은 인민위원회를 공산주의 단체로 인식하여 모두 해체하도록 지시하였고, 인민위원회가 자체적으로 치안을 맡았던 그 자리에 일제강점기 때 경찰들을 80% 이상 복귀시켰다.[46] 이는 여운형의 정치적 입지에 큰 타격을 입혔고, 후에 여운형이 수차례 테러를 당하고도 보호받지 못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여운형: 1945년 8월 15일 오전 7시에 전 정무총감인 엔도가 조선인민의 대표들을 불러 “4~5일 후면 서울에 붉은 군대 선발대가 도착할 것이며,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에 우리가 무장해제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8월 15일 오후 서울에는 붉은 군대가 서울로 오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시민들은 붉은 군대를 조용히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아 매우 실망했으며, 38선이 획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더욱 불만스러워 했습니다.
로마넨꼬: 당신은 우리의 활동이 군사적인 것이며, 우리는 명령받은 바로 그 지역까지만 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여운형: 나는 38선 이남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감옥에 있는 정치범들을 석방시키는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정치범들이 주축이 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당신은 북조선에서 인민위원회가 발전해 가는 것과 같이 미군이 진주한 남조선에서도 그러리라고 믿습니까? 그러나 실제 사실은 다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로마넨코 소장과 여운형의 미소공위 재개문제 논의
한편 미군정에서는 비록 사회주의 단체의 수장이라는 직함이 꺼림칙했지만 화려한 전적을 지녔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지닌 여운형을 어떻게든 이용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여운형은 몇몇 부분에서는 미군정에 의존하지 않겠노라고 확실히 선을 그었기 때문에 미군정에게도 외면을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군정에서는 여운형을 미군정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라고 깠다. 그래서 별명이 'Silver Axe(은도끼)'였는데, 몽양 평전에서는 겉으로는 매력적이지만 이용하려니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쓸모없다는 뜻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은으로 만든 도끼로 장작을 패면 은이 물러서 쓸모가 없으니, 언뜻 보기에는 대화가 통하고 영향력이 있으며, 은이라고 할 만한 실력자이기 때문에 미군정이 활용하기 좋아보여도, 실제로는 완고하고 미군정에 비협조적이라서 활용 가치가 없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만 해도 그는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은 정치인이었고 좌우 갈등이 그렇게 표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여운형은 노력만 한다면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서 물러나고 38도선이라는 지리적 분단은 해소되어 통일된 정부가 수립될 것이라고 보았다. 1945년 10월 여운형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고 정파 간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민주당, 조선공산당 등과 함께 좌우진영요인합작회의를 개최한다. 인공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그는 민족 통합을 위해 인공도 해산할 수 있다며 회의를 주도했다. 그 결과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가 설립됐으나 10월 16일 이승만의 귀국으로 정국의 관심이 그에게 쏠리면서 동력을 상실했다. 10월 23일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로 전환되며 회의의 주도권이 이승만에게 넘어갔다. 오래지 않아 이승만의 편파적 태도로 좌파 세력이 독촉 중협을 대거 이탈했다. 여운형 역시 독촉 중협을 탈퇴한다.
여운형은 11월 12일 조선인민당을 창당했다.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창당하며 토지 개혁과 중요산업 국유화, 친일잔재 척결을 주장하는 등 자본주의의 바탕에 계획 경제를 도입한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했다. 아래는 조선인민당 창당 당시, 여운형이 했던 주장이다.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 과거 지하운동시대 어두컴컴한 감방을 걷다 만나 껴안고 감격하던 혁명투사 간에 민족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없었던 것 아닌가[47]
이를 위해 여운형은 파시즘, 친일파를 제외한 나머지 세력의 연합전선, 인민전선 결성을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인공 중앙인민위원회와 임시정부 요인의 결합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적인 인기를 받고 있던 여운형은 송진우 등 우익은 물론 박헌영 등 좌익에게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김구 등 임시정부 세력도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여운형을 경계했다. 여운형이 통합을 제안하자 임시정부는 임정의 법통과 조직 인정을 요구했다. 좌익에게는 구색으로 2개 ~ 3개의 신설 부서만을 제안했다. 이로 인해 김구와 여운형의 합작은 무산됐다.
5.3. 신탁통치 논란과 입장[편집]
그 해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통해 접한 직후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던 김구는 격노하여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외치며 반탁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소련에서 돌아온 극좌 정치인 박헌영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선언을 하여 각자 독선적인 노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조선은 우익-반탁 좌익-찬탁으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신탁통치 결정에 대해 온건 중도는 통일 임시정부 항목에 긍정적인 태도를 나타냈지만, 이승만, 김구를 위시한 강경반공, 민족주의 우파세력들은 극렬히 반대했다. 그나마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송진우는 경교장에서 김구를 만났을 때 반탁운동에 대해 신중론을 주문하는 견해를 밝혔는데, 그 날 백의사 소속의 한현우한테 암살당했다.
송진우 암살 이후로 좌우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중도에 가까웠던 김규식은 반탁노선에 반대했다가 지속적으로 테러를 당하게 되었으며, 김구는 지속적으로 반탁궐기대회를 열었다. 한편 여운형과 인민당은 박헌영의 공산당과 함께 홍명희를 위원장으로 하는 이른바 '반팟쇼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반탁운동에 나섰다가, 박헌영과 공산당이 돌연 3상 회의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사실상 등을 떠밀려 찬탁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여운형은 신탁통치로 인한 좌우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인민당과 조선공산당, 한민당, 국민당, 4당 대표회담을 주선했다.[48] 이 자리에서 3상회의에 대한 원칙적 지지, 합리적인 문제를 통한 신탁통치 문제해결 등의 내용을 담은 4당 코뮤니케가 발표됐으나 반탁정신 몰각을 이유로 한민당, 국민당 등이 연이어 합의를 번복하면서 무산됐다.[49] 여운형은 이갑성이 이끄는 신한민족당을 포함한 5당 회담을 통해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내려 했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여운형은 정치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에 실망하여 "우리 같은 지도자들이 없었던들 통일은 벌써 되었을 것이다. 조선 지도자들은 1차 시험에서 모두 낙제다."라고 실망이 역력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여운형이 구상했던 민족통일전선은 좌익 일색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으로 변질되면서 좌익 내에서의 인민당의 입지가 몰락하고 공산당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또한 이때부터 여운형은 지속적인 백색테러에 시달리게 됐다.
5.4. 좌우합작운동[편집]
한때 미군정은 여운형을 친좌익으로 인식해 멀리 했으나, 대화해보니 일단 영어가 되는 사람이었고[50][51] 또 그가 과거 인공 부주석 시절부터 계속해서 협조노선을 펼쳤기 때문에 쿠데타를 기도했던 이승만, 김구나 친소파 박헌영 등을 싫어하던 미군정은 그나마 협력이 가능해보이는 여운형, 김규식 등 중간파를 합작시켜 정치세력으로 키우고자 했다.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을 대체할 필요가 있었다. 민주의원은 대부분 이승만, 김구 등 반탁세력으로 구성돼 있었다.[52] 지나치게 우경화된 성격으로 인해 민주 의원은 대중적 지지가 부족했고 소련과의 협상에서도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미군정은 여운형, 김규식에게 새로운 임시입법기구 설립을 맡겨 군정의 지지기반을 넓히고 이승만, 김구 등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 좌우합작운동을 누가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는가는 학자에 따라 의견이 조금씩 갈린다. 이 문서에서는 거의 모든 것을 여운형이 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주로 우익측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 아래에서 쓰인 칼럼이나 논문에서는 여운형에 대한 언급은 교묘하게 빼고 김규식이 합작운동을 주도한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일찍부터 여운형은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해 김일성 등과 좌우의 협력방안을 논의해 왔다.
1946년 7월 25일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합작운동을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화하는데 성공한다.[53] 외형 상으로는 조선공산당과 한민당 등 좌우의 양극단까지 모두 포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틀 만에 박헌영은 토지몰수, 군정종식 등 우익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좌우합작의 원칙으로 제시했다. 좌우합작이 미군정이 공산당을 고립화시키려는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정 문서에 직접 공산주의자는 "고립화"되어야 한다고 쓰여 있다. 조선공산당은 좌우가 모두 참여한 선거를 통해 지지만큼의 지분을 얻고 싶어했다. 김구, 이승만 계열에서 볼 때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여운형이 공산주의자나 진배 다름없었으므로 여운형을 공격했다. 한편 북한에서는 이를 "미제의 놀음에 말려들었다"고 비판하고 있다.[54]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은 축소 내지 고립화되어야 함
공산당은 1/16~2/16의 역할을 갖게 하거나 고립화
과도입법기구안#
좌우합작은 비록 공산당의 고립화 전략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동시에 이승만•김구로 대표되는 이른바 극우세력을 정치의 중심에서 배제하는 효과도 있었다. (중략) 중간파가 주도한 합작운동은 좌우대립을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수립한다는 점에서 극좌극우를 대체하는 대안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실주의 입장에서는 실현가능성이 낮았다. 무엇보다 좌우합작운동을 대리하고 있는 김규식•여운형의 힘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극우극좌세력에 지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중략)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사회주의세력이 배제된 중간파 집단의 대표성을 소련이 수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185~186
이후 내놓은 좌우합작 7원칙 또한 친일파 처단 문제에서 즉시 처단을 주장했던 박헌영과 뒤로 미룰 것을 주장한 우파 계열에게 공격당했고, 토지배분 문제에서도 당연히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할 것을 주장한 박헌영과 유상매수 유상분배를 주장한 우파 계열에게 비판받았다. 분명 유조건매수 무상분배라는 안이 그대로 시행되었다면 재정문제가 심했을 것임은 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좌우합작위원회가 개최되던 즈음 북한에서는 양대 좌파정당이었던 북조선공산당과 북조선신민당이 북조선로동당으로 통일되어 사회주의적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조작했고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이관술, 박낙종, 송언필과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인쇄소 노동자들에게 누명을 씌웠다. 박낙종, 송언필은 박헌영과 친분이 하나도 없어서 김철수 중심으로 공산당을 만들려 했던 사람들이고, 김철수는 좌우합작 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이관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보수 유림 김창숙의 며느리 손응교도 인품을 증언하는 사람이고 이관술의 제자 이효정은 여운형의 건국동맹에서도 일한 적 있었다. 여운형의 측근이었던 전사억은 정판사 사건의 참고인이 되었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55] 자기 측근 전사억도 말려들었지만 냉혹하게도 여운형은 이를 좌파의 주도권을 되찾아올 기회로 보고 미군정에 박헌영을 "경우에 따라서는 7월 29일에 있을 위폐 사건 재판에다 엮어 투옥하라고 암시”[56]했다.
다만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화전양면전술에 따라 행동했기에 진심인지는 의문이다.
김일성이 입법기관 참여에 대해 반대하자 여운형은 한 발짝 물러섰다. 그(여운형)는 "미국에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한편 그들을 치는 화전양면 전술을 당의 노선으로 채택해야 한다"며 북로당이 반대하면 입법기관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당신이 좌익들로 하여금 입법의원에 참가하지 않도록 충고한다면 나는 거기에 들어가지 않겠다. 서울로 돌아가서 남로당 창당을 위해 일하겠다. 만일 미국인들이 합법적으로 남로당을 창립할 가능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의 당명 아래서 그것을 만들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근로인민당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남과 북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전당대회에서 당의 이름을 정하면 될 것이다." 이후 두 사람(여운형과 김일성)은 소련의 세계정책과 조선문제 해결과정에서의 역할 등에 논의했다. 두 사람은 "조선은 소련의 원조 하에서만이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합의했다.
<로마넨코의 보고서> (인용은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197의 번역임.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번역)
여운형: 조선은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은 아직 해방되지 않아 여기에 비합법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넨꼬: 어떻게 해방이 안 됐습니까?
여운형: 해방이라고 되기는 했지만 미국인들로부터 다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로마넨꼬: 왜 그렇습니까?
여운형: 최근 남조선의 반동세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이 그들을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넨코 소장과 여운형의 미소공위 재개문제 논의
로마넨꼬가 스티코프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여운형은 본래 3당 합당에 반대했으나, 김일성에게 설득당해 3당합당을 수락한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귀하와 박헌영, 백남운 및 기타 저명한 정치인들의 지도하에 좌익 정당들의 합당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만일 이 사업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라면 일시적으로 중지해야 한다.”
김일성의 이 발언은 여운형의 아픈 곳을 건드렸습니다. 여운형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 안을 돌며 한참 만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합당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을 로동당으로 합당할 것이다. 남조선으로 돌아가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완수해 낼 것이다. 나는 로동당의 지도자가 될 것이고 우리 당은 남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당이 될 것이다. 나는 미국인들이 나를 체포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체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9월 총파업의 지도자를 체포하려 한 결과를 보고 있다.”
로마넨꼬가 스티코프에게 보낸 편지 중#
당시 공산당 내부에서 박헌영을 몰아내고자 당대회 소집을 주장한 이른바 대회파가 출현하면서 박헌영의 주도권이 무너지는 듯 했으나, 박헌영은 대회파를 재빨리 탄압하여 출당시키고는 인민당과 신민당 내부의 박헌영파를 조종하여 즉시 흡수 통합을 요구하며 상황이 반전되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신중론을 내세웠으나, 인민당 내부 표결에서 48대 31로 합당이 가결되었고, 신민당에서는 당수였던 백남운조차 몰랐던 합당 결정을 거쳐 억지로 남조선로동당 (남로당)이 결성되고야 만다. 좌우합작으로 인기가 높았던 여운형의 주도로 합당이 진행되어 통합정당이 대중정당으로 출범할 경우, 박헌영 등 조선공산당이 쥐고 있던 주도권이 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여운형은 사회로동당에는 이름만 올려놓고 남로당에 힘썼으며 이 내막은 박병엽 증언록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을 보면 알 수 있다. 사회노동당은 김철수 등 공산당 대회파가 주도한 정당이다. 박병엽 증언록을 봐도 스티코프 일기를 봐도 여운형은 사회노동당과 선을 긋는다. 오히려 여운형은 사로당 해체를 위해 노력한다. 사회노동당은 공산당 대회파 등이 명백히 남로당에 반대하여 만든 정당이고, 이후 여운형이 창당하는 근로인민당은 남로당과 갈등하는 좌익까지 통합하기 위한 정당으로, 사로당과 근로인민당은 성격이 다른 당이다.
여운형이 김일성•김두봉에게 보낸 편지(1946.11.30)
내가 11월 16일에 보내 편지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며 이하는 그 보고사항의 연속입니다.(중략) 나는 좌익진영의 통일이 중요한 문제이며 당내 파쟁을 중지시킬 최선의 방법은 사회노동당을 해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의 지도분자인 몇몇 은퇴한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당으로 복귀할 것입니다. (중략) 강진과 백남운은 합동에 관여하지 않고 있으며 끝까지 싸울 테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박병엽 구술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215
백남운은 자신은 사회로동당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사회로동당의 선언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여운형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티코프 일기#
이 무렵 좌우합작위원회도 난관에 처해 있었다. 당초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원할 때 군정을 뒷받침할 입법 기관 설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의원의 절반을 좌우합작위원회가 추천해달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미군정의 제안을 받아들여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고 그 안에 입법기관 설립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57] 그러나 중간파를 제외한 좌익과 우익은 각각 입법기관 설립과 토지개혁을 문제삼아 좌우합작 7원칙을 비판했다. 게다가 좌우합작위원회의 지지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출이 진행되며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를 배신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입법기관 설립을 지지하는 조건으로 추천권 뿐 아니라 정치범 석방, 행정기구 개혁, 친일파 숙청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막상 선거가 확정되자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가 내건 조건을 외면했다. 김규식 등 우파에서는 개혁입법을 내세워 선거에 참여했지만 여운형 등 좌파는 선거불참을 선언했다. 이로 인해 1946년 12월 입법의원 개원 이후 좌우합작위원회는 분열됐다. 게다가 조봉암, 홍명희, 김약수, 이극로 등 좌우합작위원회에 불참한 민족주의 세력이 독자적으로 '제3 전선'을 결성하면서 여운형과 좌우합작위원회는 또 다시 타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은 북에 있는 김일성과 김두봉 및 소련군정의 인사들을 만나러 위험을 무릅쓰고 농부로 변장하여 5번이나 북한을 방문하는 등 갖은 노력을 하였다. 여운형은 12월 4일 민전 의장직 사퇴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정계은퇴 선언 후 여운형은 고향 양평에 은거했다. 그러나 미소공위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며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여운형의 복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김일성도 여운형의 복귀를 후원했다.[58] 1947년 3월 인도에서 열리는 범아시아회의 한국대표로 임명되며 여운형은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한다.[59] 5월 24일 남조선 신민당 내 백남운 세력, 조선 공산당 내 반(反) 박헌영 세력과 함께 근로인민당 (근민당)을 창당하고, 중간파 결속을 위해 이른바 '시국대책협의회'를 결성한다.
여운형과 김일성의 의도와 달리 사로당 관계자들이 남로당과 갈등하자, 김일성과 여운형이 근로인민당 창당으로 대응한 것이다. 즉 사로당의 공산당 대회파와 조선인민당 출신들이 남로당과 계속 갈등하여 좌익 통합이 안 되니까 여운형을 중심으로 뭉치는 근로인민당을 만들어 좌익 통합을 하라고 김일성이 여운형을 설득한 것이다.
김일성은 백남운에게 사로당에서 탈당한 뒤 남로당으로부터 배척당한 사람들이 여운형을 중심으로 재집결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이미 했었다. 김일성은 여운형에게 백남운과 공산당 대회파 출신의 이영, 나아가 장건상같은 중도세력까지를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로당 지도부는 여운형에게 사회노동당을 완전히 해체한 바탕 위에서 몽양이 나서서 보다 대중적인 정당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했던 것이다. 북로당은 여운형에게 공산당 대회파 출신들 가운데 종파분자들을 새 당의 중앙간부로 뽑아서는 안 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당 강령에 대해서는 이전의 인민당•신민당 강령의 수준이면 될 것 같다는 의견교환도 있었다. 북로당 지도부는 특히 몽양에게 사로당의 공식 해체과정을 밟는데 힘써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몽양도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약속을 하였다.
여운형은 사로당 출신들 가운데 남로당에 입당하지 않은 사람들을 결집시켜 2월 26일에 근로인민당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인민당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공산당 대회파 출신들을 당에 끌어들이는 게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북로당이 개입하게 됐던 것이다.
박병엽 구술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226~236
스티코프 일기나 박병엽 증언록을 보면 박헌영 뿐 아니라 여운형의 의사결정에도 평양과의 의사교환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로인민당은 북로당이 개입해서 만든 정당이다.
한편 역사학자 김기협은 인민당의 전술계획이라는 사료를 보고 다음과 같이 분석하기도 한다.
인민당의 전술 계획
1. 우리는 남조선에서 합작추진 우익을 반대하는 반동적 요소를 좌우익 합작과정에서 평화적 전투를 통해 저지해야 한다. 우리는 소극적인 반탁진영이 반동적 지도자와 미국의 영향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오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공산당에 대한 반동적 공격을 약화시켜야만 한다.
우익의 분열에서 바라는 효과를 “공산당에 대한 반동적 공격을 약화”시키는 데 있다고 했다. 그(여운형)는 공산당이 좌익의 ‘본산(本山)’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믿었다. 인민당의 역할을 공산당에 대해 보조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남로당이 세워진 뒤 그가 남로당에 대항하던 사로당을 해체시키고 근민당을 창당한 것도 이 관점을 지킨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남로당이 이남 좌익을 위한 첫 배라 보고, 그 배를 놓친 사람들을 위해 두 번째 배로 근민당을 만든 것이었다.
김기협, 해방일기
그러나 근민당 창당 2달 뒤 여운형은 암살당했다.
5.5. 테러 위협과 암살[편집]
여운형이 당한 테러는 세계 정치사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최다 기록 수준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인 1925년 12월에도 임정의 본분을 벗어나 개인적인 명예를 추구하고 다닌다는 비판을 받아 괴한의 습격으로 가족들과 함께 구타를 당한 적이 있었다. 광복 이후 여운형은 우익 진영의 테러 1순위가 되었다. 지지자들은 우익이 지지 기반이 약했다고 하고 비판자들은 그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립하면서 사회주의에 지나치게 관대했기 때문에 다른 운동가들처럼 공격 대상이 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인간 관계가 좋았고 몸이 건장하였기 때문에 여러차례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강원룡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송진우를 죽인 암살범인 한현우도 처음에는 여운형을 죽이려고 했다 한다. 만약 이것이 시행되었더라면 송진우보다 여운형이 먼저 죽었겠지만 탑골 공원에서 죽이려고 다가가는데 여운형이 한현우를 알아보고 "어이, 현우군! 오랜만일세."라고 어깨를 툭툭 쳐주며 인사했기 때문에 도저히 죽일 수 없어서 송진우를 먼저 죽였다고 한다. 아래 예는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정확히는 2년간 총 12차례 테러를 당했다. 이런 직접적인 테러뿐만 아니라 협박 전화와 편지, 비방 벽보, 심지어 살인을 교사하는 신문 기사(이종형의 <대동신문>)까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여운형은 5번째 테러를 당했을 적에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겠다."고 말하였고 아버지를 걱정하는 자식들에게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앞날을 예견하는 듯 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첫댓글 나철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대종교의 초대 교주.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몽양은 현충원 못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