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의 겨울
옛 광화문 광장이 그립다
1950년대 말 독일 TV에서 서울 풍경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마침 학생 기숙사 휴게실에서 여러 친구들과 우연히 그 풍경을 보았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때 서울 거리를 본 친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갑자기 “와우!” 하는 감탄사와 함께 필자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는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반응에 내심 놀란 것은 필자 자신이었습니다. 아시아에 위치한 먼 나라의 도시 정도로 보았을 텐데 왜 이리 놀라워할까 궁금했습니다.
며칠 후, TV에서 본 서울 도시 풍경을 친구들이 언급하기에 “서울의 어떤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필자가 기대했던 경복궁이나 당시 중앙청 건물이 아니라, 중앙청에서 바라본 광화문 거리였습니다. 지나다니는 차량은 많지 않았지만 ‘굉장히 폭넓은 거리 광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를린의 ‘보리수 거리(Unter den Linden Strasse)’나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가 연상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는데 광화문 광장이 무척 인상적이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영국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 미국 워싱턴에는 링컨 기념 광장(Lincoln Memorial), 중국 베이징에는 천안문(天安門) 광장이 있습니다. 이렇듯 세계 유수 대도시에는 하나같이 넓은 광장이 있어 아마도 오래전 독일 친구들도 광화문 광장을 보며 서울이 세계 수준급 도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추측했습니다.
얼마 전 삼성미술관 리움(Leeum)에서 전시 중인 <한국건축예찬 -땅의 깨달음>전을 관람했습니다. 우리 전통 가옥이나 사찰들이 주변 지형과 자연스레 어우러져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마치 한 폭의 그림인 듯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건축미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감탄하다가 조선시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 당시 도시 모습을 축약해 제작⋅전시한 대형 모형물(1142.5x340.6cm,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소장, (주)기흥성 제작) 앞에서 또 다른 감동을 받았습니다.
문득 “사람들은 은연중 경복궁이 자금성을 모방해 (중략) 지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자금성이 완공된 것은 1420년이고 경복궁은 1395년에 완공되었으니, 경복궁이 25년 먼저 지어진 것이다.”(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 ‘인생도처유상수’ 중에서)라는 글을 떠올리며 새로운 감흥을 느꼈습니다. 또한 전시 모형물을 보며 광화문 앞에 조성한 육조거리의 폭이 상대적으로 아주 넓은 것에 놀랐습니다. (참조, 사진 자료/광화문과 육조거리만을 부각시킴). 즉 오늘날 광화문 거리의 폭이 620년 전 넓은 모습 그대로를 지켜온 것이라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광화문 광장은 어수선하고 복잡하며 볼거리가 너무 많아 조잡하기까지 한 ‘시장 바닥 같은 광장’으로 변모하고 말았습니다. 정책 담당자가 ‘서민은 시장 바닥 같은 분위기를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게 됩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는 시민을 얕보는 일이며, 시민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성왕(聖王)인 세종대왕을 기리는 동상과 영웅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한곳에 배치한 것도 문제이지만, 성왕이 신하의 뒷모습을 줄곧 보게끔 모시는 것이 예(禮)에 크게 어긋나며, 신하 이순신 장군이 성왕보다 더 높은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도 참으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오늘날 광화문 광장은 다른 도시의 광장이 주는 탁 트인 시야를 확보하지 못해 답답하기만 합니다. 반세기 전 독일 친구들이 본 ‘시원하고 넓은’ 광화문 광장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연중행사로 열리는 다양한 먹거리 축제며 볼거리 축제 등으로 ‘도시 광장’이 주는 시각적 안식처로서 기능을 더욱더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광화문 광장은 우리의 국격을, 그리고 시민의 품격을 떨어뜨려 짜증스럽고 부끄럽게 만듭니다.
을미년 올해를 보내며 소망하건대 620년 전 우리 선조들이 광화문과 육조거리를 아우르는 큰 광장을 조성하며 후손에게 전한 메시지를 다시 되새겨 이제 ‘광장다운 광화문 광장’을 우리에게 되돌려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펌] / 필자; 이성낙(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 2015년 12월 29일 (화) 02:52:09
헌책방
파리 센 강변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1951년 미국 시인 조지 휘트먼이 노트르담 성당 맞은편으로 옮겨온 이 고서점은 헤밍웨이의 단골집이었다. 영화 ‘비포 선셋’의 주인공들이 만난 장소로도 유명하다. 선교사 딸 실비아 비치가 다른 곳에서 문을 연 전력까지 합치면 역사가 100년 가까이 된다.
세계 최초 책마을인 영국의 헤이온 와이도 낡은 책방에서 출발했다. 50여년 전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이 마을 출신 청년이 헌 창고를 책방으로 개조한 것이 지금은 40여개로 늘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연간 50만명이나 된다. 미국 LA의 더 라스트 북스토어에서도 오래된 책의 풍미를 맛볼 수 있다. 2층에는 앤티크 소품을 파는 가게도 있다. 낡은 레코드음반 판매점 등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물건이 많다.
최근에는 새로 생긴 중고서점들의 인기도 치솟고 있다. 2012년 조지아주에서 시작해 8곳으로 지점을 늘린 월스 오브 북스는 워싱턴DC까지 진출했다. 이 집 주인은 “박물관이나 극장 같은 문화공간이자 사람들이 찾고 싶어하는 헌책방이야말로 좋은 투자처”라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에서 헌책방이 성업 중인 이유를 세 가지로 꼽았다. 헌책방은 인근 주민들이 책을 사고팔며 함께 모여 읽는 지역친화적 문화공간인 데다 뜻하지 않는 책을 만나는 즐거움으로 외지인들까지 불러들인다. 은퇴한 베이비부머들이 집을 줄여 이사하면서 내놓는 헌책을 젊은이들이 산다. 수익성도 좋다. 원가의 10%에 사서 50% 안팎에 파니까 이문이 쏠쏠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고책방이 가파른 성장세다. 온라인 서점 중고책 사업의 ‘원조’ 격인 알라딘은 해외까지 합쳐 20군데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인터파크 도서의 중고책 구입 전용 차량 ‘북버스’와 예스24의 ‘바이백’ 서비스, 교보문고의 ‘스마트 가격비교’ 프로그램도 인기다. SK플래닛 11번가의 중고 도서 매출은 지난해보다 6.8배나 뛰었다. 헌책을 소독기에 넣고 자외선으로 살균한 뒤 포장해 전달하는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지난해 국내 중고책 판매시장 규모는 2470억원으로 2010년(1180억원)보다 두 배 이상 커졌다. 올해는 2700억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헌책방을 찾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느리게 둘러보는 재미’를 얘기한다. 낡은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거닐다 우연히 맘에 드는 옛날 책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이야말로 새 책에서는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묘미다.
[펌] / 출처; 한경닷컴 / 고두현(한국경제 논설위원) / 2015-12-28 20:14:53
더불어민주당
지난 20일 치러진 스페인 총선에서 좌파 정당 ‘포데모스’와 중도우파 정당 ‘시우다다노스’가 돌풍을 일으키며 견고한 양당체제를 무너뜨렸다. 포데모스는 ‘우린 할 수 있다’, 시우다다노스는 ‘시민들’이란 뜻이다. 30여년간 권력을 주고받아온 국민당⋅사회주의노동자당과는 명칭에서부터 차별화된다. 이탈리아에는 디지털 기반 정치세력으로 출발해 일약 제3당에 오른 ‘오성(五星)운동’이 있다. 오성은 물⋅환경⋅교통⋅관계⋅경제 등 5개 민생 분야를 가리킨다. 폴란드 집권당은 ‘법과정의당’, 핀란드 제2당은 ‘진짜핀란드인당’이다. 당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법과정의당은 우파이고, 진짜핀란드인당은 반이민⋅반유로 정책을 내걸고 있다.
정당의 이름을 짓는 일은 쉽지 않다. 당의 이념⋅가치⋅노선⋅비전을 반영하되, 부르기도 기억하기도 쉬워야 한다. 한국 현대정치사에 수많은 당명이 존재했지만, 역시 압권은 2008년 한나라당 친박근혜계 공천탈락자들로 구성된 ‘친박연대’가 아닐까 싶다. 가치나 노선 대신 특정 개인과의 친분을 공공연하게 내세운, 해괴한 이름이다. 더욱 기막힌 것은, 정치를 희화화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역구 6명과 비례대표 8명을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 성과에 감명받았는지, 최근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지지자들이 ‘친반연대’ 창당준비위원회 등록을 마쳤다고 한다. 정작 반 총장 측은 무관한 단체라며 당혹감을 표시하고 있다니 웃지 못할 코미디다.
‘개명’ 자주 하기로 유명한 제1야당이 또다시 이름을 바꿨다. 새정치민주연합은 ‘희망민주당’ ‘더불어민주당’ ‘민주소나무당’ ‘새정치민주당’ ‘함께민주당’ 가운데 ‘더불어민주당’을 새 이름으로 선택했다. 약칭으로는 ‘더민주당’을 검토했으나 원외정당 ‘민주당’의 반발 등을 고려해 결정을 미뤘다고 한다. 현 제1야당의 당명은 2000년대 이후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통합민주당→민주당→민주통합당→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 등으로 바뀌어왔다. 개명할 때마다 명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민들은 당 이름의 변화보다 당 체질의 개선을 바란다. 나와 내 가족의 삶을 나아지게 해준다면 당명이야 무엇이든 상관없을 터다.
[펌] / 출처; 경향신문 / 김민아(경향신문 논설위원) / 2015.12.28 20:40:01
명자나무(Common flowering quince)
같은 듯 다른 유대민족과 한민족
디아스포라 유대인 구심점은 구약
한민족은 역사 정체성 바로 세워야
한민족의 웅비의 날이 다가오는가. 을미년을 보내고 병신년을 맞으면서 이상하게도 우리 민족의 기원문화를 생각하게 되고, 유대민족과 비교를 하게 된다. 한민족과 유대민족은 여러 면에서 매우 대조적이면서도 같은 하늘신앙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다.
유대민족은 스스로를 ‘선민(選民)’이라고 한다. 하나님(여호와)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는 뜻이다. 이에 비해 한민족은 스스로를 ‘천손족(天孫族)’이라고 한다. 하늘(하나님)의 정통자손이라는 뜻이다.
유대민족은 알다시피 구약(토라)을 믿는 민족이다. 유대민족은 일찍이 나라를 잃고, 세계 각지로 흩어져서 살아왔다. 그래서 스스로의 처지를 ‘디아스포라’라고 말한다.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다 보니 믿을 것은 ‘돈’밖에 없었지만, 그들의 정신과 영혼은 구약에 의해 유지되었다. 이에 비해 한민족은 광활한 만주 땅을 잃어버리고 일부는 중국에 동화되고, 나머지는 한반도로 이주해 살았지만 작은 영토는 유지했다. 한민족은 작은 땅에서 잦은 외침에 시달리면서 외래사상에 사대하면서 살아왔다.
서로 다른 역사과정에서 유대인은 ‘불의 신화’와 가부장의 전통 속에서 ‘실체적 사고’를 통해 살아왔고, 한민족은 ‘물의 신화’와 끈질긴 여성성에 의지해 ‘심정적’으로 살아왔다. 유대그리스도 문화전통은 밖으로 나가 지금 세계적 지배문화가 되어 있고, 한민족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 세계평화를 안에서 꿈꾸고 있다. 두 민족문화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대조적이다.
유대인은 지금 실질적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유대인들의 머리가 좋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현대사상을 이끌고 있는 주요 인물인 마르크스, 프로이트가 유대인이고, 현대과학의 상징인 아인슈타인도 유대인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역대 인물을 보면 유대인이 약 27%(노벨경제학상은 42%)를 차지한다고 한다.
오늘날 세계금융시장과 석유⋅곡물시장의 메이저들도 유대인이다. 석유결제통화를 달러로 제한함으로써 미국의 달러본위제를 실질적으로 정착시킨 인물인 키신저, 컴퓨터와 스마트폰 시대를 연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그리고 세계적인 영화감독 스필버그도 유대인이 아닌가.
디아스포라 당한 유대인은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정치⋅경제는 물론이고, 과학기술⋅문화예술 등 문화 권력을 다 잡고 있다. 그 힘으로 1차 세계대전 후 이스라엘을 중동 땅에 다시 세웠을 것이다. 유대인의 힘은 구약에 있다고 한다. 유대인은 구약을 끊임없이 읽고 써왔다.
이에 비해 한민족은 어떤가. 한민족은 좁은 땅에 살면서 유대인의 여호와에 해당하는 ‘환인’, 그리고 환웅과 국조단군을 두고 있지만, 우리의 성경인 ‘천부삼경(天符三經)’은 잊어버린 채 외래종교와 사상에 의지해 살아왔다.
한민족도 유대인만큼 머리가 좋아 ‘아시아의 유대인’이라는 별명도 얻고 있지만 유대인이 이룬 세계문화사적 업적에 비할 수는 없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훈민정음)’과 ‘금속활자’가 있었지만 이들이 한민족의 사상을 정리하고 펼치는 데 이용되지 못했다. 급기야 외래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탓으로 현대에 이르러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벌였으며, 지금도 그 이념에 따라 남북 대치 중이다.
한민족도 일제식민 기간 중 해외 각지로 흩어져 살았고, 겉으로는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처럼 보이지만, 통일을 이루기는커녕 도리어 극심한 체제 경쟁과 반체제 정서 속에 살고 있다. 유대인의 자기긍정과 민족 정체성과 달리, 한민족은 아직도 자기부정과 사대사상에 젖어 있다. 한국인만이 한국의 근대발전상을 모르고 있다고 한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결국 자신의 경전(신화)과 법전과 역사를 스스로 쓸 줄 모르는 탓이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사상이 있지만 한국인에게는 한국사상이 없다. 유대인에겐 구약이라는 구심점이 있지만 한민족에게는 알맹이가 없다.
신화와 역사가 없는 민족, 남의 신화와 남의 역사에 의해 사는 민족은 경제가 아무리 성장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역사 앞에 굴복하고 만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역사는 현재적으로 써가고 있는 민족의 영원한 신화이면서 고향이다. 주체적 글쓰기를 하지 못하는 민족은 역사의 미아가 된다.
역사적 식민지란 남(이웃나라)이 써놓은 텍스트(역사)에 의존하는 민족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과거에 한때 식민지였던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문화식민지가 문제인 것이다.
다가오는 병신년에는 무엇보다 우리 역사를 스스로 쓸 줄 아는 국민이 되는 것이 선결과제인 것 같다. 주체적으로 역사를 쓰는 일은 자신감과 자긍심으로 미래를 열어가는 역사를 쓰는 것을 말한다. 세계적으로 한국의 경제 위상에 맞는 역사와 문화예술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역사적 과제이다.
문화에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큰 법칙이 있다. 자신의 문화를 확대재생산해 나가는 민족과 국민은 흥하고, 그렇지 못한 민족과 국민은 망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비판과 반대가 확대재생산에 도움이 되는가, 방해가 되는가를 시금석으로 삼아야 한다.
고대에 인류문화의 찬란한 등불이 되었던 한민족에게 신(神)은 다시 인류평화를 구현하라는 사명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병신년을 앞두고 해본다.
[펌] / 출처; 세계일보 / 박정진(문화평론가) / 2015-12-28 21:07:14
둔군입풍년화
쑥맥과 병신년(丙申年)
한자로 표기하는 곡식 명칭은 신기할 정도로 다양하다.
쌀은 미(米)와 도(稻), 보리는 맥(麥)이나 모(牟)로 쓴다. 밀은 소맥(小麥), 메밀은 교맥(蕎麥), 조는 속(粟)이다. 콩은 대두(大豆), 팥은 소두(小豆), 강낭콩은 완두(豌豆)다. 콩의 다른 표현인 숙(菽)을 붙여 강낭콩을 융숙(戎菽)이라고도 쓴다.
율무는 의이(薏苡), 들깨는 계임(桂荏)이나 명유(明油), 참깨는 지마(芝麻) 혹은 유마(油麻)라는 어려운 표현도 있다. 수수는 고량(高粱)으로, 옥수수는 옥고량(玉高粱)으로 표기한다. 수수에는 촉서(蜀黍)라는 낯선 명칭도 있다.
한국과 중국 농경사회에서는 주식인 쌀 외엔 콩과 보리가 익숙한 곡식이었다. 그런데 농사 짓는 이들에겐 눈 감고도 알아낼 콩(숙⋅菽)과 보리(맥⋅麥)를 구분하지 못하는 둔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을 가리켜 `쑥맥`이라고 불렀다. 숙맥(菽麥)의 된소리 발음이다.
숙맥의 원말은 숙맥불변(菽麥不辨)이다. 콩과 보리를 제대로 변별하지 못하다는 의미다. 아이가 봐도 금세 알 수 있는데 분간하지 못하니 바보라는 놀림이다.
2016년은 육십갑자로 병신(丙申)년이다. 붉은 원숭이띠 해인데 `병신`이라는 어감 때문에 벌써 패러디가 난무한다. `병신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라는 정겨운 인사를 해도 앞 단어만 부각되면서 여성들에게는 욕으로 들린다는 얘기도 있다.
120여 년 전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에 걸친 개혁작업을 추진하던 조선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청일전쟁과 명성황후 시해라는 수모를 당하고 무너졌다. 병신년(1896)부터는 사실상 일본제국주의 세력에 국권을 잃은 상태로 접어들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해 간 을사늑약보다 10년 전에 이미 식민지 처지로 곤두박질쳤던 것이다. 발음만 갖고 쑥맥과 병신을 이용한 패러디가 새해를 맞는 시점에 난무하니 별로 유쾌하지 않다.
주역으로 육십갑자를 해석하는 학자 중에는 병신년을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때라는 주장도 내놓는다. 병은 창조와 도전, 신은 질서와 법을 뜻한다는 것이다. 발음이 같다고 병신년을 바보나 쑥맥으로 빗대지 말고 새로운 질서 구축을 향한 기회로 받아들여보자. 개인이든 국가든 운세는 좋게 해석하고 그렇게 밀고 나가야 좋은 결과를 얻는 법이다.
[펌] / 출처; 매일경제 / 윤경호(매일경제 논설위원) / 2015.12.28 19:11:59
납매(臘梅)
덕담(德談)
글피면 병신(丙申)년 새해다. 엄격히 말하면 ‘병신년’은 아니다. 병신년은 설날인 2월 8일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양력 1월 1일부터 ‘○○년 새해’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새해 인사를 양력 1월 1일과 설날 아침 두 번 하게 된다. 음력과 양력이 비빔밥처럼 뒤섞이면서 생겨난 새 풍속도다.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건네는 축복과 축하의 말을 덕담이라고 한다. 요즘은 아랫사람이 어른에게 하는 기원도 덕담이다. 그런데 설날에 주고받는 축복과 기원을 뜻하는 단어를 하필이면 ‘덕담’(德談)이라고 했는지 그 어원이 궁금한 적이 있다. 고대 중국의 점치는 행위에서 나왔다는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수긍할 만한 답은 찾지 못했다.
논어 학이편을 읽으면서 ‘신종추원 민덕귀후의’(愼終追遠 民德歸厚矣)라는 문장에서 덕담이라는 단어가 유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신종추원’은 부모나 조상의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낸다는 뜻이다. ‘민덕귀후의’는 백성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라는 의미다. 이 문장에서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는 행위’와 ‘덕’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관계를 짓고 있다. 이 때문에 “설날 차례를 지낸 뒤 세배를 하면서 나누는 이야기를 ‘덕담’이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이다.
덕담의 어원이 어디에서 비롯됐든 단어의 의미는 변하기 마련이다. 덕담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덕담의 종류도 다양하고, 덕담을 건넬 일들도 많아졌다.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와 회사 동료 등 대상도 넓어졌다. 덕담을 하는 날도 결혼식을 비롯한 기념일이나 행사일, 성탄절 등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멋진 덕담도 있지만 그저 그런 덕담도 있다. 최근 눈길을 사로잡은 덕담은 지난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탄 메시지다. ‘빛이 없는 성탄은 성탄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빛이 비치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기를….’ ‘대립과 반목이 사라지기를 기원합니다. 이것들은 어둠입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빛이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칭찬도 일종의 덕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험담보다는 더 많은 칭찬과 덕담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칭찬이나 덕담을 마음에 잘 새기지 않는다. 오히려 덕담보다 횟수가 적은 덕담의 반대말인 악담이나 시기, 험담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이런 것들은 쌓이면 병이 된다. 사상의학의 창시자 이제마 선생은 일찍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악은 (능력 있는)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이라고 갈파했다. 미움과 시기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를 치료할 수 있는 명약은 칭찬과 덕담이 아닐까. 병신년 새해를 덕담으로 시작해 보자. 거창할 필요도 없고, 따뜻한 말 한마디, 칭찬 한마디면 충분할 것이다.
[펌] / 출처; 서울신문 / 강동형(서울신문 논설위원) / 2015-12-29
귤
재미있다고 하기엔 심각하고, 심각하다고 말하기엔 귀엽다. 제주에서 황감(귤)이 진상되면 궁궐에서는 과거를 치렀다. 황감제다. 정조 3년(1779년) 12월의 황감제에서 황당한 일이 일어난다. “감귤을 나눠 줄 적에 매우 혼잡스러웠다”고 단순하게 기록했지만 단순하지 않다. 과거 보러 온 선비들이 서로 귤을 받겠다고 분탕질을 쳤다. 처음도 아니다. 숙종 25년(1699년)에도 ‘과거장 황감 탈취 사건’이 있었다. “감귤을 나눠 줄 때 유생들이 앞다투어 탈취했기 때문에 분란이 일었다.
이번에는 전일보다 더 극심하다. 명색이 선비들인데 임금의 하사품이 중한 줄 모르니 괴이하고 한심하다.” 황감제에서 점잖은 선비들이 귤을 더 받겠다고 분탕질 친 일이 매우 잦았음을 알 수 있다. 처벌은 엄했다. 중죄로 다스렸다. 정조 때는 성균관 대사성과 과거장 담당 승지가 파직된다. 귤 때문에 국립대 총장급(성균관 대사성)이 파직된 것이다. 분탕질을 친 과거 응시자들은 ‘과거 응시 제한 조치’를 받았다.
귤은 귀한 과일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이미 쓰시마 섬, 제주도의 귤이 개성으로 올라온다. 고려 선종 2년(1085년) 2월에 “쓰시마에서 감귤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동사강목). 조선 태종 18년(1418년)에는 일본 쓰시마 좌위문대랑이 황감(柑子⋅감자) 320개를 바쳤다는 왕조실록의 기록이 있다. 벼슬 이름(좌위문대랑)과 감귤의 수까지 정확하게 기록했다. 교산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귤의 종류를 금귤, 감귤, 청귤, 유감, 감자, 유자 등으로 상세하게 나누고 그 맛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귀한 과일이니 귀하게 사용했다. 고려 말 도은 이숭인(1347∼1392년)은 팔관회에 참석해 “자줏빛 술을 귤배(橘杯)에 부어 마시니, 그 향기가 자리에 가득하다”(도은집 3권)라고 노래했다. 귤배는 귤을 반으로 가른 껍질이었을 것이다. 귤 껍질로 술잔을 만들어 그 향기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 문신 성현은 시에서 “(귤 껍질은) 고기와 같아서 씹으면 단맛이 나고, 꿀에 재워 음료로, 술로 빚어서 마셔도 향과 맛이 뛰어나다”라고 노래했다. 마른 귤 껍질(陳皮⋅진피)을 이용한 차는 조선시대 내내 주요한 약재로 사용되었다. 궁중에서도 귤 껍질에 인삼을 더한 삼귤차(蔘橘茶)와 생강을 더한 강귤다(薑橘茶) 등을 늘 가까이 두었다.
조선시대 귤은 임금의 은혜와 효도의 상징이었다.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육적이 여섯 살 때 원술을 만나 귤을 얻었다. 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소매에 담았던 귤이 떨어졌다. “왜 귤을 숨기는가?”라는 질문에 “어머님께 가져다 드리려 한다”고 대답했다. ‘육적회귤(陸績懷橘)’의 고사다. 이후 귤은 효도의 상징이 된다.
성종은 늦은 밤, 홍문관에 있던 문신 성희안에게 술과 귤을 하사한다. 성희안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고, 소매 안의 귤이 떨어진다. 다음 날, 성종이 성희안을 불러 귤을 한 쟁반 내린다. “어젯밤 그대 소매 속의 귤은 어버이에게 드리려 한 것이리라. 그 때문에 다시 주는 것이다.”(해동잡록 4권)
정작 귤의 산지인 제주도는 고통이 심했다. 세종 9년(1427년) 6월, 제주도 찰방 김위민이 상소를 올린다. 귤 관련 제주 관청의 악행이다. “귤나무를 일일이 세어 장부에 기록하고, 열매가 맺을 만하면 열매 수를 기록한다. 그 집 주인이 귤을 따면 절도죄로 몬다”라고 했다. 세조 역시 “민가의 귤 하나하나에 표지를 달고, 손실이 나면 다른 물품으로 세금을 걷는다. 너무 힘드니 민가에서 귤나무를 뽑아 버리는 일도 있다”(세조 1년⋅1455년)라고 했다. 견디다 못 한 제주 사람들이 귤나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나무를 죽이는 일도 잦았다.
궁중에서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태종 12년(1412년)에는 조정 관리를 제주로 보내 감귤나무를 전라도 순천 등 바닷가 마을에 옮겨 심게 했고 이듬해에도 감귤나무 수백 그루를 전라도 바닷가에 옮겨 심었다. 그러나 실패. 20여 년 후인 세종 20년(1438년)에는 ‘강화도로 옮긴 귤나무’ 이야기가 등장한다. 추운 지방이니 보온이 필요했다. 높이가 10척이 넘는 나무를 구해서 집을 지었다. 담을 쌓고 온돌을 만들어 귤나무를 보호했다. 이듬해 봄에는 또 이 집을 허물었다. 귤나무는 제대로 자라지 않고 민간의 근심거리만 늘어나니 폐지하자는 주장이다.
귤은 향기롭지만 귤을 얻는 방법은 힘들었다. 귤을 운반하던 관리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오키나와로 가거나 심지어는 중국으로 표류해 쑤저우까지 간 경우도 있었다. 5개월이나 늦었으니 공물 청귤은 다 상했다(왕조실록 정조 2년⋅1778년 8월 5일).
[펌] / 출처; 동아일보 / 황광해(음식평론가) / 2015.12.29. 04:12
유독성(有毒性) 인간
시쳇말로(to coin a phrase) '액물'이니 '진상'이니 불리는 사람이 있다. 어느 조직에나 한두 명은 꼭 있다.
매사에 부정적이다(be negative about everything). 끝없이 불평을 한다(complain to no end). 본인은 영원한 피해자(perpetual victim)다. 언제나 비난할 대상을 찾는다. 늘 자기 견해(point of view)가 옳고, 자기가 제일 똑똑하다. 어줍잖게 교만해(be ridiculously arrogant) 남들에게 우월감을 느낀다(feel superior to others). 욕심과 질투심에 차있어(be plagued with greed and jealousy) 다른 사람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한다. 거짓말은 예사로 한다(make no bones about telling lies). 남의 흉을 보고(speak ill of others) 뒤에서 험담하며(rip up the back) 대단한 정보인 양 떠벌린다.
문제는 이런 '액물'들이 다른 사람들의 도덕심마저 피폐하게 하고(devastate others' moral fiber) 고갈시키는 존재가 된다는(become a drain on them) 것이다. 베스트셀러 '감성지능 2.0(Emotional Intelligence 2.0)'의 저자 트래비스 브랫베리 박사는 "공기⋅물⋅음식에 독소(toxin)가 들어 있을 수 있듯이 사람도 독소가 들어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유독성 인간들(toxic people)'이라고 지칭한다.
남들에게 폐해를 끼치는(exert an evil influence on others) 이들은 백해무익하다(be only good for doing harm). 어떤 부류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be unaware of the negative impact on those around them). 일부는 혼란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 화 돋우는 것에서 만족감을 얻기도(derive satisfaction from pushing other people's buttons) 한다. 어느 쪽이든, 불필요한 갈등을 조장해(aggravate unnecessary strife) 주변 사람들 건강까지 해치는 스트레스를 만들어낸다.
한계를 지어야 한다. 호의적으로 들어주는(lend a sympathetic ear) 것과 그들의 부정적 감정 소용돌이에 빨려드는(get sucked into their negative emotional spiral) 것을 구분해 거리를 두는(distance yourself from them) 것이 바람직하다. 그들과는 절대 다툼에 휩쓸리지 말고 꿋꿋이 견디는(live to fight another day) 것이 현명하다. 비이성적인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다가는(dig your heels in) 상처만 입는다. 논쟁에서 이기려 애를 쓰지 마라(quit trying to beat them in an argument). 길거리에서 어느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a mentally unstable person)이 당신에게 다가와 자기가 케네디 대통령이라고 우기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냥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지 않나.
브랫베리 박사는 "어떤 종류의 독이나 마찬가지이듯, 유독성 인간에 대한 최상의 방책은 노출을 최소화해(minimize your exposure) 당신 스스로를 지켜내는(keep yourself protected) 것"이라고 조언한다.
[펌] / 출처; 조선닷컴 / 윤희영(조선뉴스프레스 부장대우) / 2015.12.29 03:00
칼 라르손(Carl Larsson , 1853 ~1919, 스웨덴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