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주간 금요일 강론>(2024. 1. 12. 금)(마르 2,1-12)
복음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1-5)”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와서,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서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 일은, 병자 자신을
포함해서 그들 모두의 믿음과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동안에 그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던
군중의 모습은 ‘이웃의 사정’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이기적이고 ‘사랑 없는’ 모습인데, 예수님께서 복음 말씀을
전하시는 상황이기 때문에, 군중은 복음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귀로는 듣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듣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 상황을 보기만 하셨을까?
사람들에게 조금씩 옆으로 비켜서 통로를 열어 주라고
말씀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도 사람들이 듣지 않고,
움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떻든 그 상황은 병자 자신과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믿음과 간절함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는,
또 극복해야만 하는 일종의 시련(시험)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과
간절함과 딱한 사정 등을 모두 보셨다는 뜻입니다.
<‘믿음만’ 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을 꿰뚫어보셨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에서 ‘얘야’ 라는 말은,
‘아들아’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은데, 이 말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는 따뜻한 호칭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권한으로, 당신이 직접 그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병자를 구원하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하신다고 표현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상황에서는 옳지 않은 표현이고, 지금의
상황에서는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고 표현해야 합니다.
또 여기서 ‘용서’ 라는 말은, ‘죄의 용서’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넓은 뜻으로 ‘영혼의 구원’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병자가 간절하게 바란 것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물론 그 구원에는 ‘죄의 용서’와 ‘몸의 치유’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8-10).”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율법학자들이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는 예수님 말씀을
의아하게 생각했다는 이야기는(마르 2,6-7),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에 대한 증언을 좀 더 생생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배경 설정
같은 것이고, 그들의 생각에 특별히 중요한 의미는 없습니다.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일, 또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즉 하느님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당시에 중풍은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
즉 하느님의 힘으로만 고칠 수 있는 병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으로 바꿔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다.”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이제 내가 나의 권한을 너희에게 증명해 보이겠다.” 라는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증명해
보이려고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아닙니다.
<병자를 이용해서 당신의 권한을 증명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 주신 일은,
그냥 순수하게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입니다.
<이 말씀도 사도들의 증언으로 바꿔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분이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느님의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도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곧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14).”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하느님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출처] 연중 제1주간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