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아름다운 시절
아들에게 '늦어?'라고 문자를 보내면 '드가영!'이라는 답장이 온다. 문자를 왜 그렇게 보내냐며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 날, 문득 초등학교 동창 창수가 생각났다. 6학년이 되도록 한글도, 덧셈 뺄셈도 모르던 아이. "졸업하기 전까지 창수가 읽고 쓸 수 있도록 도와줘. 할 수 있지?“ 담임 선생님의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창수가 싫었 다. 창수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발음도 부정확하고, 하루 종일 코 풍선을 불어대는 아이였다. ‘열심히’를 몇 번이나 가르쳐도 '열시 미'라고 썼고, 일기 쓰기 숙제를 내 주면 '일기' 두 글자만 써 왔다. 창 수가 수업 시간에 바지를 적시기라도 하면 선생님에게 혼나는 건 나 였다. 답답하고 화가 났다. 내 생일날이었다. 당시 우리 반은 서로의 생일을 축하해 주자는 의 미로 교실 뒤편에 반 아이들의 생일을 적어 두었다. “오늘 생일인 사 람 있나?” 선생님이 묻자 창수가 내게 너덜너덜한 공책 하나를 선물 로 건넸다. 아이들은 교실이 떠나가라 웃었고, 나는 그 공책을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가 하굣길에 찢어 길바닥에 버렸다. 그 안에 '생일 축하한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느덧 40년이 흘렀다. 작년 가을 동창 모임 에서 창수의 소식을 들었다. 시소나 그네에 올라타면 꼭 입으로 오토 바이 소리를 내더니 고향 읍내 식당에서 배달 일을 하고 있단다. 모 두가 "그래, 그런 아이가 있었지. 그럼 그 애는 꿈을 이룬건가?“ 하며 웃었다. 그날 이후 부모님을 뵈러 시골집에 갈 때마다 주변 식당을 돌며 그를 찾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 어느 날, 나는 길가에 있는 한 중국집에 들어가 자장면 한 그릇을 시켰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철가방을 든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안전모와 털모자, 목에 감은 목도리를 차례로 풀더니 "눈이 많이 와, 위험해!"라고 외쳤다. 창수였다. "창수야! 나 알아보겠냐? 네 초등학교 친구!"
창수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이름을 큰 소리로 여러 번 불렀다. 어쩌면 나는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그의 기억 속에 남은 유일한 친 구인 걸까? 짝꿍으로 보낸 1년, 나에게는 힘들었던 그 시절이 그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이었을까? 식당 벽에 붙은 메뉴 하나하나를 창수가 찬찬히 읽어 주었다. 그러고 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카드 단말기를 꺼내 보이며 "지금은 다 이걸로 계산해. 쉬워."라며 으스댔다. 제힘으로 밥벌이를 하며 어엿한 생활인 으로 살아온 그가 눈물 나게 자랑스러웠다. "연락해!" 하며 나를 배웅한 창수는 눈을 맞으며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못했지만, 친구가 평생 간직해 온 아름다운 시절 속에 나도 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웠다. 이제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창수에게 전화를 건다. 나를 부르는 그 의 목소리에 우리의 어린 날들이 흠뻑 묻어온다. 임성훈 | 경기도 하남시
사랑하는 친구들의 기억이 마음속에 있는 한 나는 인생이 좋다고 말할 것이다. _ 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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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잘읽어 보구 갑니다
오늘도 꽃향기 가득한 날 되시어요~빵긋
좋은글 잘읽어 봅니다
고은 오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