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수필가 이규철의 세계, 동작동의 영혼들
戰爭文學이란 한 마디로 전쟁과 그 체험을 주제로 하는 문학을 일컫는다.
독일작가 레마르크(E. M. Remarque)의 ‘西部戰線 이상없다’와 프랑ㅅ그작가 도르젤레스(R. Dorgeles)의 ‘나무 십자가’ 등이 그것이다.
헌데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전쟁사의 연속적 환경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괄목할만한 전쟁문학의 出産이 없었다는 것은 매우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때때로 교묘하게 전쟁문학의 탈을 쓰고 부정적 텃취 일변도의 글에 접하기도 하지만 말초신경과 충격적 호기심의 자극만으로는 전쟁문학의 소임을 다할 수 없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전쟁문학을 통하여 전쟁의 비극을 깨닫게 하고, 이 민족의 줄기찬 생명력에 대한 긍지를 느끼게 하는 敎訓的요소가 전혀 없거나 크게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34년 전으로 거슬러 1990년 7월에 한국전쟁문학회에서 펴낸 계간지인 ‘戰爭文學’ 제 3집의 뒤표지에 실린 글이 그랬다.
당시 그 학회를 이끌던 박경석 회장이 책 머리에서 ‘戰爭文學의 使命’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 인용한 대목이라고 했다.
자랑스럽게도 우리 장인어른께서도 그 잡지에 한 편 글을 기고 하셨다.
282쪽에 실린 ‘동작동의 영혼들’이라는 제목의 수필이 바로 그 글이었다.
장인어른께서 동작동 국립묘지의 조성 초기에 육군 중위로 관여를 했었다는 사실은, 일찌감치 아내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관여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를 못했다.
알려고 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내 그 무심했던 세월이 참으로 송구스럽기만 하다.
2024년 3월 28일 목요일인 오늘로, 장인어른께서 기고하신 그때 그 글을 챙겨 읽으면서, 이제야 먼 먼 세월의 저쪽 편에서 땀 흘려 수고하셨던 장인어른의 그 애쓴 흔적을 그려본다.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살아생전에, 내 왜 좀 더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깊은 회한에, 결국 두 눈시울을 축축하게 적시고 말았다.
다음은 장인어른께서 기고하신 그 글 전문이다.
국립묘지는 조국수호와 국가번영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고이 잠들고 계시는 민족의 성역(聖域)이다.
관악산 기슭의 공작봉을 주봉으로 하여 정기어린 동작의 능선이 병풍 치듯 삼면을 감싸고 앞쪽으로는 한강수가 성스럽고 영광된 조국의 역사를 굽이쳐 도는 43만평의 포근한 땅, 이 언덕에 나래 펴듯 자리하고 있다.
오늘의 국립묘지는 1955년 7월 15일 국군묘지로 명명되어 군인과 군무원만을 안장하였으나 그로부터 10년 후인 1965년 3월 30일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위시하여 국가유공자, 국군장병, 경찰, 예비군 등 16만 2천여 호국영령들이 이곳에 잠들어 계신다.
국민의 자주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년간 6백여만 명에 이르는 참배객이 4계절 끊이지 않고 참배하고 있으며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는 죽음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여 오늘의 조국번영이 있게 한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비는 거국 거족적인 추모행사가 거행된다.
올해로 제35회째 현충일을 맞는 국립묘지와 나는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1956년 초 전방부대에서 근무하던 나는 국방부의 명령을 받고 당시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던 국군묘지의 치산(治山)관리대장 직으로 약 6개월간 근무한 일이 있다.
당시의 국군묘지는 오늘과 같은 장엄한 묘지가 못되고 공사를 진행하면서 얼마 되지 않은 기수의 전몰장병 유해를 각 지역 영현보관소에서 운현해다 안장한 정도였다.
장병 백여 명으로 편성된 치산관리대는 20개 사단 지역으로 구획한 묘지동산의 치산(治山)을 위해 식수(植樹) 관리를 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식수요 묘목은 국방부로부터 조달받았는데 경쟁의욕에서 소속부대 전방에서 큰 나무들을 옮겨다 식수하는 사례가 있기도 했다.
나무를 심고 뿌리가 내릴 때까지 물을 주어야 하며 고사목을 교체해야 하는 작업은 실로 고된 중노동이었다. 그러나 그때 장병들은 조국을 수호하다 산화한 전우들의 넋이 고이 잠들 국군묘지라는 대의(大義)에서 고된 작업을 마다하지 않고 헌신적인 봉사를 했다.
5월의 강열한 태양이 이글거리는 뜨거운 열기를 온 몸에 받으며 비 오듯 흘러내리는 비지땀을 아랑곳없이 물통을 짊어지고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다 실족하여 곤두박질 쳐 다치기가 일쑤였다.
검게 그을린 병사들의 얼굴, 시나브로 조성되어 가던 묘지동산, 거목으로 자라 푸른 숲을 이룬 오늘의 자랑스런 국립묘지가 있기까지 지난날 묘지조성 때 세상이 모르고 있는 치산관리대 장병들이 흘린 피땀이 묘역에 서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으리라.
이렇듯 지난날 국립묘지와 깊은 유대를 간직한 나는 서울에 살면서도 삶에 쫓긴 나머지 숱한 세월동안 국립묘지를 망각한 채 있다가 실로 30여년 만에 옛 추억을 더듬으며 국립묘지 참배 길에 올라 광대무비하고 장엄하게 변모한 오늘의 국립묘지의 엄숙한 위용 앞에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다.
‘과연 자랑스럽고 위대한 역사라고!’ 감탄하면서 나는 무명용사비에 헌화한 후 관리사무소의 K담당관으로부터 간단한 브리핑을 들은 후 동행한 잡지사 J기자와 함께 성역을 둘러보았다.
잘 다듬어진 도로, 질서정연하게 안장된 묘역, 규모 있는 시설물과 조화스런 색채, 예술적 진솔한 표출로 창작되어 적재적소에 세워진 기념비와 기념탑, 용사들의 상징적인 동상, 거대한 현충문, 잘 키워진 금잔디, 울창한 거목군의 푸른 숲, 그 질서 있고 장엄한 규모 등에서 우리 국력의 보다 커진 국면을 엿볼 수 있어 마음 든든했다.
국가와 민족의 일급 성역인 국립묘지는 당연히 거국 거족적인 관심에서 존중되며 관리 유지되어 마땅하리라. 이 성역에 잠들고 있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아니었던들 우리가 오늘의 번영을 누릴 수가 과연 있었겠는가.
나라를 잃었던 망국의 서럽던 시대 구국 독립투쟁을 벌이다 이역만리 산 설고 물 선 타국의 불모지에서 순국한 선열들과 저 비극의 6.25전란에서 국가 민족을 수호하다 꽃다운 나이에 이름 모를 격전지 산야에서 산화하여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전몰장병들, 그 외롭게 사라져 간 우리의 선구자들은 지금 우리의 오늘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우린 호국영령들에게 어떤 면목으로 오늘의 시대상황을 설명할 것이며 그들 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의 댓가에 부응할 것인가를 엄숙히 성찰해야 할 필요를 느껴야 할 것이다.
또한 K담당관에 의하면 참배객들 중에는 신성한 성역에서 고성방가를 저지르는가 하면 레디오 볼륨을 크게 틀어 놓고 놀이마당을 벌이는 몰상식한 추태를 부리기도 하고 참배객으로써 걸맞지 않는 사치스런 색깔의 성장한 복식으로 경건함을 망각한 몰지각한 일 등, 또한 막대한 국가예산을 투입해 건립한 성역의 시설물과 잔디, 꽃나무 등을 훼손하는 상식이하의 참배객도 있다고 하는 K담당관의 고충을 귀에 담은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온 몸에 분노가 치밀고 가슴이 아팠다.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넋 앞에 엎드려 오열하는 그들의 유가족들이 하늘이 무너지는 비탄을 안고 몸부림치며 슬퍼하는 비극의 현장에서 우린 새로운 국가관과 민족의 사위버린 얼을 되찾는 겸허함을 익혀야 할 것이다.
국립묘지는 나라의 으뜸가는 성역이며 민족의 영원불명의 산 역사적 교육 현장이기도 하다. 잘 건립된 우리의 국립묘지를 아끼고 정성으로 가꾸어 보다 훌륭한 성지로 일구어 나가야 할 것이다.
나는 브라운관을 통해 어떤 나라의 신혼부부가 결혼식을 마치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그들 나라의 전몰 무명용사비에 꽃다발을 바치고 경건하게 묵념을 올리는 장면을 본 일이 있다.
그 정경에서 나는 생각했다. 우리네 신혼부부가 혼례식이 끝나고 국립묘지를 드레스 차림으로 참배하는 아름답고 경건한 모습을 드라마가 아닌 현실로 볼 수 있다면 나는 그 신혼부부를 위해 하나님의 큰 사랑과 축복을 받아 평생 최고의 행복을 누리도록 기원하리라.
오후 한나절 동안 이곳저곳 고루 답사한 나는 석양빛이 드리우는 성역 구석구석까지 올려 퍼지는 구슬픈 진혼의 나팔소리를 귓전에 담으면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