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수필가 이규철의 세계, 돌아눕지 않는 예술혼
‘돌아눕지 않는 예술혼’
33년 전으로 거슬러 1991년 12월에 한국신문예협회에서 펴낸 ‘新文藝‘ 제 15집에, 우리 장인어른께서 기고한 한 편 수필의 제목이 그랬다.
그 제목으로 짚이는 것이 둘 있었다.
하나는 어느 문학가가 좌절의 위기를 이겨낸 이야기를 담았겠다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 장인어른께서도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와 마찬가지로 글에 멋을 더하려고 애쓰셨다하는 것이었다.
묘비명에 ‘수필가’라고 새겨주시기를 바랐던 장인어른이 쓰신 글이라면, 이 글의 대상은 같은 문인일 것임이 짐작됐고, 그 문인이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고 새로이 작품 활동을 하게 된 것을 예찬할 것이라면 다른 칭찬의 제목을 붙일 수도 있으련만 ‘돌아눕지 않는’이라는 문장을 빌려온 것은 오로지 멋을 위한 차용이었겠다고 짐작된 것이다.
역시 그랬다.
장인어른께서는 한동안 소식을 끊고 지내던 시인이며 극작가인 H라는 문인에 대한 이야기를 그 글에서 풀어내고 계셨다.
인류사회가 문명권에 진입하면서 인간은 빵만으로는 섭생(攝生)에 만족할 수가 없게 되고, 정서생활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이르렀다.
이에 인간은 고대로부터 예술이라는 방법을 삶의 정서적 목적에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을 자연발생적으로 터득하면서 이름 하여 예술이라 일컬어 왔다.//
글 처음은 그렇게 예술에 대한 장인어른 나름의 정의로 시작됐다.
장인어른께서는 계속해서 과학이 추상적 개념을 통한 인간의 사유활동(思惟活動)이라 한다면 예술은 구체적 형상을 통한 인간의 사유활동이며, 모든 예술활동 중에 특히나 문학은 언어문자를 그 소재로 하는 인간의 형상적 사유활동이라 할 수 있겠으며, 사유활동으로서의 이 문학은 실로 다양한 부문의 과학적 지식 즉 역사 고고학(考古學) 민속(民俗)을 포함하여 타예술분야까지 전문성까지는 몰라도 개념범주의 지식수준까지는 터득되어야 본다면서, 문학에 좀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논리를 이어 가셨다.
그 끝에 그림으로 섭섭했던 사례를 하나 들었다.
다음은 그 대목이다.
나는 어느 날 R화백으로부터 누드(Nude) 전에 초대받아 효자동 어귀에 있는 아담한 갤러리를 찾은 일이 있다.
화랑을 천천히 돌며 조화스럽게 전시해 놓은 크고 작은 누드 그림 속에 관능미가 철철 넘쳐흐르는 20대 초반인 듯한 아가씨의 다양한 포즈로 그려진 그림들을 감상하고 나오면서, 안내양에게 넌즛이 그림 호당 값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호당 500만원이라 했다.
이 벌거숭이 그림 100호 짜리라면 작품 한 점 값이 5억원이라는 이야기다. 나는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기분을 가까스로 억제하면서 그 어마어마한 화폐가 걸린 갤러리를 떴다.//
참 용감한 질문을 던지신 우리 장인어른이셨다.
나도 지난날 숱하게 전시회에 다녀봤지만, 그 그림 값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살 것이라면 몰라도, 아예 사지 않을 것임에도 그 값만 물어봤다가 괜히 쪽팔리기 십상이겠다 싶어서였다.
그래도 장인어른의 그 글 한 편으로 인해, 그림값에 대한 대충의 기준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장인어른께서는 그 글 끝에,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인 H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하셨다.
그 글이다.
어느 날 나는 H작가(시인, 극작가)로부터 한 뭉치의 신문을 우편을 받았다. 펼쳐보니 가평예술신문이라는 제호의 신문이었다.
그 지역사회에 잡다한 소식과 문예란을 크게 할애하여 시, 수필 등 그 고장 글모임 회원들의 문예작품 등이 즐비하게 게재되어 있었다.
나는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H선생과 나는 약 7년여에 지기로 있었으니, 어떤 원고문제로 의견이 갈려 서로의 교통이 어긋나고 어정쩡한 관계로 한동안 소식을 끊고 있던 처지에 있었다.
그런데 신문에 이어 수 삼일 후, 전화로 만남의 전갈을 받고 명동의 유네스코다방에서 실로 오랜만에 해후(邂逅)한 H선생은, 그의 특유한 드라마틱한 제스쳐를 내 보이면서 반갑게 나를 맞았다.//
그렇게 만난 H선생이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이유를 털어 내놨다는 것이다.
이야기인즉슨, 같은 취향을 가지고 금실 좋게 지내든 ‘발레리나’이던 아내가 어느 날의 무대공연을 마치고 치룬 축하연에서 먼저 귀가했다는 것이고, 남편인 H선생이 나중에 집에 와보니 아내가 침대 위에서 옷 입은 채로 잠들어 있기에 흔들어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더라는 것이었고, 그래서 끔찍한 생각에 정신을 곤두세우며 구급차를 불러 병원엘 달려가 진찰을 했더니 이미 심장마비로 사망을 했더라는 것이고, 그래서 아파트를 처분해 장례를 치른 후, 비통함을 잠재울 수가 없어서 저린 마음을 달래고자 몇 개월을 주야장창 술독에 빠졌다가, 끝내 병을 불러 H대학병원에서 3개월 동안 입원치료를 받고 살아나, 다시 태어나 새로운 인생을 산다는 각오로 선친의 고향이기도 한 가평으로 낙향해 낙후된 그 고장 문화예술의 창달을 위해 정열을 쏟아 붓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인어른께서는 H선생의 그 토로를 듣고, 실로 폐부에 찬물을 끼얹은 듯이 가슴저린 연민의 정으로 눈시울을 적셔야 했다는 것이다.
‘돌아눕진 않는 예술혼’이라는 글 제목은, 그렇게 지어진 것이었다.
장인어른의 그 인간미에, 내 눈시울까지 뜨거워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