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새로운 자연 세계로 떠나는 산보다. 낯설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고 그 이야기를 전해듣는 것도 흥미롭지만, 색다른 풍광의 자연 모습이 머리에 더 많이 남는 경우도 있다. 나는 때때로 여행중에 만나게되는 그곳만의 독특한 풍토에 뿌리내린 풀과 나무들, 거기에 기대어사는 또다른 생명체들의 모습과 그 새로운 풍경에 매료되고는 했다. 백두산 고봉 칼데라의 무수한 들꽃, 킬리만자로 계곡의 물봉선, 셰렝기티 황야의 '휘파람 부는 가시나무(Whistling Thorn), 모잠비크 마푸토 도심에 보랏빛 터널을 만들고 있던 자카란다 가로수, 케이프타운 테이블 마운틴을 덮고있던 이름모를 풀과 소관목의 나무들...
이번 여행이 자유 여행이라면 아마도 여행 지역의 자연 모습을 좀더 많이 가깝게 살펴보았을 것이다. 모하비 사막의 어느 한 곳에 차를 세우고 모래 언덕이 있는 멀리까지 걸어보았을 수도, 샌프란시스코 바다의 연안 모래밭을 걷다보면 혹이나 캘리포니아의 주화(州花)인 캘리포니아양귀비(California Poppy)를 만날 수도 있었다. 또 유니버설 스튜디오 유람보다는 헌팅턴식물원(Huntington Botanicsl Garden)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로스앤젤레스 도심의 약 50ha에 달하는 헌팅턴식물원은 철도 재벌이었던 헌팅턴이 조성한 세계 식물 자원의 전시장과도 같은 곳이다. 식물원 안에 희귀 도서를 보관 전시하는 도서관, 유명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 등이 함께 자리해 있다. 그곳을 방문했다면 특히나 유명한 동백정원(Camellia Garden)과 장미정원(Rose Garden)을 반드시 둘러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열흘 동안의 미국 서부 여행은 나의 개인적인 기호와는 별개로 주요 관광지 중심으로 미리 정해진 곳만을 돌아보는 단체 여행이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대부분의 여정이 역사나 문화보다는 매우 이국적이고도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 빼어난 곳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자세히 둘러보고 살펴보기는 어려웠지만, 틈틈이 그 지역 특유의 환경에서 자라는 독특한 식생의 풀과 나무, 그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광을 발견할 수 있었다.
LA에서의 첫날 첫번째의 여행지인 산타모니카 해변에서는 바람에 나부끼는 검푸른 야자수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 가을이라고는 하지만 태평양 연안의 따뜻한 도시 LA, 남국의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오후의 한 방문지인 LA의 역사적 건물인 브래드버리 빌딩(Bradbury Building) 근처의 거리에서는 분홍빛 가득한 꽃을 피운 가로수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한가을의 시기에 꽃이 만발한 우람한 나무라니... 분홍빛 화사한 꽃을 피운 이 나무를 그 다음날 샌디에고의 발보아 파크(Balbore Park)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 샌디에고 역사관(History Center)의 직원으로부터 알아낸 이 나무의 이름을 오키드 트리(Orchid Tree), 마치 난초와도 같은 꽃을 피우는 난초 나무다. 가을을 맞아 꽃을 피우는 것도, 잎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온통 분홍의 꽃잎을 가득 연 것도 특이했다.
LA로부터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뻗어있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서편으로는 캘리포니아 센트럴 밸리(Central Valley)가 펼쳐져 있다. 그 거리가 남북으로 700km가 넘고, 그 폭이 동서로 100km에 이르기도 하는 드넓은 평야다. 샌프란시스코 북부의 와인 산지인 나파 밸리까지 이어져 있다. 미국이 소비하는 과일, 채소, 견과의 약 절반 정도가 이곳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우리만치 넓은 농장에는 오렌지는 물론 호두, 아몬드, 피스타치오 따위의 나무들이 그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많이 심어져 있었다. 생산되는 농산물의 품목이 특이하기도 하지만, 광활한 농장의 풍경 또한 특별했다.
캘리포니아 내륙 너머의 캐년 지대를 둘러보면서는 모하비 사막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황무지의 생소한 풍경을 마주했다. 거칠고 메마른 땅이었지만 사막에도, 황무지에도 무엇인가 거기에서 자라고 있는 것들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었다. 가을을 맞아 한때 푸르렀을 풀들은 황갈색이나 회백색으로 말라 있고, 작은 떨기 나무들은 단풍을 물들이고 있었다. 공 모양으로 바람에 굴러가서 씨앗을 퍼트리는 텀블위도(Tumbleweed), 토끼가 몸을 숨기는 풀이라는 래빗브러쉬(Rabbitbrush), 국화과 식물의 하나인 그린 그라운드셀(Green Groundsel)과 세이지브러쉬(Sagebrush)...
거칠고 메마른 풍토의 미국 서부 지역, 특히 사막과 황무지의 식생은 비교적 단조로웠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 서남지역의 캐년, 산과 계곡도 마찬가지 피니온(Pinyon), 폰데로사(Ponderosa)라는 이름의 소나무 등 몇몇 종류의 소나무와 노간주나무(Juniper), 전나무(Fir), 가문비나무(Spruce) 등의 상록수가 주된 나무들이다. 그나마 단풍이 든 풍경을 보여주는 것은 보통 애스펜이라고 하는 미국 사시나무(American Aspen)와 이 사시나무와 같은 포플러과 나무의 하나인 미국산 미루나무 카튼우드(Cottonwood)라는 나무 정도다. 노란 오렌지색 단풍색이 환하기는 하지만 극히 제한된 수종의 활엽수 숲의 단풍은 단조로웠다. 하얀 수피에 노란 주황빛 단풍의 미국 사시나무는 그랜드 캐년 입구 근처의 광장을 수 놓고 있었다. 자이언 캐년을 향해 가는 도중의 마을 곳곳에서도 이 애스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멕시코주 오스틴에서 유학 생활을 했던 어느 분으로부터 그곳 애스펜의 아름다운 단풍에 매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미국 사시나무는 중부 멕시코에 이르는 북미 전역에 자생한다. 사시나무는 버드나무과 포플라(Populus) 속의 한 부류에 속하는 활엽수다. 우리가 '사시나무 떨 듯 떤다'는 사시나무인 한국 사시나무도 이 나무의 한 종류이다.
미국 사시나무는 이 나무가 워낙 넓은 권역에서 자라는 만큼 그 이름도 여러가지로 불린다. 미국 사시나무는 '떠는 사시나무'라는 뜻의 Quaking Aspen 또는 Tremblinig Aspen, Mountain Aspen 또는 Golden Adpen, Trembling Poplar 또는 White Poplar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이 나무는 유타주에 자리한 자이언 캐년(Zion Canyon)의 계곡에서도 볼 수 있었다. 유타주에는 이 사시나무가 하나의 거대한 유기 생명체를 형성해서 군락을 이루고 있는 사시나무 숲이 있다고 한다. 뿌리로 이어지는 새싹을 올린 뒤 그 세력을 넖혀 하나의 거대한 군체를 이루고 있는 판도(Pando)라고 하는 50ha 넓이의 사시나무 숲이다. 한 그루의 나무로 가장 큰 나무가 셔먼 장군 나무(General Sherman Tree)라고 불리는 자이언트 세콰이어(Giant Sequoia) 나무라면, 가장 거대한 유기 생명체의 나무는 바로 유타주의 이 사시나무 숲이라고 한다. 이 나무는 이번 여행을 통해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나의 농원에 이 나무를 들였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내 기억에 남겨진 또다른 풍경 하나. 그것은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와 앤티로프 캐년(Antelope Canyon)의 황무지에서 짚 여행을 하면서 보았던 풀과 키작은 떨기 나무들이 있는 풍경이다. 다른 서부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적갈색 황토에 뿌리내리고 있는 그 황무지의 풍경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특히 애스펜이나 커튼우드마냥 샛노란 단풍을 단 떨기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를 안내하는 인디언 여성은 그 나무의 이름은 모르지만, 그 나무의 부드러운 줄기로 어린아기의 요람(Cradleboard)을 만든다고 했다. 작은 가지 하나를 꺾어서 냄새를 맡아보라고도 했다. 상큼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산버들과 같은 버드나무의 한 종류가 아닌가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나바호족 어린아기들을 그 나무줄기로 만든 요람에서 돌본다고 했다.
눈에 잘 띄이지는 않았지만 거칠고 황랑한 곳이나마 그곳엔 여러 동물이나 곤충들이 서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하비 사막을 횡단하는 길가에는 야생 동물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철조망이 처져 있기도 했다. 자이언 캐년에는 산사자(Mountain Lion)와 말코손바닥사슴(Elk)이 산다고 한다. 요세미티 공원의 안내 팜플렛은 공원의 숲속에 흑곰(Black Bear), 뮬사슴(Mule Deer), 마못, 매 따위의 여러 짐승과 새가 산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어느 것도 볼 수는 없었지만, 공원의 기념품점에 눈에 띄는게 있었다. 책가방 따위의 악세사리 손잡이로 달 수 있는 인형이었다. 흑곰 인형이 있었다. 손녀들로부터 주문 받은 선물이 바로 이 책가방 악세사리였다. 내 추억은 물론 손녀들의 기억에도 담을 수 있는 멋진 선물을 살 수 있었다. 모두 열흘 동안의 매우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었다. (2023.10. 28)
첫댓글 70대의 나이에 이 긴 여정을 그것도 부부 같이 ㅡ 대단하시오. 많은 것을 알게 해주신 순우께 감사드려요ㅡ
저 역시 외국 여행을 하며 한국과는 다른 생소한 풍광과 식생, 기후 등에 설레고 흥분하는 편이라서 순우의 여행기에서 소개되는 여러가지 자연의 모습이 좋습니다. 거기다 사진까지 곁들이니 더욱....
생소한 식물 동물들이 자주 등장하여 식물도감과 동물도감을 펼쳐보는 현장체험의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여행기를 써본 경험을미루어볼 때 세밀한 관찰, 기록, 조사의 과정을 느끼게 됩니다.
여행후 가장 큰 자산은 여행후기를 정교
하게 정리한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도 오래전 미 서부를 펰기지 여행을
했지만 당시 미 문화에 역점을 두고
관찰했지요.
순우의 세심한 관찰력은 참으로 대
단합니다
미 서부여행기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40 여 년 전의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때 문학적 소질이 있었다면 글로써 남겼을텐데 하는 아쉬움. 빛바랜 사진만 몇 장 남아 있다오. 순우의 글을 읽으면서 그때의 나를 회상해보는 회상여행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어 감사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