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윤상은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5. 30.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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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기행 윤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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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0. 20:23조회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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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은행 세워 일제에 저항, ‘윤상은’(1887~1984)
개항 2년 뒤인 1878년 일본 제일은행이 부산에 지점을 연 것이 우리나라 근대적 은행의 처음이다.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은 이제 곧 이 땅에 화폐와 신용을 매개로 한 새로운 경제제도가 시작되리라고 예고하는 것인 동시에, 봉건말기 조선사회에 흐트러져 있는 돈줄을 장차 이 제도를 통해 움켜잡겠다는 신흥제국주의 일본의 음모를 드러내 보이는 사건이기도 했다.
제일은행은 부산지점에 이어 원산·인천·서울·목포에 차례로 지점 또는 출장소를 개설했고, 제일은행을 선두로 제 18은행·제 58은행·흥업은행 등 일본 은행들이 속속 국내에 진입했다. 일본은행 중 선발주자인 제일은행이 을사조약 이후 사실상 중앙은행이 돼서 이 은행이 발행한 새 화폐가 백동전 등 조선조의 화폐를 대체한다. 1910년대 동양척식회사·조선식산은행 등으로 식민지수탈체제가 정착되기까지 약 30~40년은 봉건체제가 급속히 무너지고 근대적 화폐·금융체제로 신속히 재편되면서 일제의 식민지통치 구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간이었다.
출발 자체가 불행했던 이 무렵의 초창기 한국 금융사엔 윤상은이라는 독특한 인물이 나온다. 그는 1912년 부산에서 구포은행을 세웠고, 이 은행이 한국인 자본으로 설립된 첫 지방은행이었다. 윤상은은 지주 출신으로 민족은행을 주도한 최초의 인물이자, 토지자본을 상업자본으로 발전시킨 전형적인 사례로 꼽힌다. 또한 백산 안희재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자금을 대고 뒷세대 교육사업을 지원한 민족주의 은행가로서 윤상은의 이름에는 각별한 무게가 실린다. 특히 거대 자본의 일본은행이 물밀 듯 밀려들어오고 한인은행들이 예외 없이 일본 자본에 먹혀들어가는 추세 속에서 한 영세한 지방은행을 붙들고 민족은행으로 살려 보려 했던 그의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윤상은의 주요 활동무개가 됐던 구포는 낙동강 어귀에 있는 작은 포구,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이곳은 경상남북도의 농산물·토산물이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운반돼 오는 집산지였다. 한말의 구포는 많은 객주와 상인들이 모여들어 번창했다.
윤상은은 1887년 8월 이곳에서 태어났다. 유서 깊은 사대부 집안이었고, 부친 윤석홍은 동래부사·사천군수를 지낸 대지주였다. 그 역시 서당에서 봉건학문을 설렵하는 것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가 근대학문을 만난 것은 1901년 열다섯 나이에 한말의 걸출한 기업가 박기종의 사위가 돼 그가 설립한 개성학교(지금은 부산상고)에 들어가서였다. 1904년 개성학교를 졸업한 윤상은은 동래감리서에 주사로 취직했다. 감리서는 부산항에 들어와 있는 모든 외국인들의 영사업무를 맡아 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을사조약으로 감리서라는 기관이 유명무실해지자 그는 주사직을 버리고 구포로 돌아와 당시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양잠일을 시작했다. 이 무렵 구포지역의 객주들 사이에서 ‘저축계’가 조직됐다. 감리서에서 세상물리에 트인 윤상은과 물산객주로 큰 돈을 움켜쥔 장우석이라는 구포 사람이‘저축계’를 주도했다. 이 저축계가 발전해 1909년 구포저축주식회사가 설립된다. 자본금은 2만5천원. 당시 지방 경제 수준에서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구포의 물산객주와 토착지주 70여명이 주주로 참여해, 근대적인 주식회사의 면모를 갖췄다. 을사조약 이후 일제가 금융기관 정비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던 때였음을 감안하면 ‘국민주’ 형태를 띤 이 첫 지방은행의 존재는 한결 돋보인다. 1906년 농공은행, 1907년 지방금융조합, 1908년 조선식산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을 통해 일제는 부동산 저당과 고리대로 불과 몇 년 사이 한반도 전역에 걸쳐 토지와 자금을 빨아들이는 실핏줄들을 촘촘히 얽어 놓고 있었다.
구포 저축 주식회사는 윤상은을 취체역(대표격)으로 지역사회에 은행업의 뿌리를 내렸다. “그때는 워낙 농촌사정이 피폐해 농사꾼들 경우는 봄철에 돈꾸어 가면 가을 추수 지나도 빚을 못 갚아 은행에서도 농민 대부는 절반은 상환받기를 포기했다 한다”고 그의 아들 윤현표(77)씨는 말한다.
이 회사는 1912년 자본금 50만원에 주주 2백40명 규모의 ‘구포은행’으로 확대 개편됐다. 정식으로 은행 간판을 달고 새로 출범한 구포은행은 자의반 타의반의 확대개편을 거치는 동안 위상이 바뀌었다. 부산지역의 거상들이 대주주로 참가했고, 일본 상인들이 16명 새 주주로 끼어들었다. 일인 주주들이 임원진에 대거 진출하면서 윤상은은 감사로 물러 나앉게 되었다. 5년 동안 공들인 은행을 결국 일인들 앞에 갖다 바친 격이 됐다.
청년은행가 윤상은은 당시 재산이 겨우 3백석 정도 소출을 거두는 정도였다고 <거부실록>(이용선 지음)을 통해 회고했다. 윤씨 집안의 그 막대했던 토지는 그 사이 은행주식으로 바뀌었고, 땅문서로 만든 주식은 한일무역으로 번성하던 일본 상업자본 앞에서 금세 힘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3백석짜리 논을 팔아 김해 벌판의 갈대밭을 사들였다. 그가 사들인 땅은 약35만평에 이르는 맥도(보리섬). 낙동강이 범람할 때마다 황토벌이 되는 삼각주의 버려진 땅이었다. 윤상은은 보리섬에다 바닷가쪽으로 바위둑을 쌓고 갈대를 심어 홍수와 조수를 막는 대역사를 시작했다. 겨울 지나고 봄 한철에 물길을 잡고 둑을 쌓다 보면 여름 홍수가 죄다 쓸어가 버리기를 두해 거푸 한 뒤 이 개간사업은 4년 만에 성공해 첫해에 2천석을 거둬들이게 됐다. 보리섬 한쪽에 염전을 만들어 소금도 거뒀다.
윤상은은 이 재산을 토대로 구포은행을 회복하는 데 온힘을 쏟았다. 몇 백주 남았던 자신의 주식을 늘려가는 한편 경상도 일대를 돌며 지주들을 새 주주로 끌어들였다. 그 사이 구포은행은 1915년 경남은행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점을 부산 시내로 옮기면서 이제 작은 포구마을에서 객주들의 계조직으로 출발한 초창기 모습이 거의 씻겨 있었다.
윤상은은 1917년 1월 경남은행 정기총회에서 전무취체역에 선출된다. 이미 그는 1천주 이상을 가진 경남은행의 최대 주주가 돼 있었다. 구포은행 운영에서 손을 뗀 지 5년만이었다. 윤상은이 전무취체역으로 있는 동안 경남은행은 구포지점 말고도 마산·하동 지점을 열고 주일은행을 흡수하는 등 영업이 번창했다.
경남은행이 경남·부산지역 유지들의 독립 운동자금을 조달하는 창구라는 소문이 파다해진 것도 이 무렵이다. “이 은행이 국내외 독립운동자금의 공급처가 되어 많은 지주들이 토지를 저당하고 자금을 대출받아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것”이라고 조기준씨는 <한국기업가사>에서 쓰고 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19년 3·1만세 직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윤상은의 조카 윤현진이 27살 나이에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으로 임명돼 임정 자금조달책을 맡은 것도 경남은행이나 백산상회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부산에 백산상회를 열었던 백산 안희재와 윤상은 일가는 교분이 두터워 윤상은이 구포저축주식회사를 열 때 백산이 주주로 참가했고, 백산이 1919년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할 때는 윤상은이 주주로 가담했다.
1919년 11월 부산의 한국인 유지들이 기미육영회를 조직했을 때, 안희재는 윤상은의 조카 윤현태와 함께 간사를 맡고 윤상은은 평의원이 되었다. 이극로·안호상·신성모 등이 모두 이 기미육영회 지원으로 해외유학을 했다(김정명의 <조선독립운동>).
3·1만세 이후 경남은행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노골화되고, 은행 장부를 일경에 검색당하는 일이 여러 차례 벌어지자 윤상은은 1920년초 경남은행 전무직을 내놓고 구포로 다시 돌아와 버렸다. “형님(윤인구)도 동래중학교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쫓겨 집에 숨어 있던 때였지요. 부친은 공부를 해야겠다면서 그해 봄 형님과 누님 두남매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형은 메이지대학 신학부에, 누님은 도쿄여대에 보내고 아버님은 게이오대학 경제학부에 들어갔습니다.” 아들 현표씨의 회고다. 이때 윤상은의 나이 서른넷. 그는 1923년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으로 돌아온다.
그해 7월 그는 다시 경남은행 두취(사장)에 취임한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 뒤의 세계를 휩쓴 공황의 여파와, 나날이 세력을 늘려가는 일본 은행들의 틈바구니에서 운영에 활로를 찾을 수 없다고 느낀 그는 다음해 1월 두취역을 사임했다.
1920년대엔 식산은행과 금융조합·동양척식회사 금융부·신탁회사·무진회사 등 총독부 산하 금융기관들과 일본은행 지점들이 식민지 조선의 자금시장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고, 영세한 한인 은행들의 폐점 합병이 속출했다. 지방은행 중에서 선발주자이자 비교적 튼튼한 재원을 거느렸던 경남은행마저도 1928년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으로 통합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30년대 이후 해방까지 윤상은은 구포에서 오직 과수원과 양잠·야채밭을 돌보며 지냈다고 그의 딸 윤학자(72. 전 부산대 교수)씨는 말한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때 윤상은도 고초를 겪는다. 아들 윤현표씨는 윤상은이 구포집에서 일경에게 압송돼 함흥까지 가서 조사를 받은 뒤 한달쯤 뒤에 돌아왔는데 한글학자 이극로와의 관계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전한다.
구포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미군정 아래서 경상남도 재무부장을 맡기도 했고,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는 재무부 전매국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이 관직생활도 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그가 사표를 던지면서 불과 몇 해로 마감됐다.
“중국서 들여온 홍삼을 특정인에게 주라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두 차례 강권을 당하고 분개해서 사표를 냈던 것으로 들었다”는 것이 윤학자씨의 말이다.
바깥 세계에 얼굴이나 이름을 내기 꺼렸던 그는 지금 부산지역사회에서조차 부산대 초대 총장과 연세대 총장을 지낸 신학자 윤인구 박사의 부친으로 치부되고 있다.
윤상은은 지난 84년 거의 100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타계하기 전해 부산대학의 장학사업에 쓰라고 떼어둔 약간의 자금은 올 5월 부산대의 인덕관 건립공사에 쓰였다. 구포은행의 후신인 경상합동은행은 1942년 서울에 본점을 둔 한성은행에 흡수되고 한성은행은 뒷날 조흥은행으로 개편됨으로써 구한말에서 식민시대 초기에 걸친 한 젊은 은행가의 열정은 이제 조흥은행 90년사의 한 지류로 묻혀 흐르게 됐다.
[출처] 윤상은|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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