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제목 : 얼굴이 밥 먹여주냐?
작가명 : 피리나
E-mail : ysoli@hanmail.net
연재장소 : 꽃잎소설 1-20대
총편수 : 총16 편 완결
장르 :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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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팬까페 : cafe.daum.net/pilina
(11)
준기는 손님들의 메이크업을 하다가 하나씩 실수를 하고 있다. 아까 채린이 일이 생각나서,
일에 집중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채린이한테 메이크업을 해 주지 말걸 그랬어. 미안하지만, 잔인하지만..
그녀가 내 옆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만 보는 게 좋았어. 적어도 그땐 나 혼자만 가질 수
있었으니까...... 그녀가 내게 큰 존재라는 걸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마음이 그렇다고 하는
걸 자꾸 모른 척 한 걸까?'
준기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직원중의 웨이브 머리를 한 여자가 준기를 부른다.
"원장님,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세요? 손님이 기다리잖아요."
준기는 마스카라를 한 쪽만 해주고 다른 한쪽 마스카라를 하려다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 정신 좀 봐. 죄송합니다, 손님."
그는 손님한테 사과를 한 후 나머지 마스카라를 쌍꺼풀이 진하고 눈이 큰손님한테 칠한다.
한편, 상우는 채린의 집까지 데려다 준다. 끝까지 점심을 먹고 가자고 했지만 그녀가 이 꼴
로는 어디도 갈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점심을 못 먹었지만 다음에는 꼭 먹자. 그리고 옷 말이야. 내일 꼭 변상할게."
"조심해서 가."
채린은 짧게 인사하고 집으로 들어간다. 상우는 그 모습을 그녀가 안 보일 때까지 보다가
핸드폰 플립을 연다.
"채아야, 오늘 5시까지 보기로 한 거, 지금보자."
다른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상우. 그녀는 그것도 모르고, 상우와 보낸 시간들이 황홀하기
만 하다.
"아- 아직까지 심장이 뛰네.'
오늘 시간들은 억 만금을 준다고 해도 바꾸지 못할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비록 점심은 못
먹고, 준기의 원피스가 찢어지는 사고가 있었지만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원피스 찢어진 걸 어떻게 말하나 걱정이 되는 그녀였다. 준기가 알면 살 빼라고 잔
소리할텐데……. 남자의 잔소리는 때론 여자의 잔소리 보다도 더한 힘이 있다. 그래서 몇 배
로 받는 스트레스가 생긴다.
다음 날, 원피스를 들고 준기의 숍으로 간 채린. 아니나다를까 준기는 원피스를 또 찢어먹었
다며 살 빼라고 잔소리했고, 듣다못한 그녀는 상우가 찢어 먹은 거 라고 말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기분이 언짢은 준기는 그 얘길 하자마자, 무섭게 화를 냈고 그런 모습을 처음 본
채린은 놀라다가 끝내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여자의 눈물이 남자의 마음을 한없이 약하
게 한다고 했던가? 그녀의 눈물을 보자, 그는 당황해서 그녀를 품에 안고 말없이 있었다.
그래도 그칠 기미가 안 보이자, 사과까지 하는 준기.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이렇게까지 화낼 생각은 없었는데……."
준기는 끝에 '상우 얘기가 나오니까 화가 났어.' 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모질게 할 수 있어?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우엉우엉."
채린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서 눈물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울어, 채린아. 내가 잘못했다니까."
준기는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더 꼬옥 끌어안았다.
그녀가 우니까 그의 마음도 미어졌다. 이렇게까지 마음이 아파 본 적은 처음이었다.
어느새 준기가 입고 있던 옷은 눈물자국으로 얼룩져있었고,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그만해. 다 큰 숙녀가 그렇게 울면 못 써."
마치 엄마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그렇게 달래고, 손에 힘을 풀어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제 눈물 닦고, 세수 해."
준기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고, 세수하라고 그녀를 화장실로 데리고 간다. 그녀는 준기
의 말에 순순히 따르며 세수를 한다. 세수를 하고 나서 채린은
"미안해. 일할 시간인데 나 때문에 시간 많이 뺏겼지?"
하며 미안한 모습을 보였다.
"아니야. 사과는 내가 해야지."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내가 미안하지."
"내가 미안 하대도."
"됐다. 우리 이러다 또 싸우겠다."
준기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만 가볼게. 일 열심히 해."
"너 그냥 가도 돼? 메이크업 안 해, 오늘은?"
"수업 없어, 오늘은."
채린은 쇼핑백을 들고 원장실 문을 열려고 한다.
"그건 왜 들고 가? 놓고 가지."
"꿰매 주게."
그녀의 바느질 솜씨를 아는 준기는 웃으며
"네 바느질 솜씨보다 내 바느질 솜씨가 낫겠다. 그냥 놓고 가."
라고 말했다.
"아니야, 그래도 ……."
"글세, 그러라니까. 바느질도 못 하는 애가 바늘에 찔려서 또 나한테 울고불고 하지 말고."
"내가 울보니? 만날 울게?"
"빙고, 너 울보잖아."
준기의 놀림에 살짝 삐친 채린은 "뭐야?" 라고 하며 준기의 어깨를 살짝 때린다.
"아파, 그만 때려."
사실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 짖궂게 농담을 하는 준기.
"남자가 그렇게 부실해서야. 몸이나 키워, 임마. 간다."
그녀는 쇼핑백을 팍 놓고 원장실 문을 열고 나가고, 준기는 아무렇게나 놓여진 쇼핑백을 보
며 중얼거린다.
"오늘부터 운동해야 겠군."
채린은 숍을 나와 뒤를 한번 돌아본다. 아직까지 심장이 뛴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준
기가 안을 때 설렌 느낌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란 이름으로 안아 본 적은 많았는
데, 오늘처럼 심장이 뛴 적은 없었다.
'이상하네. 내가 준기를 좋아하는 걸까? 말도 안 돼, 준기는 그냥 친구야. 동성친구 같은 친
구. 내가 좋아하는 앤 상우 뿐이야. 정신 차리자.'
채린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는 집으로 향한다. 옷도 예쁘게 입지 않고, 화장도 안 해서인
지 지나가는 예쁜 여자들이 눈에 걸린다. 예쁜 여자들 옆에 있는 잘생긴 남자들은 더 걸리
고…….
'용기를 내자. 이제부터 상우랑 좋은 추억 많이 만들거니까.'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운동을 시작한다. 집안에 헬스기구 하나 들이지 못하는 관계로 가까
운 산에 올라가 뛰고, 줄넘기를 하고, 맨손 체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 시간에 상우는
어제 전화 받고 만난 채아를 또 만난다. 채아라는 애는 상우가 허리를 두르면 22인치의 허
리가 금방 팔에 닿고 생 머리는 바람에 날려 상우의 코끝으로 향기를 전하는 여자이다.
상우는 그런 그녀를 사랑했다. 요즘엔 채아 못지 않게 채린이도 좋아졌지만 아직까지는 채
아가 우위에 있었다.
"채아야, 내가 너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그럼, 자기야. 나도 자기밖에 없는 거 알지?"
애교 있는 채아의 말투에 상우는 씨익 웃어 보인다. 하지만 상우는 알고 있다. 그녀의 남자
친구가 한 둘이 아니고, 자신도 그녀의 많은 남자친구 중 하나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녀를 계속 만나는 건 아름다웠고, 날씬하고, 애교가 많은 데다가 부잣집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상우는 집이 부자이면서도 돈에 대한 집착이 많은 남자였다. 채아와 엮이게 되
면 모 재벌가의 사위가 되는 영광스런 일이였으므로 그로서는 그녀를 쉽게 포기 할 수 없었
다.
"채아야, 눈 감아봐."
"왜?"
"깜짝 놀랄 선물을 준비했어. 눈 감아봐."
상우의 말에 채아는 애교 있게 '뭘까?'라고 하며 눈을 감았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어주며 눈을 떠보라고 한다.
"이게 뭐야? 반지잖아?"
"채아야, 우리 졸업하면 결혼하는 거야."
"상우야."
상우의 프로포즈에 감동한 채아는 마냥 기뻐하며 상우를 끌어안았다. 순간, 채아의 반대쪽으
로 얼굴을 댄 상우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한편, 채린은 운동하다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는다.
"더 이상 못 해먹겠네. 살이고 나발이고 찔 라면 찌고, 빠질 라면 빠지라 그래."
끈기 없는 채린은 그새를 못 참고 갈증이 나서 음료수를 사 마신다.
"아, 이 맛이야. 운동 후에 먹는 음료수 맛이 최고라니까."
채린이 한창 시원한 음료수 맛에 도취 되 있을 때, 뒤편에서 그녀를 보는 섬뜩한 눈빛을 느
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렇게 끈기가 없어서야."
뒤를 돌아보니, 자신을 한심한 시선으로 보는 준기였다.
"준기야, 가게는 어떡하고 왔어? 또 내가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알고 왔고?"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날라리 원장이라고. 네가 여기 있는지는 어머님한테 들었지."
"넌 뭐 하러 운동하러 왔니? 말라비틀어진 멸치 같은 애가."
"건망증 있니? 아님 알츠하이머니? 네가 몸 키우라며."
"그럼 나 때문에? 야, 그건 그냥 해 본말이야."
"난 말이야, 너한테 더 이상 친구가 아닌 남자로 다가가고 싶다."
준기가 중요한 대사를 말하는데, 하필 그때 채린이 손으로 귀지를 파는 바람에 듣지 못한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이거 파면서 딴 생각하느라 못 들었어."
"더럽게…… 됐어, 임마. 이 모습을 상우인지 모시깽인지가 봐야 하는 건데."
채린은 그의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손에 있는 귀지를 입으로 불어서 준기 쪽으로 날린
다.
"야, 이거 어제 새로 산 옷인데 너 정말 이럴래?"
"그래? 그럼 신고식을 거창하게 해 줘야지."
내친김에 코에 손을 넣어 큰 덩어리를 빼내 준기의 옷에 쓱 묻히는 그녀.
"야! 너 점점……. 내가 미쳤지. 이런 네가 뭐가 좋다고."
"너, 나 좋아하니? 나도 너 좋아해."
준기랑 평소에 이런 장난을 주고받아서 그의 고백을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그녀. 암만 그가
진심이라고 하면 무엇할까? 그녀에겐 아직도 자신이 남자처럼 느껴지질 않는데……. 할 수
없이 그는 아직은 고백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혹독한 운동을 시킨다.
이름하여 철인 3종 경기라고 줄넘기를 100번하고, 뛰어서 운동장을 네 바퀴 돈 다음 한 바
퀴는 토끼뜀을 시키는 방식이었다. 채린은 한번하고 못 하겠다며 자리에 주저앉았지만, 준기
는 억지로 일으켜서 총 5번을 하게 하였다.
'헉, 헉'
가빠지는 심장 소리에 채린은 더 이상 힘을 못 쓰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고, 준기는 채
린을 벤치에 앉히며 잠깐 쉬자고 말한다.
"힘들지? 살 빼는 게 그렇게 힘든 거야."
"놀리니? 누가 그걸 몰라?"
"왜 이렇게 까칠해? 내 딴엔 위로 삼아 해 준 말인데."
"위로 삼아 말하는 애가 똥개 훈련이나 시키고......잘한다."
채린의 불만에 준기는 채린의 심장 쪽에 손을 대본다.
"뭐 하는 거야?"
"채린아, 여기가 또 미친 듯이 뛰어?"
들켰다는 생각에 그녀는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당황한 표정만은 숨길 수 없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 표정이 말하고 있는데. 살 빼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네
건강이야. 힘들면 오늘로 끝내."
"힘들긴 누가 힘들다 그래? 하나도 안 힘들어. 정말이야. 볼래?"
채린은 일어나서 제자리 뛰기를 하며 힘들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그러나 이번에도 준기는
채린의 심장 쪽에 손을 대며
"거봐. 여기가 미친 듯이 뛰고 있잖아. 아무래도 이런 운동은 무리인 거 같다."
준기는 이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채린아, 그냥 나한테 와. 나한테 오면 너 힘들게 살 빼지 않아도 돼. 내가 너라는 자체를 좋
아하니까…….'
라고 말하고 있었다.
(12)
그때, 하늘엔 먹구름이 끼더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잔잔하게 오던 비는 천둥번개까지 동반
하며 세차게 내린다.
"비가 오네, 우리 집으로 가자."
그녀는 짧게 말하더니 준기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준기의 새로 산 베이지색 쟈켓은 내리는
빗줄기로 젖어가고 있었고, 보다 못한 채린은 그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한다.
"뛰지 말아. 너 또 심장 뛰잖아. 난 괜찮으니까 그냥 걷자."
준기는 다정하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빗속에서 느껴지는 그의 감촉은 뛰는 것 이
상으로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단순히 손만 잡았을 뿐인데, 이상한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한
다. 준기는 옆에 걸어가는 채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빗속에 있는 그녀는 섬세하고, 부서
질 거 같았다. 그녀에게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밝고 건강하고 왈가닥으로 까지 보이
던 그녀였는데……. 잠깐 그녀의 얼굴을 감상하다, 그녀가 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바람
에 그도 재빨리 앞으로 얼굴을 돌렸다.
"또 내 얼굴 훔쳐봤지? 그렇게 몰래 훔쳐보지 말고, 얼굴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마음
껏 보게 해 줄게."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나오는 그였다. 자기가 무슨 여왕마마나 된 듯이 말하는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다.
하늘엔 빛이 나더니 천둥소리가 들린다. 다른 여자들 같으면 남자의 부성애를 자극하려고 소
리를 지를텐데, 그녀는 소리 한번 안 지르고 태연하게 걸어간다. 그런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편하다. 기후를 핑계삼아 안기는 여자들은 피곤하다.
"다 왔어."
그녀는 낭낭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손을 놓는다. 그는 놓은 손을 다시 잡으며 '들어
갈 때도 손잡고 걸어가.' 라고 말한다. 그녀는 '좋아.' 하며 안으로 들어가고, 준기의 부드
러운 손을 꽉 잡는다. 안으로 들어가니 변한 게 하나도 없다. 10년쯤은 더 된 낡은 옷장도
그대로이고, 40인치 TV도 그대로이고, 어머님과 단 둘이 찍은 가족사진도 그대로였다.
"너희집은 변한게 없다."
준기의 말에 아무 대답도 없는 그녀.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괜찮아, 채린아?"
준기는 이렇게 말하며 채린을 안았다.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체온을 올라가게 만들고 마음까
지 따뜻하게 만들었다. 함께 있어서 좋은 사람, 함께 있어서 따뜻한 사람……. 준기랑 있으
면 마음이 안정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이제 괜찮으니까 놔줄래?" 라고 말하는 그녀였다.
"조금만 더,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좋겠다."
준기는 이렇게 말하고 그녀를 힘껏 안는다. 갑작스런 준기의 힘에 놀란 채린은 그 상태로 가
만히 있는다. 그러고 얼마동안을 있었을까? 준기는 그녀를 놓아주고, 비는 유리창을 두드리
며 거세게 내린다.
"비가 점점 더 많이 온다."
아까의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준기는 말을 돌리고, 채린도 무안해서 '응' 하며, 그의 말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문너머로 비가 쏟아지는걸 보는 두 사람.
한참동안을 말없이 비 오는 것만 본다. 그러다가 채린의 어머니가 집안으로 들어오고, 준기
를 오랜만에 본 어머니는 여전히 예쁘고 고운 모습에 놀란다.
"어쩜 넌 변한 게 하나도 없니?"
"안녕하세요, 어머님. 이게 얼마 만에 뵙는 거죠?"
어머니를 본 준기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깍듯하게 인사한다.
"예나 지금이나 너무 말라서 안쓰러울 지경이다. 아직도 못 먹고 다니는 거니?"
어머니의 짖궂은 농담에 채린은 '엄마도, 참.' 하며 준기를 자기 방으로 끌어당긴다.
"얘, 준기랑 오랜만에 얘기 좀 하게 내버려둬라.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인데."
"더 오래있으면 엄마가 무슨말을 할지 몰라서 그래요."
채린의 말에 어머니는 들은 척도 않고,
"준기야, 결혼할 여자는 있니? 난 네가 사윗감으로 맘에 드는데."
하며 더 짖궂게 말하였다. 어머니의 말에 채린은 어쩔 줄 몰라하며 얼굴이 빨개졌고, 준기
역시 예상치 못한 어머니말에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준기야, 이제 그만 가야지? 숍 오래 비워두면 안되잖아."
당황한 채린은 준기를 빨리 보내려고 하고, 준기도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응' 하
며 집을 나서려고 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벌써 가려고 하니? 오랜만에 본 김에 밥이나 먹고 가지."
하며 준기를 붙잡는다.
"엄마, 준기 빨리 가봐야 해요. 밥은 다음에 같이 먹어요."
"그래도 이대로 보내긴 서운한데."
어머니는 계속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준기의 손을 놓치 않았고, 밖에는 비가 멈추질 않고
계속 내린다.
"비가 시간이 갈수록 많이 오네. 준기야, 나가자. 요 앞에까지 배웅해 줄게."
채린은 어머니가 잡고 있던 준기의 손을 놓으며 집앞까지 데리고 나간다. 그 모습을 본 어
머니는
"준기야 다음에 또 와."
하며 아쉬운 목소리를 내었다. 우산 두 개를 든 채린은 한 개는 자신이 쓰고, 한 개는 준기
에게 주며, 함께 걷는다.
"채린아, 너희 어머님 정말 오랜만에 본다."
"그렇지? 너희 어머님도 한번 봬야 하는데……고등학교 때 이후로 뵌 적이 없어."
"우리엄마, 지금 미국에 계셔. 한국 나오시면 우리 집에 와서 봐."
"그래도 될까?"
"그럼, 엄마가 널 친딸 이상으로 생각하시잖아. 엄마 얘기하니까,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
다."
준기의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이슬로 덮인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미국에 계시고 한
국에 혼자 남아있는 준기의 생활이 얼마나 외로울까?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준기에게
연민이 생긴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꿋꿋하게 살고 있는걸 보면, 자랑스러워 보이기도 한
다.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 앞까지 간다. 버스가 올 때까지 한마디도 안 하다가 숍 안까지
가는 버스가 오자,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
"전화할게, 준기야."
"들어가. 아, 그리고 너 살 뺄 수 있는 운동, 한번 찾아보자."
준기는 이렇게 말하며 버스에 올라탄다. 채린은 준기가 버스에 오르는걸 보고 버스가 갈 때
까지 그 자리에 있는다.
잠시 후, 승객을 모두 태운 버스가 떠나고 준기는 멀어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본다. 잡고 싶
어도 지금 그녀의 마음에는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생각해 잡지 못하는 그녀. 언젠가
는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언젠가
가 언제 오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냥 그는 이렇게 먼발치서 그녀를 바라볼 수
밖에는 없었다.
준기랑 헤어진 채린은 돌아오는 길에 준기가 손 잡아주고, 안아 준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돈
다.
'왜 생각하는 거야? 유채린, 잘 들어. 준기는 친구일 뿐이야. 친구, 친구, 친구, 친구, 친
구.'
냉정하게 친구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감성은 이미 친구가 아닌, 남자로 느껴지고 있었다.
한 마음에 두 사람을 품는다는 것……. 여자로서 조신하지 못 하고, 두 사람 다 불행하게 하
는 일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마음은 이미 두 사람을 품고 있었다. 상우가 뜨거운 불같은 남자
라면, 준기는 물 같은 남자였다. 상우가 아침에 뜬 태양 빛이라고 한다면, 준기는 밤에 뜬
달빛 같은 남자였다. 매력도, 개성도, 생김새도, 목소리도 다른 두 남자……. 마냥 다른 것
같다가도 어딘가 비슷한 거 같기도 한 두 남자……. 그녀는 두 남자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
으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채린이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사이, 상우는 즐거운 데이트를 끝내
고 채아를 집으로 데려다 주고 있었다.
"자기, 우리 너무 빨리 헤어지는 거 아니야?"
애교 섞인 말투로 채아가 아쉬워하자, 상우는 굳나잇 키스를 하며 살짝 토라져 있는 그녀를
달랜다.
"오늘은 내가 일이 있네. 아쉽지만 다음에도 시간 많으니까, 그때 자기랑 얼굴 보자."
상우는 이 말을 하며 손을 흔들었고, 채아는 멀어져 가는 상우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상우는 채아의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다가 그녀가 안 보이자, 핸드폰
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굵고 투박한 손가락으로 채린의 번호를 눌렀다. 귀여운 아기 목소
리로 된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채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린아, 나, 상우야."
전화번호를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상우가 전화를 걸어서 놀란 그녀.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아까 패스트 푸드점에서 네가 알려줬잖아."
기억을 더듬어 보는 채린. 그러고 보니, 상우가 폰에 번호 저장한다고 했을 때 가르쳐준 기
억이 생각났다.
"아, 그랬었지? 이 놈의 건망증, 건망증. 병이라니까."
"그럴수도 있지, 뭐. 지금...볼래?"
상우의 말에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살핀 채린. 그러나 지금 모습은 화장도 안 하고, 트레이
닝 복 차림이라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이 모습으로 상우를 볼 수 없었던 채린은 '지금은 몸
이 안 좋다' 는 핑계를 대고, 아픈 목소리로 신음하기까지 했다.
"많이 아파? 내가 문병이라도 갈까?"
그녀에게 너무 친절해진 상우는 진심으로 걱정하며 이 말을 했고, 그녀는 '올 필요 없어, 조
금 쉬면 나을 거야.' 라고 말하였다.
"그래? 그럼 몸 조리 잘해."
상우는 이 같이 말하며 핸드폰 플립을 닫았고, 그녀도 핸드폰 플립을 닫으며
"너한테 안 꾸민 모습을 보이는 건 지난날의 내 수치를 드러내는 거랑 같은 거야."
라고 중얼거렸다.
(13)
그랬다. 수치……. 지금 상우가 그녀에게 친절한 건 겉모습이 아닌 화장으로 위장한 모습이
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는 그녀였다.
'왜 상우는 날 있는 그대로 좋아하지 않는 걸까? 아니, 상우를 탓할 필요는 없다. 더 화나는
건 떳떳하게 내 본모습을 드러내지 못 하는 나 자신한테 있으니까.'
그녀는 이렇게 자책하며 자신의 집 있는 곳까지 걸어가다, 옆집 아줌마가 뿌린 물벼락을 맞
는다. 순식간에 물벼락을 맞은 그녀는 옆집 아줌마한테 짜증을 냈고, 아줌마는 미안해서 어
쩔 줄 몰라한다.
"학생, 미안해. 학생이 지나가는 걸 못 봤어."
"아줌마, 미안하면 다예요?"
"내가 잘못했어, 학생. 그러니까 화 풀어."
아줌마는 이 말만하고 성급하게 들어가 버리고 만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채린은 옆집 대문
을 두드리다가, 개 짖는 소리에 놀라 집으로 도망 온다.
"아휴, 애 떨어질 뻔했네."
"채린이 들어왔니?"
"네, 엄마."
채린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서운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왜 그러세요? 왜 그런 얼굴로……."
"엄마는 너한테 서운하다. 내가 준기랑 얼마 만에 보는 거니? 근데 넌 준기를 인사시켜도
모자랄 판에 일찍 보내는 게 어디 있니?"
이럴 때 보면 어머니가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드는 채린이었다. 물론 아들이 없어 준기를
아들처럼 생각해서 예뻐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엄마, 그러지 말고 우리 맛있는 저녁 먹으러 가요, 네?"
"내가 너랑 둘이 저녁을 왜 먹니? 준기가 같이 있다면 몰라도……."
"엄만- 오랜만에 오붓하게 저녁 먹어요, 네? 엄마-"
결국 어머니는 채린의 애교에 못 이겨 그녀를 따라나선다. 두 사람은 동네에 있는 레스토랑
으로 가서 돈까스를 시킨다. 은은한 조명과 분위기 있는 재즈 음악이 레스토랑을 운치 있게
해 준다.
"여기 오랜만에 오니까 너무 좋다. 준기도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걸."
"엄만- 예쁜 딸내미가 있는데 그런 말씀을 하셔야 겠어요?"
"해야겠어."
"엄마도, 참."
채린은 웃으며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거칠다. 그녀를 위해서 일만 한 손이라서 그런지…….
이렇게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위해서 준기랑 오래있게 해 줄걸 하고 후회하는 그녀였다.
"엄마, 다음엔 준기 초대해서 같이 와요."
"정말 그러는 거지? 약속했어."
그녀의 말에 어머니는 아이같이 기뻐한다. 그렇게 좋을까? 어떻게 보면 자신보다 준기를 더
좋아하는 거 같아서 살짝 질투가 나는 그녀였다.
다음날, 하늘에서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날, 아침 9시부터 수업이 있는 채린은 7시에 준기의
숍에 들린다.
"빨리 해 줘, 오늘 수업 9시야."
"지금 시간이 내가 자고있을 시간인 거 알아, 몰라? 친구라서 안 해 줄 수도 없고."
친구? 자신은 단순히 친구였던가? 어제만 해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그녀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준기는 친구로만 생각하는데, 자신이 잘못 생각한 건
아닌가 하고…….
"아-"
준기가 하품을 한다. 피곤한데도 아침부터 일어나 메이크업을 해 주고 있는 거 보면,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해 주는건 아닌가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그녀다.
"다 됐어."
1시간이 지나고, 메이크업을 끝낸 준기. 채린은 거울을 보았다. 오늘도 역시 몰라 볼 정도다.
준기의 메이크업은 언제 봐도 요술 같다. 화장 하나로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다니…….
존경해 주고 싶은 녀석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그녀다.
"맘에 들어?"
"그럼, 맘에 들다 마다. 역시 너의 실력을 따라올 자는 이 세상에 없어."
그녀가 칭찬하자, 준기는 자신보다 실력 있는 사람은 많다며 겸손한 태도로 말한다.
"그렇게 겸손 떨 거 없어. 잘하면 잘한다고 하면서 잘난 척 하는 거야."
"뭘 모르는 구나. 원래 이렇게 겸손 떨어줘야지, 칭찬을 더 들어."
"그런 의도가 있었군."
그녀는 준기랑 말장난을 하다가 학교에 가본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준기는 졸린 데
도 불구하고, 학교까지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하며 그녀를 끌고 갔고 그녀는 사양하다가 준
기한테 못 이겨 차에 올라탄다.
"고마워, 안 데려다줘도 되는데."
"뭘, 친구니까 당연한 거지."
또 친구라고 말하는 준기. 그놈의 친구 소리는 안 할 수 없나? 그가 자신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는 걸 아는데…….
채린은 이렇게 생각하며,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준기는 운전대를 잡으면 조용해지는 성격이
라 학교 도착 할 때까지 한마디도 없다.
"내릴게."
"응, 잘가."
두 사람은 짧은 인사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채린은 강의실 안으로 들어간다. 강의실 안엔
변함 없이 상우가 먼저 와 있었다.
"채린아, 여기야."
상우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채린은 싱그러운 미소를 한번
짓고는 상우 옆으로 가서 앉는다.
"오늘은 캐주얼 차림이네, 예쁘다."
상우가 채린의 스타일을 보며 칭찬한다.
"고마워."
채린은 칭찬에 답하고, 상우의 스타일을 본다. 평소에는 캐주얼을 즐겨 입는 그이지만, 오늘
은 세미정장을 입고 왔다. 흰색 면 티에 검은색 재킷을 걸치고 바지는 청바지를 입고 은색
십자가 목걸이로 포인트를 준 상우. 은색으로 빛나는 십자가 목걸 만큼이나 은색으로 빛나
는 십자가 귀걸이도 인상적이다. 십자가 귀걸이를 보니, 준기 생각이 나는 채린.
긴 머리에 가려져서 언뜻 보이는 은색 십자 귀걸이는 준기의 필수 아이템이 된지 오래였다.
메이크업을 해 주면서 보게 되는 십자 귀걸이는 섹시했다.
"채린아, 무슨 생각해?"
상우의 말에 현실로 돌아온 채린.
"아니야, 암것도."
"이상하다, 너. 멍하게 있고... 숨겨둔 남자친구라도 생각하는 거야?"
"남자친구는 무슨."
채린의 호통에 상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고, 강의실 안에 있던 다른 학생들도 채
린 쪽을 한번보고는 수업 준비를 했다.
"없다면 없는 거지. 왜 소리는 질러? 애 떨어질 뻔했잖아."
"남자가 어떻게 애를 낳는다고 그러니?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수업 준비나 해."
채린의 말에 상우는 군소리 없어 수업준비를 한다.
"너는 안해?"
상우가 수업 준비를 하고, 멍하게 있는 채린을 툭 치며 말한다.
"해야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채린은 부리나케 수업 준비를 하고, 교수가 강의를 하기 위해 들어온다.
교수가 열과 성을 다해 강의를 하고 나간 후, 상우는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오늘 우리 집 비는데 같이 있을래?"
준기 외에는 남자가 혼자 있는 집에 처음 가보는 채린은 부끄러워하며,
"남자 혼자 있는데 어떻게?"
하며 80년대나 나왔을 법한 말을 한다.
"웬 구시대적 사고? 그러지 말고 가자. 안 잡아먹을 거니까."
채린의 고민을 솔직하게 말하는 그. 채린은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들어 망설이다가 그의 뒤
를 따라 나선다.
상우의 집은 새로 개발한 아파트였다. 소위 상류층만 산다는 그 아파트. 아파트 건물은 다른
아파트랑 같지만, 아파트 공원에 영화관까지 있는 최신식이었다. 이런 아파트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우의 집은 한참 걸어가야 했다.
"여기야."
하고 상우가 안내한 곳은 1701호 앞이었다.
열쇠대신 번호 키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럭셔리한 분위기가 채린의 눈을 뜨지
못 하게 만들었다. 가구며, TV며, 벽지며, 커튼이며, 가전제품까지……. 전부 최고급이었다.
그녀는 떡 벌어지려던 입을 다물고 최대한 침착 하려고 애썼다.
"앉아."
상우가 최고급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어."
"뭐 좀 마실래?"
"아니야."
"목마른데 마셔. 아줌마, 주스 두 잔만 주세요."
"네."
상우네 집에서 일하는 아줌마가 주스 두 잔을 쟁반에 받혀서 가지고 왔고, 아줌마를 본 채
린은 놀라고 만다.
"엄마, 엄마가 여긴 왜 있어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네가 여긴 왜 있니? 상우 학생이랑 아는 사이야?"
두 사람이 놀라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상우도 같이 놀라며,
"두 사람이 아는 사이였어?"
라고 말한다.
"응. 우리 엄마셔."
채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우는 벌떡 일어나서 채린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한다.
"상우 학생, 이럴 거 없어."
"아니에요, 어머님. 그거 이리 주세요. 제가 할게요."
방금 과는 180도 달라지는 태도. 채린은 그런 상우가 밉다. 그동안 자신의 엄마를 얼마나 부
려먹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상우의 얼굴이 보기 싫어진다.
"갈게, 나."
"채린아."
뒤에서 붙잡는 상우를 뒤로하고, 그녀는 앞만 보고 밖으로 나간다. 어머니는 죄를 지은 거
마냥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채린은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났다. 꼭 이렇게 나와
야 했었는지……. 하지만 상우 앞에서 엄마의 모습을 본 순간 초라해 보여서 창피했고, 상우
가 엄마를 부리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상우가 정말 싫다."
채린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쓸쓸하게 길을 걷는다.
저녁이 되고, 집으로 온 어머니는 채린에게 잠깐 얘기를 하자고 부른다.
"할말 없어요, 전."
"그러지 말고 같이 얘기 좀 하자."
"할말 없다니 까요."
채린이 화를 내면서 자신의 방문을 쾅 닫았고, 어머니는 닫힌 방문을 쓸쓸한 눈빛으로 보았
다.
채린은 방안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울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존
경스럽게 느껴지던 어머니가 자꾸만 창피하게 느껴져서 눈물이 나왔다. 세상에 남자가 전부
는 아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집에 파출부라는 사실이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채린의 눈물은 밤까지 계속 되었고, 밖에는 서러운 마음을 더 서럽게 만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흑,흑.'
내리는 비 따라서 더 서럽게 우는 채린. 그녀는 그렇게 울다가 잠이 들었다. 채린의 울음소
리가 그치자, 어머니는 조심스레 그녀의 방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았
다.
"채린아, 미안하다. 이 엄마가 못 나서 너한테 상처를 주는구나, 미안하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채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어머니 눈엔 슬픈 비가 내렸다.
어머니의 말을 듣지 못하는 채린의 꿈속엔 아버지가 찾아왔다. 낮에 상우 집에 갔을 때, 화
가 나서 나왔던걸 혼내려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아빠, 제가 잘못 했어요."
"네가 잘못한 건 알고 있니?"
"네."
"그래, 잘못을 알았다니 됐다. 네 심정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널 위해서 고생하시
는 엄마잖니.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할망정, 그러면 어떡하니?"
"잘못했어요."
"이 아빤 네가 백 번 잘못했다고 하는 것 보다 네 엄마를 위해 예쁜 행동 한번 하는걸 보고
싶어. 그래 줄 수 있지?"
"네, 아빠."
채린은 꿈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눈물은 채린이 현실에서도 흘리고 있었다.
"채린아, 채린아. 왜 그러니?"
자면서 우는 딸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잠에서 깬 그녀는 눈에 보
이는 어머니를 보며 '죄송해요.' 하며 와락 안는다.
"그래, 네 마음 다 안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럴 수 있어."
"엄마, 내가 엄마 많이 사랑하고, 엄마를 존경하는 거 아시죠?"
"그럼, 알다마다. 우리 예쁜 딸."
두 모녀의 감동적인 제스처에 비는 축하라도 해 주듯이 밤새도록 내린다.
(14)
채아가 쉬고 있는 집. 그녀는 음악을 틀어놓고 손톱 손질을 하고 있다. 그때, 최신 가요 벨
소리가 울리고, 그녀가 핸드폰을 받는다.
"민정이, 네가 어쩐 일이야?"
"너 소식 들었어?"
채아의 친구 민정이 다급해진 목소리로 말한다.
"무슨 소식?"
"요새 상우랑 유채린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 학교에 소문이 파다해. 어제는 상우 집
까지 놀러갔대."
"뭐?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유채린이라면 우리 학교에 제일가는 폭탄인데, 그런애랑 상
우가 어울리겠니?"
"네가 뭘 모르는구나. 요새 유채린, 변했어. 몰라보게 예뻐졌다구."
예뻐졌다는 말에 채린의 얼굴을 한번보고 싶은 채아였다.
"알았어. 내가 확인해 보고 연락할게."
채아가 핸드폰 플립을 닫고, 비장한 각오로 학교로 나선다.
"오랜만에 학교 오니까 대게 어색하네."
채아는 학교에 잘 안 오는 아이였다. 학교에 안 와도 자신의 든든한 지원군들이 대리 출석
도 해 주고, 시험 때면 노트 복사도 해 줘서 학교에 올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나저나 올 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
채아가 이 말을 하자마자, 그녀의 앞으로 오는 눈부신 여자를 보았다. 통통하지만 흰색 원피
스를 공주같이 차려입은, 귀여운 느낌의 여자. 채아는 처음엔 몰라보다가 그게 채린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어머, 웬일이야? 저게 유채린?"
깜짝 놀라는것도 잠시, 그녀는 지금 유유히 가고있는 채린을 잡아야 했다. 그녀의 왼쪽 구두
굽이 나갈 정도로 뛴 채아는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채린을 잡았다.
"헉, 헉. 유채린, 나 좀 보자."
"이채아, 네가 무슨 일로?"
채린이 영문을 몰라하며 그녀를 보았다.
"나쁜 계집애."
채아는 채린이 얼굴을 돌리자마자, 손으로 그녀의 뺨을 쳤고, 주변에 있던 학생들은 그녀들
을 보고 있었다.
"네가 내 악세사리를 건들어?"
"악세사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잘 들어둬. 상우는 내 악세사리야. 앞으로 건들었다는 얘기 한번만 더 내 귀에 들리면 가만
두지 않을테니까, 각오해."
채아는 이 말을 하고 홱 돌아서 걸어갔고, 채린은 자신의 뺨을 쓰다듬으며 채아의 뒷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채린아."
그때, 멀리서 채린을 다정하게 부르는 상우 목소리가 났고, 그녀는 어제 일도 있고, 아까 일
도 있고 해서 못 들은 척 하며 그를 그냥 지나친다.
"채린아, 채린아."
그냥 지나치는 그녀를 보며, 그는 계속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들은척도 않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는 그녀를 따라 뛰어서 안으로 들어간다.
"채린아, 방금 내가 부르는 거 못 들었어?"
상우는 채린을 잡으며 말했고,
"들었는데, 너 부르는 거에 대답하기 싫었어."
라고 말하는 채린.
"왜, 싫은데?"
"어제 일도 그렇고, 방금 채아가 다녀갔었어."
"채아가?"
"그래, 다른 애들 있는데서 보기 좋게 뺨까지 맞았어, 너 건들었다고."
그녀의 말을 듣고 기가 막힌 상우는 채아한테 연락을 한 후, 약속을 잡는다. 그 길로 약속장
소에 뛰어간 상우는 채아를 보고는 인상을 쓴다.
"상우야, 나 보는거 싫어? 표정이 왜 그래? 인상 좀 펴."
"채아야."
"응?"
"왜 그랬니? 왜 채린이 뺨을 때렸어?"
그의 말에 환하게 웃고 있던 표정에서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지는 채아.
"걔가 널 건드니까. 뭐도 아닌 게 건드니까. 그게 싫었어."
"이채아."
"분명히 말하겠는데, 넌 내 꺼야. 언제까지나 내 악세사리라고. 누구도 널 못 건들어."
채아의 말에 기가 막힌 상우는 주먹이 올라가려는 걸 진정하며 차분하게 말한다.
"내가 널 좋아하긴 하지만, 네 악세사리나 소유물은 아니야. 날 그렇게 밖에 생각 안 하고
있었다니, 서운하다."
"그럼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았어? 널 사랑하는 줄 알고 있었단 거야? 착각마. 나한
테 남자는 너말고도 많으니까. 넌 그냥 악세사리일 뿐이야."
"더 이상 앉아있을 이유가 없네. 먼저 일어날게."
상우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약속 장소에서 나와 사람이 많은
시내 한복판을 걸어다녔다.
'그래, 알고 있었잖아? 난 채아에게 원래 그런 존재인걸.'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마음 한쪽은 무거웠다. 자신이 그동안 채아를 위해서 얼마나 노
력했었는데……. 하지만 결국 자신도 그녀와 잘되서 팔자 고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자업
자득이었다.
"그래, 내가 이런 말 들어도 싸지."
상우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채린이 있을 학교로 향했다. 그러나 학교에 가보니 강의는 끝나
있었고, 채린은 학교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거야? 얜."
그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멀리서 준기와 함께 있는 채린을 본 상우. 그녀는 자신한
테 화낼때와는 반대로 다른 남자 앞에서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화가 나 그녀 앞
으로 간 상우. 채린은 그런 상우를 보고 깜짝 놀라며
"언제 왔어?"
라고 말한다. 채린의 말은 듣지도 않고 준기를 아래부터 위까지 훑어본 상우는
"누구야?"
라고 하며 준기를 경계의 시선으로 본다.
"친구야. 학교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구경시켜 주고 있어."
채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끌고 가려고 한다.
"왜 이래, 상우야? 이것 좀 놔."
채린은 거칠게 상우의 손을 뿌리친다.
"유채린, 아무리 친구라 해도 남자는 용납 안 된다."
"기가 막혀. 뭐가 어쩌고 어째? 네 여자친구는 한테 따귀까지 때려놓고선."
"따귀 때렸어?"
채린이 따귀 맞았단 말에 울컥한 준기는 상우를 노려보며
"네 여자친구 관리나 잘 하시지."
하며 채린을 데리고 학교 밖으로 나간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볼리 없는 상우, 억지로 채린을
자기쪽으로 데리고 오려고 하고, 준기도 그런 상우한테 질세라 채린을 자기쪽으로 데리고
온다.
"기생 오라비 같은 자식이, 이거 못 놔?"
"못 놓겠다면 어쩔 건데?"
둘의 실랑이는 커져 갔고, 보다 못한 채린은 상우를 밀친다.
"한상우, 날 만만하게 본 모양인데, 나 네 여자친구한테 따귀 맞고도 헤헤 거릴만큼 얼빠지
지 않았거든?"
"채린아, 그건 내가 사과할게. 미안하다, 정말."
"됐어. 너랑은 이제 끝났어."
채린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상우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다음날부터 끈질긴 사과공세
가 이어진다.
"미안해."
"됐어."
"미안하다."
"됐다니까."
"미안해, 정말."
"아, 됐다니까. 짜증나게 왜 이래?"
"네가 내 사과 받아줄 때까진 계속 이럴 거야."
사과공세는 두 달 동안 이어졌고, 계절은 싱그러운 봄에서 찌는 듯한 여름으로 바뀌어 있었
다.
"이젠 내 사과 받아주는 거지?"
"내가졌다, 그래 받아줄게."
결국 끈질긴 사과 공세에 못 이긴 채린은 상우의 사과를 받아준다.
"우리 다시 화해한 기념으로 고기나 뜯으러 갈까?"
"안돼. 지금은 약속이 있어."
그녀는 준기와 헬스하기로 한 약속이 있었다. 상우가 알면 심기가 불편해 지니까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내일은 꼭 같이 고기 뜯자."
"그래."
상우는 성큼성큼 걸어서 학교 밖으로 나간다. 상우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채린은 준기한
테 전화를 한다.
"준기야 운동하기로 했지?"
"아, 그랬지. 깜빡 잊고 있었어. 어디서 볼까?"
"그냥 삼신 헬스장에서 보자."
"그래, 거기서 봐."
채린은 핸드폰 플립을 닫고 나서, 학교 주변의 커피숍으로 갔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커피숍 인테리어는 언제 봐도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녀는 늘 앉는 창가로 가서 자리에 앉는다. 창가로 내다보이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여름이
라 그런지 시원하다. 남자들은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고, 여자들은 민 소매에 짧은 미니스커
트나 핫팬츠를 즐겨 입었다. 그녀는 잠시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흰색 폴로 티셔츠에
베이지 색 면바지……. 여름에 입기엔 더운 옷이었다.
'운동하고 살 빼서 나도 민 소매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말겠어.'
그녀는 이렇게 마음먹으면서 준기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저녁이 되고, 준기의 전화를 받은 채린은 삼신 헬스장으로 향한다.
그 곳에 도착해 보니, 준기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만 왔다갔다 거린다.
"준기녀석, 코빼기도 안 비치네. 금방 온다더니 어떻게 된 거야?"
채린이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몇 분 후, 준기가 허겁지겁 채린의 앞으로 달려온다.
그는 달려와서 그런지 숨이 가쁘고,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하게 맺혀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지금왔어."
"들어가자."
두 사람은 나란히 헬스장 안으로 들어간다. 그 곳에 들어서니, 직원들이 두 사람을 반겼고,
두 사람은 회원가입을 했다.
"요즘엔 연인끼리 오셔서 운동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직원 중의 한 명이 두 사람을 연인이라고 착각, 이렇게 말하자, 채린은
"저흰 그냥 친구에요. 연인이 아니에요."
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서운해진 준기는
"저희 연인 사이 맞아요."
라고 말해버린다.
채린은 그의 말에 당황하고, 그녀가 당황하는 사이, 준기는 그녀의 몫까지 계산한다.
"3개월 치 미리 선불로 냈으니까 돈이 아까워 서라도 빠져선 안 돼."
"준기야 왜 네가 내? 돈도 없을 텐데."
"돈이 없긴 왜 없냐? 우리 숍에 손님 넘치잖아. 돈 문제는 걱정 마."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녀는 그런 준기가 고마워서 눈물을 글썽
거린다.
"야, 왜 울어? 별것도 아닌 거 갖고."
준기는 이렇게 말하며 채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채린이 마음을 추스린 후, 두 사람은 운동
복으로 갈아입고 가벼운 줄넘기부터 시작한다.
(15)
두 사람이 줄넘기를 하는 사이, 채아가 헬스장에 들어왔다. 채아는 늘 그렇듯이 가벼운 맨손
체조부터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줄넘기를 하고 있는 채린을 발견하고, 이를 갈고 있는데 옆
을 보니 눈에 쏙 들어오는 미남이 보였다. 미남이라면 놓칠 수 없었던 채아. 준기에게 다가
갈 기회를 잡고 있는데 마침 채린이 줄넘기를 끝내고 화장실 있는 쪽으로 나간다. 이때다
싶어 준기에게 다가간 채아.
"저, 이 기계 다루는 법 좀 알려주실래요?"
하며 작업을 시작하고, 준기가 자전거 기계 다루는 법을 알려주자, 고맙다며 가까운 곳에 차
를 사겠다고 말한다.
"됐어요, 일행이 있어서요."
"그럼 그 일행 분도 함께......"
"아니요, 괜찮아요."
채아의 말이 끝나기 전에 말을 가로채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준기. 채아는 뭐 저런 애가
있나? 하며 기막혀 한다. 하지만 쉽게 넘어가면 재미없는 법. 채아는 다음을 기약하며 운동
을 한다. 그 때,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본 채린이 들어오고, 준기는 그녀와 함께 다정하게 자
전거 타기를 시작한다. 자전거를 다 한 후에는 런닝 머신을 하고. 그렇게 2시간 가량을 헬스
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준기는 다시 숍으로, 채린은 집으로, 각자의 갈 길로 돌아간다.
그렇게 한달 동안을 운동했다. 한달 동안의 운동결과, 채린은 5kg이 빠졌다. 부푼 마음으로
민 소매를 입은 채린. 그러나 아직도 굵디굵은 팔뚝에 좌절하고, 실망한 그녀는 민 소매를
벗어서 던져 버린다. 그녀는 팔뚝 살을 빼겠다는 일념 하나로 팔뚝 부분을 집중적으로 운동
했고, 3달 후엔 15kg이나 빠지는 쾌거를 이룬다.
'됐어. 살도 많이 빠지고, 팔뚝도 많이 빠졌으니 민 소매를 입을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 채린. 그러나 어느새 9월이 됐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반 팔에서 긴 팔 차림으
로 변하고 있었다. 결국 여름에 민 소매를 입지 못한 그녀는 내년 여름을 기다려야 하는 신
세가 되고 말았다.
다음 날, 하늘엔 구멍이 뚫린 듯이 비가 오고, 채린은 새로 산 검은색의 세련된 우산을 든
다. 유유히 학교로 향하는 그녀. 강의를 끝낸 후, 옆에 앉은 상우와 잡담 중이다가 학교 밖
으로 나간다. 여전히 하늘엔 구멍이 뚫린 듯이 내리는 비. 빗속에서 상우는 채린의 오른쪽
눈에 껴진 눈곱을 발견한다.
"여자가 칠칠치 못 하게."
하며 그걸 떼어주는 상우. 하지만 우연치 않게 같이 점심이나 먹을까 하며 학교 앞으로 차
를 가지고 온 준기가 그 광경을 보고 있다. 할 말을 잃은 준기, 키스하는 거라고 오해하고
핸들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 버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린은 상우가 떼어 준 눈곱을 보며
해맑게 웃는다.
준기, 아까의 광경이 머릿속에 떠 오르고 운전을 하고 있으면서도 열이 받는 준기는 차를
도로 한 복판에 세워 놓는다. 뒤에 가던 차들은 갑자기 멈춰버린 준기차를 보며 신경질적으
로 크락션을 울린다.
"조용히들 안 해?"
이미 열을 받을 대로 받은 준기는 애꿎은 차들한테 화풀이를 하고, 배째라 식으로 차를 세
워 놓고 있는다. 결국 준기의 차를 피해서 앞으로 가는 차들. 그 덕에 준기의 차만 도로에
덩그러니 남고, 준기는 내리는 빗줄기를 보며 우울해 한다.
'채린이한테 지금이라도 좋아한다고 말할까?'
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그녀에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느낀다.
고민하는 준기, 갑자기 좋은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핸드폰 폴더를 열어 아는 친구한테
부탁을 한다.
"여자 친구 역할 좀 해줘."
[여자친구? 내가 왜?]
"잡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 못 잡으면 나, 평생 후회해. 잘하면 죽을지도 몰라."
[여자 생겼구나. 뭐 하는 여잔데?]
"대학생."
[대학생? 예뻐?]
"대게 평범해. 그치만 예뻐."
[평범한데, 예쁘다니? 평범하면 평범한 거고, 예쁘면 예쁜 거지. 말 대게 아리송
하게 한다.]
"말로는 표현 못 해. 아무튼 해 줄 거야? 말 거야?"
[해줄게. 누구 부탁인데.]
준기의 친구는 해 주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는다. 폴더를 닫은 후, 준기는 이제야 그녀
가 나한테 올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면서 심장이 두근거린다.
"좋았어."
준기는 이렇게 쾌재를 부르고, 채린한테 전화해서 저녁에 자기 숍으로 오라는 말을 전한다.
오겠다는 채린.
"이제 된 거야."
이렇게 말하며 준기는 혼자 좋아한다. 옆 차에서는 준기가 혼자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재미
있다는 듯이 웃는다.
저녁이 되고, 준기의 숍 앞으로 온 채린. 들어가진 못하고 유리로 숍 안의 풍경을 보는데,
준기가 어떤 여자와 함께 있다. 게다가 다정하게 키스까지 한다. 채린은 그 모습을 보며 기
막혀 하며 앞만 보고 뛰어간다. 얼마를 달렸을까? 어떤 카페앞에 멈춰 선 채린. 숨은 턱까지
차 오르고 죽을 것 같다. 그녀는 아까 키스한 장면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애
쓰면 애쓸수록 키스 장면은 새록새록 떠오르고, 그녀는 괴로움에 또 달린다. 달리면 생각나
지 않을까 해서. 한편 숍 안에선 '수고했어,' 하는 준기의 목소리가 들리고, 여자는 '이래도
괜찮은 거냐?' 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말했잖아. 그녀를 잡아야 한다고. 잡기 위해선 이 방법이 확실해. 질투심을 유발해서 그녀
가 먼저 고백하게 만들거야."
"작전은 좋은데, 만약 상처받아서 다신 너 안보면 어떡하냐?"
"나, 봐. 걱정 마. 그녀가 먼저 고백 할 테니까."
채린은 그 길로 집으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자기 방에서 펑펑 우는 그녀. 어머니
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그녀를 위로하고 채린은 어머니를 안고 운다. 너무나 서럽게.
다음 날, 어제의 충격으로 학교를 빠진 채린. 하루 종일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오후 늦
게나 되어 전화로 준기를 부른다. 하지만 준기는 다른 약속을 핑계로 그녀의 나오라는 말을
거절한다. 채린은 석연치 않은 기분에 몰래 준기의 숍으로 간다. 그리고는 준기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저녁 8시, 준기가 나오고, 어떤 여자와 만나고 있는걸 본 그녀. 그녀가 어제 준기
와 키스한 여자인걸 확인하고 두 사람을 미행한다. 준기는 여자와 다정하게 걸어가다가 시
내 구석지에 있는 모텔로 들어간다. 그걸 보고 경악하는 채린. 모텔까지 따라 들어가려다 포
기하고, 그 앞에서 나올 때까지 있는다. 그 시간, 채린이 자기 뒤를 미행한걸 안 준기는 그
녀가 안 가고 모텔 앞에 있는 걸보고 감기에 걸릴까봐 안타까워한다.
"그렇게 걱정되면 가서 따뜻하게 안아주지 그래?"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 근데 지금 그러면 안되잖아. 너랑 뭔 일 있어 보여야
하는데."
"채린씨는 알까? 당당하게 모텔에 들어간 연인은 지금 잡담 중이란 것을."
"모르고 있을거야."
준기는 하염없이 창문으로 채린의 모습만을 보았다. 주위에 떨며 자신을 기다리
고 있는 모습에 친구 말처럼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었다. 그러고 1시간 후, 준기
는 친구와 모텔을 나왔다. 준기가 나올 때, 재빨리 몸을 숨긴 그녀는 모텔 앞에서 여자와 헤
어지는 준기를 보고 나서야 준기앞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준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돌아보는 준기.
"여기에 네가 왜?"
하며 시치미를 뗐고,
"할 말이 있어서."
하는 채린.
"할 말이 뭔데?"
"방금 다 봤어. 그 여자랑 어떤 사이야?"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이준기, 우리가 이것밖에 안 되니?"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우리? 우린 말이야."
선뜻 대답하지 못 하는 채린. 그냥 억누르고 있던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난 우리가 진정한 친구 사이인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나한테 넌 어느새 남자였
어. 어느새 널 사랑해 버렸다고. 아까 그 여자한텐 대게 미안하지만, 준기 널 그 여자한테
줄 수 없어."
채린의 고백에 그녀를 안는 준기.
"그래. 내가 바랐던 말이 이 말이야.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 줄 몰라. 나도 너 사랑해.
네가 심장에 깊이 박혀서 떨어지질 않아."
"준기야."
"내 심장을 꺼내서 너에게 보여주고 싶어. 널 향한 네 심장이 얼마나 뜨거운지, 널 향한 내
심장이 얼마나 뜨거운지, 널 향한 내 심장이 얼마나 격렬한지를 보여주고 싶어."
"준기야."
준기의 고백에 눈물을 흘리는 채린. 준기는 아까보다 힘껏 채린을 끌어안는다.
"준기야, 그 여자랑은 무슨 사이야?"
"아직도 모르겠어, 바보야? 너 잡으려고 연극한 거야. 아까 걔랑은 그냥 친구야."
"정말?"
"그래."
두 사람이 모텔 앞에서 한참 끌어안고 있으니까 지나가는 모텔 손님들이 두 사람을 쳐다본
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끌어안는 두 사람. 이제 두 사람은 시작하는 연인이 되었다.
다음 날, 전날 강의에 빠져서 시무룩해진 채린을 위해, 분위기 있는 가을 메이크업을 해 주
는 준기. 채린은 그 메이크업을 하고 갈색의 가을 분위기 물씬 나는 정장을 입는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 상우한테 말한다.
"준기랑 사귀기 시작했어."
"그럼 나는?"
"너도 물론 좋아했지. 하지만 여자는 두 얼굴인 거 알지? 화장 한 모습과 화장을 지운 모습.
내가 화장을 할 때의 너는 더 없이 친절하고 좋은 애지만 내가 화장을 지울 때의 너는 냉정
하고 나한텐 무관심한 아이야. 하지만 준기는 달라. 그 애는 내가 화장을 할 때나, 화장을
지울 때나 한결같이 대해 줘."
상우는 채린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말하는 내용이 전부 사실이었으므로. 결국
상우는 학교에 며칠 나오다가 휴학계를 내고 군대에 지원한다. 상우가 없어진 학교에 멋낼
일이 없다고 느낀 채린은 더 이상 메이크업을 하지 않고, 예전에 수수했던 모습으로 돌아간
다. 그 덕에 아무도 그녀를 봐 주지 않고, 오직 준기만이 그녀를 봐 준다.
(16)
2년 후, 4학년이 된 채린은 취업 준비로 바쁘다.
다행히 뛰어난 성적으로 교수님한테 S기업이라는 대기업을 추천 받은 채린은 면접 날 예쁘
게 보이기 위해 준기한테 메이크업을 부탁한다. 하지만 준기가 하는 말이
"미안해서 어떡하지? 그 날 엄마 보러 미국에 가려고 비행기 표랑 다 예매해 놨는데."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날짜를 미룰까?"
"아니야. 내 실력이 있는데, 잘 되겠지. 미국 잘 다녀와."
채린은 그 날 메이크업도 안 하고 면접을 보게 되고, 결과는 실력은 자신보다 떨어지지만
미모는 앞서는 다른 동기생에게 합격 자리를 내 주고, 자신은 보기 좋게 미끄러진다.
속상한 마음에 채린은 술을 마시고, 준기도 미국 가고, 상우도 군대 간 마당에 채린은 혼자
서 웬 청승이냐 할 정도로 술을 양껏 마신다.
"이모, 여기 술 한 병 더요."
"이제 그만 마셔. 그러다 탈 나."
"이모, 그러지 말고 한 병 더 주세요."
채린의 말에 가게 주인은 혀를 끌끌 차며 술을 한 병 더 내온다.
"여기있어."
"고마워요, 이모."
"그런데 뭐 때문에 그렇게 술을 마시는 거야?"
"제가요, 오늘 면접에서 미끄러졌거든요. 나보다 실력도 없는 애 한테."
"그 회사 안되겠다. 채린이 같은 인재를 몰라보고."
"다 내가 못생긴 탓이죠."
"채린이 얼굴이 어때서? 내가 보기엔 예쁘기만 하고만."
"회사에서 볼 땐 그게 아니거든요. 근데 속상하진 않아요. 다른 사람들 다 나보고 못났다고
해도 나 예쁘다고 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채린은 이 말을 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놀란 가게 주인이 그녀를 병원으로 옮기고,
그녀의 가방을 뒤져 집으로 연락한다. 연락을 받고 놀라는 채린의 어머니.
"뭐라고요? 네, 알았어요."
어머니는 병원으로 한걸음에 달려오고, 의식을 잃은 채린을 본다.
"안녕하세요."
가게 주인이 채린의 어머니를 알아보고 인사하고, 아까 까지 자신의 가게에서 술을 마신 이
야기와 의식을 잃게 된 얘기를 한다.
"그랬군요. 얜 술을 과하게 마시면 안 되는 아이인데."
"죄송합니다. 제가 채린 학생을 끝까지 말렸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바쁘실 테니 가서 일 보도록 하세요."
"채린 학생 깨어나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가게 주인은 메모지에 자신의 가게 전화번호를 적고 병원을 나간다. 가게 주인이 나간 후,
채린의 어머니는 채린이 깰 때까지 마음을 조리면서 지켜본다.
밤, 그녀가 의식을 되찾고,
"이제 정신이 들어?"
"제가 어떻게 됐죠? 여기는 병원 아니에요?"
"술 마시고 정신을 잃었어. 놀란 주인 아줌마가 병원으로 데리고 온 거고."
"그랬구나."
채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어머니는 그녀를 다시 눕힌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 며칠동안 안정시켜야 한 대."
어머니는 이 말만하고 말았다. 사실, 의사가 왔을 때 심장병이 재발했다는 말을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채린은 그런 줄 알고 병원에서 지낸다.
그리고 며칠 후, 미국에서 돌아 온 준기는 채린에게 전화를 한다. 하지만 채린의 핸드폰은
낯선 여인의 음성만이 들릴 뿐 전혀 받질 않고, 채린이 걱정된 준기는 그녀의 집을 간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그래, 준기 왔구나. 그런데 채린이 여기 없는데?"
"여기 없어요? 어디 갔나요? 전화해도 안 받던데요."
"병원에 있어. 채린이가 면접에 떨어져서 술을 많이 마시다가 심장병이 재발했어."
"네? 지금 어느 병원에 있죠?"
"나도 지금 가는 길이니 같이 가자."
준기는 초조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뒤를 따라 병원에 들어온다. 채린을 본 그. 다행히 그녀의
모습은 건강해 보였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럼 둘이 얘기 나누고 있으렴."
어머니가 자리를 피해주고, 준기는 채린의 앞으로 와서 그녀의 손을 잡는다.
"걱정했어."
"뭘 말이야?"
"아직 모르고 있어? 너 심장병이 재발했대."
"뭐?"
준기의 말을 듣고 놀라는 그녀. 준기는 괜히 말했나 싶어서 방금 한 말을 후회하고, 그녀는
그녀대로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내가 심장병이란 말이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준기.
"준기야."
"응?"
"내가 죽으면 나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줘."
"채린아, 걱정 마. 죽진 않을 거야."
"하지만 어떻게. 수술 받는 것도 무척 비쌀 텐데."
"유채린, 네가 보기엔 내가 하찮게 보이냐? 너 수술비 하나 못 대줄 거 같아? 돈 문제는 걱
정 마."
"준기야, 하지만."
"돈은 언제든지 벌면 돼. 나한텐 너를 잃는 것 보다 더 슬픈 건 없어."
준기와 채린은 서로 눈물을 흘리며 안는다.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어머니도
눈물을 흘린다.
채린의 수술이 있는 날, 어머니와 준기는 수술이 잘 되게 해 달라고 그녀를 위해 기도를 해
주고, 그녀와 같이 수술실로 향한다. 수술실 앞에서 환자만 들어가게 하고 보호자는 기다리
라고 의사가 말한다. 어머니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고, 준기는 마음 졸여하며 수술이
끝나길 기다린다. 그리고 긴 수술 시간이 끝나고, 채린이 침대에 눕혀서 나오고 의사와 간호
사들이 그녀의 침대를 끈다. 준기는 의사에게 수술이 어떻게 됐는지 묻고 수술이 잘 됐다는
의사의 말을 듣는다.
"어머니 수술이 잘 됐대요."
"그래, 준기야. 선생님 고생 많으셨어요."
준기와 어머니가 기뻐하는 가운데 채린도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고 있었다.
"왜 울어? 수술도 잘 됐는데."
"그냥. 건강을 찾았다는 게 너무 기뻐."
며칠 후, 채린은 건강한 몸으로 퇴원을 하고, 두 사람은 영원히 함께 하자는 약속을 한다.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자는 말을…….
"채린아, 너 졸업하면 우리 결혼하자."
"그래, 준기야."
"채린아 이젠 얼굴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마. 널 사랑하는 내가 여기 있잖아."
"그래. 얼굴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이젠 얼굴 때문에 속상해 하지 않을게. 네 말대로
날 사랑해 주는 네가 있으니까."
서로 사랑하는 이들이 있어 우리의 삶은 행복하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