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글로 화제를 모은 공지영 작가는
복잡한 현대인의 가정 문화를 작가 자신의 인생을 녹여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혼율 50%라는 복잡한 가정 문화의 불행......
가정의 불행은 생활의 일탈로 이어져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혼율 50%라는 불가항력.....
불가항력의 불행을 행복으로 만들어 가는 공지영 작가는
시대의 눈높이를 작가의 이상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사막에 묘목을 심고.....
황사를 막기 위해 산림을 조성하는 노력은
불가항력의 불행을 행복으로 만들어 보고자하는 안타까운 몸부림입니다.
행복의 조건이 모두 구비되고서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행을 행복으로 만들어 가는 마음의 향기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걸인의 역활로
예수님 천국 복음의 메세지가 되었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그냥 행복의 조건일 뿐입니다.
마음의 행복은 불행을 극복하는 지혜를 덕으로 가진 사람이 누리는 복입니다.
운전하는 사람은 승용차를 행복의 조건으로 가졌지만
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늘 낯선 사람들에게서 풋풋한 인간애를 마음의 행복으로 느낍니다.
문득.... 고등학교를 다닐 때
눈동자가 돌출되어 "개구리"라는 별명을 가진 국어 선생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국어 선생님은 늘 버스를 타고 드라이버를 즐기면서
버스를 타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과 옷차림, 그리고 신발을 관찰하면서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차이를 문학의 소제로 삼았습니다.
자주 시를 써서 발표하게 하는 등 생각하는 공부를 하게 하였던 훌륭한 선생님으로
오랫동안 가슴의 메아리가 되었습니다.
승용차는 행복의 조건이지만
버스는 마음의 행복을 느끼는 복입니다.
불행을 행복으로 극복하는 지혜를 덕으로 가지면
향기로운 꽃비의 복을 누릴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다보면 ....
가정이라는 소중한 울타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내는 것을 감동으로 받습니다.
떡 한덩이로 엘리야 선지자를 대접하였던 사르밧 과부는
여호와께서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병으로 죽었을 때
엘리야의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또한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가 선지 사역을하는 동안 수넴 지역을 지날 때마다
남편과 의논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여
지극정성으로 섬겼던 수넴 여인은 성경에서 아주 "귀한 여인"으로 존귀한 호칭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 때처럼 아들이 병들어 죽자
엘리사의 간절한 기도로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구약의 선지자가 가운데 엘리야와 엘리사는
성경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켰던 선지자였습니다.
두 선지자를 지극한 믿음으로 섬겼던 가정은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공생애 메시야 사역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베다니에 사는 오라버니 나사로와 언니 마르다, 그리고 동생 마리아의 가정이었습니다.
이들 가정은 가난한 베다니 문둥이 촌에 거주하였지만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가운데 가장 많이 찾으시고 식사를 하시며 쉬었던 가정이었숩니다.
예수님의 유일한 친구였던 나사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가정의 섬김으로 담아내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할 보금자리가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는 예수님의 탄식을
나사로는 가정의 섬김으로 담아내었습니다.
나사로의 가정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 동안 사역의 보금자리로 편안한 휴식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나사로의 가정에
아름다운 믿음의 꽃이 피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는 부활의 은혜를 입었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였던 마르다는 예수님에 대한 부활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아래서 말씀을 경청하였던 마리아는
옥햡의 향기로 예수님의 복음을 담아내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을 가정의 섬김으로 담아낸 나사로의 가정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정이었습니다.
이 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사로의 가정은
예수님 부활의 영광으로 가득 넘쳐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메마른 기념일로 지키는 오늘날 교회는
부활의 선물과 신앙으로 가득 넘치는 복되고 아름다운 나사로 가정을
부활의 메세지로 담아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계란으로 부활의 의미를 담아내는 최악의 부활절은
이데올로기로서의 의식적인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절 계란 먹는 사람들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추한 모습입니다.
믿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살아계신 아들로 그 마음에 거하는 사람은
최악의 부활절 문화를 계란으로 욕되게 하지 않습니다.
고난 주간 검정 넥타이로 애도하고.....
부활절 계란 먹는 최악의 문화는 이방신을 섬기는 축제일이었습니다.
고대 이방종교의 알에서 꺠어난 여신의 축제일이
부활절과 혼합되면서 계란으로 기념하였습니다.
부활은 기념하는 날이 아닙니다.
부활은 그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 그 이후의 상황을 죽은 모습으로 그려내는 것입니다.
부활은 부활입니다.
부활은 영생, 그 자체입니다.
날을 기념하여 부활의 의미를 새기는 것은
부활의 영광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는
더 이상 고난을 애도하는 슬픔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간 사람은
예수님의 출생과 고난과 부활을 절기로 지키지 않습니다.
참으로 부활의 영광으로 가득한 사람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일처럼 지키지 않습니다.
부활의 영광으로 가득한 나사로의 가정은
예수님의 오신 방문 날을 기념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숨결로 가득한 나사로의 가정은
과거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영원한 행복으로 누렸습니다.
부활은 과거가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만든 영원한 청조입니다.
삶이 진행되고....부활의 생명과 영광이 진행되고 있는데
과거의 날로 기념하는 것은 생과 부활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생이 영광스럽지 못하고 부활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과거의 날을 기념하여 현재를 순간의 행복을 기리며 미래의 건강과 복을 염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