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백남운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5. 31.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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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기행 백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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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0. 20:24조회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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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편향 극복 중도통일전선 펼친 역사학자 ‘백남운’(1894~1979)
해방공간의 좌·우익의 정치적 분열은 얼마되지 않은 중도통합론자들의 입지를 좁혔고 6·25 민족내전을 치르면서 이들은 남과 북, 어느 땅에도 설 자리를 얻지 못한 채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동암 백남운(東岩 白南雲·1894~1979)은 예외적 인물이다. <조선경제사>를 집필한 탁월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서 조선학술원과 경성제대 건립을 주도한 학술운동가이자 교육자로서,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중도좌익의 통일전선(연합성민주주의론)을 주장한 정치가였던 백남운은 북한의 교육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내면서 자신의 학문과 활동이 조금씩 구체화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눈을 감을 수 있었던 상대적으로 행복한 인물이었다.
그의 일생은 크게 세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 해방 전까지 탁월한 경제학자이자 학술운동가로서의 날들, 해방공간에서 중도좌익 입장에서 민족통일전선을 펼친 두 번째 시기, 그리고 47년말 이후 북에서의 학술인·교육행정가·정치인으로서의 단계가 그것이다.
주자학 가풍 양반집안
백남운은 1894년 전북 고창에서 시골양반 백낙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주자학을 가풍으로 삼아온 봉건 양반 집안이었다.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백남운은 1911년 18살 나던 해 기남섭씨와 혼인했다. 기씨와의 사이에서 백남운은 다섯 자녀를 뒀는데 위로 셋은 어려서 죽고 딸 금기와 아들 홍기만이 살아남았으나 홍기 역시 6·25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가족은 모두 월북했기 때문에 그뒤의 소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12년 그는 수원농림학교로 진학해 새로운 세계와 학문을 배우게 된다. 이 학교 시절이 그의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는 뒷날 “거친 음식도 맛이 있고 괴로움도 즐거웠다. 과학적 정신이 길러지는 곳, 기쁨이 가득한 생활이 잠자는 곳”이라고 이때의 생활을 회상하고 있다.
“어릴 때 고집에 세고 내성적이라 한번 돌맹이를 차기 시작하면 중간에 도랑에 빠지더라도 다시 건져내 끝까지 집으로 굴려왔다.”수원 백씨 종손 백원기(76)씨는 이렇게 회상하지만 그의 외고집 성격은 만족스럽고 풍성했던 학교시절로 인해 크게 변화한 듯하다. 그의 일생을 관철했던 ‘도의’라는 인생의 원칙과 활달하고 친근한 품성도 바로 이 시기를 통해 갖추어졌다.
1915년 학교를 졸업한 백남운은 강화보통학교의 교원으로 부임해 3년 동안 교직생활을 한 끝에 1918년 스물다섯 나이로 일본 유학을 떠난다. 일본에서 그는 뒷날 사회주의 운동에도 크게 기여한 종합잡지 <개조>를 창간한 야마모토 자네히코 집에 잠시 머무르면서 동경고등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할 준비를 한다. 이때의 인연은 뒷날 백남운의 저서가 개조사에서 출판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동경고상 입학 뒤에 그의 특별한 사상적 활동이나 편력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경제적 어려움과 치열한 학문 욕구를 보여주는 몇몇 대목이 전해져온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백남운은 하숙집밖으로 뛰쳐나왔다가 아직 여진이 계속돼 기와가 무너져 내리는데도 집안으로 다시 들어가 귀중한 책 몇 권을 들고 나왔을 만큼 책을 귀중히 여겼다(서강백, <조선중앙일보> 1936년 5월3일자)고 전해진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주의 조선경제사 연구라는 그의 학문적 틀은 완성이 되었다. 그가 1933년 발표한,“조선학 연구를 한 단계 위로 올려놓았다”는 <조선사회경제사>의 서문에는 이미 22년부터 그 구상이 이루어졌음이 밝혀져 있다. 그때의 동기를 백남운은 “첫째 조선사는 계급투쟁이냐 아니냐, 둘째 조선역사의 기점 설정, 셋째 일선동조론에 대한 과학적 규명, 넷째 최남선 등의 ‘문화사관’의 부정당성 입증”으로 요약했다. 이때의 역사학의 수준이 첫페이지가 단군으로부터 시작하고, 그 이전의 역사는 마치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20대의 백남운의 학문적 구상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뒷날 일본 사회주의 이론가를 많이 배출한 동경상고·상대의 학문적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32살 연전상과교수 부임
1925년 도쿄상대를 졸업한 백남운은 32살의 나이로 연희전문 상과 교수로 부임한다. 23년부터 연전 상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소개하던 이순탁과 함께 백남운은 경제사를 가르쳤고, 사회주의운동을 지향하는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경제연구회’라는 학생서클이 만들어졌다. 당시 학생이었던 김규삼(연세대 명예교수)씨에 따르면 백남운은 부기·회계학 강의 때조차 거의 변증법과 사적유물론, 조선경제사를 강의했다고 한다.
1932년 그는 <조선경제사>의 1권을 완성해 개조사에서 일어판으로 발간했다. “사적유물론의 원리를 조선 경제사에 처음으로 적용한”것으로 평가받는 이 저작은 조선의 사회발전단계를 원시공산제(아시아적 생산양식)-봉건제-자본제로 정석화해 놓은 것으로 당시 이청원 등과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오늘날까지도 경제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꼽힌다.
지식인 학술운동 전개
이와 함께 그가 관심을 기울인 것이‘실학파’였다. 그는 정약용을 자유주의적 부르좌 이론가로 규정하고 역사에서의 그의 역할을 진보적인 것으로 중시했는데 이런 주장은 뒤에 북한 학계에 그대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에 그는 인문사회·자연과학자들을 망라하는 ‘학술기간부대’를 만드는 데도 깊은 관심을 보여 1936년 중앙아카데미(학술원) 창립안을 내놓는다. 이는 해방 뒤 조선학술원과 민족문화연구소 창립으로 이어졌고 해방공간에서는 국가건설활동 참여를 위한 지식인의 학술운동으로 전개됐다.
1938년 백남운은‘연전 경제연구회사건’과 관련해 ‘학내 적화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검거되었고 40년 7월에야 풀려났다.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금융회사 상무로 취직했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해방 직후 곧장 정치·학문활동을 다시 펼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는 학자들과 일정한 교류를 맺어온 것으로 보인다.
8·15해방은 그의 인생의 새로운 단계였다. 해방공간의 ‘신국가건설’이라는 역사의 명제 앞에 뛰어들어 명멸했던 수많은 인사들처럼 그 또한 시대의 과제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그가‘운동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곳은‘조선학술원’의 창립과 경성대학 재건 등 학술·교육활동이었다. 46년초부터 월북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정치활동을 포함한 국가건설활동은 이런 지식인·과학자 집단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8·15 다음날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한 활동의 하나로 학계·기술계에서 김양하(물리화학), 윤행중(이론경제학), 김계숙(철학) 등의 인사들이 모여 ‘조선학술원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당시 지식계의 중견들이었던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진보적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 실증주의자 등 다양한 이념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대인관계 좋아 사람 끌어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학술원은 해방공간에서 좌·우 통합에 중요한 구실을 한 민족주의민주전선(민전)에 참여하여 주요한 이론진이 되었다. 이처럼 해방직후에 학술계의 결집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백남운의 학술운동관과 개인적 권위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최호진 전 서울대 교수는 “백남운은 일제시대부터 학문적 능력과 도덕적 품성으로 학계의거목으로 꼽혔다”며 “해방 직후의 활동들도 그가 받고 있던 존경과 권위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당시의 백남운의 위치를 회고하고 있다.
백남운의 탁월한 장점 가운데 하나는 이런 ‘사람좋음’에 있었다고 할 수 잇다. 그는 “온화·쾌활하고 활동적이며 남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는”대인관계로 많은 사람들을 끌었고 그의 주변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해방공간에서 정치활동의 노선 차이로 공산당과 한민당 계열 모두에게 공격을 받으면서도 그는 “저열한 비방은 삼가자”며 ‘정치도의’ 강조와 ‘태도’에 관한 언급을 자주한다.
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의 난항과 좌·우익 노선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분단 가능성이 나타나자 여운형·김규식 등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 운동에 당시 남한 신민당 책임자로 있던 백남운도 본격적으로 가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9월 공산당·인민당·신민당의 합당문제가 박헌영의‘흡수통합론’에 부닥쳐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됐다. 결국 그는 그해 12월 ‘분열주의자’라는 비판을 감수한 채 정계 은퇴 성명서를 발표했다.
47년 5월 백남운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지 반년 만에 ‘정치활동 재개의 변’이라고 할 수 잇는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을 발표하며 정계에 복귀했다. 남북분단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에 이영·장건상과 함께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시기 그의 현실 인식은‘일반 민주주의=공산주의’임을 분명히 하고 인민혁명과 인민권력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 시기 백남운의 활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지금의 현대사 평가에 있어서는 “극좌·극우 편향을 벗어난 민족자주국가수립의 가장 올바른 노선”(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오늘날 백남운에 대한 정치사적 관심의 초점은 바로 이런 점에 맞춰지고 있다.
47년 7월19일 여운형이 피살되고 미군정은‘좌익’에 대한 대규모 탄압을 시작했다. 이해 8월 백남운도 10여명의 당원들과 함께 검거된 것으로 보도되고 있는데(<독립신보>47년 8월23일자) 이후 그의 남한에서의 행적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언제 풀려나 월북했는지 확인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47년말께는 북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8년 4월 북한이 제안한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에서 백남운은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북로당에의해 ‘우익기회주의자’‘분열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정계에서 은퇴했던 백남운이 여기서 보여준 역할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28인 주석단의 한사람으로 선정됐고, 김일성과 박헌영에 이어‘남조선정세보고’를 했으며, 사흘째 되는 날에는 사회를 보며 회의를 주재했다. 남북요인회담이 끝난 뒤 발표된 성명에 그는 허헌·박헌영과 함께 남한의 ‘좌익대표’로 서명하고 있다. 백남운은 이들 행사에서 근민당의 대표로서만이 아니라 비남로당 계열의 좌익을 대표하는 지위와 역할을 맡았으며, 여기에는 북로당이 그를 여운형의 정치적 승계자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좌우합작’ 박헌영에 꺾여
또한 노선상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부르좌 혁명단계를 주장한 박헌영과 인민민주주의에 가까운 백남운이‘정세보고’를 따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후 북한 권력 구성의 앞날을 보여주는 사건으로도 읽힐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내용도 남한사회의 본질적 모순을 “미 제국주의의 조선 식민지화에 있으며 현 투쟁방향은 민족자주노선에 입각한 총체적 반제투쟁”이라고 규정하고 있어 김일성의 정세보고와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다. 나중에 북한 정권에서 백남운이 최고인민회의 의장까지 맡을 수 있었던 것도 ‘남로당 몰락 뒤의 남한 출신을 대표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그의 학문적 수준을 들 수 있다. 조동걸 국민대 교수는 “북한의 학문·교육적 환경에서 백남운은 그들이 내세울 수 있을 만한 대표적 인물이었던 것이 정치적 성공의 한 이유”라고 말한다.
48년 9월 55살의 백남운은 조선최고인민회의 제1기 1차 대의원으로 선임됐고, 곧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성립과 함께 교육상에 임명되었다. 그러면서도 학문연구를 계속해 김일성 대학 강의안인 <조선민족해방투쟁사>와 <조선력사교재>를 집필했고 52년에는 과학원 원장도 겸임했다 56년 교육상에서 물러난 그는 56~58년에 북한 역사학계의 주요 쟁점인 ‘삼국시대 사회구성체논쟁(봉건논쟁)’에 참여했고 61년 노동당 중앙위원(당서열 37위)에 이어 67년 최고인민회의 제4기 회의에는 의장직을 맡았다. 72년 79살의 고령으로 의장직에서 물러난 그는 79년 86살을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노동당 중앙위원(서열 46위)으로 권력의 한복판에 계속 남아 있었다.
89년 그의 <조선사회경제사>가 영인돼 나오고 몇몇 연구자들이 최초로 본격적인 논문을 발효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그의 여러 가지 활동 가운데서도 후세에 전해진 가장 중요한 업적은 역시 한국사와 경제학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역사비평>에 세차례에 걸쳐 백남운 연구를 발표한 방기중(순천향대 강사)씨는 “해방 이후 사회경제사 연구나 과학적 한국사 연구는 모두 백남운의 업적을 비판적으로 계승·발전시킨 것이었다”고 그의 학문적 위치를 평가하고 있다.
[출처] 백남운|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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