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수필가 이규철의 세계, 발트해변의 낭만
낭만을 좋아하시던 장인어른이셨다.
그래서 글 속에 낭만을 담기도 하셨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에서 펴낸 월간지인 ‘향군’ 1993년 10월호에 기고하신 ‘발트해변의 낭만’이라는 제목의 수필이 곧 그런 글이었다.
그 글은 그때로 1년 전으로 거슬러, 장인어른께서 같은 문인들과 어울려 7박 8일 일정의 러시아 기행(紀行)을 추억하면서 쓰신 글이었다.
러시아의 간단한 역사를 소개하시고, 곳곳의 풍경을 그려주시고, 그리고 공산화 된 이후로 철의 장막이 쳐진지 70여년 세월이 흘러 그 장막이 활짝 걷혀진 새 시대의 분위기를 전해주셨다.
그리고 낭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그것은 발트해 그 해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대목이다.
우린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발트해변 가에 우뚝 서있는 프로발티스카야호텔에 여장을 풀고 관광길에 올라 아름다운 네바강, 왕궁과 뿌쉬낀 기념관, 러시아박물관, 볼쇼이 발레, 네바강에 정박해 있는 10월 혁명 때 혁명신호를 발포했다는 전함 오로라호 등 이름난 명소 등을 두루 답사하고 쫓기는 일정 속에 피곤한 몸으로 호텔로 돌아와 저녁식사 후에 있은 모처럼의 자유시간, 문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호텔안의 면세점이나 스탠드바에 들려 나름대로의 낭만을 즐길 때, 나는 로비에서 만난 따따르계와 백러시아계 미녀들의 끈질긴 유혹을 물리치고, 홀로 백야(白夜) 현상의 신비로운 풍광이 드리워진 발트해변가로 발길을 옮겼다.
밤 12시경, 하루를 밝히던 뜨거운 태양이 저 멀리 핀란드만 쪽으로 침몰하는 순간, 낙조(落潮)의 영롱한 빛깔이 어둠속에 휘감기며 침묵의 고요가 해변에 젖어들 무렵, 여기 북유럽 발트해변의 지울 수 없는 낭만을 추억 속에 담으려는 듯 10여명의 낯익은 남녀 문인들이 해변을 다가왔다.
우린 즉석에서 해변파티를 열고 신명나게 노래를 불렀다. 바람결에 실렸던가 우리들의 노래소리 따라 찾아든 40대 초반의 기타를 멘 러시아계 집시가 익살 좋게 능숙한 기타솜씨로 우리와 어울렸다.
싱그러운 바닷내음이 물씬 풍기고 잔잔한 파도자락이 해변을 철썩이는 숨 쉬는 밤바다의 서정 속에 보드카와 노래, 기타가 어우러진 발트해변의 낭만 속에 우린 여독과 이역만리에서의 노스탈지아를 풀어헤치며 발트해변의 밤을 밝혔다.//
나도 낭만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때 장인어른이 일행들과 어울려 모닥불 피워놓고 부르던 포크송들이 내 귓전에 얹혀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