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신비소녀(神秘少女)
잡초 한 포기 자라 있지 않은 황량한 붉은 빛 암산(岩山)이 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암산 사이로 한 줄기 협곡(峽谷)이 나 있었다.
두두두.
백마 한 필이 붉은 황토먼지를 일으키며 협곡을 질주하고 있었다.
위지대연이 몰고 있는 백마였다.
옥문관을 벗어나 쉬지 않고 이곳까지 오는 데 만도 거의 한 달여가 걸렸다.
'오백 리만 더 달리면 납륭(納隆)이다!'
위지대연은 박차를 가해 속도를 올렸다. 그런데 위지대연이 협로 중앙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우르르르르!
칼을 거꾸로 박아 놓은 듯 솟아 있는 협곡 양쪽의 암산들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뒤흔들리며 암봉의 일부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위지대연은 흠칫하여 말을 멈추고 이 돌연한 사태를 예리하게 살펴보았다.
'지진(地震)은 아니다!'
지진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계속하여 사위를 살펴보던 위지대연은 내심 펄쩍 뛸 듯이 경악하고 말았다.
'내가고수(內家高手)가 발휘하는 강기(剛氣)다!'
위지대연이 경악할 만도 했다.
'내가 전력을 다해 강기를 뿜는다 해도 이 암산 전체를 요동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
천하에 그 누가 있어 강기 하나로 이 거대한 암산을 뒤흔들어 놓는단 말인가?
위지대연은 강기의 주인공에 대해 호기심이 솟구쳤다.
다음 순간, 그는 백마의 안장을 박차고 신형을 날렸다.
"헉! 헉!"
노인(老人)은 바위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핏물로 목욕을 한 듯 전신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부러진 갈비뼈가 겉옷을 꿰뚫고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저런 몸으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였다.
뿐만 아니었다.
노인은 술병째 술까지 들이키고 있었다.
"헉…헉…! 빌어먹을… 젠장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술을 들이키고, 연신 욕설을 퍼부어댔다. 들이키는 술의 양(量)보다 더 많은 양의 피가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휘익!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인영 하나가 노인의 전면으로 비쾌하게 내려섰다.
위지대연이었다. 그는 노인을 내려다보며 희미한 경악성을 발했다.
'주노귀(酒老鬼) 탁우절(卓羽絶)!'
주노귀 탁우절.
한 마디로 술없이는 한시도 못 사는 술고래다.
백 수십 년 평생을 오직 천하명주(天下名酒)만을 찾아 헤매는 강호괴걸(江湖怪桀).
그리고 세상은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술과 더불어 또 하나를 엄지 손가락으로 꼽는다.
경공비술(輕空秘術)의 천하제일인!
"탁노선배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위지대연이 묻자 주노귀 탁우절은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며 쓰디쓴 고소를 날렸다.
"오늘 재수가 옴붙었네. 내 그놈에게 술을 권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놈이라뇨?"
순간, 주노귀 탁우절은 희미하게 공포까지 보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놈은… 인간도 아니야!"
"…?"
위지대연은 그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젠장할…!"
주노귀 탁우절은 또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놈은 쇳덩어리 괴물이야!"
이어 주노귀는 공포의 눈빛을 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보게!"
주노귀 탁우절은 피투성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은 한 암봉의 절벽 중앙이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구멍 하나가 뻥 뚫려 있었다. 방금 뚫린 구멍이란 걸 알 수 있게 구멍 주위에선 아직도 돌가루 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어이 없게도…믿을 수 없게도 그 괴물은 절벽을 통째로 꿰뚫고 사라져 버렸다네!"
"허…"
위지대연은 어이가 없었다.
'절벽의 두께는 적어도 삼백 장. 그것도 단단하기로 이름난 청강석(靑鋼石)으로 된 바위 절벽을?'
이거야 말로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상상의 괴물이나 가능할 일이었다. 그러나 눈 앞의 구멍난 절벽이 현실로 일어난 일이란 걸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으…!"
주노귀 탁우절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놈은… 쇠물로 빚어 놓은 청동괴물…!"
이 순간 주노귀 탁우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미 세수 백하고도 오십.
술 한 잔에 천하를 주유하는 풍진기인인 그로서도 오늘같은 경악지사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공포에 질려 있는 탁우절을 바라보던 위지대연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눈 깊은 곳에서 퍼뜩 이채를 떠올렸다.
'쇠로 만든 괴물이라? 혹… 나부신마 석궁이 말했던 환우마성의 효사와 철마 중…철마(鐵魔)?'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놈이 철마가 분명하다면…놈의 목표는 대라사원이고 그건 곧 환우마성에서도 초염수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다!'
휙.
생각에 잠겨 있는 위지대연을 향해 주노귀 탁우절이 빈 술병을 던졌다.
"술 가진 것 있나?"
위지대연은 소리없는 고소를 날렸다.
"노선배껜 술보다 약이 필요한 것 같소이다."
주노귀 탁우절은 고개를 저었다.
"갈비뼈 몇 개가 세상 바람을 쐰다 해서 나 주노귀 탁우절은 죽지 않아. 그리고 노부에겐 술이 곧 약이야."
그러나 위지대연은 탁우절의 상처를 살핀 후 품속에서 비상약을 꺼내고 있었다.
"자네는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젊은이군. 빌어먹을… 자네같은 사람에게나 노부의 명주를 권해야 했는데… 그 빌어먹을 쇠괴물에게 술을 권해서 죽도록 매만 맞았으니…!"
탁우절의 말대로라면 뭐주고 뭐 맞은 셈이었다.
"놈이 노부를 팰 정도로 술을 싫어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빌어먹을!"
탁우절은 빈 병을 버리려다 말고 주둥아리를 거꾸로 들어 혀로 핥았다. 자신의 피가 술이라면 몽땅 마셔 버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위지대연이 막 탁우절의 상처에 약을 바르려 하는 순간이었다.
"바보! 상처에 손을 대지 말아요!"
아름다운 교갈과 함께 섬세한 인영 하나가 날아들었다.
쌍갈래 머리에, 두 손을 양가죽 털외투 주머니에 폭 찔러 넣고 있는 소녀였다.
'…!'
이미 천하제일미녀란 금선녀 단옥군을 통해 여인의 미색 따위엔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이른 위지대연이었다.
때문에 반고일빈과 현도수련 등의 천하미녀가 뜨거운 정념의 추파를 보내왔어도 오연할 수 있었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 눈 앞의 소녀를 대한 위지대연은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 혼란은 충격이었다.
여인의 미색에 충격을 받은 경우는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위지대연은 알 리 없지만, 이 소녀는 바로 환우마성에서 환유와 부딪쳤던 문제의 신비소녀였다.
소녀는 아직도 혼란에 잠겨 있는 위지대연을 향해 마치 종달새가 시(詩)를 읊조리듯이 고운 음색으로 말했다.
"바보같이…저리 비켜요."
위지대연은 가까스로 혼란된 정신을 수습하며 한켠으로 물러났다. 소녀가 탁우절의 상처를 살폈다.
"이 상처에는 고약한 철기(鐵氣)가 스며 있어 일반적인 약으로는 치료할 수가 없어요. 오히려 전신의 모든 혈액이 굳고 마는 대화(大禍)를 초래할 뿐이에요."
탁우절은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잘 생긴 계집애야. 그렇다면 네게 좋은 방법이 있느냐?"
"잘 생겼다는 말은 고맙지만…술고래 할아버지도 바보예요."
처음엔 위지대연을 바보로 만들었고, 이제는 탁우절을 바보로 만든 소녀였다.
"좋은 방법이 없으면 왜 제가 나타났겠어요?"
"하긴…쩝!"
탁우절은 말문이 막혀 입맛만 다셨다.
소녀는 품에서 비단주머니를 꺼냈고, 그 속에 든 흰 약분(藥粉)을 탁우절의 상처에 고루고루 뿌렸다.
"숫자는 셀 줄 아시죠? 셋까지 세어 보세요."
그녀의 신비한 분위기에 말려 탁우절은 엉겁결에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숫자를 세었다.
"하나…둘…엉?"
셋을 세기도 전에 탁우절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보기에도 끔직하던 상처가 거짓말처럼 아물고 마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새살도 돋았다.
'까무라칠 일이다!'
탁우절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뺨을 꼬집어 보았다. 따끔한 것이 꿈은 아니었다.
"바보같이…정신나갔어요?"
소녀가 신형을 일으키며 섬섬옥수를 들어 멍하니 서 있는 위지대연의 가슴을 콕 찔렀다.
그제서야 위지대연은 정신을 수습했다.
"나는 소청(少靑)이라고 해요."
"나는 위지대연이라고 한다."
"그럼…대가(大哥)…위지대가라 불러야겠네?"
"바보라 불러주지만 않는다면 나는 상관 않겠다."
"위지대가는…"
그 때였다.
우르르릉!
암산 너머 저 멀리서 은은한 진동음이 일었다.
그 순간이었다.
"위지대가. 우리 이만 헤어져야 겠어요. 다음에 봐요."
소청은 꽤나 바쁜 일이 생겼다는 듯 급히 신형을 뽑아 올려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대단한 경신술이다!"
경공비술의 천하제일인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탁우절이 무릎을 치며 경악했을 정도로 소청의 경신술은 신기지경이었다.
우르르릉.
소청이 사라진 방향에서 연이어 진동음이 일었다.
'철마일 테지.'
철마라면?
'소청은 철마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을 맺고 있는 관계일 수도 있다!'
소청의 등장 자체가 신비했다.
그리고 철마에게 당한 탁우절을 간단히 치료했고, 지금도 철마의 뒤를 따라서 사라졌다.
이 모든 걸 종합해 볼때 소청과 철마와의 관련성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하지만 추측에 불과할 뿐 밝혀진 것은 없었다.
'어디…두고 보면 알게 될 테지!'
<대라사원(大羅寺院)>
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라마교의 총본산.
일천(一千) 숫자를 넘는 대소불각(大小佛閣)들과 황금불탑들이 즐비하게 들어차 있는 대라사원의 장엄한 분위기는 중원의 소림사와 필적할 만했다.
"돌아가시오!"
타륵(馱勒)의 첫마디는 축객령이었다.
위지대연이 대라사원을 방문한 목적도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무황가의 이름을 등에 업은 위지대연이었기에 그나마 예를 다해 직접 대면을 허락한 타륵이었다.
타륵.
라마교의 달라이 대라마이며 서천축 무림의 대종사!
황금빛 가사를 걸치고 양쪽 귀에 대라마를 상장하는 아홉 쌍의 금귀고리를 하고 있는 타륵을 위지대연은 물빛같은 눈길로 주시했다.
"대종사. 신산 초염수는 천하의 안위를 좌우하는 열쇠를 지니고 있소이다. 혜량하여 주십시오."
"그건 중원무림의 사정일 뿐…"
위지대연은 타륵의 말을 잘라 버리듯 말했다.
"상황이 달라졌소이다. 초염 수가 몰고 온 혈풍이 곧 대라사원을 휘감을 겁니다. 대종사께서 원하든…원하지 않든! 어쩌면 대종사께서도 이미 이런 상황변화를 감지하고 계시리라 봅니다만."
"음."
타륵은 희미한 신음성을 발했다. 위지대연의 말을 인정한다는 간접시인이었다.
"라마(喇麻)는 라마 나름대로 율법이 있소. 우리 라마를 범하지 않는한 우리도 그를 범하지 않소이다."
"대종사…"
"돌아가시오."
"대종사!"
"초염수를 찾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라면 그렇게 해도 좋소이다. 다만…뒷 책임은 온전히 시주의 몫이외다."
그리고 다음순간, 실로 놀라운 기변이 벌어졌다.
팟!
위지대연의 눈 앞에서 타륵의 모습이 허공 중에 흩어져 버렸다. 마치 연기가 흩어지듯. 순간적으로 자리이동을 하는 이위신(移位身) 따위의 경신재간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위지대연은 이런 기변 앞에서도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직하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이체환영(移體幻影)이라…"
라마밀공(喇 密功)이란 중원무림이 상상도 못할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밀공절기(密功絶技)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체환영도 라마밀공 중 하나였다.
본신(本身)의 영(靈)이 빠져 나와 다른 장소에서 또 하나의 환신(幻身)을 만든다.
아니, 환신이라기에는 설명이 부족하다.
또 하나의 완벽한 자신을 만든다. 그리고, 상대와 어떤 대화를 나누건 그건 곧 본신의 심기(心機)가 행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좀 전에 위지대연과 이체환영의 밀공을 시전해 나타났던 타륵의 환신은 곧 타륵의 본신과 같고, 타륵 자신의 심기를 그대로 위지대연에게 전한 것이다.
어쨌거나 위지대연은 타륵의 환신과 마주 대좌했던 셈이었다. 그러나 위지대연은 자신이 상대한 타륵이 본신이 아니라 환신이었다는 걸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만큼 위지대연의 이목이 영활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라마의 율법이라…"
위지대연은 고개를 저었다.
"피로 쓴 율법이 될 테지."
나후법승(羅厚法僧).
대라사원의 오원(五院) 중 손님접대를 책임지고 있는 객원주지(客院住持).
비록 나이는 젊으나 수양이 깊고 일신의 무위는 대라사원 서열 십위안에 드는 절정고수였다.
나후법승은 한 명의 내방객(來訪客)을 맞이하고 있었다.
머리는 중처럼 삭발했으되 승복 대신 흑의장삼을 걸쳤다. 허리춤에 포대모양의 주머니가 여럿 달린 요대를 차고 있었으며, 용모는 관음불을 연상케 하는 젊은이.
그는 자신을 관음불 조영이라 했다.
혜공대선사의 망나니 제자인 그였다.
문황 고광헌의 지시대로 대라사원에 달려와 문제의 라마승, 나후법승을 찾은 것이다.
"언제부터 그 분의 끄나풀이 되었나?"
조영은 대뜸 나후법승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나후법승은 빙그레 웃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렇다면…우리 두 사람은 경우가 같군."
조영의 경우, 그의 뼈와 살과 머리는 모두 문황 고광헌으로부터 비롯 된 것이라했다.
한동안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자. 이제 이 조영이 할 일을 말해주게."
그리고 두 사람은 한동안 전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밌어! 과연…그분다운 안배야!"
조영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러나 이 순간 나후는 어두운 표정을 했다.
"문제는…소위 객원주지인 나도 초염수란 자가 어디에 틀어박혀 있는지 모른다는 것일세."
"짐작가는 데도 없단 말인가?"
"한 군데 있기는 한데…"
위지대연이 대라사원을 찾은 지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한 사람이 살해되었다.
대라사원 내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나, 시체의 신원을 알고 있는 라마승이나 살인흉수에 대한 단서는 하나도 없었다.
의문의 살인사건!
대라사원 측에서는 예를 다해 시체를 사원 밖 공동묘지에 묻어 주었다.
공동묘지.
위지대연은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냈다.
시체의 임자는 노인이었다. 시체의 상의를 벗겨 보았다.
'북두칠성의 점!'
시체는 가슴부위에 북두칠성의 형상으로 자리하고 있는 일곱 개의 점을 확연히 식별할 수가 있었다.
고광헌이 말해 준대로 따르면 초염수가 분명했다.
"후후후."
잠시 시체를 내려다보던 위지대연은 문득 고소를 날렸다.
"장난치고는 꽤나 정성을 들였군."
그는 허공을 격하고 한 손을 시체의 가슴에 겨누었다. 장심에서 무형의 기류가 뿜어져 시체의 가슴을 한차례 쓸었다.
예상 했던대로였다.
시체의 가슴에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던 일곱 개의 점이 어느새 푸르스름한 흔적으로 변해 버렸다.
'태어나면서부터 있는 태점(胎點)이 아니라 누군가가 얼마전에 박아 넣은 문신(文身)에 불과한터…그렇다면 누군가 나를 끌어 들이기 위한 함정?'
그 때였다.
위지대연의 등 뒤쪽에서 괴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묘비처럼 박혀 있는 바위 하나가 있었다.
스으…
바위에서 홀연 손 하나가 환상처럼 튀어 나왔다. 그리고 위지대연의 등을 향해 소리없이 암경(暗徑)을 뿜었다.
뿐만 아니었다.
파파파팟―!
위지대연이 서 있는 바로 발 밑의 지면이 박살나며 또 하나 암경이 위지대연의 양 다리 사이를 노리며 폭사했다.
등 뒤의 암습은 기습적이긴 하나 특별히 놀라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발 밑은 달랐다.
상대는 시체를 미끼로 공동묘지로 유인했다.
그리고 위지대연이 자리할 위치까지 염두에 두고 지하에 은신했다가 암습을 가해왔다.
등 뒤에서 암습을 가해온 적은 발 밑의 적이 결정타를 가할 틈을 벌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그럴줄 알았다!'
위지대연은 암습이 시작되는 순간 이미 신형을 기쾌하게 움직여 두 가닥 암경을 무위로 만들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쌍수가 등 뒤와 발 밑의 암습자들을 향해 벼락치듯 맞공세를 펼쳤다. 위지대연이 아니고선 엄두도 못 낼 눈부신 임기응변이었다.
퍼퍼퍼펑!
"크아악―!"
두 암습자의 비명은 짧았다. 그리고 즉사(卽死)였다.
그러나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위지대연이 두 암습자를 처리하기 위해 펼친 쌍장을 채거두기도 전이었다. 새로운 암습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콰가가가각! 콰가각!
어디에 숨었다가 암습을 펼쳤는가?
전후좌우, 사방에서 네 자루의 칼이 위지대연의 사대사혈(四大死穴)을 노리며 번개같이 들이닥쳤다.
이번엔 네 명(四人)의 암습자였다.
'헛!'
여유만만하던 위지대연도 이 순간만큼은 내심 헛바람을 집어 삼키고 말았다. 새롭게 시작된 암습은 실로 생각지도 못했던 바였다.
그리고 사인의 암습자들이 펼쳐 낸 칼의 위력으로 미루어 이미 죽은 두 명의 실력 보다 최소한 세 배 이상의 실력을 갖춘 고수들이었다.
'철저하게 훈련된 살수들이다!'
위지대연은 숨돌릴 틈도 없이 허공을 열여덟 번이나 밟은 후 에야 간신히 암습자들의 칼날을 벗어날 수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피부는 상하지 않았으나 장삼자락이 몇 군데 칼을 맞고 너펄거렸다.
위지대연이 강호출도 이래 처음 당해보는 낭패였다.
"암습도 떳떳치 못하거늘 합공까지?"
사인의 암습자를 노려보는 위지대연의 눈썹이 분노로 인해 창대살처럼 곤두섰다.
하나같이 단단한 체구를 검은 옷으로 감춘 명의 흑의인들이었다. 수중에는 거무틱틱한 묵도(墨刀)를 들고 있었다.
'위험한 자들!'
일반적인 살수들의 눈빛은 회색빛으로 죽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비하여 이들의 눈빛은 별빛을 연상케할 정도로 생동감있게 살아 있었다.
살수수업을 닦은 자들이면서도 눈빛이 살아 있다는 것은, 살수로서는 이미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봐도 좋았다.
"환우마성의 고수분들인가?"
"우리는 환우마성의 사인사도(死引四刀)! 소종사께서 네 목을 원하신다."
위지대연이 예상한 대로 환우마성의 고수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눈치챘다.
'환우마성의 소종사는 금화장에서 내게 당했던 빚을 갚으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네 명 외에도 더 가공할 죽음의 안배가 첩첩히 펼쳐 있을 것이란 건 쉽게 상상이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지대연을 끝장내기 위해 파견한 고수들인만큼 하나같이 막강의 절대고수들일 것이다.
'이 자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사이 철마가 초염수를 노린다면?'
속전속결 만이 상책이다!
그러나 그의 의중을 눈치챘는지 오히려 환우마성의 사인사도가 더 빨리 공세를 발동했다.
"목을 내 놓아라!"
이미 첫수에 위지대연의 옷에다 칼자국을 남긴 사인사도였다. 그만큼 위지대연에 대한 자신감도 배가되었다.
콰아아! 콰콰콰!
숫나사가 암나사를 향해 맹렬하게 회전해드는 듯, 네 자루의 칼끝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위지대연의 사방을 짓쳐왔다,
칼 끝이 맹렬하게 회전하고, 그 회전력으로 인해 칼끝이 뿌리는 도기(刀氣)의 위력은 더욱 살인적이 되었다.
'빠르기와 위력! 모두가 대단하다!'
사인사도의 도기가 위지대연의 전신을 벼락처럼 꿰뚫어왔다. 그 순간 위지대연의 대응이 시작되었다.
양 발을 엇비슷이 교차시키고, 양 손의 중지(中指)만 고추 세우고 나머지 네 손가락은 주먹쥐듯 말아 쥐었다.
그의 중지가 자색의 광망으로 물들었다.
휘리릭!
번--쩍! 번--쩍!
그의 신형이 회전했다. 동시에, 그의 양 손 중지의 자광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팍!
뭔가 관통당하는 음향은 네 마디였으나, 듣기기에는 하나의 음향으로 들렸다.
사인사도의 네 자루 칼이 위지대연의 사대사혈에 닿아 있었다. 다만 닿아 있었을 뿐 옷을 뚫지는 못했다.
사인사도는 왜 자신들의 칼 끝이 위지대연의 사혈을 뚫어 버리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막 사혈에 칼 끝을 박아 버리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전신의 힘이 쑥 빠져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위지대연의 사혈에 칼을 디밀기 위해 칼을 쥔 손에 힘을 주기 위해 용을 쓰듯 내력을 끌어 올렸다.
그런데 힘을 끌어 올린 순간이었다.
파아…
사인사도는 자신들의 몸 어느 곳에서 분수가 터지는 것을 느꼈다. 눈 앞의 세상이 온통 시뻘겋게 변해 버렸다.
그들의 이마, 눈썹과 눈썹 사이였다. 치명사혈인 미심혈(眉心穴)에 콩알만한 혈공(血孔)이 생겼고, 피분수가 뿜어지고 있었다.
"뭐…야?"
사인사도의 의문은 위지대연의 냉랭한 음성이 풀어 주었다.
"본 나으리가 네놈들에게 담로신지(曇露神指)의 교훈을 내린 때문이지."
"다…담로신지…그…그건 전설로만…"
경악도 제대로 다 채우지 못하고 사인사도는 피바다 속에 나뒹굴었다.
담로신지!
위지대연은 구종천극무예 중 지공(指功)의 최고봉인 담로신지를 펼쳐서 단 일지(一指)에 사인사도를 처리했던 것이다.
'자. 이제는 또 어떤 자가 내 발길을 막을…?'
위지대연은 내심 중얼거리다 말고 흠칫하고 말았다.
이번엔 머리 위, 하늘 쪽이었다.
"으음."
위지대연은 위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치를 떨고 말았다. 천하의 위지대연이 치를 떨만치 공포스러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