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용해원 - 나는 행복합니다 | 007. 조동화 -나 하나 꽃 피어 |
002. 문병란 - 인연서설 | 008. 정호승 - 내가 사랑하는 사람 |
003. 최영미 - 선운사에서 | 009. 한용운 - 사랑하는 까닭 |
004. 윤동주 - 참회록 | 010. 사무엘 울만 - 청춘 |
005. 백석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011. 도종환 - 담쟁이 |
006. 김민부 - 균열 | 012. 안도현- 연탄 한 장 |
<지정詩>
001. 나는 행복합니다 /용혜원
나는 행복합니다
이 세상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내가 사랑할 사람이 있어서
나는 행복합니다
살면서 살면서
내 마음에 남아 있는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햇살을 가득 안고 있는
당신을 보면
나도 행복하게 웃을 수 있습니다
하루를 텅 비워놓고
당신을 만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내 마음의 빈터에
당신이 찾아올 때
나는 행복합니다
002. 인연서설 / 문병란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 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 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불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
003.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004. 참회록 /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 사년(滿 二十 四年) 일 개월(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00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와 나타샤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시골로 가자 출출이(뱁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오막살이집)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006. 균열 / 김 민 부
달이 오르면 배가 곯아배곯은 바위는 말이 없어할일 없이 꽃 같은 거처녀 같은 거나남몰래 제 어깨에다새기고들 있었다.징역사는 사람들의 눈 먼 사투리는밤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푸른 달빛없는 것, 그 어둠 밑에서흘러가는 물소리바람 불어...아무렇게나 그려진그것의 의미는저승인가깊고 깊은 바위 속 울음인가더구나 내 죽은 후에 세상에 남겨질 말씀쯤인가
007. 나 하나 꽃 피어 / 조동화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008.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009.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주검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010. 청춘 / 사무엘 울만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한 정신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뜻한다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
나이를 더해 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잃어버리면 마음이 시든다
고뇌, 공포, 실망에 의해서 기력은 땅을 기고
정신은 먼지가 된다.
예순이든 열여섯이든 인간의 가슴에는
경이로움에 이끌리는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인생에 대한 즐거움과 환희가 있다.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마음 한가운데 무선탑이 있다
인간과 신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기쁨,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그대는 젊다
그러나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싸늘한 냉소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스물이라도 인간은 늙는다
머리를 높이 쳐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여든이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
011.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012. 연탄 한 장 -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