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79
10월15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연중 제28주간 토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8KgWu2PWn9E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위대하고 매력적인 여성,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오늘 예수의 성녀 데레사, 혹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축일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관상기도의 최고봉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녀는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연인관계로 설정했습니다. 하느님과 비밀스럽게 주고받은 연서(戀書), 연애편지가 바로 ‘천주 자비의 글’입니다.
그녀의 인생에서 깊은 묵상기도와 황홀한 관상 생활은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영적 생활의 기쁨과 행복, 감미로움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깊은 우물에서 건져 올린 하느님 사랑의 체험을 이웃들과 연결시켰습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던 수도회와 교회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그녀를 용감한 수도회의 개혁가이자 투사로 변모시켰습니다.
우리가 절실히 체험하는 바처럼 인간 존재는 대체로 한결같지 못합니다. 바깥에서는 천사, 법 없이도 살 사람, 성인군자가 따로 없지만 귀가(歸家)즉시 폭군으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타인으로부터 받는 평가 중에서 가장 정확한 평가이자 신빙성 있는 평가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알고 있는 가족, 이웃, 동료들로부터 받는 평가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크게 칭송받을 만합니다. 성녀는 교회 역사상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 영성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가들보다 훨씬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녀와 동고동락했던 동료 수도자들의 평가입니다. “이토록 거룩하고 신비로운 분, 이토록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성녀를 저희에게 보내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성생활과 관련된 그녀의 가르침은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지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렇게 영성생활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바가 없었습니다.
“좋은 벗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 하느님과 단둘이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성(理性)만으로 그분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개념들도 끄집어내지 마십시오. 대단하고 복잡한 명상도 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바라보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탁월하고 매력적인 인물이요 성인 가운데서도 대성인인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였지만 자신의 생애 안에 방황하던 청소년기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지난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한때 연애 소설에 심취해서 밤낮없이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또한 외모를 가꾸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예쁜 옷, 값비싼 향수, 화려한 장신구를 구하는 데 혈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래 여자 친구들과 수다 떠느라 하루해가 짧았습니다.”
지금은 만인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대성인께서도 한때 이런 ‘흑역사’가 있었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는 큰 위안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개혁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험난한 생애 내내 그녀를 동반한 분이 있었는데, 곧 성모님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주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저는 자신을 성모님께 의탁했습니다. 그때마다 여왕이신 성모님께서는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소박한 개혁 수녀회(맨발의 가르멜회) 하나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수녀회(신발의 가르멜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작고 초라한 수녀회였지만 그녀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료 수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 영광에 가득 차 계신 하얀 망토의 성모님께서 당신의 아름다운 망토로 우리 수녀님들을 감싸주고 계십니다. 나의 사랑하는 딸들이신 수녀님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좋으신 어머님을 모시고 있으니 감사하십시오. 수녀님들, 성모님의 위대한 겸손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 그분의 수녀라고 불리는 것에 큰 감사를 드립시다!”
+++++++++++++++++++++
<(2)위로받기 원한다면 고개를 위로>
운전 중에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들려온 멘트입니다. “‘위로’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머리를 고개를 쳐들고 ‘위로’ 한 번 바라보십시오.” 위로 받고 싶다면 위로 머리를 들라는 말, 참으로 의미심장한 멘트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차를 주차하자마자 ‘위로’가 필요했던 저는 고개를 ‘위로’ 쳐들고 하늘을 바라봤습니다. 바삐 살아오느라 참으로 오랜만에 올려다본 하늘이었습니다. 참으로 맑고 투명한 옥색 하늘이었습니다. 여기 저기 뭉게구름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대화가도 묘사할 수 없는 한폭의 수채화였습니다. 오직 주님의 성령께서만 그려낼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림 같은 가을하늘 그 자체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좀 더 자주 위로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삶이 힘겨울 때 이웃 동료들의 따뜻한 위로도 필요합니다. 세상이 주는 달콤한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위로가 있더군요. 위로부터 오는 위로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인간으로부터 오는 위로, 세상이 주는 위로는 참으로 제한적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완전한 충족, 충만함이란 불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위로부터 오는 위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위로, 주님의 성령께서 베푸시는 위로는 그야말로 무한하며 충만합니다. 그 위로의 맛을 느낄 때 더 이상 아쉬움이 없습니다. 더 이상 세상이 주는 위로는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 좋은 계절, 세상만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주님 성령의 손길에 더욱 민감해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얼마 전 한가한 주일 오전 시간에 겪은 특별한 에피소드입니다. 주중 피로가 겹쳐서인지 아침식사를 끝내니 ‘몽롱’ ‘노곤’했습니다. 다행히 아무런 스케줄이 없었습니다. 휴게실 편안한 소파에 앉나 TV를 틀었습니다. 참으로 여유롭고 편안한 주일 오전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세상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얼마나 잤을까요? 부르르 하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고 힘겹게 스마트폰을 들어보니...세상에 부재중 전화가 10번이나 찍혀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문자 하나! “신부님, 저희 신자들 모두 모여 신부님 강의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디쯤 오고 계시나요? 10시부터 강의 시작인거 기억하시죠?”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시간을 확인했더니 10시 정각이었습니다. 그제야 다음 주일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 한 본당 강의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택시 타면 20여분 남짓이면 도착하니 양해를 구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초스피드로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강의 준비였습니다. 꽤나 어렵고 특별한 강의 주제였고 제 생각에 아직 일주일이나 여유가 있으니 이제 슬슬 준비하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잠시 후부터 강의를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택시 속에선 저는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머리 털 나고 나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주님, 제가 이거 초대형 사고 쳤는데, 어떡하죠? 주님 정말 큰일입니다. 주님, 좀 도와주십시오. 도움이신 성모님, 방법이 없겠습니까? 제발 좀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날씨가 더운 날씨도 아닌데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 그분께 맡겨라.”
그토록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여유가 생겼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이 하얗더니 이런 저런 강의와 관련된 아이디어들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초롱초롱한 신자들의 눈동자를 앞에 두고 강론대에 섰습니다. 참으로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강의 원고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되던 저였는데, 자동으로 강의 전체 스케마가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그리고는 재미있고 유익한 예화들이 순간순간 떠올랐습니다. 말도 꼬이지 않고 술술 풀려나갔습니다.
강의 끝내고 돌아서는 제게 다들 한 목소리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정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정말 감명 깊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권고 말씀이 문자 그대로 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진한 체험이었습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성령께 내어맡긴 결과입니다. 성령께서 활동하신다는 표시였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1)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오늘 짬이 나서 ‘그래비티’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인공위성과 우주정거장이 있는 곳에서 일을 하는 한 여성이 우주복을 입고 우주 공간에서 작업하다가 사고를 당합니다. 날아오는 파편들에 부딪혀서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 버리게 된 것입니다.
어둡고 무한한 우주로 떠내려가는 이 여성을 구하기 위해 한 남성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 여성을 쫓아옵니다. 결국 이 여성을 찾아 둘은 자신들의 우주선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우주선은 파괴되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죽어있었습니다.
이 남성은 또 이 여성을 데리고 다른 우주 정거장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거기에서는 이 남자가 위험에 처합니다. 여자가 한 가닥 줄에 의지해서 간신히 자신을 구해준 남자를 잡고는 있었지만 남자는 여인의 손을 놓습니다.
왜냐하면 그 한 가닥의 줄도 끊어지려 하기 때문에 자신이 손을 놓지 않으면 둘이 다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 남성은 우주미아가 되어버립니다.
그 남자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진 여자는 새로 태어나는 마음으로 거기 있는 우주선을 분리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하는데 알고 보니 그 우주선에는 연료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해 보지만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편안하게 죽을 생각으로 우주선에 있는 산소를 빼냅니다.
산소가 줄어들면서 의식을 잃어갈 무렵 우주선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 가보니 자신을 구해주었던 남자가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와 그 우주선을 추진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려줍니다.
착륙을 위해서 사용되는 에너지를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이 바짝 든 그녀는 주위를 다시 보지만 이것은 꿈이었습니다. 여자는 다시 힘을 회복하여 꿈에서 그 남자가 일러준 대로 우주선을 작동시키니 작동이 되었고 그렇게 극적으로 지구에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지만 이 영화 역시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잡아주시고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시기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래도 살아가다보면 또다시 방향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확신이 들 때도 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우리를 그냥 놓아두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의 인도자인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 목적지까지 도달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도 오늘 우리 마음속에 당신의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결코 혼자두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란 이름도 가지고 계신데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그만큼 귀중한 자녀들을 아무 도움 없이 두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힘든 때라도 내면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으면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때에 더 확실한 목소리를 우리 갈 길을 밝혀주십니다.
25살 때 저의 내면의 목소리가 저를 사제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사제와 수녀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천둥처럼 내면에서 울렸던 목소리가 있습니다. “나는 ‘너’를 원한다.”
이 목소리에 저는 감히 대꾸를 할 수 없었고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 때는 원망스럽기도 한 목소리였지만, 그리고 지금은 사제가 되어있고 참으로 이 길로 이끄신 성령의 도우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숙종대왕 때 수원지역에서 한 청년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냇가에 묻기 위해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한 선비가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 왜 사람을 개울에 묻으려고 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눈물을 훔치며 갈 처사라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선비는 민심을 살피던 숙종 대왕이었습니다.
대왕은 무식하지만 그래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강한 그 청년에게 쌀 삼백 섬을 하사하고 명당자리에 어머니를 모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갈 처사라는 사람을 찾아가 왜 청년에게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라고 시켰느냐고 따졌습니다. 그 선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갈 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뿔도 모르면 잠자코 있으시오. 그 곳은 그 곳에 시신을 묻기 전에 반드시 많은 곡식을 얻고 또 새로운 명당자리를 얻을 명당 중의 명당이요. 묻히기 전에 복이 들어오는데 그곳이 물이건 불이건 무슨 상관이겠소.”
갈 처사의 능력을 안 숙종은 자신의 묘자리도 그에게 물어서, 서울 서북쪽 서오릉에 자리한 ‘명릉’이란 자리를 잡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도 따르기만 하면 복이 되는 말씀이 계십니다. 그 청년이 결국에 복을 받았던 것처럼, 성령의 이끄심은 좋은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십니다.
항상 내 안에서 울리는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바치며 우리를 구해 주셨으니, 그 귀한 생명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줄 성령님의 도우심을 항상 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
<(2)사랑한다면 선물부터 뜯어보라>
어느 아담한 도시가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 자리한 레코드 가게에서 일어난 이야깁니다. 그 가게엔 에메랄드 빛 눈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가게 사장입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며 클래식을 사랑하는 아주 멋진 청년이죠.
그리고 언제부턴가 가게 앞을 기웃거리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날마다 가게 앞을 서성거리다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가씨가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옵니다. 물론 아가씨의 목적은 레코드가 아닌 청년이었죠.
“안녕하세요? 찾으시는 판이라도...?” 청년이 말을 걸어오자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옵니다. “이 판 얼마예요?” “5달럽니다”
이를 어쩝니까? 아무 말도 못 한 체 레코드판을 들고 길을 나섭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레코드판만 사고 문을 나섭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청년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어느덧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아가씨의 사랑은 깊어만 가서 결국 상사병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아무 가족도 없이 혼자 살던 아가씨는 유일한 친구가 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고 맙니다. 장례를 치르고 아가씨의 집을 정리하던 친구는 굳게 닫힌 작은 방문을 열게 됩니다. 이 방엔 무엇이 있을까요? 여기엔 포장도 뜯지 않은 레코드판 수백 장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럼 왜? 레코드판을 뜯어보지도 않고 쌓아만 뒀을까요? 안타깝게도 아가씨에겐 전축이 없었습니다. 단지 청년을 보기 위해 레코드판을 사러 갔으니까요.
‘얘는 듣지도 않는 레코드판을 왜 이렇게 사 모은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는 무심결에 포장을 뜯어봅니다. 그 속에 쪽지 하나가 떨어집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가씨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p.s. 제 이름은 존이라고 합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다른 판을 뜯어봅니다. “정말 당신을 사랑합니다. 8시 가게 앞 카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나오실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오늘 안 나오시면 내일모레 언제까지고 기다릴 겁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판에 존이 쓴 쪽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친구는 존이라는 청년을 찾아가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청년은 이야기를 듣고 밀려오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한 마음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분이 주시는 선물은 뜯어보지도 못한 채 상사병으로 죽어갈 수도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선물부터 뜯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진리와 은총’입니다. 쉽게 말하면 ‘말씀과 성사’입니다. 성경은 들춰보지도 않고 성체는 공경하지도 않으며 그것들을 주시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신앙생활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사랑하려면 그분이 주신 선물을 먼저 뜯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구원은 당신에 대한 사랑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증거할 것입니다. 만약 성당에 다니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언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제로는 그분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되는 이유가 당신께서 주시는 선물을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주시는 선물은 ‘진리와 은총’입니다. ‘말씀과 성령(성사)’인 것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선물을 무시하면서 그분께 대한 사랑을 증가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당신께서 주시는 선물은 믿으라는 것입니다. 미사 때 말씀의 전례를 통해 예수님은 당신 진리를 선물하시고 성찬의 전례를 통해 당신 성령을 선물하십니다. 말씀도 지겨워하고 성체를 영하면서도 감동이 없다면 레코드판만 사고 그 안의 글은 읽지 않았던 여자와 같아집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뜯어보고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분께 대한 사랑은 증가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면 선물부터 뜯어봅시다. 사랑은 선물에 담깁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진리 치유의 길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음악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가를 부르면 2번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는 단순히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리 친모이라는 유명한 인도의 수행자이자 명상의 대가는 ‘수련 중의 으뜸은 소리요, 음악은 명상’이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가를 부르고 난 후 성가대원의 혈액을 검사하니 자연면역세포(NK세포)의 면역력이 1,000배나 증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성가, 염불, 자연과 함께하는 소리와 음악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소리와 음악은 고막에 진동 파장을 만들어 뇌의 활동 파장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실제로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공부한 하버드 대학생의 성적이 놀랍게 향상되어 의학적으로 모차르트 효과라는 말도 생겼다고 합니다. 또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준 미숙아들은 신체 발달이 훨씬 빠르고, 부모님의 사랑 가득한 목소리 파장은 자녀들의 뇌 파장에도 긍정적인 자극을 주었다고 합니다. 음악으로 스트레스 호르몬은 감소하고, 성장 호르몬의 생산을 증가시켜 동식물의 성장을 촉진시킬 뿐만 아니라 식품의 면역력을 높여줍니다. 물론 유전인자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음악이 생명 활동에 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바탕으로 음악치료라는 새로운 치유법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저는 장거리 운전을 할 경우가 많습니다. 묵주기도를 하는 때도 있지만 음악을 들을 때가 더 많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운전하면 피곤함을 줄일 수 있고, 졸음도 막을 수 있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산보를 할 때도 강의를 듣는 때도 있지만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산보는 음악과 함께 하면 즐거운 시간이 되곤 합니다. 음악이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정신질환으로 고통스러워할 때 다윗이 수금을 연주하며 진정시켰습니다. 한국의 BTS는 음악으로 많은 젊은이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노래는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음악이 우리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는 기능이 있다면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은 그것을 ‘영성’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두 가지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는 형식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건물, 제도, 교리의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협조자, 성령의 모습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을 우리는 ‘영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형식이 없는 내용은 알 수가 없지만, 내용이 없는 형식은 공허하기 마련입니다. 화려한 건물인 교회가 있지만, 제도와 교리가 신앙생활의 울타리가 되지만 영성이 채워지지 않으면 공허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교회는 유혹과 시련이 다가오면 모래 위에 세운 건물처럼 쉽게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영성입니다. 겉모습이 화려한 사람보다는 영적으로 빛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재물, 명예, 성공과는 다른 삶이 있으며 그것이 인류의 지혜와 문화의 힘입니다. 행운을 이야기하기보다는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이해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앞을 보고 달리기보다는 어디에서 왔는지 성찰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돌아보는 것이 영성입니다. 나와 인류는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하는지 묻는 것이 영성입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푸른 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함께 하는 생명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2000년 전 로마는 당시 세계의 기준이었습니다. 로마가 법이었고, 로마가 길이었고, 로마가 문화를 선도했습니다. 로마라는 법을 채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로마가 만들 길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로마의 문화는 교회의 조직과 교회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21세기는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문명이 법과 길을 만들어 갈 겁니다. 그것을 거스르기도 힘들고, 외면하기도 힘들 겁니다. 법이 그릇이라면 그 그릇을 채우는 건 정신과 영성이어야 합니다. 플랫폼과 빅데이터가 새로운 시대의 길이라면 그 길의 종착점은 복음이어야 합니다. 산업, 경제, 재물이라는 잔은 믿음, 희망, 사랑을 채울 때 그 가치가 더욱 빛날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시련과 고난 앞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저의 모습과는 다른 삶입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십시오.’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를 맡겨드리며, 주님과 함께 충실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8-12: 어떻게 항변할까 걱정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순수한 신앙의 힘에 대해 말씀하신다. 영원한 생명은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우리 신앙인들이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면, 복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순수한 신앙의 힘은 위대하다. 자신의 믿음과 희망과 덕과 영광을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둔 사람은 누구도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8절)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을 증언하면 받는 보상이 바로 이 말씀이다.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알까?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고, 입술로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아는 것이며, 그것이 증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죄라고 가르치셨다.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겠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인간이 저지르는 어떠한 죄들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며, 이는 그분의 자비와 크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을 거스르는,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무엇인가?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이 사랑은 인간의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사랑이며, 그래서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시는 사랑인데, 그것을 믿지 않아 하느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모독죄이다.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 알려주실 것이다.”(12절) 성령께서는 순교자들에게 그 위험한 순간에도 당신을 증언할 힘을 주신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자로서 그분을 증언할 수 없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없다. 우리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신앙을 전파하고 생활로써 증거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여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의 분위기를 보면, ‘사람들 앞에서’ 또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서’ 예수님을 당당하게 증언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 하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겪었던 박해 상황을 투영하는 단락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순교가 아니면 배교를 선택해야 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또 다른 구절을 기억합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6)
예수님께서는 현재의 생사 문제를 넘어서는 종말론적 시각을 지니도록 촉구하십니다. 제자들이 현세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세상 끝 날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대하실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은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와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대조하면서, 누구를 더 두려워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눈앞의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거나 그분을 부끄럽게 여기면, 종말에 있을 심판에 더 큰 공포와 두려움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를 모른다고 하시거나 부끄러워하시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박해 때문에 생사의 갈림길에 설 일도, 배교를 강요당하는 처지에 놓일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일상 가운데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야 할 경우가 때때로 생깁니다. 혹시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를 부끄러워할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한 상황에 놓일 때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지 스스로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부끄러워하면 그분께서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
[부산교구 김인환 히폴리토 신부님]
사람들은 저의 활발한 평소 성격을 보고 혹자들은 제가 어떤 사람 앞에 서더라도 떨림이 없는 사람인 줄 압니다. 그런데 저는 실제로 대중 앞에 서게 되면 이유 없이 가슴은 콩닥거리며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해서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끝나기 일쑤였습니다.
지나간 이야기입니다만 신학교 시절 독서를 하거나 부제반 시절 강복을 주기 위해 독서대로 올라가면 매일 보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그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나오는 목소리는 불안하고 톤이 덜덜거리는 날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매일 같이 미사를 주례하고, 미사 시간 안에서의 강론을 하는 덕분인지 말을 하는데 있어서 떨림은 없어진 것 같습니다만 당시는 하느님께 얼마나 떨지 않게 해주십사고 기도를 했는지 모릅니다.
내 마음이 떨리지 않게 하고 남들 앞에 섰을 때 내가 어떻게 처신할지 이끌어주시는 분, 성령이 있기에 제가 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다소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령도 한 분이신 하느님이신데 예수님을 욕하는 것은 괜찮고, 성령을 욕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인지 어색한 여지를 남깁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성령을 더 높이시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제법 긴 시간 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먼저 죄를 지은 나의 상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고립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죄를 지은 나 자신이 주님 앞에 서기 민망하므로 고립되고,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 미안해서 고립되게 됩니다. 따라서 죄의 현실은 자신을 고립시키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욕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것과 연관 지어 생각해 봅시다. 성령을 욕한다는 것은 곧 성령을 거부한다는 뜻이 되겠지요. 여기서 성령의 역할과 결부시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은 여러 가지 은사를 통해 나의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고,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나의 정신과 육체를 능동적으로 이끌어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거부하게 되면 성령이 내려주는 어떤 은사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되고, 하느님과의 관계성은 제동이 걸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과의 관계성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죄의 상태에 있는 나 자신이 다시 회복되는 데에도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게 되고, 이에 죄의 상태의 지속이라는 결과가 발생합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성령을 욕하는 것은 성령을 거부하는 것이 되고, 회개의 길로 이끌어주는 성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람의 아들을 욕했다는 것과 성령을 욕했다는 것은 차이가 있게 됩니다.
많은 신자분이 바람 또는 숨으로 상징되는 성령을 생각하면서 ‘과연 성령의 바람이란 어떤 것일까 나도 한번 경험해 보고 싶다’라는 바램를 가지실 겁니다.
그런데 지난날의 나와 그 후로 신앙생활을 해오던 나 자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생각하는 지평도,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도, 주님에 대한 앎도, 교회 공동체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도 모두 변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단순히 사회화 과정을 통해 전부 습득했다는 것은 억지가 아닐까요?
봄에 부는 시원한 바람은 내가 미처 ‘참 시원하다’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나에게 불어와 나를 상쾌하게 만듭니다. 이것처럼 성령께서도 조용히 시원하게 나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직장에서 회의 중에 어떤 말을 할까? 싸웠던 교우와 화해하고 싶은데 어떻게 다가갈까? 고민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성령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특별히 성령께 더 깊이 의탁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
[글라렛선교수도회 이회진 빈첸시오 신부님]
<끊임없이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신앙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살아갈까요?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하느님께서 에페소인들에게 크나큰 은총을 내리시는 것을 보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기쁜 마음을 드러냅니다.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을까요? 바오로 사도처럼 끊임없이 하느님으로 인해 끊임없이 기뻐하고, 감사드리며, 기도할 수 있는(1데살 5,16-18참조) 신앙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 때 선하게 살며 착한 일도 많이 했기에 그는 하늘나라에서 베드로 사도의 마중을 받게 되었고, 베드로 사도의 안내로 하늘나라도 두루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하늘나라 천사들이 모여 일하는 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천사들은 3곳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첫 번째 일터에 가니 천사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에게 "여기는 접수처라네. 사람들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온갖 청원을 이곳에서 접수하고 있지.” 하고 설명해주었습니다.
그가 자세히 보니 그곳에서 일하는 천사들은 정말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천사가 세상 도처의 사람들이 보내온 온갖 종류의 기도들을 분류하고 있었는데 엄청나게 많아서 그런지 정말 눈코 뜰 사이가 없이 날아다녔습니다.
그곳을 나와 두 번째 부서에 갔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에게 "여기는 포장 및 발송처라네. 사람들에게 보낼 은총과 축복이 이곳에서 포장되어 뭐 해달라고 기도하는 이들에게 보내지는 곳이지." 하고 말했습니다.
그가 보니 그곳은 정신없이 바쁠 뿐만 아니라 첫 번째 기도 접수처보다 더 많은 천사가 일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축복과 선물 꾸러미를 포장해서 배달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을 나와 마지막으로 작업실 가장 후미진 구석에 있는 마지막 부서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놀랍게도 천사가 딱 하나밖에 근무하지 않는데다 그 천사는 아무 할 일이 없다는 듯이 빈둥거리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가 의아해 하자, 베드로 사도가 "이곳은 확인처라네."라고 힘없이 말했습니다. 그가 "그런데 어째서 이곳은 왜 할 일이 없는 겁니까?"라고 그가 묻자 베드로 사도가 대답했습니다. "서글픈 일이야.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께 은총을 청할 때는 죽자사자 기도하지만 부탁한 은총과 축복을 받고 나서는 확인서를 보내는 일이 거의 없거든."
그가 "축복을 어떻게 확인하는 건데요?" 하고 묻자 베드로 사도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네, 그저 '주님, 감사합니다.' 하면 되는 거지."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나 감사하며 살고 있을까요? 하느님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고, 또 얼마나 많을까요?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음은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모든 말이자 마지막 말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저는 분명히 압니다.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이웃들에게도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
[성 바오로 수도회 안성철 마조리노 신부님]
<네가 날 알아?>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신앙고백을 요구하신다. 이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 위해서는 목숨의 위협까지 각오해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 대단한 용기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듯싶다. 사회 학문의 급속한 발전과 기계 문명의 발전, 무신론적 사고로 말미암아 신앙인들은 한낱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당하게 안다고 증언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한다면 그분 또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도 내어 주셨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분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순교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것은 그분의 사랑을 배신할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어 놓는 선교사가 많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아직도 공공장소에서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을 창피해한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슬쩍 조그맣게 하거나 재빨리 성호를 긋는다. 참으로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많은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십자 성호마저도 부끄럽게 여긴다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은혜를 저버리는 일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더니 우리가 그 꼴 아닌가?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들 앞에서>
루가 12,8-12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더욱 굳건해지는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을
당신을 바라는
사람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당신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더욱 솟아나는
당신을 향한 나의 바람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더욱 뜨거워지는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을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향한 나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게 하소서
=====================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알게 되기를?>
"그 기도는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또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신자들을 위해 어떤 기도를 어떻게 했는지 얘기하는 내용인데, 한마디로 줄이면 에페소 신자들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하느님을 알게 되고, 신자들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알게 되고, 신자들이 받게 될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되고, 하느님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비교하면 좋은 비교가 될 것입니다.
신자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신자들이 로또에 당첨되고,
신자들이 사법고시에 붙게 되는 것과 비교하는 것.
저는 저에게 이런 기도를 부탁하면 한 번도 그렇게 기도해드린 적이 없고, 제가 내용을 바꿔 주님이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라거나 주님이 보시기에 지금 그에게 가장 좋은 것과 필요한 것을 주시라고 빕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보시기에 그에게 좋은 것,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보시기에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것을 주시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는 기도합니다.
신자들이 건강하게 되고,
신자들이 취업하게 되고,
신자들이 합격하게 되고,
신자들이 자녀를 얻게 되기를.
사실 현세를 살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이런 기도는 해도 되고, 좋은 기도라고 할 수 있으며, 적어도 나쁜 기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가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기도에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진정, 우리의 기도는 나를 위한 것이건, 이웃을 위한 것이건,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리고 그것이 현세 행복만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되고, 현세와 내세의 행복을 모두 아우르는 기도가 되어야 하는데, 오늘 바오로 사도의 기도가 바로 그 기도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습니다. 되는 것보다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니,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이 참 행복이고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내 생명의 시작이요 마침이심을, 다시 말해서 나를 살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는 분이심을,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시고 저세상까지 이끄시는 분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어떤 것보다 소중함을 깨우침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은 지상에서 열립니다>
가끔 낯선 곳을 가면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라는 것을 먼저 소개하며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편안해합니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당당히 자기를 알리고 그 이름에 걸맞은 품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신자로서 신자임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 12,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안다고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잇속을 차리려고 누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손해가 오더라도 그를 안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지 않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무안을 당할 수도 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
간혹 식당에서 보면 십자성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까 조심스럽게 가슴에 열 십자를 긋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표현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성호경을 하면서 십자가를 긋는 것은 신앙 고백입니다. 따라서 십자성호를 할 때 믿음을 담아 바르게, 당당하게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늘나라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의 삶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하늘은 이미 땅에서 열립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지상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 순간이 성령을 모독하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뜻하는 바를 삶으로 거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품위를 지금 여기서부터 지키며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아는 지인이 좋은 포도주를 선물해주셨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자그마치 30만 원이 넘는 고급 포도주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들 모임에서 이 포도주를 내놓았습니다. 인터넷 검색 결과를 보여주면서 아주 좋은 포도주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포도주의 맛을 본 신부들은 하나같이 훌륭한 맛이라고 칭찬하더군요.
만약 이 포도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포도주잔이 아닌 종이컵에 따라 주었다면 어떠했을까요? 맛을 음미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훌륭한 맛이라고 칭찬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비싸고 귀하게 여기면 그만큼 대접받습니다. 그러나 싸구려로 취급하면 다른 사람 역시 싸구려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귀한 물건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상술이라고 하지요.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 생각납니다. 유리창이 깨진 차가 길가에 세워져 있으면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망가뜨리기가 쉽지만, 멀쩡한 차는 그대로 유지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사람 역시 그렇지 않을까요? 귀하게 대접해야 남들도 귀하게 생각합니다. 비하하고 함부로 대하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대할 것입니다.
주님 역시 그렇습니다. 주님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보고, 다른 이 역시 주님을 귀하게 여깁니다. 자신이 주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남들 역시 그 모습을 보고 주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거슬러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준엄한 말씀을 하신 다음, 예수님께는 제자들이 장차 당하게 될 박해 속에서 이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의 말씀으로 항변하는 지혜와 용기를 성령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성령 모독죄는 예수님께서 전하는 하느님의 진리를 고의로 외면하는 죄를 말합니다. 진리는 권력과 폭력 앞에서 자칫 꺾이기 쉽습니다. 제자들은 곧 스승 예수님의 비참한 세속적 패배를 목격할 것이며, 그들 자신도 박해받으며 같은 운명에 처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느님의 진리가 세상에 퍼지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고의로 외면하는 성령 모독죄가 바로 하느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삶입니다. 이 성령 모독죄는 다른 이에게도 전달됩니다. 하지만 성령의 이끄심에 충실하면 그 모습 역시 전달되어서 다른 이들도 성령의 이끄심에 충실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귀하게 여기는 우리가 됩시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 역시 모두 귀하게 될 것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찬양과 감사의 삶>
-참행복-
오늘 10월15일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입니다. 지역명을 붙여 ‘아빌라의 데레사’로 부르기도하고, 동명의 데레사와 구별하게 위해 ‘대 데레사’로 부르기도 합니다. 16세기 활동하다 만67세에 선종한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자이자 제2의 창립자이며 스페인의 수호성인입니다.
참으로 풍부한 일화들에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도 여전히 감동을 선사하는 성녀입니다. 성녀는 중세 시대의 힐데가트르 폰 빙엔,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함께 여성 수도자의 대모로서 존경받고 있으며, 기도의 스승이자 신비체험 및 영성의 대가인 성녀를 교황 바오로 6세는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함께 여성으로는 최초로 교회학자로 선포합니다.
성녀에 의해 개혁된 남녀 맨발의 가르멜 수녀회는 19세기말 프랑스의 ‘리지외의 데레사’와 나치 독일의 학살로 순교한 성녀 ‘에디트 슈타인’을 배출한 명문 수녀회이기도 합니다. 성녀의 시대적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성녀가 활약하던 16세기는 천주교의 타락과 더불어 개신교 종교개혁의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던 시절이었고, 이런 도전에 직면하여 성녀는 교회의 내부개혁과 쇄신을 추구하는데 앞장섰으며, 이런 역할은 앞서 역시 예수회를 설립하여 교회 개혁에 앞장섰던 스페인 출신의 이냐시오 데 로욜라와 흡사합니다.
성녀와 함께 교회 개혁의 조력자이자 동지였던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와의 영적 우정도 참 각별합니다. 성 요한 사제보다 27세 연상의 성녀였지만 영적우정은 나이와 무관함을 깨닫습니다. 두분 성인의 영적우정 관계는 성 베네딕도와 성녀 스콜라 스티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와 비슷한 경우로 하느님 섭리의 배려가 참 놀랍고 감사하게 됩니다. 성녀의 사후 성녀의 성무일도에서 발견되었다는 다음 아름다운 시도 감동적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흔들지 못하리라.
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않으리라.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가
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
하느님을 소유하는 이는
아무런 부족함 없고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아무 것도 너를>이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수녀가 남긴 시에 김충희 수녀가 곡을 붙인 노래가 널리 감동을 선사하며 지금도 여전히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시간되시면 이 곡을 찾아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성녀는 1582년 여행 도중에 병으로 쓰러지고, 1개월 만이 10월4일, “주여, 저는 거룩한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긴채 향년 67세로 선종합니다.
성인의 특징은 사랑과 감사입니다. 성녀는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듯 교회를 사랑했고 매사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우리 또한 이런 성녀를 교회에 선물하신 하느님께 저절로 감사하게 됩니다. 찬양과 감사는 참신자들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어제 수도형제들과의 휴게시간중 대화가 생각납니다. 예전 10여년 이상 수도원 직원으로 일했던 형제가 참으로 성실하고 착했는데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에 아파하며 늘 불평중에 어둡게 지냈다는 것이며 이에 대해 제 의견을 첨부했습니다.
“아, 감사도 발견이며 선택하여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저절로 감사가 아닙니다. 평생 날마다 발견하고 선택하여 배우고 훈련해야 하는 감사입니다. 이래야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눈만 열리면 널려 있는 감사의 발견이요, 이런 감사를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또 배우며 훈련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사랑을 발견하고 선택하고 배우고 훈련하듯 감사도 발견하고 선택하고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제 고백성사중 늘 뉘우쳐 고백하는 것이 감사의 부족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편 구절과 행복기도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끊임없는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이신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찬양과 감사가 한 영성 셋트입니다. 찬양의 삶, 감사의 삶을 살 때 참 행복한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참 좋은 이의 모범입니다. 어제 제1독서 에페소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진 은총에 대한 우리의 “찬양”이었다면, 오늘은 전형적인 “감사”기도입니다. 온통 깨달음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로 가득한 참 아름답고 깊은 내용들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주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주님의 부르심과 우리가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떤 것이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주님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부한지 깨달아 알게 하시는 하느님 은혜에 대한 감사요,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주님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깨달아 알게 하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마지막으로 최고의 선물인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감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텅 빈 공허를 텅 빈 충만으로 바꾸시는 그리스도입니다.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답도 그리스도뿐임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감사하는 믿음이요 감사에 대한 깨달음이 참 중요합니다. 어찌보면 우리 믿음의 여정은 감사의 여정이자 깨달음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날로 주님을 깨달아 알아 갈수록 감사와 믿음도 더해질 것이며 참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가 되어 자유로운 빛의 삶을 살 것입니다.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이 믿음에는 참 좋은 자산입니다. 찬양과 감사의 영혼의 양날개를 달고 하느님 창공을 나는 자유로운 영혼들입니다. 찬양으로, 알렐루야로 살다가, 감사로, 아멘으로 마치는 긍정적 낙관적 믿음의 여정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바로 이런 감사하는 믿음이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입니다. 참으로 감사로 충만한 견고한 믿음이라면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저함 없이 주님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며, 결코 용서받지 못할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곤경이나 역경중에도 어떻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 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이자 성령입니다.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들과 늘 함께 하시는 성령이자 주님이십니다. 저절로 나오는 고백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감사의 고백중 ‘아쉬울 것 없노라’ 대신 ‘두려울 것 없노라’, ‘걱정할 것 없노라’, ‘부러울 것 없노라’, ‘부족할 것 없노라’ 무엇을 넣어도 다 통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생 날마다 할 수 있는 참 좋은 영성훈련은 하느님 찬양과 감사뿐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 온마음을, 온힘을 다해 바치는 찬양과 감사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의 찬양과 감사에 응답해 무궁한 축복의 선물을 베풀어 주십니다.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12,8)
<완덕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늘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스페인 아빌라에서 태어나 '아빌라의 데레사'로 잘 알려져 있는 성녀는 가르멜 수도회에 들어가 평생을 완덕의 길에 정진하셨고, 가르멜 수도회도 개혁하셨습니다.
성녀 데레사는 그의 저서에서 '완덕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좋은 벗이고 그렇게도 훌륭한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곁에 계신다면 무슨 일도 견디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분은 늘 도와주시고 견고케 해 주십니다. 필요할 때 돌보아 주시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그분은 참되시고 성실한 벗입니다. 이렇게도 좋은 벗이 우리 곁에 계시는 것 이상으로 더 바랄게 무엇이 있겠습니까?"(성무일도 고유독서 참조)
'완덕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합일'을 말합니다. 그러니 '신앙 여정은 완덕으로 나아가는 여정, 완덕에로 보다 더 가까이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완덕에 이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복음적 단순성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여정'입니다.
성녀 데레사는 완덕이시요, 완덕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곁에 계신다면 무슨 일도 견디어 나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너와 세상에 증언하고, 그러기 위해서 완덕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는 삶, 하느님만으로 만족한 삶을 살아내어 봅시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성녀 데레사의 기도)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2kvGGEfM67Q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루카 12, 11)
자신을 살피는
일이 수도생활의
시작입니다.
낡은 인식에
머물지 않는 것은
자기성찰과
하느님 은총으로
가능한
수도공동체의
힘입니다.
수도생활의
거울로 삼을 수 있는
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
수녀님입니다.
수녀님께서는
해야할 일을
묵묵히 실천하여
나가셨습니다.
가장 요구되는
정신은
수도공동체의
정신입니다.
전도되고
왜곡된
잘못된 무질서를
바로잡으려
노력하셨습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의 자세를
수녀님을 통해
다시 배웁니다.
우리의 눈을
하느님께로
다시 돌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있고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바람직한 관계가
개혁과 혁신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은 일상생활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실천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사랑입니다.
가장 빛나고
극적인 선택은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회개입니다.
회개없는
순명이 없고
회개 없는
개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수도생활이란
마음과 몸의
실천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봉헌의 삶입니다.
복음삼덕인
청빈, 정결, 순명의
덕을 실천으로
옮기는 삶이
수도생활의
의미입니다.
수도생활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 수녀님을
통해 희망을
만납니다.
수도공동체의
변화와 발전
성장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녀의 삶을
만나는 것은
수도생활의
제 자리를 찾는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