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릿말 ***
헬라어 제목 : ΠΡΟΣ ΤΙΤΟΝ (프로스 티톤, (헬라인) 티토(뜻:존경하다)에게 보내는 편지 )
기록 연대 : AD : 63-65
기록 목적과 대상 : 파울로가 로마 감옥에서 석방된 후 4차 전도여행으로 그의 소원인 띵끝 스페인까지 갔다가
돌아오면서 루카의 친동생인 티토와 같이 크레타 섬을 방문하여 교회를 세우고,
어려운 자리에 있는 크레테 교회에서 교회를 돌보(목회)는 헬라(그리이스)인 티토에게
교회를 돌보는 사람의 길잡이를 알려 주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다.
티토는 파울로 서신에 13회 기록되어 있다. (갈 2:3, 코린도 베타 2:13, 7:6, 8:23 기타).
전도하러 (유고슬라비아) 달미티아로 갔다. (티모데 베타 4:10)
크레타 섬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중간에 있는 섬이다.
파울로 당시에 많은 사람이 크레타 섬에 살고 있었다.
섬의 가장 높은 산의 높이는 2,100 미터 이다.
크레타 섬은 지중해안에 있는 것으로서 아프리카 해안 까지 300 킬로,
그리이스 본토 까지 300 킬로, 소아시아 쪽으로도 비슷한 거리로 떨어져서
무역으로 발달한 도시국가 이었다.
길이가 258㎞요, 너비가 11㎞에서 56㎞나 된다.
그 섬의 총 면적은 8,285㎢ 로 제주도 4.5 배 크기 며
북위 35도 (부산과 비슷한 위도)에 있지만 지중해성 기후로 온화하다.
섬의 북쪽에는 협착하지만 비옥한 해안 평야가 연안 산맥으로 뻗어 있으며,
그 뒤에는 그보다 좀 더 높은 또 하나의 산맥이 놓여 있고,
세번째의 산맥이 뻗어 있다.
가장 높은 산은 프실로리티(Psiloriti)산으로서 그 높이는 해발 2,458m 이다.
이 산이 바로 고대의 그리이스 전설에서
이교의 주신 제우스가 탄생했다고 하는 고대의 이다(Ida) 산이다.
한국에선 크레타의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해외에서 크레타는 손꼽히는 여행지다.
특히 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휴가지. 매년 외국 관광객 수백만 명이 크레타에 방문한다.
매년 트립어드바이저가 전세계 여행자들에게 투표를 받아 '세계 최고의 여행지' 랭킹을 매기는데,
크레타는 이 랭킹에서 늘 최상위권에 랭크된다.
최근 들어 크레타섬에 방문하는 한국인 숫자도 점차 늘고 있다.
크레타섬 현지 한국인이 운영하는 여행사도 있다.
아테네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크레타섬에 갈 수 있다. 하니아, 이라클리오에 각각 공항과 항구가 있다.
크레타섬의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사마리아 협곡, 크노소스 궁전, 하니아 항구, 엘라포니시, 발로스, 프레벨리, 아르카디우 수도원 같은 곳들이 있다.
크레타 섬과 크노소스 궁전
2018년 현재 크레타 섬은 크노소스 궁전 때문에 유명한 관광지 이다
잊혀있던 환상의 섬 ... 크레타섬과 크노소스 궁전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궁전은 미케네 문명이 사라지면서 우리에게는 잊혀진 문명 잊혀진 역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단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에서 만들어진 환상속의 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역사가 영원히 잊혀지리라는 법은 없는 듯 크노소스 궁은
1900년 이후 영국인 아서 에번스 경에 의해서 우리에게 살아있는 역사라고 밝혀졌다.
♧ 하인리히 슐리만과 아서 에번스경
살로몽 레나크 “에번스의 발굴은 고고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의 발굴 덕분에 우리는 슐리만의 발굴을 통해 알게 된 문명보다 훨씬 더 앞서고 더 찬란한 문명이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에번스의 발굴은 에게해의 고대 문명에서 페니키아인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
모든 학설을 뒤엎어버렸다.”
트로이․미케네․티린스를 발굴해 전설을 역사로 바꾼 하인리히 슐리만은 그의 꿈을 이룰 네 번째 무대로
미궁과 미노타우로스 전설의 고향인 크레타를 점찍었다.
미노스왕의 궁전은 크레타섬 크노소스의 산기슭에 있을 것 같았다.
그곳은 도기 파편이 널려 있고,올리브 나무들로 뒤덮인 자갈밭이었다.
발굴 허가는 쉽게 얻었지만 땅주인들이 땅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값을 터무니없이 높여 부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슐리만과 다른 땅주인 사이에 끼어들어
사기 치려는 사람도 있었다.
슐리만은 화가 나서 아테네로 돌아갔다.
그는 미노스 왕궁이 크노소스에 있다고 확신하고 다시 가려고 했지만
1890년 나폴리의 한 광장을 지나다가 쓰러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백만장자였지만 옷차림이 아주 초라해 사람들이 그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아 죽었다).
크노소스를 발굴하는 행운은 아서 에번스에게 돌아갔다.
1851년 영국에서 태어난 에번스는 고고학에 관심이 깊은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선사시대 고고학에 조예가 깊은 지질학자였다.
고고학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모험가 기질이 있던 그는 1870년대 말기부터
‘맨체스터 가디언’의 통신원이 되어 발칸 반도를 돌아다니면서 고대 유물을 수집하고,
오스트리아의 통치에 저항하는 슬라브 민족의 투쟁을 도왔다.
1881년 오스트리아 당국에 체포되어 발칸에서 추방된 그는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팔리는 미케네 출토 골동품에 매료되었다.
주로 무늬가 새겨진 작은 인장과 보석이었는데, 골동품 상인들은 그것이 크레타섬에서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인장과 보석에서 그는 ‘최소한 두 가지 문자 체계로 기록된 흔적’를 발견했다.
그는 선형문자 B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크레타의 문자 문명 유물을 좀더 많이 발견하기 위해
1884년 크레타로 갔다.
에번스는 슐리만이 발굴하려던 크노소스를 찾았다.
그 역시 그곳을 파헤치면 뭔가 엄청난 결과가 나오리라고 예감했다.
그는 2년여 동안 땅 주인들을 설득해 1896년 그 땅을 전부 사들였다.
호메로스가‘오디세이’에서‘포도꽃 피는 풍요한 섬,바다에 떠있는 부유한 나라’라고 노래한 크레타.
그곳에서 제일 큰 도시 이라클리온 항구에서 남쪽으로 6㎞ 떨어진 올리브밭에서
1900년부터 시작된 발굴은 그로부터 30년 동안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첫 삽을 뜬 날 에번스는 건물과 유물을 발굴했다.
둘째날에는 퇴색한 벽화들이 그려진 가옥을 찾아냈다.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얼마 후 그는 ‘크레타’라고 표기된 점토 서판 2,000개를 찾아냈다.
그 뒤를 이어 벽화와 조각상들이 나왔다.
그는 기쁨에 들떠 런던의 ‘타임스‘신문에 전보를 쳐서 자기가 ‘미노아 문명’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미노스 왕에게서 딴‘미노아(미노스의)’라는 말이
크레타섬에 있었던 문명을 나타내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아이디어에 흡족해 했다.
얼마가 더 흐르자 크노소스 유적지는 8,100㎡ 넘게 확장되었다.
나중에는 24㎢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임이 드러났다.
이를 두고 에번스는 다음과 같이 추리했다.
그 성은 슐리만이 미케네와 티린스에서 발굴한 성들과 같은 시대의 것이며 서로 관계가 깊다.
즉 에번스가 발견한 성이 훨씬 당당하고 장엄한 것으로 미뤄
크레타가 에게해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섬들의 중심지였고 미케네와 티린스에 있는 성들은 거기에 복종하는 지방도시였다.
왕궁은 아주 큰 네모꼴 안뜰을 둘러싸고 사방으로 방이 수백 개 있었다.
벽은 돌로 되어 있었고 평평한 지붕을 둥근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었다.
층마다 방과 복도,넓은 홀이 어지러이 널려 있어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다가 길을 잃는 일이 자주 생겼다.
미궁에 대한 전설을 모르는 사람조차 미로(迷路)라는 말을 저절로 떠올릴 지경이었다.
에번스와 그의 동료들은 특히 주택의 안락함에서 미노아 문명이 지니닌 현대성을 확인했다.
고고학자들은 크노소스와 파이스토스 궁전안에서 방의 환기와 밝기를 책임지는 채광시설과 물길을 끌어온
인공 수도관 시설, 빗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시설을 발견했고
미노스 궁전의 동쪽 측면에 있는 현대식 화장실을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
틸리소스나 팔라이카스트로에 살던 미노아 문명인의 소박한 주거지에도
현대 부르주아 계층의 편리함과 호화로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에번스와 그의 동료들을 끊임없이 놀라게 했다. 막심 콜리뇽은 방들의 장식과 안락함,
특히 가변식 벽이 있는 거실, 욕실, 방을 서늘하게 하는 물 저장 탱크,
전망이 좋은 베란다 등 세심하게 갖춰놓은 설비에 대하여 언급했다.
아돌프 레나크는 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미노스는 궁정 회랑 위로 복잡하게 얽힌 모든 계단과 모든 복도로 통하는 3층을 올렸다.
그리고 무용과 투우를 위하여 계단석으로 둘러싸인 포장된 마당이 있었다.
옥좌가 있는 넓은 알현실 옆에는 우리가 보기에도 위생에 전혀 문제가 없는 요길과
심지어 세면대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이러한 안락함과 세련됨은 유럽의 중산계층도 누리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므로
매우 놀랍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또한 에번스는 발굴 초기에 크레타섬에서 그가 찾고자 했던 것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나중에 ‘선문자B'라고 부르게 된 문자가 기록되어 있는 100여개의 점토판들이었다.
이어서 상형문자와 선문자 A로 쓰여진 많은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에번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 문서들은
왕실의 기록, 법령집, 서신, 계약서, 법정 판결문이나 상품목록들이라고 한다.
그는 궁전에서 18개의 창고를 발견했는데, 그중에 몇몇 창고에는 아직도 저장용 항아리들이 남아 있었다.
1909년 이후 에번스는 훈장을 받고 1911년에는 작위를 수여받았다.
1941년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도 에번스는 자신의 삶을 고고학에 바쳤다.
♧ 완전히 다른 문명 (미케네보다 앞선 문명)
아서 에번스는 자신이 발견한 것들이 미케네 문명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궁전은 요새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았고
발굴해낸 수백개의 유물 가운데 전쟁이나 군대와 관련이 있는 것은 극히 적었다.
대부분의 도자기가 본토에서 발견된 도자기와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에번스는 점차 이 라비린토스 궁전의 주인이 미케네인일 것이라는 생각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어쩌면 세월이 더 흐른후에 미케네인들이 그곳에 살았을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다른 문명을 상대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에번스는 첫 번째로 그것이 미케네 문명의 지역적 변종이 아닐까 생각했고
그 다음으로는 미케네인들에게 순식간에 정복당한 토착문명,
즉 그 유명한 에테오크레타 문명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 본토 문명과의 유사점이 없는 숱한 유물들을 보면서
그는 마침내 이것이 미케네 문명과는 무관한 문명, 특히 미케네 문명보다 앞선 시대의 문명일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에번스는 그가 발굴해낸 것들이 슐리만의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05년에 열린 제13회 선사시대 고고학 및 인류학 국제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 문명을 계승한 후계자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상고시대에 대한 연구에서 진전을 이룬 바이다.
슐리만의 발굴 이후 미케네 문명의 기원을 둘러싸고 의문이 제기되었다.
에번스는 더욱 오랜 옛날의 문명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북유럽 기원론과 근동 기원론을 일축해버렸다.
금제 봉납 양날 도끼
미노아인들이 이 양날도끼를 '라브리스(labrys)'라고 불렀음.
도끼는 미노안 종교의 신성한 상징임.
이 궁정의 동쪽 면의 중간에 거대한 계단(Grand Staircase)이 있는데 ,
이것을 따라 내려가면 동쪽 날개(East Wing)에 이른다.
이 동쪽날개에는 왕과 여왕을 위한 분리된 왕가의 아파트들(Royal Apartments)이 있다.
거기에는 훌륭한 프레스코화와 욕실, 화장실, 왕좌의 방들이 있는 거대한 방들이 있다.
이 남쪽에는 양날도끼의 사당(Shrine of the Double Axes)이 있다.
궁전의 이 날개는 5층의 높이로 올라가 있다.
왕가의 아파트의 북쪽에는 도기류와 보석 세공인,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기술자들의 작업장이 있다.
명판(銘板, tablets)이 있는 기록보존소(Archive Room)가 궁전의 북쪽에 있으며,
또한 채색된 황소 부조(bull relief)가 있는 발코니와 극장 지역이 북쪽에 있다.
이 극장지역에는 왕가의 길(Royal Road)이 있는데, 큰 궁전(Great Palace)과
작은 궁전(Little Palace)을 북동쪽 끝에서 연결해준다.
궁전 주위에는 궁정 관리들과 부유한 시민들의 대저택이 있는데,
구조가 화려하고 많은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궁전의 남쪽 입사데스(Yipsades) 언덕 위에는 거대한 집들이 있다.
여기에는 남쪽 왕가의 묘지 사당(Royal Tomb-Shrine)이 있다.
궁전의 마지막 파괴는 BC1400년 이후에 일어났는데,
자연 재해에 기인히고 B.C. 1450년 이후에 궁전은 미케네 지배자에 의해 점령당했다.
♧ 크레타 섬의 연표
BC 3200 초기 미노아 시대의 시작
BC 2200 중기 미노아 시대의 시작
BC 2200 최초의 궁전들의 건설 (크노소스, 파이스토스, 말리아, 자크로)
BC 1700 최초의 궁전들의 파괴
BC 1650 궁전 재건 (제2 궁전시대)
BC 1500 산토린섬의 화산분화
BC 1450 미노아 궁전 파괴와 미케네 침임
BC 1370 크노소스의 완전 파괴
BC 1100 - 800 청동기 문명의 소멸과 도시국가 사회의 발전
BC 500 고르틴 법전
BC 4세기 말 - 1세기 (헬레니즘 시대) 크레타섬 도시국가들 사이의 끝없는 경쟁 크레타의 해적질
BC 67 로마의 크레타섬 정복. 크레타섬은 키레나이크(고르틴의 수도)지방으로 통합
324 크레타섬, 동로마 제국에 병합
823 아라비아의 정복
961 동로마 제국, 크레타섬 탈환
1204 제4차 십자군 정복때 크레타섬은 베네치아에 귀속
1201 - 1669 베네치아의 점령 (필명이 엘그레코인 화가 테오토코풀로스와
<에로토 크리토스>의 저자 코르나로와 함께 14세기부터 크레타섬의 르네상스 를 맞음
1415 부온델몬티, 크레타섬 여행
1669 - 1898 오스만 제국의 점령
1817 지버의 탐사
1821 그리스 독립전쟁
1830 - 1840 크레타섬은 이집트의 부왕 지배하에 놓임
1834 패슐리의 탐사
1857 페로와 트농의 탐사
1865 스프랫의 탐사
1866 아르카디 수도원 파괴
1878 크노소스에서 미노스 칼로카이리노스의 첫 번째 동굴
1866 슐리만, 크노소스 방문
1894 에번스의 첫 번째 크레타섬 탐사, 크레타섬 자치권 획득, 게오르그 왕자 위원 장으로서 도착
1900 크레타섬 발굴작업 시작 (크노소스, 파이스토스)
1913 크레타섬, 그리스에 병합 (런던조약)
1915 하치다키스의 말리아 궁전 발견과 1920년 프랑스인들에 의한 발굴작업 재개
1923 마지막 회교도들이 출발하고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로 대치됨
1941 독일의 침입과 크레타섬의 황폐화
1961 자크로 궁전 발견
B.C. 2천년 대에 크레타는 이른바 미노스 문명이라고 일컫는 고대 문명의 중심지였다.
이 문명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 메소포타미아의 문명 및
이집트의 문명과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거기에 반전설(半傳說)적인 왕이 살았는데 그의 이름이 미노스였다.
그 왕은 너무나 크고도 놀랍도록 복잡한 하나의 미궁을 건축하였다고 전해진다.
바로 이 미궁으로 인하여 저 유명한 테세우스(Theseus)와 미노타우로스(Minotaur)의 전설이 생겨나게 되었다.
미노스 왕은 강력한 함대를 구축하고 광범위한 해상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질서 정연하고 정교한, 그러면서도 관료적인 체제를 보여주는
번문욕례(煩文縟禮-규칙, 예절, 절차등이 지나치게 형식적이어서 번거롭고 까다로움)와도
같은 법률 조직을 입안하여 실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크레타인들은 고도로 발달된 문자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크레타가 그것의 문명의 도달했다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B.C. 1400년 경의 미노스 왕 시대였다.
그때 이후로 크레타는 고대의 미노스 시대에 누리던 그 비길 데 없는 위치로 두번 다시 오르지 못하였다.
한 때 부하고 강하고 고도로 발달되었던 탓으로 크레타는 후기에 와서
아시아의 예술과 학문들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크레타 섬은 헬라인들의 식민지가 되었고,
헬라 문화사의 비교적 전성기 얼마 동안에 그 섬은 두드러지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크리스토교의 최초기의 여러 해 동안에 크레타인들은 부정직과 무신용으로 널리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티토서 1:12). 이 섬은 B.C. 1세기 동안에 해적들의 본부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윽고 해적들은 소탕되었고, B.C. 67년에 그 섬은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크레타인들은 외국 군대에서 용병으로 계속 복무하였다.
크레타 섬은 그리이스 본토의 남쪽 끝에서 96㎞ 지점,
고대에 있어서 아카디아 사람들은 갑다라라고, 이집트 사람들은 겝듀라고
히브리인들은 갚토르:
플레쉩(팔레스티나) 사람들의 고향 크레테 섬 (아모스 9:7, 예레미야 47:4)
이라고 불렀다.
크레타 섬이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BC 2000-1400년까지 계속된 에게 문명의 중심지로서이다.
가장 유명하고 또 그 문화의 집약이라고도 생각되는 것은
크노소스에 있는 미노아 궁전이다.
이것은 매우 큰 것인데,
(170-180m)×(160-170m)의 면적에 부분적으로는 4층, 단층만에도 100개 이상의 방이 있다.
그리고 이 궁전은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또 크레테 문자라고 불리우는 회화문자가 BC 2100-1150년에
이 곳을 중심으로 쓰여졌다.
크레타 섬의 동쪽에 있는 키프로스는 BC57년 로마령으로 되고,
BC22년 부터는 지방 총독이 있었다.
크레타 섬에는 유대교 회당도 많이 있었다.
티토가 목회할 당시 크레타 섬의 수도 역할을 한 고르티스(Gortis) 에 티토 기념 교회가 있다.
고르티스 왕국이 있었던 크레타 섬은 법이 다스리는 사회였다.
노예의 권리, 여성의 권리도 돌에 새겨 놓았다.
AD 5세게 무렵에 만들어진 벽에 헬라어(그리아스) 대문자로 법이 적혀 있었다.
글은 특이하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줄을 바꾸어 왼쪽에서 오른쪽 이렇게 적혔있다
2018년 현재 크레타 섬의
예수 믿는 바율은 90% 이상이라고 이강근의 성지여행에서 말하였다.
크레타 섬 동쪽 약 600 킬로에 있는
키프로스 (구약 시대: 킽팀 민 24:24, 렘 2:10, 에즈켈27:6, 단 11:30)섬에는
죽었다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서 키프로스 섬으로 가서
키프로스 섬에서 AD58년 파울로와 바르나바를 만나서 장로로 세워져서 목회하고 있다가
죽은 라나카(Larnaca)의 '라자로 기념교회', (헬라어로 적혀 있었다)
'마르코 복음'의 저자의 외삼촌으로 AD116년 돌에 맞아서 순교한 '바르나바 기념 교회'가 있다
사도행전 13장 6-8절
6. 섬 (동쪽 끝 살라미에서 서쪽 끝 파보 까지 약 220 킬로의 먼길과 산악 지대를 거치는)전체를 지나 가면서
파포에 가서 '바리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났다.
7. 그가 (키프로스 섬의) 총독 세르기오 파울로와 함께 있으니, 세르기오 파울로는 슬기있는 사람이었다.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다.
8. 이 마술사(남자 무당) 엘루마 (뜻: 남자 무당, 마술사)는 그들을 방해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참조 :파포에는 로마에서 보낸 총독 관저가 있었으며, 코린도 베타 11장 24절에
사도 파울로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았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한장소가 파포 라고 하면서 파포에 파울로 채찍 기념교회가
중세 시대 때 부터 이어져 내려 온다고 하였다. 이강근 성지 여행)
1장- 장로와 감독의 자격
2장- 크리스토인의 품성
3장- 크리스토인의 사회적 의무
# # # # # # # # # # * * 티토서 1장
1. 하나님의 종이며,
그리고 예수 크리스토의 심부름꾼(일꾼,사도)인 나 파울로가 심부름꾼(일꾼,사도)이 된 것은,
하나님이 뽑은 사람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딸린 참된 것을 아는 것과
2. 끝없이 사는 앞날을 위해서이다.
그것(끝없이 사는 것, 영생)은 거짓이 없는 하나님이 끝없이 오래 앞부터 약속한 것이다.
3. 자기가 알맞은 때(기간)에 자기의 말씀을 알리는 것으로 나타내었으니,
이 말씀을 알리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낸 하나님이 명령한 대로 나에게 맡긴 것이다.
4.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아들 된 (헬라인 ,갈라티아 2:3)티토에게, (편지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낸 크리스토로부터
(헬라어 인사 :카리스)은혜와 (히브리식 인사: 샬롬) 평화가 당신에게 있기를 (바란다).
5. 내가 당신을 크레테에 (고르티스 왕국의 수도에 개척한 교회에서 목회하라고 ) 남겨 둔 이유는
모자라는 일을 바르게 하고 (남은 일을 정리하고) ,
내가 알려준 대로 (크레타 섬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어서 교회가 여러개 있으므로)
각 성(도시, 마을)에 (교회에서 다스리는)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는 것이다.
6. 누구든지 꾸짖을(나무랄) 것이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고,
술과 여자에 빠졌다는 비난을 받거나,
또는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이 없는
(예수) 믿는 아들 딸들을 둔 사람이어야 한다.
7. 감독(지도자)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꾸짖을 것이 없고,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빨리 성내지 아니하며,
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사납게 싸우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8. 오직 ( 교회들을 다니면서 순회 전도하는) 나그네를 대접하며,
착한 일을 좋아하며,
조심스러우며,
바르며,
거룩하며,
알맞게 갖추며
9. 믿는 말씀이 가르치는 그대로 지키는 사람이어야 한다.
바른 가르침으로 가르치고,
그리고 거스르서 말하는 사람들을 꾸짖게 하려는 것이다.
10. 왜냐하면 말을 잘 듣지도 않으면서,
헛된 말들만 하고,
속이는 사람이 (겉으로 몸에) 페리토메를 받았다는 사람들(유대인들) 가운데 많이 있다.
11. 그들의 입을 막아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부끄러운 이로움 때문에 마땅하지 아니한(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린다.
12. 크레테인 가운데 어떤 선지자((크레테의 예언자 BC6세기경 에피메니데스(Epimenides))가 말했다.
'크레테 사람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나쁜 짐승 같은 사람들이며,
(먹기 위하여)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다.'
13. 이 증언이 참말이다.
그들이 믿음 안에서 건전해지도록 당신이 그들을 (칼로 베어내듯) 엄하게 꾸짖어라.
14. 유대 사람의 허탄한 이야기(신화)와 참된 것에 거스르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15. (율법에서 깨끗하다고 말하는 음식을 먹는)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지만,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워졌다.
16. 그들은 하나님이 있다고 ( 입으로는) 말하지만, 행동으로는 없는 것 처럼 행동한다.
꼴보기 싫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지 아니하는 사람이며,
모든 착한 일을 버리는 사람이다.
티토서 2장
*** 바른 가르침 ***
1. 오직 당신은 바른 가르침에 맞는 것을 말하라.
2. 나이 많은 남자(지도자)들은
알맞게 갖추며, (예수의 삶과 성품을 닮아가서) 경건하며 , 조심하며, 믿음과 사랑과 참아내는 것에 온전하게 하고
3. 나이 많은 여자(권사, 집사)들은 이와 같이 행동(행실)이 거룩하도록 하고,
헐뜯지 않도록 하고,
포도주에 푹 빠진 종(노예)이 되지 말고,
착한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라.
4. 그들(나이 많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에게 남편과 아들 딸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쳐라.
5. 조심하며,
깨끗하며,
집안 일을 하며,
착하며,
자기 남편의 말을 잘 듣도록 하여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웃음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6. 당신은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건전한 마음을 가지도록 가르쳐라.
7. 모든 일마다 당신 자신이 착한 일로 본보기를 보이며,
썩지 않게 거룩하게 가르쳐서
8. 꾸짖을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반대하는 사람이 부끄러워서 우리를 '나쁘다' 말할 것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9. 종(노예)들은 자기 윗사람들에게 모든 일에 잘 따라주어서,
기쁘게 하고,
말 대꾸를 하거나,
10. (주인의 것을 ) 훔치지(떼어먹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착하고 몸과 마음을 다하라'고 가르쳐라.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낸 하나님의 가르침을 빛나게 하려는 것이다.
11.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을 죄에서 건져내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
12.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 (예수의 삶과 성품을 닮아가지않는)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욕심(정욕)을 다 버리고 조심함과 바르게 살아가는 것과
(예수의 삶과 성품을 닮아가는)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우리의 큰 하나님이며
우리를 죄에서 건져낸 예수 크리스토가 빛나도록 행복한(복스런) 앞날을 기다리라'고
했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준 것은,
모든 불법(죄)에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고 사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착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15.그리고 당신은 이것들을 말하고 격려하라(권하라, 위로하라).
모든 명령(권위,지시)로 꾸짖어서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하라.
티토서 3장
*** 크리스토인의 행동 ***
1. 당신은 그들이 (크레타 섬 왕국을) 다스리는 사람들과 권력 잡은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
모든 착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도록 기억하고 있도록 하라.
2. 아무도 헐뜯지 말며,
다투지 말며,
느그러우이며,
모든 일에 부드러움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고 있도록 하라.
3. 우리도 앞에는 어리석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지 않았던 사람이며,
속은 사람이며,
여러 가지 욕심(정욕)과 마시고 취해서 노는 것에 종 노릇한 사람이며,
어긋난 행동과 샘내서 마워하던 사람이며,
꼴보기 싫은 사람이며,
서로 사이에 미워한 사람들 이었다.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친절(자비)과 사람 사랑하는 것이 나타날 때에
5. 우리가 행한 바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하나님)의 불쌍하게 여김을 따라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서 다시 태어나도록(중생,거듭나게) 하고
성령으로 새롭게 하여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었다.
(참조 : 중생(重 거듭할 중, 무거울 중, 生 날 생), regeneration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뉘우치고 고쳐사는(회개)' 사람에게 주어진다. )
6. 우리 구주 예수 크리스토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넉넉하게 부어 주었다.
7. 우리가 그의 은혜를 힘입어 바르다 하는 것을 얻어,
끝없이 사는 앞날을 따라 (물려서 받는) 상속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8.이 말은 믿을 만하다.
나는 당신이 이러한 것을 힘있게 주장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착한 일에만 힘쓰도록 바란다.
착한 일은 아름다우며, 사람에게 이롭다.
9. 그러나 어리석은 말싸움(찾아내어 조사 하는 것)과
(에게해 문명의 오래된 크레타 섬에서) 족보(유대인 조상들의 역사) 이야기와
다툼과
(유대인들이 모여서 사는 곳에서,행2:11)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쓸데 없는 것이며,
헛된 것이다.
10. 이단(분파,교리)적인 것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한두 번 타일러 보고 멀리하라.
11. 이러한 사람은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빗나가서(그르쳐서) 스스로 정죄한 사람으로서 죄를 짓는다.
12. 내가 (티토 당신 대신에 티토 교회를 임시로 맡아서 돌보도록) 아르테마나 투키코를 당신에게 보내리니,
(침조 : 아르테마는 예수의 70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전설이 있다. 루카 10 :1)
그 때에 당신이 빠르게
(이오니아해 동쪽의 로마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그리이스의) 항구도시) 니코폴리로 나에게 와라.
왜냐하면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다.
(참조 : 투키코는 파울로가 1 차 옥중에서 기록한 에페소서와 콜로싸이서를 각각 에페소와 콜로싸이에
보내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다 에페소 6:21,22 콜로싸이서 4:7.8)
13. 율법학자 제나와 및 (설교 잘하는) 아폴로를 빨리 먼저 보내어서 (준비하도록 하여서),
(우리가 니코폴리에서 겨울을 지내면서 집회할 때에) 그들에게 모자라는 것이 없게 하라.
14. 그리고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사람들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15.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다 당신에게 인사한다.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도 인사하라.
은혜가 당신들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