鄧麗君 假護照風波(2) 등려군 위조 여권 풍파:
台湾媒体群起攻击叛“国”,邓丽君彻底感受到人情的冷暖。整件“假护照风波”自爆发到厘清真相,只有短短一个星期,
而且日本政府的调查证实邓丽君并无涉及伪造护照,迅速还给邓丽君清白。但是经此风波,邓丽君彻彻底底感受到人情的冷暖,
对媒体、对人性都寒了心。
대만의 매체는 나라를 배반하였다고 떼를 지어 공격을 하여서 덩리쥔은 처절하게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냉정한 마음을 느꼈다.
모든 위조 여권 풍파 사건은 발생부터 진상이 깨끗하게 밝혀지는데는 단지 짧은 1주일이 걸렸고 일본 정부의 조사는 덩리쥔이
결코 여권을 위조하는데 관계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여서 재빠르게 다시 덩리쥔의 결백을 밝혀 주었다. 그러나 이런 풍파를
겪어서 덩리쥔은 처절하게 사람들의 냉정함과 따뜻함을 느꼈기에 매체나 사람 마음에 대해 모두 마음 아파하였다.
“假护照风波”若发生在今天的台湾,可能仍是值得街头议论的话题,但起不了太大的波澜,此事发生在二十多年前的台湾,
当时两岸对峙,台湾舆论几乎是以叛“国”行为讨伐她。因为在1978年,“最忠实的盟邦”美国与台湾当局“断交”,改与中国大陆建交。
在此背景下,邓丽君被传出宁愿改当印尼人,这是何等严重的大事? 因此,假护照案发生首日,尽管真相未明,
台湾报章标题诸如“洋相出到扶桑国”或者“堂堂正正中国人,鬼鬼祟祟干什么”等,用的都是高度批判性的文字。
有些报纸还以叛“国”等级处理这则新闻,主张立刻将邓丽君“抓回来”。
甚至有小市民前往台北地检处告发邓丽筠(邓丽君的本名)使用假护照,涉嫌伪造文书。
위조 여권 풍파가 만일 오늘날 대만에서 생겼다면 아마도 여전히 길거리에서 논의할 만한 화제일 수 있지만 그다지 커다란
파란을 일으키지 못하였을 것으로, 이 사건은 20여 년 전의 대만에서 일어났다면 당시에 양측이 서로 대치하고 있고 대만의
여론은 아마도 그녀를 나라를 배반한 행위로 규탄하였을 것이다. 1978년에 가장 믿을 수 있는 맹방인 미국이 대만 당국과
단교를 하고 새로이 중국 대륙과 수교를 맺었기에 이 배경 하에 덩리쥔은 차라리 인도네시아 사람으로 바꾸려 한다고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로 인하여 위조 여권 사건은 발생 첫날에 진상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대만 신문들은 "일본에 가려는 추태" 또는 "정정당당한 중국인이 남몰래 무슨 짓을 하나" 같은
제목으로 사용한 것이 모두 다 고도의 비판적 내용이었다. 어떤 신문은 여전히 나라를 배반하였다는 수준으로 이 기사를
처리하였으며, 즉시 덩리쥔을 "잡아 와라" 라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어떤 시민은 타이베이 지방검찰청에 가서
덩리윈(덩리쥔의 본명)을 위조 여권 사용과 문서 위조 혐의로 고발을 하였다.
在弥漫着“爱国情绪”的台湾,连演艺界也不支持邓丽君。当年的 “影视剧演艺人员生活自律评议委员会”召集人葛香亭表示,
邓丽君事件已“损及演艺人员的荣誉,并对演艺人员的风气有不良作用”,待邓丽君返回台湾,评议会将请她解释事件始末。
即使在侨界,对邓丽君的“假护照事件”也有两极看法。一是质疑邓丽君过去既然拿了“台湾护照”,为何还要拿印尼护照?
他们认为邓是自作自受,不值得同情。但也有侨界认为,邓丽君在出事后,为了保护朋友,自称是自己花钱买的,
企图担下责任,显示她心地善良。有人说,更何况歌星为了进出许多国家的签证便利,持有双重国籍也无可厚非。
애국 정서가 휘덮히고 있는 대만에서, 연예계조차도 덩리쥔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해의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의 연예인
생활 자율 평의위원회" 소집인 葛香亭이 덩리쥔 사건은 이미 연예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아울러 연예인에 대한 품위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하였으며 덩리쥔이 대만으로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라고 부탁하기로 하였다.
교포 사회에서도, 덩리쥔의 위조 여권 사건에 대하여 두 가지의 극단적 관점이 있었다. 하나는 덩리쥔이 과거에 대만 여권을
이미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또 인도네시아 여권을 가지고 있는 가하는 의문이었다. 그들은 덩리쥔이 자업자득이라,
동정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또한 교포들은 덩리쥔이 일이 난 뒤에야 친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기가 돈을 써서
샀다고 스스로 책임을 질려고 한다며 그녀의 마음씨가 선량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여겼다. 어느 사람은 말하길,
하물며 대스타가 수많은 나라를 출입국의 비자를 편리하게 위하여 다중 국적을 가지는 것도 크게 비난할 바가 못 된다고 하였다.
一个无心之过引起这么大的风波,是邓丽君始料未及的。为平息“众怒”,邓父和邓母都极力低调处理此事,赵素桂代替女儿解释,
这是自己女儿“年轻,一时糊涂,不懂法律”,才走错了路。邓丽君的弟弟邓长禧忆起这段风波说,邓丽君拿印尼护照的想法真的很单纯,
因为“那个年代持‘中华民国护照’出国非常不方便”。邓长禧指出,不仅每次回台湾就要加签一次,一等就是10至14天,
而且每次出国最多只能3个月,到无“邦交”国家拿签证不容易,还要申请工作证。邓丽君是艺人,处境更尴尬,
因为主管机关有时是“教育部”,有时又是“新闻局”,有时两者都推说不管演艺人员,邓丽君每次加签还要拜托人找“新闻局”出具证明。
무심코 한 일이 이처럼 커다란 풍파을 불러일으킨 것은 덩리쥔이 처음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대중들의 분노가
잠잠해지도록 덩리쥔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최선을 다하여 조용히 이일을 처리하였고, 趙素桂는 딸을 대신하여서 이것은
자기 딸이 나이가 어려서 한때 법률을 잘 이해 못하고 잘 몰랐기에 잘못된 길을 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덩리쥔의 남동생 鄧長禧는 이 풍파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였는데, 덩리쥔이 인도네시아 여권을 가지려고 한 생각은,
그때에 중화민국 여권을 가지고 출국하는 것은 매우 불편하였기에, 단순하게 가지려고 하였다고 하였다. 鄧長禧가 지적하기를
매번 대만으로 돌아오려면 한차례의 도장을 찍어야 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다리는데 10일 내지 14일이 걸리고,
게다가 매번 출국할 때 최대 3개월이나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국교가 없는 나라를 갈 때면 비자 받기가 쉽지 않았고
신분증도 신청하여야 하였다. 덩리쥔은 연예인이어서 처지가 아주 곤란하였는데 왜냐하면 담당기관이 때로는 교육부이거나
떄로는 또 공보부이서 혹은 두 기관이 모두 연예인은 담당하지 않는 다고 퇴짜를 놓기도 하였는데
덩리쥔은 매번 도장을 받으려고 또한 공보부를 찾아서 증명을 발급해 달라고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여야 하였다.
“姐姐有个印尼好友,是名印尼富商。他告诉姐姐可以帮她办一本护照。姐姐信任朋友,没多想,就答应了。
没多久,印尼富商拿了一本印尼护照给姐姐,只说是外交部发的,后来就发生假护照风波。
”发生这等大事,邓丽君事后也不好意思回头再追问朋友。邓长禧说,姐姐告诉他“这只能怪自己年轻不懂事,就当作是给自己一个教训”。
"누나는 한 인도네시아 친구가 있었는데 유명한 인도네시아 부자 상인이었다. 그는 누나에게 여권을 만드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고 하였다. 누나는 친구를 믿었기에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승락을 하였다. 오래지 않아서 인도네시아 부자 상인은
인도네시아 여권을 누나에게 가져다 주었고 단지 외교부가 발급한 것이라고만 하였다. 나중에 위조 여권 풍파가 생겼다."
이런 큰일이 생기고 덩리쥔은 나중에 부끄러워하며 반성하며 다시 친구에게도 물어 보았다. 鄧長禧가 말을 하기를
누나는 그에게 "이것은 단지 내가 나이가 어리고 일을 잘 몰랐다는 것을 탓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것은 내게 하나의 교훈이라고 여겨요" 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鄧麗君 假護照風波(3) 등려군 위조 여권 풍파:
在美国做了一阵明星学生,誓言东山再起。 被日本驱逐出境后,邓丽君选择来到美国,一方面为履行既定的秀约,
另一方面,十四岁即辍学的她也想趁风波未平之际,重拾学生生活。
于是她在加州大学洛杉矶分校夜间部选修学分,报名了英文、日文、生物和数学等进修课程。
한때 스타가 미국에서 학생이 되고서 다시 재기할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일본에 의하여 국경 바깥으로 쫓겨난 뒤 덩리쥔은,
한편으로는 이미 정하였던 쇼 계약을 이행하기 위하여, 또 다른 면으로는 14살 때 즉 중단하였던 공부를 그녀는 풍파가
가라앉지 않은 시기를 틈타서 다시 학교 생활을 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가기로 선택하여였다. 그래서 그녀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로스앤젤레스 분교 야간부에 선택 과목으로 영문학, 일문학, 생물학과 수학 등의 과목을 신청하였다.
隔年到美国与姐姐作伴的邓长禧用“因祸得福”形容邓丽君那两年在美国的日子。
“我姐每天穿件白衬衫、一条牛仔裤,就去学校了,很轻松自在。” 加州大学虽然中国学生多,但邓丽君的班上都是外国人,
没有人知道她的职业,日子过得单纯。只是邓丽君毕竟是大明星,“不管她怎么穿,样子太好认了”,没多久,
校园内不管是不是华人,都知道有这么一位明星学生。
일 년 전 미국에 누나와 같이 도착한 鄧長禧는 "불행으로 인하여 오히려 복을 얻은 격"이라며 등려군의 이번 2년간의
미국 생활을 묘사하였다. "누나는 날마다 흰색 셔츠, 청바지를 입고서는 학교에 갑니다, 매우 편하게요."
캘리포니아 대학은 비록 중국 학생이 많지만, 덩리쥔의 반에는 모두 외국인이었기에, 그녀의 직업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단순하게 시간이 지나갔어요, 그러나 덩리쥔은 필경 대 스타이기에 "그녀가 어떻게 입든지 간에, 모습이 너무나 멋있다"고
여겨졌기에, 오래 지나지 않아 학교 내에 중국인 이든 막론하고 모두 다 이처럼 유명한 학생임을 알게 되었다.
但邓长禧透露,邓丽君在夜深人静时,还是会有很怄的感觉。他在一篇《我的老姐》文章中提到,在客居他乡的日子里,
有一次他从外面回家,看见姐姐一个人面对着窗外异国街道,泪流满面。爱好美好事物的邓丽君,即使心情跌落谷底,
对于生活品味可是没有忘记,她将原本摆在家中的清宫景致工笔画带到美国,裱好了放在洛杉矶的公寓里。
她说,“面对画,我的心情好开朗、好舒畅,书画真能陶冶性情。”
그러나 鄧長禧가 털어놓았는데, 덩리쥔은 깊은 밤에 인적이 조용할 적에 또한 매우 화나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고 하였다.
그는 [我的老姐: 나의 누나]라는 글에서 밝혔는데, 외국의 타향 살이에서 한번은 그가 집으로 돌아와서는,
누나가 혼자서 창밖의 외국 거리를 바라보며 눈물을 얼굴 가득히 흘리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덩리쥔은 설령 마음이 깊은 저 밑으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생활에 대해 삶을 음미하는 것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원래 집안에 있던 청나라 궁의 경치를 세밀하게 그린 그림을 가지고 미국으로 가져가서,
표구를 하여서 로스엔젤레스 아파트에 걸어 두었다. 그녀가 말을 하였는데"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매우 즐거워지고, 아주 편안해져요, 서화는 정말로 마음을 도야시켜 줄 수 있네요" 하였다.
她白天逛街、看书,和朋友约会,还学会了钓鱼,晚上到学校上课,假日则经常开车到拉斯维加斯看表演,有时也玩玩“二十一点”,
试试自己的手气。邓妈妈看女儿过得悠闲,自己也干脆暂时放下多年的担子,经常一个人搭机遨游各地,
以前到新加坡和香港都是为了帮女儿打点工作,现在邓妈妈终于可以安心游玩,还顺便发挥投资理财的长才,在香港和美国投资房地产。
그녀는 낮에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책을 보거나 친구와 만났고, 또한 낚시를 배우거나 하였고
밤에는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갔다. 휴일에는 언제나 운전을 하여 라스베가스에 가서 공연을 보았다.
때로는 밤 9시까지, 스스로 도박을 하면서 놀기도 하였다. 덩리쥔의 어머니는 딸이 한가로이 보내는 것을 보고
스스로도 아예 잠시라도 수 년간의 부담을 덜어 놓았다. 언제나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서 여러 곳을 여행하였는데,
이전에 싱가포르와 홍콩에 갔던 것은 모두 다 딸을 위해서 사업을 돕기 위한 것이고 지금은 덩리쥔 어머니가
마침내 마음 편히 즐길 수 있게 되었고 게다가 겸사겸사, 홍콩과 미국에서 부동산에 투자 이재의 재주를 발휘하였다.
就在事业转折点上,邓丽君与同样在洛杉矶拍片的成龙有了较长的接触机会,因为都是中国人的亲切感,两人经常一起看落日,
兜风,谈起若有似无的恋爱,但因顾虑事业、顾虑双方感受,从相恋到分手时间约两年。但直到多年后,当事人才证实这段往事。
邓丽君专心当学生期间,各地歌迷支持邓丽君的力量并未中断。1979年8月15日,“马来西亚邓丽君之友会”成立,
对正逢低潮的邓丽君来说,犹如雪中送炭般,温暖在心。新马是在香港之后,第二个成立邓丽君歌迷会的地区。
成立当天,来自新马各地的两百多名歌迷汇聚在歌迷刘宝敦的木屋里,此后,他们定期举办茶会,交换有关邓丽君的消息、
唱片和照片。事隔多年,1993年香港成立“邓丽君国际歌迷会”时,新马歌迷会也加入成为一员。
바로 사업의 전환점이 덩리쥔과 마찬가지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를 찍던 成龍과 비교적 오랫동안 만날 기회가 있었다.
모두 다 중국인의 친절함과 두 사람이 언제나 함께 석양을 보거나 드라이브를 하거나 없는 듯한 것 같은 연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지만 사업에 대한 고민이나 서로에 대한 느낌을 고려하였기에 서로 연애한 때부터 헤어진 것은 약 2년이 걸렸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서 당사자들이 이런 지난 이야기를 시인하였다.
덩리쥔은 오로지 학생 생활에 전념을 하였는데, 여러 곳의 팬들이 덩리쥔의 능력을 지지하였으며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1979년 8월 15일에 말레이시아 덩리쥔의 팬클럽이 창립되었다. 침체기에 떄 마침 빠진 덩리쥔에 대해 말하자면
마치 눈이 내리는 겨울에 숯을 보내는 것처럼 마음이 따스하였다. 新馬(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홍콩 다음으로
2번째로 덩리쥔 팬클럽이 만들어진 지역이었다. 설립 당일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여러 곳에서 온 2백여 명의 팬들은
劉寶敦의 목조 건물에서 모임을 가졌고 이 뒤로 그들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덩리쥔과 연관된 소식, 음반,
그리고 사진을 교환하였다. 이 일이 몇 년이 지나고 1993년에 홍콩에서 덩리쥔 국제 팬클럽이 창립될 때,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팬클럽도 가입하여 멤버가 되었다.
尽管长时间未公开亮相,这不影响音乐人对邓丽君作品的肯定。1980年3月,邓丽君赢得台湾金钟奖“最佳女演员歌唱奖”,
美国和加拿大都有经纪人积极邀邓丽君复出。于是沉潜一年之后,她先于7月受邀于美国纽约林肯中心、
洛杉矶音乐中心和旧金山登台,逐渐恢复忙碌的表演生活。
아무리 오랫동안 모습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것은 덩리쥔 작품에 대한 음악인의 긍정적 평가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1980년 3월 덩리쥔은 대만의 金鐘賞 "가장 아름다운 여자 가수 가창상"을 획득하였고,
미국과 카나다에서 모두 다 매니저가 덩리쥔의 컴백을 열정적으로 요청하였다. 은거에 들어간 지 1년 뒤에
그녀는 우선 7월에 미국의 뉴욕 링컨 센터, 로스앤젤레스 음악 센터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무대에
올라 달라는 요청을 받아서 점차로 바쁜 공연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假护照风波”让邓丽君在台湾、香港和日本的歌唱事业受到重大打击,个性好强的她,暗自立下东山再起的誓言。
1980年9月21日邓丽君抵达东京成田机场,这是“假护照风波”之后,邓丽君首度现身东京,她以一贯柔美的口吻表示:
“我很抱歉,让我的歌迷为我操那么多的心。” 并在广大传媒前,正式宣布准备重返日本歌坛。这次亮相,邓充分展现出
“从哪里跌倒,就从哪里起来”的气魄。对于回台湾,邓丽君则暗自立下“除非请我,我才会再回来”的决心。
위조 여권 파문이 덩리쥔을 대만, 홍콩 그리고 일본의 연예 사업에서 중대한 타격 받게 하였는데, 승부욕이 매우
강한 그녀는 남몰래 재기하리라는 맹세를 하였다. 1980년 9월 21일에 덩리쥔은 도쿄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였다.
이것은 "위조 여권 풍파" 이후 덩리쥔이 처음으로 도쿄에 몸을 나타낸 것으로 그녀는 여전한 부드럽고 아름다운
입술로 이야기하였다. "저의 팬들이 저 때문에 그렇게나 많이 걱정을 하신 것에 대해 매우 죄송합니다."
아울러 여러 매체 앞에서 정식으로 일본 가요계에 다시 돌아오려고 준비한다는 것을 발표합니다.
이번 모습을 나타낸 것은 덩리쥔이 "어느 곳에서 넘어지더라도 바로 어느 곳에서나 일어서리라" 하는
기백을 유감없이 표현한 것이었다. 대만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덩리쥔은 즉 남몰래
"오로지 나를 불러야만, 나는 비로소 다시 돌아가리라" 라는 결심을 하였다.
同年10月,邓丽君第四度选在香港利舞台举行演唱会。在香港仅发行过国语唱片的她,
首度尝试推出第一张粤语大碟《誓不两立》,歌曲《忘记他》异军突起,为复出香港歌坛的邓丽君注入强心剂。
같은 해 10월 덩리쥔은 제4회 홍콩 엘리자베스 체육관에서 거행된 콘서트를 하였다.
홍콩에서는 단지 보통화 음반을 내놓았던 덩리쥔은 처음으로 첫번 광둥어 앨범 "勢不兩立" 가곡 "忘記他"를
출시해 보면서 새롭게 도전하듯 홍콩 가요계에 복귀하려는 덩리쥔은 강심제 주사를 놓았다.
假护照风波 (4): 위조 여권 파문:
歌声红遍大陆,台湾当局为“假护照事件”平反。 但令邓丽君始料未及的是,就在她的事业陷于停顿时,
邓式爱情歌曲则在1979年至1980年之间开始于中国大陆流传。身在美国的邓丽君,在1980年前后传出歌声响彻神州的消息。
不仅到美国的大陆民众争睹邓丽君风采,中国大陆大江南北的民众皆为邓丽君所醉倒。
노래 소리는 대륙을 널리 퍼져 나갔고, 대만 당국은 위조 여권 사건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러나 덩리쥔의 처음 판단이 제대로 맞이 않았던 것은 바로 그녀의 사업이 난관에 봉착하였을 때,
덩리쥔 스타일의 사랑 노래가 마침 1979년부터 1980년 사이에 중국 대륙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에 있던 덩리쥔에게 1980년 전후로 그녀의 노래가 중국 대륙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에 있는 대륙 민중이 다투어 덩리쥔의 모습을 보려고 할 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의 대부분의 민중 모두가
덩리쥔에게 매혹되었다.
许多经历那个时代的中国人,几乎视她的声音为开放的一个标志。唱她的歌曲成为时尚,那时卡拉OK还不普及,
但录音机里几乎全是关于邓丽君歌曲的翻录带,邓丽君成为了人们精神与心灵解放的一个窗口。
人们从她的歌声中,开始触摸心灵中某一部分柔软之处。
이 시대를 지나쳐 온 수많은 중국인들은 거의 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는 개방을 하여야 할 상징으로 여겼다.
그녀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하나의 시대적 트렌드이었고, 그때 가라오케는 아직은 보급이 되지 않았지만,
녹음기에는 거의 다 덩리쥔에 관한 노래 복제 테이프가 있었고, 덩리쥔은 인간 정신과 심령 해방의 하나의
창구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속에서 심령 속의 어느 부분의 부드러운 곳을 찾기 시작하였다.
面对如此盛景,邓丽君还玩笑地告诉记者,如果大陆真的邀请她过去,“我一定去大陆,我也很愿意把我的歌唱给大陆同胞听”。
台湾方面则确实担心被“冷冻”中的邓丽君到大陆,开始积极为邓丽君先前的风波平反。1980年由国民党文工会主任楚崧秋亲自赴美,
以盛大的排场邀请邓丽君回台演出,首先于10月间到金门义演,安排在“国父(孙中山)纪念馆”举办盛大义演,门票收入全部捐献。
이처럼 환영받은 모습을 보고서는 덩리쥔은 또한 웃으면서 기자에게 말을 하였다. 만일 대륙이 정말로 나를 오라고
초청한다면“나는 반드시 대륙으로 갈 거예요,나도 내 노래를 대륙의 동포들에게 들려주기를 대단히 바라고 있어요”。
대만 측에서는 움추려진 채로 덩리쥔이 대륙으로 가는 것이 정말로 염려되어서 적극적으로 덩리쥔을 위하여 먼저
풍파을 바로잡아 주기 시작하였다. 1980년 국민당 문공회 주임 楚崧秋이 친히 미국으로 가서 성대한 의전으로
덩리쥔을 대만으로 돌아와 공연을 하기를 요청하였다. 우선 10월에 진먼도에서 자선 공연을 하고 국부(손중산) 기념관에서
성대한 자선 공연을 개최하기로 안배를 하였고 입장권 수입은 모두 다 자선 기부하기로 하였다。
曾经担任蒋经国英文秘书和“新闻局长”的现任亲民党主席宋楚瑜,2001年忆起邓丽君时说,典知大陆有意邀邓丽君演唱时,
高层立刻派他与邓丽君联系,邓丽君也立刻允诺,并回请宋楚瑜夫妇,第二天宋楚瑜和夫人陈万水即共赴餐宴。
在高规格待遇之余,“假护照案”在台湾仍未结案,因为根据台湾的法律,这涉及伪造文书罪嫌,而且在遭市民董尚和提出告发后,
已由台北地检处侦办,此案拖了两年余。
이전에 장경국 영어 비서와 신문 국장을 담당하였던 현 친민당 주석인 宋楚瑜은 2001년 덩리쥔과을 회상하며 말을 하기를,
대륙이 덩리쥔을 초청하여 공연할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고위층은 곧바로 그에게 덩리쥔과 연락하도록 파견을 하였고,
덩리쥔도 곧바로 응락하였으며 아울러 宋楚瑜 부부를 답례로 초청하였다. 둘째 날 宋楚瑜과 부인 陳万水는 함께
식사 초대연으로 갔었다. 높은 품격의 대접 이외에“위조 여권 사건”은 대만에서는 아직도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는데,
대만의 법률에 의거하여서 이것은 문서위조 혐의와 연관된 것이고,게다가 시민 董尙和가 고발을 제기한 뒤라서
이미 대북의 지방 검찰에서 조사를 마친 뒤로 이 사건은 2년여가 지나가고 있었다。
一连串义演活动结束后,1981年初,“新闻局”特别颁奖给邓丽君:又邀请她与广播界第一把交椅的广播电台主持人李季准主持
“金钟奖”颁奖典礼:6月再安排她到金门及高雄举办《何日君再来》等义演晚会。感情丰富的邓丽君,第一次主持金钟奖时,
由于在台湾红透半边天的“月亮歌后”李佩菁脊椎病变开刀失败,只能坐着轮椅上台领奖,刹那间邓丽君止不住泪水,频频以手拭泪。
일련의 자선 공연이 끝난 뒤,1981년 초에 신문국은 덩리쥔에게 특별히 상을 수여하였는데:또 그녀에게 방송계의 최고의
라디오 방송국 사회자 李季准과 金鍾賞 시상식을 진행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6월에 다시 그녀에게 진먼과 까오슝에서
[何日君再來] 등의 자선 공연을 개최를 배려하였다. 감정이 풍부한 덩리쥔은 처음으로 金鍾賞 시상식을 진행하였는데
대만에서 여성 중에서 인기가 최고인“月亮歌后”인 李佩菁이 척추병으로 수술을 하였지만 실패하였기에 단지 휠체어에
앉아서 무대에서 시상을 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덩리쥔은 눈물이 멈추질 않아서 자주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很凑巧的是,1981年12月,检察官林天麟突然借口台湾“航警局”提供的资料,认为邓丽筠的犯行“堪予认定”,
但因“犯罪情节轻微”,且邓在美求学期间,仍多次返台演唱,只是“偶触法网,情有可原”,因此依职权予以“不起诉处分”。
种种集荣耀于一身的安排,又为假护照事件“平反”,在两岸关系紧张的时刻,台湾亟欲拉住邓丽君的意图十分明显。
离家年余,首度返台,邓丽君心里一阵激动,她在回台日记里,以简短的文字描述自己的五味杂陈的心情:
정말로 공교로운 것은 1981년 12월 검찰관 林天麟이 갑자기 대만의 航警局이 제공한 자료를 핑계로 덩리윈의 범행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지만“범죄 과정이 경미”하였고,덩리쥔이 미국에서 공부하던 기간에 여전히 여러 차례
대만으로 돌아와서 공연을 하였기에 단지“우연히 법망에 저촉되었기에 정상을 참작할 만하다”고 하였기에
직권으로“불기소처분”을 내렸다. 여러 영광스러움이 한몸에 몰리는 배려와 또 위조 여권 사건을“바르게 잡아”준 것은
양안 관계의 긴장의 시기에 대만이 덩리쥔을 급히 잡으려고 한 의도를 충분히 드러났다. 집을 떠나 몇 년이 지나서
처음으로 대만으로 돌아간 덩리쥔의 마음속에는 한바탕 격동이 있었는데,그녀는 대만으로 돌아와 쓴 일기에서
간결한 문장으로 자기의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심정을 그려냈다。
(第一天)走在拥挤的人群里,属于台北的那股特有气氛迎面而来,回头看着也提着行李的妈妈,一脸愉悦,看来似乎年轻了些。
冬暖下的台北,正张开双手欢迎我。随身的几箱衣服真是麻烦透了,这几年在国外演唱,什么苦都吃了,
但是出入境得带着大批行李仍是令人头疼的老问题。箱子里有一袋日本五角苹果,那是爸爸最喜欢的。
妈妈陪我经年累月在外头演唱,留他一个人在家,每次想到他,妈妈和我都牵肠挂肚的。好不容易找到假期,回台北看看家人,
替电视台录节目,三天后我又得收拾行囊,到马来西亚登台。要保持知名度,人非得付出相当代价,即使是付出青春。
첫째 날,
모여 있는 군중 속을 지나가며 대북의 저 특유한 분위기를 바라보며 가다가 돌아다 보니 역시 가방을 든 어머니가 보였는데,
얼굴에 기쁨이 하나 가득하여 보기에 마치 조금은 젊어진 듯하였다. 따스한 겨울의 대북은 마침 나를 두 손을 벌려 맞이하고 있었다.
몸에 지닌 몇 개의 의복 가방은 정말로 매우 귀찮었는데 이번 몇 년간 외국 공연에서 어떤 괴로움도 모두 다 맛을 보았지만,
출입국을 할 때 이런 커다란 짐을 휴대하여야 하는 것이 여전히 사람을 골치 아프게 하는 본래의 문제이었다.
짐 보따리에는 한 꾸러미의 일본 五角 사과가 들어 있었는데 이것은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오랜 세월 외국에서 공연을 하는 나를 돌보았기에,아버지를 홀로 집에 내버려 두었는데,
언제나 아버지를 생각하였다. 어머니와 나는 모두 다 마음이 걸렸다. 간신히 휴가를 만들어서 대북으로 돌아와 집안 식구를
만나 보고는 텔레비전을 위하여 프로그램을 녹화하고,3일 뒤에 나는 다시 짐을 꾸려서,말레이시아로 가서 무대에 올라야 하였다.
인기를 유지하기 하려고 사람은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설령 청춘을 지불하는 것이라 하여도…
(第二天)晚间全家人都聚在这家气派的餐厅里,爸妈坐在一块儿,感觉上我们又壮大了些,不再是飘落国外的艺人。
爸爸笑声不断,话题连连;哥哥和弟弟追问我在日本的生活。一家人这样融洽的相聚是多年来少有的。
(第三天)今天好愉快,见了好多老朋友,一家人走在路上都有许多人品头论足的。有个小女孩告诉我,她从小听我唱歌:
台北的男孩越来越时髦了,高跟鞋、中分发、皮夹克,好像越来越向日本年轻人看齐。欧阳菲菲在日本找到心爱对象,
许多人猜我也可能嫁个日本男孩,但我始终觉得日本男孩外在漂亮,但谈吐肤浅,不过婚姻的确是很微妙,我也不敢说。
둘째 날,
밤에 온 가족이 모두 다 집의 멋진 식당에 모였는데,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앉아 있었고 느끼기에 우리들은 좀 더 자랐고,
다시는 외국으로 떠도는 예술인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화제가 내내 이어졌다.
오빠와 동생이 일본에서의 생활을 내게 물어보았다. 한 가족이 이렇게 사이좋게 모인 것은 몇 년 동안 거의 없었다.
셋째 날,
오늘은 매우 유쾌하게 많은 오랜 친구들을 보게 되었고,온 가족이 길을 가다가 수많은 여자들의 용모를 평가하였는데,
한 소녀가 나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그 여자 아이는 어릴 적부터 내 노래를 들었다고 하였는데:
대북의 남자 아이는 점점 더 유행을 따라 하여서 하이힐,앞가르마 머리,가죽 재킷을 입어 마치 점점 더 일본의 젊은이를
본받는 것 같는 것 같다고 하였다. 歐陽菲菲는 일본에서 사랑하는 상대를 찾았기에,많은 사람들이 나도 일본 남자에게
시집을 갈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지만,나는 줄곳 일본 남자는 외모가 멋있다고 느낄 뿐,말투와 태도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결혼의 확실한 것은 너무나 미묘하기에 나도 감히 말할 수 없어요。
(第四天)回到“台视”老摄影棚感慨很深,想到十年前我怀着战战兢兢的心情在这里唱歌,“台视”像我的老家,
当时脑中只希望台湾的观众能接受我,但长大了之后野心更大,想学更多更好的歌唱表演,想要离开温暖的窝,
尝尝外头风雨的滋味,想要征服更多掌声。在日本的四年里我确实长大了……我深知要做一位令人回味的歌手,
不能只具有一张美丽的脸。回“台视”,从上到下对我的热情,让我想到群星会时代的小女孩。“华视”曾给我极好的条件,
但在和“台视”合约未满之前,我是绝对不会变动的,我深信影剧圈里应该是有道义的。
넷째 날,
대만 텔레비전 방송국의 세트장으로 돌아오니 매우 깊은 상념이 있었는데,10여 년 전 내가 전전긍긍하던 심정으로
이곳에서 노래하던 것이 생각이 났었다. 대만 텔레비전 방송국은 나의 고향 같아서 당시에는 마음속에 단지 대만의 팬들이
나를 받아 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성장한 뒤에는 야심도 더 커졌다. 더 많이 더 좋게 노래를 부르고,따스한 집을 떠나
바깥의 비바람의 맛을 보고,더 많은 박수를 받고자 생각하였다. 일본에서의 4년간 나는 확실히 성장을 하였는데…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돌아보게 하는 가수가 되는데는,단지 아름다운 얼굴 하나만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대만 텔레비전 방송국으로 돌아와서 나를 위부터 아래로 훑어보는 정열이 나로 하여금 群星會 시절의 작은 어린 여자아이를
생각나게 하였다. 중화 텔레비전 방송국은 전에 나에게 매우 좋은 조건을 제시하였지만 대만 텔레비전 방송국과의 계약이
아직 끝나기 전이었기에 절대 바꿀 수 없다고 하였다,나는 영화와 연극계에도 응당 도의가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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鄧麗君'떵리쥔_[無奈 무내 (鵜戸参り).普通话]☜어쩔 수 없어요,1985년。
该文章转载自:东方财富网博客,人物传记:一代歌后邓丽君 假护照风波。
[등려군노래목록'1250]☜내사랑 등려군
첫댓글 1981主持金鐘奬(三毛): 등려군은 시상식 사회를 보았는데 三毛(대만 소설가)도 일부분 함께했다..
1981金鐘奬(b4)
1981金鐘奬(c1)
1981金鐘奬(d1)
1980年10月04日 鄧麗君 國父紀念館慈善演唱會 (등려군 대만 국부기념관 자선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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鄧麗君 1981年 君在前哨特輯 (전방 초소에 있는 그대): 金門島訪勞軍 진먼도 군 위문공연 특집/ 台視(TTV: 대만 텔레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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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loveteresa/1DXh/534
鄧麗君1982香港伊利莎白体育館演唱會(1月9日~11日) 1982년 홍콩 엘리자베스체육관 공연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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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loveteresa/1DXh/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