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밤삘로프, < 오리 사냥>, 이주영옮김, 열린책들, 2003년
고맙게 내게 들어온 밤삘로프의 단편으로부터 밤삘로프의 희곡을 처음으로 접한다. 표면적으로보면 뭔가 가진 듯 보이지만, 내적으로 들어가보면 아무것도 없어, 이리저리 쉽게 휘둘리는 질로프를 통해 불안한 홀로의 현대인을 만나게 된다. 간혹 이런 질문을 나에게 던져본다. ' 나는 진정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 , 또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하는가 ? ' 이런 평소의 내 생각과 만나는 희곡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의식으로서의 장례식이 연출되는 작품이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할 불안한 개인인 질로프에게 친구들의 장난으로 보내진 장례화환에서 질로프는 가까운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회상을 통해 새롭게 시작하는 주인공이 보인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새로운 인물로 바뀐다는 교훈이 아닌, 그러한 질로프의 회상을 통해 독자(관객)에게 비슷한 처지를 마주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질로프는 어떤 인물인가? 죽고 죽이는 '오리 사냥' 은 그들에게 어떻게 활용되는가? 갈피 못잡는 어중간한 현대인의 모습인가? 이런 질문을 하게된다. 질로프라는 육체적인 건강한 서른의 건강한 남자가 머무는 집안에서의 하루인데, 그의 회상이 경쾌한 삶의 음악과 죽음과도 같은 장송곡이 번갈아가며 연극은 진행된다.
내용을 한번 간략하게 살펴본다. 질로프라는 인물이 침대에 누워있다. 그가 있는 정경을 살펴보면, 목에 리본을 메고 있는 고양이가 있고 집안은 어지렵혀져있다. 그는 지금 침대에 누어있는데, 그 옆에 전화가 있다.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가 온다. 받는다. 끊긴다. 장난 전화다. 그리고는 조문화환이 도착한다. 살아있는 질로프가 죽은 질로프에게 보내는 장례화환을 받는다. 이렇게 장난친 사람들의 존재로부터, 질로프의 주변 회상은 시작된다. 그 화환은, 어제밤 술자리에서의 광기에 대해서 친구들의 답례로서의 선물이다. 죽은 사람이라는 장난을 하는 친구들의 화환에서부터, 이제까지 그의 삶은 죽은 바나 다름없다고도 볼 수 있다. 장송곡이 들리며 과거의 회상으로 돌아간다. 그의 회상을 통해 그가 보여지는데, 그에게는 6년동안 함께 했던 아내 갈리나가 있었고, 어느날 그가 일하는 정보국에 자신이 어떤 남자를 속인 것이 아니라는 신문광고를 내기위해 찾아온 이리나와 연인사이가 된다. 아내는 그녀와 소통하지 않으려하고 단절당한 채 살고있는 그의 모습에 매번 실망하고, 좌절한다. 아이를 원치 않는 질로프를 통해 더이상 그녀와의 진실된 관계를 원치않는다는 단정에도 이른다.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운 그의 모습에서, 그녀는 어린시절 소꿉친구와 편지를 통해 마음을 얘기하고 있다. 드디어 아내는 이해하기 어려운 남편에게서 떠난다. 질로프의 인생에서 보이는 실패라 단정지을 수 있다. 이렇게 아내가 떠나자 한편으로는 믿을 수 없어하고, 한편으로는 아내를 붙잡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연인 이리나를 집으로 불러들이는,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질로프를 우린 어떻게 생각해야하나? 결혼의 실패와 연관하여, 결혼에서 보여지는 외도라는 불신의 대상으로 베라라는 인물이 있다. 질로프와 그의 직장 동료들을 모두 알릭이라 부르는 베라를 향해, 그 전날 술자리에서 모두의 연인이라는 모욕적인 발언을 하고, 이리나를 약혼자라 부르며, 꾸샤끄를 비롯한 남자들엑 아가씨가 필요해서 카페를 찾는 것 아니냐며, 격한 감정을 토로하다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파트다. 이렇게 집을 나간 아내에게서 비롯된, 결혼 생활 실패라는 직면해야하는 현실에서 질로프는 그와 함께 어울렸던 주변인물들을 싸잡아 몰아치며 모두를 모욕하는 상황이 그 전날 술자리에서 연출되었고, 오늘 죽은자에게 보낸다는 화환이 질로프에게 보내져왔다. 질로프는 이렇게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다, 진짜로 모든 것을 끝까지 헤치우고 말거라며, 죽음충동을 느낀다. 장례화환에서 시작한 한 개인의 거짓죽음이 실제로 죽음으로까지 진행되어지기 바로 직전, 희곡은 이제까지의 상황에서 벗어나 소통을 향한 결말이 보여지며 작품은 끝이 난다.
질로프에게 이렇듯 광분과 죽음충동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직장에서의 자그마한 실패가 있고, 아내가 그와의 단절된 관계에서 떠났고, 이리나와 관계 역시 미지수로 남아있고, 돌아가시전에 찾아와주기를 원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은 상황이다. 이렇게 그가 마주한 생에서의 실패의 지점이다. 이 모든 것이 갑자기 닥쳤고, 그는 그것을 지나간다. 물론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상황에 맞춘 적응이라는 생각, 거짓일지라도 또 시작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이렇듯 그의 변화를 진정 믿지는 않지만, 작품의 끝은 그렇게 끝난다.
질로프는 어떤 인물인가? 정보국에서 일을 하는 그에게 최종 관심은 무엇일까? 과연, 관심 있는 것이 있을까? 그란 사람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작가가 분명 존재할 그 시대적인 산물로 그려낸 이 질로프에게서 난 무엇을 보는가? 어느 누구와도 진실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불소통의 단절을 본다. 원인은 물론 타인이 아닌 그에게서 발행한다. 회상으로서의 그의 현재를 살펴본다. 자살하려는 질로프를 향해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무슨 일이냐고? 뭐가 불만이야? 뭐가 보족해서 그러는 거야? 젊고, 건강하고, 직장도 아파트도 있고, 여자들한테 인기 있고. 살면서 즐겨, 뭐가 필요해?(143쪽)' 라고 꾸샤꼬프의 말하듯 그는 지금 아내를 제외하고는 표면적으로는 갖춰진 형편이다. 그렇다면, 아내와 함께였던 때를 살펴본다. 그는 직장을 가지고 있다. 아내가 있다. 연인이 있다. 부모가 있다. 하지만 그가 진정 마음을 다해 살아가는 삶은 과연 무엇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아내가 있지만 아내와의 관계 만들기에도 소원하다. 다만 남편과 아내라는 표면적인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질로프가 있고, 질로프의 주변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질로프는 어쩌다 그렇게 관계속의 단절된 개인으로 됐는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과연 무엇으로 밤삘로프는 보는 것일까? 분명 과거 사랑했을 아내였는데, 분명 감정을 키웠을 이리나인데, 분명 아버지 앞에서의 아들인 질로프인데, 왜 모든 관계를 다만 관계만으로 규정한 채 그는 홀로 떠도는가? 그 서른의 나이에 아파트를 가졌고, 친구가 있고, 취미생활할 수 있는 시간이 있고, 아내가 있고, 연인이 있는 그에게 부족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진정 결핍된 것은 무엇일까? 뭔가 해보려는 의지다. 비록 위장일지라도 결말에 질로프는 의지를 가지고 전화를 건다.
아내와의 균열은 아내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할 아이를 갖기를 바라는 갈리나의 마음을 철저히 무시해버리는 태도와, 의미를 두지 않는 다른 여자와의 만남이다. 아내가 그토록 튼실한 가정을 이루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원하는 아이를 갖게 되자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이때 아내의 간절함에 대해 철저히 부숴버리는 질로프의 대사를 들어본다.
'무슨일이야? 만나자고? 지금? 그것은 불가능해......급한 일이 있어. 보고...... 모두들 휴가야......둘이서 여기 붙어 있어.....아냐, 아니라고.....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야? 당인한테 무슨 일 있어? ......아니, 당신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아니, 무슨 일이냐니까?......뭐?.....아이? 당신 확실한 거야?......정말 잘됐군. 축하해......아들이야. 확실해?......어떠냐고?......그럼, 기뻐. 그래 기쁘다고, 기뻐.......그래 당신은 어때? 춤추고 노래하고 싶어? 만나? 오늘 보자고......아이가 지금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뭐라고?......잠깐만! (수화기를 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그는 조금은 분개한다) 그래, 화가 많이 났군.(나간다)(66쪽)'
남편의 이러한 답변의 태도에 아내는 혼자 병원으로 간다. 어느날은 저녁에 들어왔어야할 남편이 아침에 들어오고, 남편의 당신은 나의 아내라는 말을 반복하자, 아내는 남편에게 청혼의 그날을 얘기한다. 하지만 옛날 그들의 사랑하고 결혼하려했던 시절의 회상에서 남편 질로프는 기억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둘이 결혼했고 지금 같은 공간인 아파트라는 곳에서 살고 있고, 어떤 행동을 해도 사랑하는 마음없이도, 배반을 해도 그들은 부부라는 사실만이 그들이 함께하는 이유다. 그리하여 이제 갈리나는 그들 관계의 단절을 깨닫고 그를 떠난다. 그녀가 질로프의 연인 이리나에게 말하듯, 난 질로프와 6년을 함께 살았어도 그를 이해할 수 가 없다며, 떠났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진짜 떠난다는 말을 하고, 다시 돌아오는 상황을 보여주며, 갈리나가 쉽게 결정한 사실이 아님을 알려준다.
사냥과 노리는 사냥감처럼 죽은 사람으로 취급당한 질로프를 통해, 오리 사냥에 대해
질문한다. '그들이 살아 있는 건 그럴 만한 사람들한테 그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미
죽은 거라고. (122쪽)' 이 문장을 통해서, 질로프가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친구들의
모습을 살핀다는 것은 장난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독자의 오해라 생각한다. 취미로서의 사냥과 죽이는 사냥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물망초라는
카페의 웨이터를 말을 듣는다. 오리 사냥에 있어서의 필수조건은 오리가 이미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이미 죽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냥을 하기전 전제조건은 '진정하고, 평안하게, 일정하게, 서두르지 않고.(121쪽)'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을 한번
들어본다.
'총 쏘는 건 빠르게, 하지만 또한 완전히 냉정하게....뭐라 할까.....그래, 그것들이 자연이 아니라, 그림 속에서 날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121쪽) '
이런 말을 통해 관계의 무의미성과 삶과 죽음의 밀접함을 잠시 말해준다. 살아있으나,
어떤 이에게는 이미 죽은 사람이 되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고, 인생 자체가 무엇을
얻고 취하며 죽이는 오리 사냥과도 같을 수 있다. 하지만 뭔가를 얻고 싶다면, 흥분해서는 안되고,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접근해야만 가능하다는, 생동하는 삶의 어려움도
역시 얘기한다. 그리하여 질로프는 광분의 지금을 지나, 이제는 총을 스스로 거두고
친구에게 전화를 하는 상황까지 나아간다. 이때 작품의 이중적 의미찾기가 될 그의 표정에 대한 표현을 만난다.
'전화 벨소리가 다시 울린다. 그는 미동도 없이 누워 있다. 벨소리가 그친다. 그가 일어서자 그의 침착한 얼굴이 보인다. 그가 울었는지 웃었는지 얼굴을 봐서는 알 수 없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건다. 그는 침착하고 사무적이며, 활기있는 목소리로 말한다.(149쪽) '
이렇게 '울었는지, 웃었는지 모를 표정' 이것이 바로 질로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가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오리사냥의 의미도 역시 침착한 오리 사냥인지, 아니면 냉정한 오리 사냥인지로 생각이 나눠진다. 답을 찾는 독자의 맘에 따라 겉으로 웃는 질로프를 각인 시킬수도 있고, 인생이란 다 실패라고 말하는 꼬자꼬프의 소리를 기억한 채 질로프의 활기찬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결혼과 사회안에서 서로 이해되고 소통되지 못하는 불안한 현대인의 모습으로 질로프를 그려내고 있다. 관계 맺을 수 없다는 단정 아래,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정작 관계의 단절을 마주하게 되자, 광분하여 인간을 향한 겨냥과 자살충동이 있었다. 이렇게 그럴만한 사람들한테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오리 사냥의 원칙을 적용시켜, 이미 죽은 질로프로 만들어버리는 친구들의 장난을 통해서 오리 사냥만이 아닌 인간 사냥이 될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결말는 친구들을 향해 사냥총을 정면 겨냥해보지만, 결국 다시 평정을 찾고 오리 사냥을 떠나자는 결론으로 끝이 난다. 이는 곧 카페 물망초에서의 웨이터와의 대화를 통해 보여졌던, 사냥감을 보고 미리 흥분했던 이제까지의 그가 있었다면, 이제 사냥은 취미가 될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이 진정 그의 진면목인가는 우린 알 수 없다.
이 작품을 통해 가장 다가오는 내용은 바로 갈길을 잃은 불안한 현대인의 단절이다. 밤삘로프는 그 단절을 얘기하는데 소통의 도구인 전화기를 이용한다. 전화기에 대한 갈리나의 말을 들어본다.
'난 전화가 싫어요. 당신과 전화로 이야기할 때면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34쪽)'
처음 보여지는 정경도 전화기를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고, 시작도 전화벨 소리로 시작한다. 그리고 끝 장면도 역시 전화기를 통해 질로프가 친구에게 얘기하고 있다. 이렇게 이 작품은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질로프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질로프가 회상하고, 그리고 다시 전화기를 통해 진심인지, 거짓인지 모를 질로프의 오리 사냥을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면서 작품은 끝난다. 그 말을 하는 질로프는 살펴본다.
'지마? 나, 질로프야. 그래......미안해, 친구, 내가 너무 흥분했어. 그래, 맞아......완전히 안정을 되찾았다고......그래, 사냥 가고 싶어서......갈 거지? 좋아......난 준비됐어.....그래, 지금 나갈게.(149쪽)'
이렇게 이 작품은 실패를 지나 다시 시작이라는 희망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실패가
될 인생과 실패인 인생을 다시 활기차게 살아갈 중간자적인 인간의 모습이 보여지는
좋은 작품이다. 장례행렬 전 꾸자꼬프의 말과, 나중 자살을 시도하는 질로프에 대한
꾸자꼬프의 두가지 말이 모두 기억에 남는 작품이기에 옮기며 끝낸다.
'누가 알아...... 잘 생각해보면, 본질적으로 인생이란 실패한 거라고.....(138쪽)'
'정신차려, 네 죽음이 누구한테 필요하다고 그래, 잘 생각해 봐. 재한테?......나한테?......너한테도 필요없어. 네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르게 살아보는 것도 좋잖아, 누가 널 방해해?.....자신을 심판하지도, 다른 사람들을 추악하게 생각하지도 마.(14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