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기자, 미혼모 시설에서 3일간 함께 생활해보니…“
아기 외면한 남친과 결혼생각 없어…기저귀 사고 나면 용돈 바닥
우리 사회에서 미혼모는 ‘실수한 엄마’로 낙인 찍힌다. 미혼모 2만6000명 시대. 지난해 미혼모의 31.5%가 입양이 아닌 양육을 선택했다. ‘책임 지는 엄마들’이 해마다 늘고 있는 것. 그러나 여전히 차가운 주위의 시선을 감당해야만 하는데…. 미혼모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젊은 엄마들과 함께한 3일.
# 1. 두 번째 아이 낳은 25살 미혼모 수아 씨
정수아(가명) 씨가 칭얼거리는 아들 현준이(가명)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친다. 생후 한 달 남짓 된 아기의 입이 손가락을 따라 움직인다. 배가 고프다는 뜻이다.
수아 씨는 얼른 윗옷을 걷어 현준이에게 젖을 물린다. 아기의 작은 입이 세차게 움직인다. 그녀의 배에는 아직도 보랏빛 임신선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원래 순해서 잘 울지도 않는데 오늘은 주사를 맞아서 힘든가 봐요.”
8월 3일 오전, 현준이는 보건소에서 B형 간염 예방접종을 하고 왔다. 아직 부기가 덜 빠진 초보 엄마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수아 씨는 7월 초 현준이를 낳았다. 스물 다섯, 아직은 이른 나이에 벌써 둘째 아이를 얻었다. 재작년 임신 7개월 만에 태어난 첫째 아이는 건강이 좋지 않아 낳자마자 입양을 보냈다. 그 후 두 번째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올해 4월. 이미 임신 25주째였다. 수아씨는 입양 보낸 첫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곧바로 양육결정을 내렸지만 아기 아빠인 당시 남자친구에게는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첫째를 가졌을 때 남자친구에게 처음으로 들은 말이 ‘지우자’였어요. 둘째 아이는 그런 말을 듣게 하기 싫었어요.”188미혼모-첫째 아이 때처럼 지우라고 할까봐 끝까지 임신 사실을 숨긴 수아 씨. 하지만 그래도 아기 아빠라는 생각에 현준이를 낳고 나서 출산 소식을 알렸다고 한다. 그때 돌아온 남자친구의 무관심한 태도는 수아 씨를 또 한 번 힘들게 했다.
“현준이 낳았다고 했는데도 관심 없다는 태도였어요. 아기에 대해 전혀 묻지도 않는데 제가 뭐라 더 할 말이 없더라고요. 노느라 바쁜가 보죠.”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때 받은 상처를 짐작하게 했다. 동갑내기 남자친구의 무책임한 태도에 부모님도 할
말을 잃으셨다. 부모님은 마지막까지 수아 씨에게 입양을 권했다. 그러나 첫째를 입양 보낸 후 힘들어하던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아는 터라 더는 강요하지 못했다고 한다.현준이가 태어난 지 보름이 지나고 나서 수아 씨는 출산 후 처음으로 부모님 댁을 찾았다.
끝까지 양육 결정을 탐탁지 않아 하시던 부모님도 손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셨단다. 그래도 수아 씨는 앞으로 부모님과 함께 살 계획은 없다고 했다. 부모님께서 함께 키워주실 형편도 안 되지만 무엇보다 부모님까지 손가락질을 받을까 두려워서다. 평소 왕래가 잦은 친척들에게조차 아직 현준이의 존재를 알리지 못했다. 잠깐 부모님 집에 머물렀을 때도 현준이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이웃들이 웬 아기 울음 소리냐며 부모님을 다그쳤지만 결국 아무 말씀도 못하셨단다.
수아 씨는 7월 말부터 부산 남구 대연동에 위치한 미혼모자공동생활가정인 ‘희망샘(대한사회복지회 운영)’에서 살게 된 ‘새내기 입주자’다. 그 전에는 걸어서 10분 거리의 미혼모자시설인 ‘사랑샘’에 넉 달간 머물며 현준이를 낳았고, 최근에야 이곳 희망샘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희망샘에 살고 있는 엄마들은 대부분 사랑샘 출신으로 모두 양육을 선택해 미혼모자공동생활가정으로 왔다.
미혼모를 위한 복지시설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미혼인 여성이 출산 전부터 출산 후 6개월 미만까지 머물 수 있는 곳이 미혼모자시설이고, 그 후 입양을 보내지 않고 양육을 선택한 미혼모가 살 수 있는 곳이 미혼모자공동생활가정이다. 이러한 미혼모 시설은 전국에 모두 56개(2009년 현재)가 있으며 이를 이용하는 미혼모 수는 3000여 명 정도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추산한 전체 미혼모 인구 2만6000여 명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다.
수아 씨처럼 입양 대신 양육을 택하는 미혼모가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다. 7월에 국회 입법조사처 보건복지여성팀에서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2005년도에 전체 미혼모의 19.4%에 불과했던 양육 미혼모가 2009년 말 현재 31.5%로 늘었다. 또 수아 씨처럼 미혼모가 두 번 이상 임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2월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혼모 중 43.6%가 평균 2회 이상 임신을 경험했고, 28.6%는 출산 경험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수아 언니, 나와서 밥 먹어요.”거실에서 최지은(가명·20) 씨가 수아 씨를 부른다. 시계가 낮 1시를 가리킨다. 희망샘에는 수아 씨를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의 미혼모가 아기들과 함께 살고 있다. 아기들이 모두 남자아이여서 사회복지사들에게 ‘아들 부잣
집’으로 불린다. 희망샘 엄마들은 한 달씩 돌아가며 청소·빨래와 같은 집안일을 분담한다. 지은 씨는 이 달 식사당번이다. 1년 전 처음 시설에 들어왔을 땐 요리를 전혀 못했다는 지은 씨가 점심 메뉴로 내놓은 것은 순두부찌개. 맛있는 냄새가 거실을 가득 메운다. 식단은 복지사의 도움을 받아 미리 한 달치를 짜 놓는다. 산후 조리를 하는 아기 엄마들이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하기때문이다. 출산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수아 씨는 다른 엄마들의 배려로 아직 당번을 맡지 않았다. 그래도 모유수유를 하는 탓에 현준이와 밥때가 겹치면 다른 엄마들이 다 먹고 난 뒤에 혼자 밥을 먹기 일쑤다.
점심 상을 차려 놓은 거실 바닥에는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알록달록한 매트가 깔려 있다. 엄마와 아기들은 주로 이 매트 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매트 주변으로는 아이들이 함께 타는 서너 종류의 보행기와 자동차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이 집에 있는 아기 중 최고령자라고 해봐야 돌을 앞둔 민성이(가명·24개월)가 유일한데 벽에는 벌써부터 한글 배우기 그림이 붙어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만화 <방귀대장 뿡뿡이> 비디오가 연속으로 흘러나오고, 바닥에는 군데군데 우유 흘린 자국이 보이는 것이 여느 아이 있는 가정집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4개의 방에 나눠서 엄마 다섯과 아기 다섯, 그리고 담당 복지사가 산다는 점이 다른 가정과 조금 다를 뿐이다.
“같이 있으면 덜 외롭고 의지가 돼서 좋아요. 아기 키우면서 모르는 게 있으면 다른 엄마들한테 물어볼 수도 있고.”
수아 씨가 현준이 옷을 갈아 입히며 말한다. 임신 중 아기를 생각하며 손수 만든 배냇저고리란다.
“아들, 조금만 더 크면 엄마가 예쁜 옷 많이 사 줄게.”
아직 옷이 몇 벌 없는 아기에게 미안한지 현준이에게 볼을 비비며 수아 씨가 속삭인다. 옆에서 5개월 된 자신의 아기와 놀고 있던 또 다른 미혼모 이혜미(가명·21) 씨가“우리 애가 입던 거 입으면 되지 뭘 또 사게. 원래 물려 받는 옷 입으면 더 빨리 큰다더라”며 통 크게 ‘기증 서약’을 한다.
#2. 한 달 용돈 30만원, 분유·기저귀 값으로 올인
현준이가 꼬까옷으로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마치자 세엄마가 오랜만에 동네 나들이에 나선다. 나들이라고 해봐야 5분 거리에 있는 시장을 둘러 보는 게 전부지만 평소 아기 때문에 외출이 힘든 엄마들은 신이 난 눈치다.
지은 씨와 혜미 씨는 마당에서 유모차를 재정비하고 있다. 짧은 여정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금 데운 우유가 든 젖병과 기저귀 몇 개도 가방 안에 챙겨 넣는다. 수아 씨는 아직 목을 못 가누는 현준이를 포대기에 싸서 조심스레 안는다. 유모차 두 대와 엄마 셋이 나란히 서니 가뜩이나 좁은 골목길이 더 좁아 보인다.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아기들은 금세 인기 스타가 됐다.
“아이고, 얼라(아기)들이 와 이리 많노.”
할머니들은 유모차에 타고 있는 아기들을 만지고 싶어 안달이 났다. 아기들도 인기를 실감하는지 낯 한번 가리지 않고 연신 방글거린다. 수십 명 팬의 인파를 뚫고 엄마들이 향한 곳은 신발 가게. 고무 재질로 된 싸구려 샌들을 여름 내내 신던 수아 씨가 오늘은 큰 마음을 먹었다. 굽이 8cm는 될 법한 아찔한 샌들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정작 수아 씨가 집어 든 것은 굽이 낮은 수수한 단화다. 신발은 사방이 막힌 디자인이라 여름용으로는 좀 더워 보인다.
“이건 가을에도 신을 수 있겠제?”
그녀가 큰 소리로 다른 엄마들의 동의를 구한다. 여름·가을을 넘어 아예 사계절 내내 신을 수 있는 신발을 고르고 싶은 눈치다. 언니들이 신발을 고르는 동안 하이힐을 신어보던 지은 씨도 한마디 한다.
“예쁘긴 한데, 이거 신고 어디 가겠노.”
수아 씨도 몇 번 고민한 끝에 결국 무난한 단화를 샀다. 평소 수아 씨가 가장 좋아한다는 분홍색이다. 새 신을 신은 수아 씨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워 보인다. 그 발걸음이 닿은 다음 목적지는 동네에서 제법 큰 규모의 마트.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세 엄마가 약속이나 한 듯아기용품 코너로 몰려간다. 수아 씨는 아기용 로션이 없어서 현준이 얼굴이 다 텄다며 로션을 고른다.
‘1+1 행사’를 하는 두 개들이 아기로션 가격은 2만2000원이다. 7월 말 시설에서 받은 아기 기저귀도 몇 개 남지 않았다.장바구니에 60개 들이 소형 기저귀를 더하자 지출이 벌써 4만원을 훌쩍 넘는다. 이제 계산대로 가려는데 혜미씨가 평소 좋아한다는 과자를 들었다 도로 놓는다. 2000원짜리 과자다.
희망샘에 사는 엄마들이 한 달 동안 쓸 수 있는 돈은 시설에서 주는 개인 용돈 30만원이 전부다. 시설마다 차이는 있지만 희망샘의 경우 시설에서 정기적으로 주는 지원은 식비와 주거비뿐이다. 입소 후 처음 한 번은 아기용품과 분유·기저귀 등이 지원되지만 그 다음부터는 엄마들이 30만원 안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금방 산 60개들이 기저귀도 일주일을 채 못 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30만원은 온전히 아기 몫으로 돌아가 정작 엄마는 한 달에 3만~4만원 하는 휴대전화 요금도 부담스럽다. 통화료가 아까워 몇 달간 전화를 받기만 하고 걸지 않으니 통신사에서 항의 전화가 오기도 했단다.
“아까 신발 산 것도 진짜 큰 돈 쓴 거예요. 어지간하면 내 건 안 사요.”
한창 멋 부리기 좋아할 스물다섯 살. 그러나 현준이 엄마는 별 일 아니란 듯 아기를 고쳐 안는다. 날씨가 너무 더워 다른 엄마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지만 수아 씨는 아직도 할 일이 남았다. 통장을 만들기 위해 은행에 들러야 하기 때문이다.
벌써 오후 3시가 넘은 시각, 수아 씨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새 통장은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위한 것이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면 한 달에 일정금액을 추가로 지원받을 수 있다. 시설에 있는 미혼모들은 이미 시설 측에서 지원을 받기 때문에 지원금액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기 의료비가 거의 다 지원된다는 점에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은 미혼모의 필수코스다. 수아 씨도 지금 그 필수코스의 첫 단계를 밟는 셈이다. 삼복 더위에도 산후조리 때문에 긴 옷을 입고 있던 수아 씨는 시원한 은행에 들어오니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표정이다. 은행 직원에게 신분증을 내미니 돌아오는 한마디.
“아기 엄마가 아직 어리네.”
은행 직원이 현준이 얼굴과 수아 씨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한다. 수아 씨는 이미 익숙해진 듯하다.
“임신해서 배가 남산만 했을 때도 저는 당당했어요. 내가 미혼모라고 의식하면 현준이도 그럴 것 같아서요. 부끄러운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평소에는 가늘기만 하던 그녀의 목소리에 어느 때보다 힘이 실려 있다. 미혼모라고 사람들이 수군대도 수아 씨는 “지금으로선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예전 남자친구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 깊은 듯했다. 현준이에게는 조금 더 커서 말을 알아듣게 될 때면 ‘아빠가없다’는 사실을 알려줄 생각이다. 수아 씨는 현준이가 커서 이런 자신의 결정을 이해해주기를 바랄 뿐이란다.
#3. 미혼모는 ‘알바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
은행 볼 일까지 마치고 오후 4시가 넘어 집에 돌아오니 지은 씨와 혜미 씨는 아기들을 옆에 눕혀 놓고 전화 통화삼매경에 빠져 있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시설 지원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많다 보니 대부분의 미혼모는 일자리가 절실하다. 이런 사정은 이제 겨우 몸을 푼 지은 씨와 혜미 씨도 마찬가지다. 산후 후유증으로 손목이 시큰거린다는 두 사람이지만 막상 일을 구할때는 식당에서 구하는 서빙 아르바이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은 매일같이 인터넷을 뒤지며 할 만하다 싶은 아르바이트 자리가 보이면 주저 없이 전화를 건다.
“당구장 알바 구하는데 왜 대졸이고?”
좀 전까지 전화로 당구장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던 혜미 씨가 지친 듯 드러누우면서 말한다. 고등학교까지 마친 혜미 씨에게 일자리에서 내건 대졸 자격은 또 다른 벽인 듯했다. 두 엄마가 찾는 일자리 조건은 간단하다.
시설에서 멀지 않을 것, 근무시간이 시설 통금시간인 오후 10시 이내일 것 등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아직 이 조건을 업주에게 제시해본 적이 없다.
사실 지은 씨는 어제 면접까지 잘 보고 온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었다. 채용이 거의 확실시돼 오늘 아침에 주민등록등본을 떼서 다시 갔더니 이미 다른 사람을 구했단다. 지은 씨는 다 잡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또다시 놓쳤다. 기초생활수급자인 미혼모의 주민등록등본에 나오는 가족이라고는 엄마와 아기가 전부다. 미혼모라는 사실은 채용 전부터 자연스레 밝혀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정식 취업으로 가면 상황은 더 힘들어진다. 1년 전 희망샘이 개원할 당시부터 살고 있는 최고참 엄마 김선미(가명·41) 씨는 3~6월까지 정부지원을 받아 전문학원에서 세공기술을 익혔다. 아직 기술력이 부족하긴 해도 간단한 귀금속 수리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그러나 학원 수료 후 두 달이 넘도록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선미 씨 말이 귀금속 가게는 고가의 현금 거래를 하는 터라 어지간히 신뢰가 가지 않고서는 잘 써주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가게 주인들은 혹시라도 선미 씨가나쁜 마음을 먹고 귀금속을 훔치면 보증해줄 가족이 없어서 안 되겠단 말만 반복했단다.
“시설 안에만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밖에 나가니까 내능력을 보기 전에 미혼모로만 보더라고요. 면접 보러 다니면서 상처도 많이 받았어요.” 취업시장에 나선 지 이제 한 달째. 선미 씨는 세상에 나서자마자 미혼모의 벽을 새삼 실감했다. 실력을 더 쌓으면 미혼모라는 이유만으로 취업 거부를 당하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으로 선미 씨는 앞으로 보석 감정 같은 연계교육을 더 받을 계획이다.
이처럼 성년인 20대 이상 미혼모라 해도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다. 출산 전 직장생활을 하던 사람이라도 출산 후 다시 원래 직장으로 돌아가는 일은 거의 없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원 직장으로 복귀한 양육 미혼모 수는 고작 8.8%에 불과했다. 권혜란 희망샘 원장은 “대부분의 미혼모가 친척·지인 등에게 자신이 미혼모가 된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혼자 아기를 키우며 지속할 수 있는 직업도 그리 많지 않다”고 말했다.
#4. 잠든 아기 얼굴 보며 희망을 꿈꾸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집에 돌아온 현준이는 첫 동네 나들이에 지쳤는지 파란 포대기 안에서 잠이 들었다. 수아 씨도 힘들기는 마찬가지. 푹 찌는 날씨에 입고 나간 긴팔 옷은 등이 흠뻑 젖었다. 샤워를 마치고 반팔 옷으로 갈아 입은 수아 씨를 보자마자 지은 씨가 한마디 한다.
“언니, 나중에 내처럼 손목 시리고 싶어서 그러나?”
매일같이 손목이 시큰거린다는 스무 살 선배 엄마의 말을 들은 수아 씨는 하는 수 없이 긴 옷을 덧입는다.
수아 씨의 꿈은 퇴소 후 조그만 네일아트 가게를 차리는 것이다. 근무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워 현준이를 보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 대학 때 피부미용을 전공하며 네일아트 자격증도 따놨다.
수아 씨는 산후조리 때문에 당분간은 취업이 힘들겠지만 시설에 머물 수 있는 3년 안에 취업해 자립금을 마련하는 게 목표다. 현재 희망샘과 같은 미혼모자공동생활가정은 2년을 기본으로 최장 3년까지 살 수 있다. 그러나 산후조리 후 취업교육과 구직활동에 드는 시간까지 합하면 취업까지 남은 3년은 그리 넉넉한 시간이 아닌 듯했다.
희망샘을 나온 후 무주택 저소득 미혼모자 가족을 위한 모자보호시설(연립주택 형태, 최장 5년 거주 가능)에 들어가는 방법도 있지만 그곳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워낙 대기자가 많아서다. 8월 초, 서울에서 만난한 미혼모(29)는 “최소 1년 전에는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어야 2년 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들었다”면서 자신은 “아직도 순번이 한참 멀었다”고 말했다.
미혼모가 시설에 머무는 2~3년 동안 자립하지 못하고 또 다른 시설을 전전하는 데는 주거비용 문제가 가장 크다고 한다. 취업하기도 힘들지만 그나마 버는 돈이 있어도 아기 양육비에 쏟아붓다 보니 전·월세금 마련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 그래서 주거비 지원은 양육 미혼모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다.
복지선진국인 스웨덴의 경우 이런 제도가 활성화돼 있다. 미혼모의 소득에 따라 매달 일정금(2004년 기준 최대 월43만원)의 주거수당을 지급하고, 또 국가로부터 주거비를 무보증으로 대출받을 수 있는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우라나라에도 ‘자립적립금’ 제도란 것이 있다. 일종의 주택보증금 보조 지원책으로 보호시설에서 퇴소하는 미혼모의 자립을 돕기 위해 서울·경기도 등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해준다. 지원금액은 200만~400만원 남짓. 하지만 전문가들은 금액이 너무 적은 데다 지급 조건이 까다로워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입을 모은다.
수아 씨가 곤히 잠든 아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창문 밖도 어느 새 어둑어둑해졌다. 그녀의 눈에도 잠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그러나 아기 옆에 눕는 대신 서랍장에서 작은 노트를 하나 꺼낸다. 임신 6개월부터 쓴 육아일기다. 첫 장엔 ‘쭈니’라는 현준이의 태명이 하트와 함께 그려져 있다.
“병원에서 처음 초음파로 본 날부터 매일 썼어요. 오늘은 예방접종 할 때 많이 울었다고 쓰려고요.”
일기장에 붙어 있는 초음파 사진 속 모습보다 지금의 현준이는 몇 배로 더 컸다.
“요즘은 현준이가 목을 가누려고 힘을 주는 바람에 오래 안고 있기도 힘들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한 손으로 아기를 안고, 한손으로는 펜을 든 엉거주춤한 자세를 용케 유지하며 일기를 쓴다. 매일 밤 잠든 현준이 곁에서 꾹꾹 눌러쓴 수아 씨의 육아일기는 앞으로도 부지런히 채워져 나갈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