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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바이올린
천상의 바이올린 ▣ 저자 진창현 1929년, 경상북도 김천시 이천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시절을 거치면서,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을 하면서 메이지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취직자리를 얻지 못해 전전하다 독학으로 바이올린 제작에 매달려 기술을 익혔다. 197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국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6개 부문 중 바이올린 세공, 비올라 세공과 음향, 첼로 세공과 음향 부문 5개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전 세계 다섯 명밖에 없는‘무감사 마스터메이커 제작자’중 한 명으로, 동양의 스트라디바리 우스를 제작하는 바이올린 제작의 제일인자이다. ▣ 역자 이정환 경기도 청평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경영학과와 인터컬트 일본어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 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대체의학으로 모든 병을 고친다』, 『얼굴 보고 사람을 아는 법』 등이 있고, 역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인간경영』,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세계 지도로 역사를 읽는다』, 『스푸트니크의 연인』, 『준비된 행운』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일류 바이올리니스트가 가지고 있는 바이올린의 명기이다. 하지만 스트라디바리는 자신의 기술을 아들에게조차도 전수하지 않은 채 죽었다. 그래서 어떻게 저런 악기가 태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가 죽은 후, 수많은 과학자나 기술자들이 연구를 거듭했지만 밝혀진 게 없다고 한다. 하나의 예로 표면의 색깔조차도 니스에 무엇을 첨가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일본 도쿄에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라 불리는 바이올린 장인이 있다. 세계에 다섯 명밖에 없는 ‘무감사 마스터메이커’라는 최고의 명예를 얻은 일흔여덟 살의 재일 한국인 진창현이 바로 그 장인이다. 1976년,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국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6개 부문 중, 바이올린 세공, 비올라 세공과 음향, 첼로 세공과 음향 5개 부문에서 수상자로 선정되어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책은 스트라디바리우스에 푹 빠진 한국인 바이올린 장인의 꿈과 꺾이지 않는 집념의 이야기 이다. 이 책에는 아들에게 영어 참고서 한 권을 사주기 위해 남편에게 쫓겨날 각오를 하고 몰래 쌀 한 가마를 빼돌려 소달구지에 실어 보낸 어머니의 이야기, 피눈물 나는 독학 끝에 한 대에 3천 엔을 받고 팔았던 초창기의 바이올린으로 도쿄예대에 합격한 학생의 이야기 등, 잔잔하면서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는 자신의 이야기에서 한국 전쟁의 와중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던 누이동생의 가슴 아픈 이야기, 꿈에도 그리던 조국 땅을 밟자마자 중앙정보부 조사실로 끌려가 고초부터 겪어야 했던 이야기 등 상처 가득한 우리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주는 시대의 이야기들까지 담겨 있다. ▣ 차례 프롤로그 제1현 내 고향, 이천(利川), 아버지 진재기(陳在基)와 어머니 천대선(千大善) 여행 바이올린과의 만남 어린 바이올리니스트 생이별 구라마 덴구의 나라 특공대 전투기와 바이올린 안녕, 미스터 달러 북에서 찾아온 아들 인민재판 제2현 바이올린을 만드는 농부 애벌레와 반딧불이 위험천만한 노동 여동생의 편지 지상의 낙원 로망스 제3현 바이올린 장수 집에 부착한 약음기(弱音器) 영원한 수수께끼 결혼이라는 감옥 제4현 염력 아줌마 바이올린을 먹는 남자 어머니와의 재회 잃어버린 세계 하늘을 나는 바이올린 무지개 하늘을 향해 에필로그 제1현 바이올린과의 만남 내가 여섯 살 때의 이야기다. 집 밖에서 묘한, 하지만 매력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저 사람 뭐야?” “저 사람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이야.” 나는 밖으로 나가 아이들과 함께 음악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사실, 그 남자는 약을 파는 행상이었다. 초등학교 2, 3학년이 되어서도 바이올린의 음색이 들려 오면 나는 즉시 집을 뛰쳐나갔다. 아마 지금 듣는다면 한심한 연주였을 테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소리보다는 감동이 더 선명하게 남는다. 이것이 나와 바이올린의 첫사랑 같은 만남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바이올린과의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우리 집에 학교 선생님이 하숙생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이카와 선생님은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만져본 것이 그때였다. 이번에는 귀와의 만남뿐 아니라 손가락과의 만남도 이루어진 것이었다. 어린 바이올리니스트 바이올린을 켜는 것은커녕 악기를 구입하거나 만져볼 수조차 없던 가난한 내게 선생님이 바이올린을 익숙한 악기로 만들어준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이다. 선생님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내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나는 하루하루가 천국 같은 기분이었다. 아이카와 선생님에게는 두 곡만을 배웠다. 역시 아이는 기억력이 빠른 것인지, 아니면 열심히 연습한 덕분인지 내 실력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비록 두 곡밖에 연주할 수 없었지만 나는 이미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듯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나는 김천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에 진학하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이미 우리 집에는 나를 학교에 계속 보낼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결국 나는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에게 일본으로 건너가겠다는 결심을 털어놓자 어머니는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엄마,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돌아올게요.” 구라마 덴구의 나라 항구에 도착하자 형의 모습이 보였다. 하숙집에 도착해서 형에게 건넨 것은 한 개를 남겨둔 어머니의 주먹밥이었다. 형은 정말 맛있게 먹었다. 나는 형의 배려로 야간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기대에 부풀어 건너온 일본. 그러나 학창 생활은 참혹했다. 일을 해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수업을 빼먹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였다. 일본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종전 후의 혼란스런 시대에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대학에 다니겠다는 꿈을 꾸면서 나는 중학 시절부터 일을 하고 있었다. 종전 후, 조선인들 대부분은 조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자력으로 하카다에 남았다. 친구를 통해 하야카와에서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서둘러 하야카와로 향했고 일을 얻는 데 성공했다. 현장으로 향하자 진주군인 흑인들이 불도저 두 대를 가져와 작업하고 있었다. 나는 엉성한 영어 실력으로 불도저를 운전하는 미군 병사의 통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공사 현장의 인부 한 명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너, 영어를 꽤 잘한다. 요코하마 로 가서 린타쿠를 몰아. 그게 돈벌이가 되는 거야. 영어를 조금만 하면 일할 수 있어.” 나는 요코하마로 떠날 결심을 굳혔다. 린타쿠는 자전거를 이용한 인력거 같은 것으로 요즘으로 치면 택시다. 린타쿠를 운전하는 동료들 중에서도 나는 특히 친절하게 통역해 주었기 때문에 미군 병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덕분에 돈도 많이 모을 수 있었다. 린타쿠를 모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찾고 있던 시기에, 역시 동료가 이런 말을 들려 주었다. “너, 대학에 들어가라. 이런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안 돼.” 그도 조선인이고 대학생 이었다. 그래서 나는 메이지 대학 2부 영문과에 입학했다. 언젠가 대학을 졸업하면 조국으로 돌아가 모교의 영어선생님이 되겠다는 희망이 가슴속에 끓고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내 인생을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한다. 선생님이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꿈도, 그림에 대한 흥미도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날려버린, 내 운명을 좌우하는 거대한 사건 이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아이카와 선생님에게 배운 바이올린.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존재가 갑자기 거대한 모습으로 떠올라 내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특공대 전투기와 바이올린 오전 수업을 마치고 구내식당으로 가기 위해 메이지기념관 강당 앞을 지날 때였다. 강당 앞에, ‘바이올린의 신비’라는 커다란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강사는 이토카와 히데오 교수라고 써 있었다. 이토카와 교수는 특공대 전투기의 설계자로, 바이올린과는 인연이 전혀 없는 인물인데 그런 인물이 왜 바이올린을 주제로 강의를 하는 것일까? 나는 거기에 흥미를 느꼈고, 또 신비감을 느꼈다. 그날, 이토카와 교수의 강연은 물리학적인 입장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는 주로 어떤 파장으로 성립되는가 하는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를 해명하는 것은 영원한 수수께끼이고 신비이며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현대 사회에 이것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내 귀에는 이 ‘불가능’이라는 말이 매우 자극적으로 들렸다.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쳐들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없다면 제작은 할 수 있지 않은가. 바이올린 연주는 스무 살을 넘은 뒤부터 본격적으로 배웠지만 실력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그러나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것이라면 가능하다. 인생을 걸고 착수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후회도 하지 않는다. 하늘의 계시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결심인지, 바이올린 제작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고통스런 길인지, 당시 나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제2현 바이올린을 만드는 농부 나는 1956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시모쿠라 악기점을 드나들며 도쿄에 있는 몇 명의 바이올린 기술자를 소개받아 제자로 받아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일손이 남아돈다거나 내가 조선인이라는 이유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런 일이 계속 이어지자 의욕도 점차 잃어 갔다. 나는 직장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르바이 트로 파친코 가게에서 일해 보았지만, 나는 바이올린의 음색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바이올린을 만들어야 해. 그날의 강연, 그 감동을 도저히 잊을 수 없어.’ 나는 나 자신을 고무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기사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기사에 의하면 나가노현 나카노 시에서 농사를 지으며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는 농부가 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드라마틱한 내용이었다. 전쟁 중에 그는 유태계 러시아인의 집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러시아 황제의 궁전에서 사용되었던 바이올린)를 보았고, 그 집을 계속 방문하여 바이올린에 종이를 대고 그 형태를 신중하게 복사 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바이올린을 제작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하늘로 뛰어오를 듯이 기뻤다. 나는 그날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배낭과 침낭을 짊어진 채 나가노행 열차에 올라탔다. 현관문을 두드리자 그 농부가 나왔다. 나는 바이올린 제작 방법을 배우기 위해 찾아왔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농부는 뜻밖의 대답을 해주었다. “내 본업은 사과 농사야. 눈이 내려 아무 일도 없을 때, 찾아온다면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네.” 나는 나카노 시내로 돌아와 일단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자리를 찾은 곳은 고물상이었다. 고철장수를 해서 어느 정도 돈을 모은 나는 집세를 지불하고 방을 얻어 겨울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겨울이 찾아와 나는 다시 사과 과수원을 찾아갔다. 농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놀랍군. 이런 곳에서 버텨내다니. 사실, 바이올린 제작기술은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게 아냐. 전에, 다시 찾아오면 가르쳐주겠다고 말한 건 자네가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안됐지만 가르쳐줄 수 없네. 돌아가게.” 나는 화를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 설계도를 보여주실 수 있나요?” 반 년 동안 이나 기다리게 했던 것이 미안했던 듯 그는 설계도를 보여주었다. “설계도대로 만든다고 해서 소리가 제대로 나오는 것은 아냐. 이런저런 경험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하나하나 터득해야지….” 그는 설계도를 즉시 둘둘 말기 시작했다. 나카노 역까지 오는 동안 시모쿠라악기점의 담당자가 건네준 편지가 떠올랐다. 나는 그 주소의 주인인 스즈키 시로 선생 댁을 방문했다. “1년만이라도 좋습니다.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간절하게 매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만 나의 열성이 전해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공작용 칼과 바이올린을 깎을 때 사용하는 대패 를 한 개씩 내주었다. 내가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에도 뚫어지게 그 도구를 들여다보고 있자 시로 선생은 나를 공방으로 안내하여 실제로 바이올린을 깎는 장면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큰 공장에 취직해서 배우도록 하게. 중요한 것은 스스로 연구해서 터득해야 해.” 잇달아 거절을 당하자 나도 역시 진이 빠졌다. 나는 눈앞에 있는 바이올린 제작용 목재를 바라보면서 별생각 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 재료는 어디에서 구하는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은 내 인생을 결정짓는 질문이었다. 나를 안쓰럽게 생각한 시로 선생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나는 시로 선생의 말을 가슴에 담고 눈이 내리는 길을 걸어 영림서를 찾아갔다. 영림서에서 나무를 구해 껍질을 벗긴 뒤에 다시 마쓰모도의 시로 선생 집을 찾아갔다. 재료까지 구해서 다시 찾아가자 시로 선생은 역시 놀라는 모습을 보였지만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장소는 기소 후쿠 시마의 스즈키바이올린 공장밖에 없어.” 그 말을 듣고도 납득할 수 없었던 나는 신슈 근처를 이곳저곳 유랑했다. 여기저기에 찾아가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나는 결국 기소로 향하기로 했다. 기소 후쿠시마로 향했을 때는 이미 1957년 8월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당시 내 나이는 이미 28세였다. 애벌레와 반딧불이 나는 역사 대합실에서 숙박을 했다. 나는 매일 아침 역사를 나와야 했다. 그리고 밤이면 벤치에 침낭을 펴고 잠을 청했다. 식사는 식빵을 사서 기소 강변에서 먹었다. 역사에는 스즈키바이올린 전시용 부스가 있어서 매일 그걸 들여다보았다. '오늘은 반드시 스즈키바이올린 공장에 가야지.' 그러나 좀처럼 결심을 굳히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그런 식으로 2~3일을 보낸 아침에, 나는 스즈키바이올린 공장을 방문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사장에게 면회를 신청하여 시로 선생의 소개장을 건네주고 사정을 설명했다. “자네, 조선인인가?” 나는 맥이 빠졌다. “그렇습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나는 포기할 수 없었지만 다시 역사에서 잠을 자는 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1주일 정도 스즈키바이올린을 매일 찾아가 거절을 당하는 나날이 되풀이되었다. 그사이, 나는 애벌레처럼 침낭 안에 머리까지 파묻고 잠을 자고 있었다. 역사 안에는 대량의 모기가 날아다녔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기소산맥의 임도를 만들기 위한 공사현장에서 4년을 보냈다. 현장에는 단풍나무나 가문비나무가 많았다. 나는 틈틈이 바이올린을 만들기에 적합한 재료를 모으면서 바이올린 제작 에 들어가기 전의 에너지를 이곳에서 충전했다. 기술자의 제자로 들어가거나 공장의 직원으로 취직하는 길은 단절되었다. 하지만 운명은 나를 점차 나무 쪽으로, 바이올린 쪽으로 이끌어주려 하고 있었다. 내게는 그것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하늘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나는 좋은 나무를 발견하면 회사에서 운영하는 제재소에서 바이올린 제작에 적합한 두께로 제재 해 달라고 하여 창고 한 모퉁이에 쌓아두었다. 나는 산을 내려올 때마다 스즈키 공장을 찾아갔다. 그럴 때에는 항상 선물로 바이올린을 만드는 재료를 가지고 갔다. 재료를 가져가면 사장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건 정말 좋은 재료야.” 사장은 얼마든지 구입할 테니까 좋은 목재를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이것이 꽤 괜찮은 장사가 되었다. 나는 가끔씩 공장으로 가서 창문을 통해 공장 내부를 들여다 보았다. 바이올린 제작기술은 눈으로 훔쳐보고 배워야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바이올린을 직접 만들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 도구와 재료는 서서히 갖추어졌다. 남은 것은 여유 있는 시간이다. 내 년 겨울에는 제1호 작품을 만들어보자.’ 위험천만한 노동 직접 만든 판잣집에서 생활하게 된 나는 인부로 일하는 한편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생활을 2년 반 동안 계속했다. 사실, 나는 나카노에서 고물장수를 했을 때 처녀작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이올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악기가 아니었다. 그런대로 바이올린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바이올린이 완성된 것은 기소 후쿠시마의 이 판잣집에서 였다. 판잣집에서 바이올린을 만드는 날이 늘어나자 바이올린 소리가 새어나갔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나를 정신병자 취급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병자 취급을 받은 나는 그때마다 고독감을 느끼며 슬픔에 젖었다. 하지만 결국 그런 고통을 잊도록 해준 것도 바이올린 소리였다. 새롭게 제작할 때마다 소리가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것이 유일하게 내 마음을 지탱해 주었다. 기소에서는 스즈키바이올린이 주최하는 바이올린 교실이 열리고 있었다. 마루야마 쓰네오 씨는 우체국장이었는데, 취미 삼아 바이올린 교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바이올린 연주도 배웠지만 그런 한편으로 바이올린을 만들면 즉시 가지고 가서 연주해 보라고 하고 평가를 받았다. “흠, 소리가 전보다 부드럽군. 음량도 좋고. 자네, 실력이 꽤 늘었는걸.” 마루야마 선생은 늘 그런 식으로 칭찬해 주었다. 판잣집에서의 생활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바이올린 연습도 재개하여 마음의 여유가 생길 무렵, 한국의 어머니에게서 처음으로 답장이 왔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어머니의 편지를 나는 밤새도록 되풀이해서 읽었다. “편지 잘 받았다. 네가 바이올린을 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놓였다. 몸은 괜찮니? 밥은 제대로 먹고 있니?” 나는 도구상자에서 어머니에게 받은 공작용 칼을 꺼내 가만히 움켜쥐었다. “어머니….” 로망스 그녀를 만난 이후에도 나는 더욱 일에 집중했다. 그녀도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내가 결혼한다면 그녀밖에 없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결혼을 전제로 나를 만나겠다고 이야기한 듯했다. 나와 그녀의 아버지, 사촌오빠는 기소의 관광명소인 ‘기소 가교’의 온천에서 머무르며 나와 그녀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찍 아내를 잃었기 때문에 딸이 빨리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겹쳐서 그녀의 아버지는 우리의 결혼을 허락했다. 우리는 1961년 3월 3일, 기소 후쿠시마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사실, 나는 어머니를 결혼식에 모시고 싶었다. 하지만 경제적인 사정이나 어머니의 건강 때문에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더니 다음과 같은 답장이 돌아왔다.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를 보고 싶구나. 나는 그때까지 절대로 죽을 수 없다.” 나도 언젠가 아내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를 방문할 날이 올 것이라고 꿈꾸고 있었다. 아내가 생기면서 나는 그때까지 이상으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나는 항상 아내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하루 빨리 이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힘든 신혼 생활을 1년 정도 계속 하는 한편으로 바이올린도 40개 정도를 완성했다. 하지만 초기에 제작한 바이올린은 내가 보아도 너무 심할 정도로 엉성했다. 그러나 100엔에라도 구입할 사람이 있으면 팔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제품은 팔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런 딜레마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고민에 해결책을 제시해준 사람은 원래 장사를 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내였다. “부수지 말아요. 괜찮은 것만 골라서 도쿄에 가서 팔아 보는 게 어떻겠어요?” 나도 언제까지나 기소의 산 속에 틀어박혀 지낼 생각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도쿄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처음으로 도쿄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상경은 내 인생의 커다란 전환기가 되었다. 제3현 바이올린 장수 40개의 바이올린 중에서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10개를 골라 도쿄까지 짊어지고 갔다. 그리고 주요 악기점을 찾아가 보았지만 모두 냉정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정말 비참한 기분이었다. 나는 절반은 포기하고 절반은 기분전환을 한다는 생각으로 간다의 중고서점에 들러 바이올린 제작과 관련된 책이 없는지 물어보고 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잔뜩 가라앉은 기분으로 모교인 스루가다이의 K악기점을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그 가게에서 악기 브로커인 다카기 씨를 만났다. 다카기 씨는 나의 바이올린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연주도 해 보았다. 그리고 한마디. “세공은 아직 부족하지만 음량은 좋군요. 내가 선생님 한 분을 소개해 드릴 테니까 만나보시지요.”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당시에 일본 바이올린계의 3대 거장 중의 한 명으로 불렸던 시노자키 히로쓰구 선생 댁이었다. 일련의 확인 작업을 마친 선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소리가 좋군.”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하나에 3천 엔으로 괜찮다면 내가 전부 구입하겠네.” 당시의 평균 가격보다 1천 엔 정도 쌌지만 나는 너무 기뻐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시노자키 선생은 이런 말도 했다. “성인용으로는 아직 부족해. 하지만 어린이용 바이올린이라면 얼마든지 구입해 주겠네.” 내 입장에서는 생각하지도 않은 고마운 제안이었다. 이것으로, 바이올린 제작만으로 그럭저럭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시노자키 선생 덕분에 마침내 프로바이올린 제작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시노자키 선생은 우리가 거처할 장소를 수배해주었다. 우리는 기소의 판잣집을 정리하고 한 달 뒤에 상경하기로 결정했다. 집에 부착한 약음기(弱音器) 1961년 10월, 우리는 마치다로 거처를 옮겼다.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긁어모아 수리를 하고 수도도 연결했다. 그렇게 원했던 수도를 설치하자 아내는 뛸 듯이 좋아했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하지만 생활은 여전히 힘들었다. 한 명의 기술자가 제작하는 바이올린의 수에는 한계(아무리 빨라야 1주일에 한 개)가 있기 때문 이다. 그 때문에 나는 잠을 자는 시간까지 아끼며 무엇인가에 홀린 듯 1주일에 여섯 개의 바이올린을 제작했다. 이것은 바이올린 제작의 상식으로 보면 믿을 수 없는 속도다. 내 인생에서도 그렇게 빠른 속도로 바이올린을 제작한 적은 그 후에도, 그 전에도 없었다. 또, 수에 얽매인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다. 기술자는 기술을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손가락의 감촉으로 기억한다. 결국 경험을 얼마나 쌓았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때문에 나는 생활을 위해서, 또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잠도 자지 않고 바이올린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완성된 바이올린을 시노자키 선생님에게 가지고 가서 생활비를 받아왔다. 선생은 대학에서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있던 다른 선생들도 소개해 주었다. 그 당시 에는 바이올린 가격도 4천 엔으로 올라, 생활이 어느 정도 편해졌다. 그리고 마치다로 이사를 온 지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우리 부부 사이에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일에 더욱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시노자키 선생님으로부터 센카와의 도영주택으로 이사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나왔다. 시험 삼아 응모해 보았더니 운 좋게 당첨이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방 안에서 일을 할 수 없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일단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입주했다. 그러나 방 안에서 바이올린을 제작한다는 사실이 이웃에 알려지면 안 되기 때문에 일을 할 때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아내와 나는 가능하면 소리가 이웃집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이 시기에는 아내도 바이올린 제작을 꽤 능숙하게 도와주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어엿한 기술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내 인생을 되돌아다 보면, 가장 고통스러웠으면서도 가장 즐거웠던 시기는 바로 이 시기였다. 그 시절 나는 오직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야겠다는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큰 격려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성인용 바이올린도 제작하고 있었다. 내가 마치다의 창고에서 제작한 불과 3천 엔짜리 바이올린으로 연주하여 도쿄예술대학에 합격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이후 한동안, 나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나의 바이올린을 계속 사용하다가 언젠가 문득 라벨을 보고 내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를 찾아와 주었다. 그 갑작스런 방문자를 진심으로 환영했다. 이런 영광은 또 없다. 우리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언젠가 그가 우리 집을 찾아왔을 때, 나는 여느 때처럼 질문을 던졌다. “수리를 하러 오신 겁니까?” 그는 말했다. “아닙니다. 다만 제가 연주하는 악기를 제작하신 분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바이올린 제작자로서는 최고의 상장이 될 수 있는 말이다. 바이올린과 바이올린 제작자, 그리고 연주자는 이렇게 깊은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 그는 그 후 에도 자주 우리 집을 방문했고 우리는 지금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영원한 수수께끼 바이올린 제작은 미지의 영역을 더듬는 것처럼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진행된다. 이것은 스트라디바리의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스트라디바리로 대표되는 과거의 바이올린 거장들은 자기가 터득한 바이올린 제작 비결을 친자식에게조차 가르쳐주지 않고 세상을 떴다. 그 때문에 바이올린 제작 방법에 관한 지식이 서적 등의 형태로 체계적으로 남을 수 없었다. 그 뒤를 이은 바이올린 기술자들은 모두 어떻게든 명기에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해 뜬구름을 잡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만들어 온 것이다. 다만, 이것은 과거의 명장들이 자신의 기술을 후세에 전하지 않았다는 것만이 이유가 아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컴퓨터 제어로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다고 해도 바이올린의 재료는 어디 까지나 대자연에서 얻는 소재여서 그 하나하나에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행착오가 거듭되는 나날을 보내는 동안에 내가 제작한 바이올린에 대한 평가는 점차 올라갔다. 시노자키 선생님의 지원 덕분에 성인용 바이올린을 몇 군데의 악기점에 진열할 수 있게 되었다. 바이올린 제작 세계는 매우 좁아서 무슨 일이 있으면 곧 소문이 난다. 노력한 성과가 결실을 맺었는지 나의 실력이 매우 좋아졌으며, 음색이 과거와는 다르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 결과 바이올린의 가격도 몇 만 엔으로 올랐다. 소문 중에서도 특히 내가 제작한 3천 엔짜리 바이올린을 이용해서 도쿄예술대학에 합격한 청년의 이야기가 바이올린 제작이라는 좁은 세계에 일종의 전설처럼 퍼졌다. 사람에게는 꿈이 있다. 사람도 역시 꿈을 먹고사는 동물이다. 그러나 나의 꿈인 바이올린의 비결은 지금도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는 상태다. 스트라디바리가 제자에게도, 자식에게도 전하지 않은 명기의 비결. 지금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을까. 그 유명한 프로이드가 마지막까지 알 수 없었던 것은 여자의 마음이라고 말했듯 그것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 수 없기 때문에 알고 싶어진다. 바로 거기에 로망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바이올린 제작도 물리법칙처럼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 성립될 수 있다고, 나는 지금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법칙과 공식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상상하면서 더욱 노력을 쌓는 것, 보다 많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이미 센카와로 이사 온 지 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둘째 아들과 딸아이가 태어나 우리 가족은 다섯 명으로 늘었다. 물론, 생활이 급격하게 편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기소의 판잣집에서 생활 했을 때와 비교하면 훨씬 여유 있는 생활이었다. 그렇게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저축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서른여덟 살이 되어 있었다. 결코 유복한 편은 아니지만 우리 집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내가 있기에 가능했다. 아내는 결혼 생활을 그다지 힘들게 생각하지 않았고 내 작업을 도와주는 한편 으로 아이들도 돌보아야 하는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제4현 염력 아줌마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여러 선생들 중에서도 시노자키 선생님은 바이올린을 현금으로, 그것도 선불로 매입해 주었다. 선생님의 배려 덕분에 나는 큰 도움을 받았지만 시노자키 선생님은 일찍 세상을 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다른 선생들은, 내가 바이올린을 가지고 가면 일단 두고 가라고 했다. 그 바이올린을 매수할 사람이 나타나야 대금을 지불해주는 데 두세 달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는 경우가 있다. 내가 전화를 걸어도 아직 팔리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이런 경우에 등장하는 것이 아내다. “여보, 그 염력 좀 발휘해봐.” 내가 그렇게 말하면 아내는 즉시 주문을 왼다. “네, 진창현 씨의 악기가 팔렸습니다. 빨리 그 돈을 송금하게 해 주세요.” 그러면 묘하게도 정말 그 사람으로부터 돈을 받았으니까 송금을 해주겠다는 연락이 오는 것이다. “됐어, 역시 당신의 염력은 효과가 있어!” 그런 일이 몇 번인가 거듭되면서 나는 아내를 ‘염력 아줌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1970년대로 접어들자 내 바이올린에 대한 평가가 점차 올라갔고, 마침내 나의 바이올린 제작 활동에 대해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라는 제목의 기사가 미국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게재 되었다. 내가 45세 되던 해의 일이다. 이 기사는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으로도 번역되어 게재되었고, 아내는 물론이고 어머니와 여동생도 크게 기뻐해 주었다. 그와 함께 나의 바이올린 가격도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여 한 대에 50만 엔의 가격이 붙게 되었다. 또, 내게 바이올린 조정을 의뢰하는 고객도 많다. 여담이지만, 도호가쿠인 대학의 학생들은 평균적으로 한 대에 400~500만 엔 정도 하는 바이올린을 사용한다. 그중에는 2천~3천만 엔짜리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는 학생도 있다. 콩쿠르에 나갈 정도의 학생들은 테크닉에서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러 있기 때문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악기의 질이다. 프로페셔널 심사위원이 아니라고 해도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자기 자녀의 연주가 우수했는지, 아니면 부족했는지 즉시 알 수 있다. 바이올린 한 대가 그 정도의 차이를 낳는 것이다. 설령 완벽한 연주를 할 수 있었다고 해도 악기에 문제가 있어서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으면 콩쿠르에서 낙선한다. 하지만 좋은 바이올린일수록 가격이 비싸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판단을 내리지 못할 경우,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선생이 충고를 해준다. “진 선생님에게 가서 조정을 받아보십시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바이올린을 조정하러 나를 찾아오는 것이다. 바이올린의 소리는 조정을 하는 것에 의해 놀라울 정도로 바뀐다. 예를 들면, 굄목이 그렇다. 굄목은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약간의 차이만으로 현에서 발생하는 진동을 전달하는 방법이 바뀌고 그 결과, 소리가 완전히 바뀐다. 또, 활줄을 바꿀 때도 작업 자체는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활의 성능을 서너 배, 가격으로도 세 배에서 네 배 정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가게에서 교환을 하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버린다. 사실, 나는 약간의 조정 만으로 바이올린의 소리를 세 배의 가격이 붙는 바이올린의 소리와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나는 이 기술을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익혔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작업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약간의 섬세한 차이가 실제로 소리를 내어 보면 엄청난 차이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기술은 지금까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조정은 말 그대로 악기의 균형을 정돈하는 것이라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고 그 조정을 통해 가격으로 환산할 경우에 몇 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자는 아마 전 세계에서도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이것은 감성 문제로, 옆에서 지켜본다고 해서 간단히 흉내 낼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기술자의 기술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낼 수 있을 때까지 갈고닦아야 완성된다. 최근 들어서야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스트라디바리뿐 아니라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내 기술을 함부로 알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스트라디바리의 경우에는 친자식에게도 기술을 전수하지 않았다. 그 마음은 나도 아직 이해할 수 없다. 스트라디바리우스와 나의 만남은 지금부터 35년 전이다. 에릭 프리드먼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와의 만남이 출발점이다. 바이올린을 먹는 남자 독학으로 바이올린 제작의 길을 걸어온 내게 있어서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은 명기를 직접 보고 만진 경험과 내 주변에 있는 자연, 그리고 이후에 전 세계를 돌아다녔을 때에 접한 자연이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 나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여 일본을 방문하는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 를 듣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명기를 구경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에릭 프리드먼의 일본 방문 이었다. 무대에서 분장실로 돌아온 연주자는 매우 바쁘다. 프리드먼 씨의 경우에도 악기를 내게 맡겨둔 채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1726년제 스트라디바리우스, 나는 가볍게 뒷판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가볍게 흔들어보아 손에 전달되는 감촉을 확인했다. 그리고 앞판의 윤곽과 굄목의 상태도 조사했다. 그뿐 아니라 겉판 융기의 특징과 조각무늬도 점검하고 내친 김에 그가 안 보는 틈을 이용하여 니스도 핥아보았다. 오감을 최대한 활용하여 바이올린을 샅샅이 점검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명기와의 첫 대면에 너무 감동하여 그 이상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명기 중의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와의 만남은 1974년, 이작 펄만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였다. 나는 무대 뒤쪽에서 앙코르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명기는 스페인 국왕의 명령에 의해 제작된 에쿠스 스파니슈라는, 축복받은 스트라디바리우스다. 펄만 씨는 무대에서 돌아오더니 누가 악기 좀 받아달라는 식으로 명기를 내밀었다. 마침 바로 옆에 있던 내가 받아들자 본인은 갑자기 분장실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내일은 연주가 없다. 휴일이다!" 이렇게 외치더니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의 대기실로 향했다. 명기 에쿠스 스파니슈는 아직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너무 큰 감동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헨릭 쉐링은 솔로 연주자다. 1976년, 도쿄문화회관에서 개최된 리사이틀은 아주 멋진 연주였다. 나는 여느 때처럼 대기실을 방문했다. “미스터 쉐링. 오늘 저녁 연주는 정말 훌륭했습니다.” 말을 건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쉐링 교수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래서 즉시 호칭을 바꾸었 더니 기분이 좋아진 듯 악기를 보여주었다. 그가 사용하는 악기는 1745년에 구아르네리 델 제수가 제작한 에쿠스 레듀크였다. 이것은 현존하는 델 제수의 마지막 작품으로 델 제수가 사망하기 전 해에 제작된 것이다. 황금색 같기도 하고 갈색 같기도 한 두꺼운 니스가 일품으로 화려한 매력을 가진 바이올린이다. 나는 여느 때처럼 혀를 대어 감촉을 확인했다. 그러자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던 쉐링 씨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내 바이올린을 먹어치울 생각 입니까?” “아니, 너무 아름다운 여성이어서 키스 좀 했습니다.” “그러면 안 되지요. 내 여자인데 키스는 안 됩니다.”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잃어버린 세계 내게는 방랑벽이 있는 듯하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감성이 풍부해지고 시야도 넓어진다. 나의 바이올린 제작에는 이런 감각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니스의 색깔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바이올린의 니스로 이용되는 색소 중에서도 황색과 적색은 특히 중요하다. 하지만 색깔의 깊이를 내려면 자연에서 채취한 흑색과 식물성인 자색 색소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한때 흑색만도 20종 이상의 색소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마치 신들린 것처럼 자연의 소재를 사용하면서 시행착오를 되풀이했다. 나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잠을 잘 수 없는 밤에는 방을 나가 주변을 산책하는 버릇이 생겼다. 산책을 하던 어느 날, 아내가 옆으로 다가와 서 있었다. “왜 나왔어?” “여보 놀라지 말아요. 아가씨에게 전화가 왔어요. 어머니가 조금 전에 돌아가셨대요.” “어머니, 이제야 아들 노릇 좀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왜….” 아내가 내 어깨에 조용히 손을 올려놓았다. 하늘을 나는 바이올린 나는 다음날 아침 여동생이 있는 부산으로 날아갔다. 여동생의 집에 도착한 나는 어머니가 누워 있는 관 앞으로 달려갔다. 향년 77세, 나는 47세였다.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매달렸다. “어머니…. 왜 좀더 기다려주시지 않으셨어요?” 묘하게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제작한 바이올린의 음색을 어머니에게 들려드린 적이 없다는 것,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아쉬움이었다. “어머니, 다음에 올 때는 반드시 바이올린을 가지고 와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곡을 연주해 드릴게요. 약속할게요.” 여동생이 말했다. “오빠, 이제 보내드려야 돼. 관이 나갈 시간이야.” “…그래.” 그 이후의 일은 그다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아카시아나무들이 무성한 숲길을 걷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개월 정도 뒤인 1976년 12월 12일, 나는 하네다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 514편에 올라타 있었다. 어머니를 잃은 나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락의 바닥 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제2회 미국 국제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가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나도 초대를 받은 것이다. 그 시기에 나는 바이올린뿐 아니라 비올라와 첼로도 제작하고 있었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바이올린과 비올라, 그리고 첼로를 휴대하고 기내에 탈 수 있었다. 창밖에는 온통 육지만 펼쳐져 있었다. 다음날, 콩쿠르 대회장은 필라델피아의 커다란 강당으로, 심사가 시작된 이후 5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심사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에 대해 각각 세공과 음향의 두 가지 부분, 즉 합계 여섯 부분의 상이 있고 몇 명의 심사위원의 엄정한 심사로 진행된다. 심사위원은 모두 바이올린 제작자로 전 세계에 이름을 펼친 명장들이었다. 단 한 가지 부문에서도 수상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던 나는 오랜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나는 꿈속에서 도쿄문화회관의 콘서트마스터 자리에 앉아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고 있었다. 나는 당황하면서도 내가 제작한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계속 울려 퍼지는 박수소리.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바이올린은 연주할 수 없어!” 내가 아무리 소리쳐도 역시 박수는 그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박수소리는 더욱 생동감 있는 소리로 바뀌어갔다. 현실세계로 돌아오자, 필라델피아 콩쿠르 대회장에 있던 기술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나도 누가 수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상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없다. 장내가 소란스러워졌고 관객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단상에서는 사회자가 몇 번이나 수상자의 이름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더 위너 이즈… 미스터 진창휸.” 사회자는, 단상으로 올라오는 사람이 없자 당황하여 다음 수상자인 비올라 수상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이번 수상자도 같은 이름이었다. 그래도 단상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없자 사회자는 첼로 수상자의 이름을 불렀다. “더 위너 이즈… 미스터 진창휸. 미스터 진창휸?” 그때 나는 온몸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나는 내가 수상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여섯 가지 부문 중에서 다섯 가지 부문에서 수상을 하다니. 나는 몽유병자처럼 스테이지를 향하여 걸어갔다. 박수소리는 환성으로 바뀌었고 그 환성이 이번에는 드문드문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로 바뀌었다. 천천히 단상으로 올라간 나는 금메달을 받고 나서야 처음으로 나의 바이올린이 수상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나는 심사위원장으로부터 또 다른 상장과 메달을 받아 들었다. “멋진 음색, 훌륭한 세공입니다. 미스터 진.” 나는 서투른 영어를 구사하여 소감을 밝혔다. “지금부터 30년 전, 저는 바이올린 제작에 뜻을 두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최선을 다해 바이올린을 제작해 왔습니다.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유감스럽게도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조국 한국은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이고 일본은 저를 길러주신 어머니…. 그리고 미국은 저의 은인입니다….” 내가 깊숙이 머리를 숙이자 대회장에서 “브라보!”라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미국을 은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때뿐이 아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984년, 미국은 내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었다. 미국의 바이올린제작자협회에서 전 세계에 다섯 명밖에 없는 ‘마스터 메이커’란 칭호를 수여해준 것이다. “빨리 아내에게 알려야 돼….” 수상식이 끝나고 나는 아내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나는 이 기쁨을 가장 먼저 아내에게 알리고 싶었다. 내 평생에 가장 감격스러운 소식을 듣게 된 아내는 나 이상으로 감격하여 목이 메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랜 세월 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여보. 이건 모두 당신 덕분이야.” “….”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이런 순간이 오면 말하려고 했는데….” “뭔데요?” “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국에 들러보고 싶어.” “알아요. 어머니 묘소 말이죠?” "그래 당신도 출발해줘.” “알았어요.” 이렇게 해서 나는 수상의 감동이 식기 전에 다섯 개의 금메달과 바이올린을 가지고 부산으로 직행했다. 무지개 하늘을 향해 유감스럽게도 한국에 입국할 때 바이올린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당시에 한국에서는 싸구려 바이올린을 명기라고 속여 파는 사기행위가 횡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정이 있어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는 세관에 보관하는 형식으로 나는 간신히 입국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바로 묘소로 향했다. “수상, 축하해.” “고마워.” 나는 가방에서 다섯 개의 금메달을 꺼내 한 개를 여동생의 목에 걸어주었다. 잠시 후 나는 어머니의 묘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동생의 목에 걸어주었던 금메달을 합하여 다섯 개의 금메달을 모두 묘소 앞에 묻었다.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금이에요. 못난 아들을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 바이올린은 가지고 올 수 없었어요. 하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반드시 다시 찾아올게요. 그떄는 꼭…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곡을 연주해 드릴게요.” 그러나 그 이후에 내가 다시 어머니의 묘소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23년 뒤다. 나는 수상한 바이올린을 휴대하고 이번에는 아이들도 데리고 방문했다. 나는 어머니의 묘소에 직접 지은 시를 바치기로 했다. 스님이 독경을 끝낸 뒤, 나는 친척과 연고자들 앞에서 그 시를 낭독했다. 나의 낭독이 끝나자 여동생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나의 가슴에는 어린 시절의 어머니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하나하나의 추억이 어제 일처럼 되살아났다. “자, 시작하자.” 나는 아들을 재촉했다. 아들과 내가 연주하는 〈봉선화〉 멜로디가 이천 마을의 그리운 산하에 메아리쳤다. 어머니와 나, 그리고 아들로 이어지는 〈봉선화〉다. 나는 서투른 솜씨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머니, 들리세요?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곡이에요. 손자도 함께 연주하고 있어요.” 그 약장수가, 그 아이카와 선생이 연주했던 바이올린이에요. 연주가 끝나자 드문드문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옆에 있는 아내는 남편과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어머니가 나를 지켜보듯…. 스님이 다시 독경하는 동안, 우리는 한 번 더 〈봉선화〉를 연주했다. 가라, 바이올린의 음색이여. 1등 상을 받은 그 사랑하는 악기가 지금 자랑스러운 울음소리를 토해내어 고향의 하늘을 춤추며 날아간다. 나는 오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다. 그날은 언제 찾아올 것인가. 그것은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수수께끼처럼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 수수께끼를 알고 있는 것은 바이올린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부여받은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대지의 혜택인 바이올린을 만들 것이다. 〈봉선화〉처럼 지금도 내가 애창하는 시가 있다. 워즈워드의 시다. “내 마음은 춤을 춘다 하늘에 무지개가 걸리는 날….” 이것은 명기를 제작하고 싶은 바람을 담은 나의 기도다. 누구에게나 한 분밖에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 “어머니, 언젠가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어머니가 낳아주신 이 몸, 언젠가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부디 그때까지 못난 아들을 용서하고 기다려주십시오.” 어머니와 여동생과 나, 언젠가 무지개 너머에서 만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하늘에 무지개가 걸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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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寂者 感之體 其體甚微 理無不明
感者 寂之用 其用甚顯 誠無不格 物無不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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