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흰별소 이후 차무집 외양간을 지킨 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노름빚에 팔려온 어린 송아지 그릿소가 흰별소를 낳고, 흰별소가 미륵소를 낳고, 미륵소가 버들소를 낳고, 버들소가 화둥불소와 흥걸소를 낳고, 흥걸소가 외뿔소와 콩죽소를 낳았다.
그러나 난리 중에 외뿔소가 끌려간 다음 혼자 외양간을 지키던 암송아지는 따로 이름이 없었다. 외뿔소가 떠난 빈자리가 커서 아무도 혼자 남은 이 송아지에게 이름을 지어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 자라서도 그 소의 이름은 그냥 소였다. 오래 외양간을 지키면서도 이름이 없다는 건 소가 주인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해서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 소를 특별하게 여기며 살갑게 대해주는 식구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만큼 외뿔소의 빈자리가 컸다.
이 이름이 없는 무명소는 어린 시절 콩밭 한 자리를 쑥밭으로 만들어버린 콩죽소의 일곱 번째 새끼였다. 어느 소나 그 소가 낳은 여러 새끼들 가운데 일고여덟 번째의 새끼가 태어날 때 몸이 가장 실했다. 그래선지 따로 이름이 없어도 잘 자랐고 새끼도 잘 낳았다. 암소여도 동네의 웬만한 황소들보다 덩치도 컸다.
회나무집 영감이 세상을 떠나 차무집 어른이 소 반 마리 값을 영영 받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동안 비어 있던 외뿔소의 자리를 다시 송아지 울음소리로 채운 것도 이 이름이 없는 무명소였다.
세상의 어느 일이나 그랬다. 실제 돌에 손가락을 찧어가며 만리장성을 쌓은 사람들과 물집이 잡혀가며 대운하를 판 사람들과 커다란 궁궐을 지을 때 목재를 올리고 지붕을 올린 사람들은 모두 그런 이름 없는 무명씨들이었다. 세상의 수레바퀴는 무명씨의 힘으로 굴러가는 것이었다.
차무집 외양간도 무명소의 새끼들로 다시 채워져 그때부터 항상 두세 마리의 소가 외양간을 지켰다. 마당 안쪽 살림집에도 늘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양이논이 있는 납돌마을에서 시집온 새댁은 겨울 난리 중에 첫아들을 낳고, 이태 후 또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세 아이를 더 낳았다. 셋째 아들은 정유년 늦은 봄에, 딸은 다음해 무술년 겨울에, 그리고 이 집의 막내아들은 신축년(1961) 소의 해 이른 봄에 태어났다.
그날 무명소는 차무집 어른과, 또 아이들의 아버지와 함께 보내미를 나갔다. 보내미는 그해 봄의 첫 밭갈이지만 정식 밭갈이는 아니었다. 요즘 말로 하면 세워두었던 기계를 시운전해 보는 것과 같았다. 봄눈이 녹으면 농부는 그동안 헛간에 넣어두었던 쟁기를 꺼내 지게에 얹고 소와 함께 밭으로 나갔다.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에 겨우내 외양간에 웅크리고 있었던 소의 건강과 밭의 무름, 쟁기의 이상 유무를 점검해보는 것이었다.
지난해에 쓰던 쟁기줄(소 어깨의 멍에와 쟁기를 연결한 동아줄)이 삭지는 않았는지, 겨우내 소가 살이 쪄 몸이 커졌으면 쟁기줄의 길이도 조정해 늘이고, 헛간에 보관해두었던 쟁기의 나무와 쇠의 이음새가 헐거워지지는 않았는지, 헐거워졌으면 그 자리에서 쐐기를 박아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보내미도 아무 날이나 막 하는 아니었다. 손 없는 날을 골라(소의 날이면 더욱 좋고) 소머리를 어느 방위로 두고 첫 보습을 대고 나가야 하는지, 나중에 쟁기를 풀 때는 또 소머리를 어느 쪽으로 해야 하는지 미리 다 알아보고 밭으로 나갔다. 설이 지나자마자 낳은 무명소의 새끼도 어미를 따라갔다. 보내미는 이제 한 해 농사를 앞두고 사람과 소와 쟁기가 대지 위에서 한 몸이 되어 몸을 푸는 새봄의 경건한 의식이기도 했다. 그래서 미리 좋은 날을 가려 받는 것이었다.
“소머리 방위는 어디로 두죠?”
“동남향으로 두고 어디 나가 보아라.”
겨우내 외양간에만 있던 무명소는 오랜만에 몸을 풀 기회가 왔다는 듯 콧김을 씩씩대며 쟁기를 끌었다. 밭둑엔 눈 녹기 무섭게 애쑥이 올라오고, 달래와 냉이가 땅심을 받아 고개를 내밀었다. 소가 쟁기를 끌고 나가야 할 저쪽 밭끝에서는 누가 땅 밑에 불이라도 때듯 아지랑이가 어른거렸다.
“워, 워.”
아이들의 아버지는 무명소의 고삐를 바짝 당겨 오히려 속도를 조정했다.
“아주 근질근질하던 참이었구나.”
차무집 어른은 비록 보내미일망정 무명소가 씩씩거리며 쟁기를 끄는 모습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명소가 단숨에 한이랑을 갈자 이번엔 쟁기를 좀 더 깊이 넣어보라고 일렀다. 아들이 쟁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무명소고 어디 한번 내기를 해보자는 식으로 콧김을 더 세게 내뿜으며 꽁무니에 쟁기가 아니라 한 하나를 매달고 앞으로 나가듯 힘을 썼다.
땅은 깊이 갈아졌고, 보습은 눈 녹은 대지 속에 미끄러지듯 햇볕 아래 반짝였다. 땅과 쟁기만이 아니었다. 쟁기를 잡은 사람과 그것을 앞에서 온 힘을 들여 끄는 소까지 한데 어울려 그것이 이른 봄날 풍경과 일체가 되는 것이었다.
“용타!”
차무집 어른이 밭가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겨우내 눈도 적당히 와 밭의 무름도 좋았다.
“한 골 더 갈아볼까요?”
“한번에 너무 기운 쓰면 소가 놀라는 게 아니라 땅이 놀라지. 그만 떼어라.”
아이들 아버지는 이번엔 소머리를 서북향으로 두고 쟁기를 떼었다. 세일이 얼른 다가가 형으로부터 소고삐를 받았다.
밭에서 돌아오니 벌써 사립문에 금줄이 쳐 있었다. 햇빛과 바람에 흰 창호지가 날리고, 검은 숯검정 사이로 어른 가운뎃손가락보다 더 크고 굵은 고추가 매달려 있었다.
“허허, 또 아들을 낳았구나.”
금줄 아래로는 식구들만 드나들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금줄을 통과한 것은 검은 눈의 송아지였다. 그다음 무명소를 몰고 세일이 통과하고, 지게를 진 아이 아버지가 통과하고, 차무집 어른이 통과했다. 예부터 미리 정한 보내미날에 아이를 낳아도 좋고, 외양간의 다른 소가 송아지를 낳아도 좋다고 했다. 아이를 낳은 시간도 밭에서 한창 보내미를 할 때였다. 보내미날을 고르던 중에서 제대로 고른 셈이었다.
“아이 기운이 나주 승할 것 같구나.”
차무집 어른도 아주 흡족해했다. 낳으면서 산모도 크게 힘들어하지 않고, 아이의 울음소리도 컸다고 했다. 세일어멈이 해산수발을 하며 아이를 받아 씻겼다. 첫 할머니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이 집의 네 아이들에게는 세일어멈이 친할머니와 같은 사람이었다. 세일이 역시 친삼촌과 같은 사람이었다.
“허허, 보내미날에 났으니 이 녀석도 이다음 소와 꽤 칞겠는걸.”
다시 차무집 어른이 흡족하게 웃었다. 어린 날 차무집 어른에게 어머니가 늘 그렇게 말했다. 너는 소와 함께 태어나고, 소가 워낭만 울려도 까르르 웃곤 했다고. 그 소가 이 집의 첫 소 흰별소였다. 그러나 더 생각나는 건 한쪽 뿔이 없는 외뿔소였다. 어쩌면 이 아이도 소의 해, 소의 봄날, 소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것인지 몰랐다.
‘하늘에 있겠지. 어디에 있든 저 소띠 아이를 잘 지켜주게.’
차무집 어른은 마음속으로 난리 때 집을 떠난 외뿔소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