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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자료실 - 종교간대화와 그리스도인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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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한국) 스크랩 하우현성당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201)
대화일치 추천 0 조회 94 09.09.21 17: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하우현성당


주보로 ‘대 데레사’를 모시는 이 본당은 왕림 본당의 공소로부터 분할되어 1888년 갓등이 본당 설립과 함께 갓등이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갓등이 본당 2대 주임인 알릭스 신부님은 교우들이 공소 강당도 없이 교우집에서 공소예절을 하는 것을 보고 강당 신축을 추진하여 1894년 초가목조강당 10칸을 건립했다. 1900년 현 시흥군 의왕읍 청계리(始興郡 儀旺邑 淸溪里), 속칭 ‘하우고개’에 프랑스인 샤플랭(Chapelain, 蔡) 신부가 초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설정되었다.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여 지은 사제관과 함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이 때 내빈으로 참석한 주한(駐韓) 초대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프랑스 공사가 기증한 종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본당창설 당시의 신자총수는 1,105명이고 16개 공소를 관할하였다. 이는 광주군(廣州郡)과 용인군(龍仁郡)의 일부지역, 그리고 과천현(果川縣), 금천현(衿川縣, 지금의 安養지구), 안산군(安山郡) 등 넓은 지역을 관할하였기 때문이다. 1954년 다시 안양 본당 공소로 전환되었고, 1965년 은퇴 후 하우현에서 휴양하던 김영근 베드로 신부님이 성당의 붕괴 위험을 알고 미군 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원조받아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1975년 군포(현 호계동) 본당 관할공소로 변경되었다가 1978년 하우현 공소가 본당으로 부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3년 하우현 공소 건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하우현성당

 

청계산(淸溪山)과 광교산맥(光敎山脈)을 잇는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험준한 이 산골에는 일찍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 신유년(辛酉年), 병오년(丙午年) 박해 때부터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의일(義一, 지금의 鶴日里) 마을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 광주 포교에 잡혀가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일이 있고, 그 뒤 하우현 마을에 살던 김준원(金俊遠, 아니체토)이 1845년 9월 역시 광주 포교에게 잡혀가 그해 12월 남한산성에서 치명되었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가 묘론리(卯論里)에서 조선말을 배우다가 장제철(張濟哲)의 밀고로 서울 포교에게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성당 입구와 예수성심상

 

예수성심상 

 

하우현성당

 

교우촌의 생업이던 옹기 굽던 도요지(陶窯地)와 얽힌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우현에는 개화기인 1884년에 이미 공소가 시작되어 뮈텔 신부가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전교하였고, 1885년부터는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전교한 기록이 남아 있다. 1888년 왕림 본당이 설정되자, 하우현은 그 관할공소로 편입되었다. 그 뒤 왕림 본당 주임신부 대리인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는 1899년과 1900년에 걸쳐 자주 이곳에 체류하면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하우현이 본당으로 되고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여 5년간 전교하였는데, 한국 풍습에 동화되지 못했던 탓인지 교우들과 불화가 잦아 1906년 귀국하고 말았다. 2대 본당신부는 르각(Le Gae, 郭元良), 3대는 페랭(Perrin, 白文弼) 신부로, 모두 프랑스인 선교사였고, 192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주임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가 부임하여 1927년까지 7년간 사목하였다. 그 동안에 ‘애경 강습소’를 개설,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하우현성당

 

1928년 프랑스인 부이수(Bouyssou, 孫以燮) 신부가 5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신개화사상(新開化思想)과 문맹퇴치에 많은 공을 세웠으나, 애경강습소는 운영이 어려워 끝내 폐쇄되고 말았다. 1930년 부이수 신부가 대신학교 교수로 전임된 뒤, 본당은 문을 닫게 되고, 수원 고등동 본당의 공소로 편입되었다. 1943년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이 부활되었는데 얼마 후에 6.25 전쟁을 겪게 되고, 1951년 황 신부가 떠나자, 본당은 다시 문을 닫고 영등포 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1952년 구천우(具天佑,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다시 본당이 부활되었다. 구 신부는 안양 일대의 사목에 힘씀 결과 교세가 크게 신장되어 1953년 안양 본당이 설정되면서 하우현 본당은 또 폐쇄되어 공소가 되었다. 그러나 성당과 사제관은 그대로 보존되어 신부들이 휴양처로 활용되었다. 1973년에는 새로 설정된 군포 본당의 공소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구성당 건물이 허술하므로 미군부대의 원조를 얻어, 1,700평의 부지 위에 100평의 현 성당을 신축하였는데 이 사업은 벨기에인 레이몬드(Raymond Spies) 신부의 힘이 컸다. 그는 1980년에 하우현에 부임하여 다시 본당을 부활시키고 사회사업에도 힘쓰고 있다. 이 본당의 신자총수는 174명, 전국의 본당 중에서 가장 적은 곳이지만 신앙의 요람지요, 누대(累代)가 살아온 교우촌이라는 데서 교회사적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출처 : 가톨릭 대사전 - 교회사 연구소]

 

하우현성당

 

하우현성당 

 

하우현성당 주보 ‘대 데레사’

 

하우현성당 주보 ‘대 데레사’ 

 

성당 측면

 

사제관

 

사제관

 

성모상

 

성모상

 

사제관,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의 기념비와 동상

 

2001년 1월에 초대주임인 샤플랭 신부가 세운 사제관이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다. 2004년 7월과 2005년 6월에 사제관 보수 공사와 조경 공사를 실시하였다. 1906년에 건립된 사제관은 몸체는 서양식 석조 양식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전통 한국식으로 20세기 초반에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기법이 혼용된 드문 경우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사제관 앞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서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의 기념비와 동상이 있다.  

 

성당 안내판

 

김영근 베드로 신부 기념비

 

김영근 베드로 신부는  1965년 은퇴 후 하우현에서 휴양하던 중 성당의 붕괴 위험을 알고 미군 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원조받아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성 볼리외 베르나르도(Beaulieu Bernard, 1840-1866년) 동상

 

성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Bernard Louis Beaulieu) 신부의 세례명은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이고, 한국명은 서몰례(徐沒禮)이다. 그는 1840년 10월 8일 프랑스 보르도(Bordeaux) 교구의 랑공(Langon)에서 베르나르와 마리 데지레(Marie Desiree)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은 결혼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모친은 아들을 낳자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그는 여섯 살 되던 해에 공민학교에 들어갔고, 일곱 살부터 복사를 하였으며, 아홉 살이 되던 1849년 10월에 고향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에 그는 중국 사천(四川)에서 전교한 경험이 있는 한 선교사 신부로부터 중국의 사정을 듣고는 동양 전교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57년에 보르도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에 모친을 여읜 후 전교를 향한 그의 마음은 더욱 열렬해졌다. 그러나 그는 교회법상의 연령 미달로 사제 서품을 받지 못하였으며, 보르도 교구의 교구장인 대주교는 누구든지 교구를 떠나지 않도록 종용하고 있다가 뜻밖으로 그에게 전교를 위한 출국의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곧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1864년 5월 21일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6월 15일에 조선의 전교 신부로 임명되었다. 1864년 7월 15일에 프랑스 파리(Paris)를 출발한 볼리외 신부는 도리(Dorie, 金) 신부,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위앵(Huin, 閔) 신부와 함께 1865년 5월 27일 조선의 내포 지방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미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조전 교우들의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그는 경기도 광주 지방에 있는 뫼논리(현 경기도 성남시 운중동의 山畓里)라는 교우촌에서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는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장제철이라는 교우 집에서 조선말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토록 잘 전교할 수 있는 지방에 오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라고 행복하게 말했으며, 고해성사를 들을 정도로 한국말에도 능숙해졌다. 이때 배교자인 이선이가 뫼논리에 볼리외 신부가 살고 있다고 실토하였기 때문에 그는 장제철의 집을 떠나 광주 산답리 이 요셉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베르뇌 주교가 볼리외 신부의 조선말 실력과 열심함을 감안하여 충청도 지방으로 그의 임지를 정해 주려고 하던 참에, 그는 임지에 가보기도 전에 처음에 기거했던 집 주인 장제철과 이선이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마침내 1866년 2월 27일에 도리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 다음날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바로 연행된 후 곧바로 심문을 받았다. 이리하여 볼리외 신부는 마침내 베르뇌 주교와 도리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 신부 등 동료들과 함께 새남터의 형장에서 희광이의 세 번째의 칼을 맞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때가 1866년 3월 7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 동상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 (새남터 성지 사진)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의 기념비

 

둔토리 동굴 입구 표지석


성당에서 5km 정도 떨어진 산에 있는 동굴로 성인께서 체포되신 곳이다.  

 

둔토리 동굴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둔토리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서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가 박해를 피해 숨었던 동굴이 있는 곳이다. 성남 국사봉 등성이에 있는 이 동굴은 어른 5~8명 정도가 쭈그리고 앉아 있을 만한 공간이다. 서 루도비코 신부는 1864년 7월 15일 프랑스를 출발해 1865년 5월27일 조선에 도착했으며, 하우현성당 등 인근 지역에서 사목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 체포돼 26살에 순교했다.

 

둔토리 동굴 내부  (출처-http://blog.naver.com/visionk3/90029297259

 

사제관

 

사제관

 

사제관

 

사제관

 

성당내부

 

성당내부

 

성당내부

 

제대

 

제대

 

십자고상, 감실

 

십자고상

 

내부 좌측 

 

내부 우측

 

내부 십자가 14처

 

내부 후면 성 루도비코 볼리외 소명도 "선교사의 출발"

 

성 루도비코 볼리외 선교사 파송식 "선교사들의 출발"

 

1865.5.21. 사제 서품을 받고 1865.5.27. 조선에 도착하기전에(당시 24세) 가졌던 파견 예식 모습 그림이다.  파리외방전교회에 원본이 있고 하우현 성당의 그림은 원본을 확대복사한 것이다.

 

성 루도비코 볼리외 선교사 파송식 "선교사의 출발" 그림 설명문

 

1860년대 까지 계속된 선교사들의 출발예식을 1868년 샤를르 루이 드 프레디 꾸베르땡이 그린 그림인데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출발하기 전 선교사들은 제대에 열을 지어 서있고 신자들은 제대 앞으로 나와 선교사들의 발에 입을 맞추고 이들을 포옹하였다. 이 예식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선교사들의 출발을 위한 노래가 울려 퍼졌다. 이 그림에는 한국에서 순교한 네 분의 선교사가 등장하는데, 제일 오른 쪽에 보이는 사람이 백 유스토 성인이다. 성인의 왼쪽에, 팔짱을 끼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분이 김 헨리코 성인이다. 그리고 한 신사를 포옹하고 있는 분이 서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이다. 이 신사는 ‘선교사들의 출발을 위한 노래’를 작곡한 샤를르 구노이다. 제일 왼 쪽에 있는 선교사는 민 루카 성인이다. 화가는 자기의 두 자녀도 그림에 등장시켰는데 뒤를 돌아보는 소년이 삐에르 드 꾸베르땡으로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이다.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 약력  

 

성당 입구

 

성 베드로 앙리 도리(Pierre-Henri Dorie)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한 농장에서 일하던 소박한 부부 사이에서 여섯 번째아들로 태어났다. 그 농장은 성 힐라리오.딸몽(St.Hilaire di Talmont)에 있는 뽀르트(Port)라는 시골의 벳세이(Bessay)백작의 농장이었다.앙리 도리의 부모나 형제들은 공부는 많이 못했으나 신심은 매우 깊었다. 따라서 어린 앙리 도리는 건전하고도 평화스러운 가정환경 안에서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다. 한편 그곳 보좌 신부는 도리에게 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가1852년 어느 날 보좌 신부는 도리 부모의 승낙을 얻어 소년의 신학교 입학을추천하였다. 또한 벳세이 백작은 도리 가정의 생활양식이 부족하여 부모들이걱정을 하고 있을 때마다 자비롭게 이 가정을 돌보아 주었다. 1852년 10월 도리는 이윽고 소신학교에 들어가 8년 동안 모든 이들한테서칭찬과 귀염을 받으며 지냈다. 15세 때 그는 벌써 자기 생의 목표를 전교 생활에 두고 1860년 10월에 루쏭(Lucon)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도리는 부지런하고도 침착한 학생으로 점차 마음도 너그러워지고 생활도 열심 해 질 뿐 아니라 특히 그에게는 수도 생활에 대한 동경심이 다른 무엇보다 두드러지게 커져 갔다. 1866년 12월 21일 삭발례를 받은 도리는 다음해 6월 1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를 청원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때부터 자기를 잘 알고 있는 가장 가까운 분들한테 자기 계획을 말하기 시작하엿는데 이에 대해 누구보다도 먼저 건강이 허약한 도리를 염려해 주고 돌봐 준 백작이 그의 결심을 꺾으려고 반대하며 나섰다. 그러나 백작은 도리의 그 부드럽고도 굳은 의지에 탄복한 나머지 수그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도리는 이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부님! 저는 신부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매우 건강합니다. 전교생활의 피로같은 것쯤은 자신있게 이겨나감을 보실 것입니다. 신부님! 만일 제가 이 조그만 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전교 신부가 된 다음 순교까지하게될지 그 누가 압니까? 그렇게 되면 신부님도 자랑스럽고 행복하지 않으시겠어요?" 도리의 열렬하고도 패기에 찬 이같은 말에 본당신부는 더 이상 반대할 수 가없었다. 그래서 본당 신부는 교구 주교님한테 젊은 이 전교지망자를 데리고 가 소개하자 주교님은 도리를 축복하여 주실 뿐 아니라 여러가지 인자한 말로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실제로 도리는 더큰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는 반대하고 나서는 가족들로 부터 오는 고통이었다. 특히 어머니의 반대는 대단하였다. 그렇지만 그 아무도 도리를 프랑스에 머물도록 설득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 외국전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것은 저에게 있어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8년이나 이를 제 맘속에 생각해 왔었습니다. 하느님이 저의 마음속에 말씀하셨으니 저는 그분께 순명해야 합니다. "아무리해도 헛수고라는 것을 안 도리의 아버지는 내심으로는 가슴이 아팠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서 1861년 8월 성 힐라리오 역까지 나아가 아들을 환송해 주었다. 고향을 떠난 도리는 자주 사랑하는 부모에게 편지를 드리면서 자기의 즐거움과 보람됨을 말씀드리곤 하였다. 그렇지만 부모는 아들이 돌아 와 주기를 고대하며 늘 하느님께 그의 귀국을 기도 드렸었다. 1864년 5월 31일 사제 서품을 받은 도리 신부는 장래문제에 있어 자기 뜻대로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웃어른들의 결정이 내려지기 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6월 15일 한국의 선교신부로 결정 발표되니 도리 신부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더욱이 친구 백 브르뜨니에르 신부와 더불어 동행하게 되었음을 대단히 반가와 하였다.

 

 <체포와 순교>


 1864년 7월 19일 마르세이에서 백 브르뜨니에르 신부 서 볼리외 신부. 그리고 민 마르띠노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출발하여 수많은 어려운 항해끝에 드디어 1865년 5월 27일 조선 땅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의 전교활동 기간은 생각했던 것보다 의외로 짧았던 것이다. 김 도리 신부는 손곡리(孫谷里:경기도 용인 손골)에서 교우들과 같이 있으면서 많은 존경을 받는 가운데 한국말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뜻밖에 일이 터졌다. 장 주교의 체포소식이 있은지 며칠 후 즉시 김 도리 신부는 1866년 2월 27일 방안에 앉아 꼼짝도 못하고 잡히게 되었다. 물론 위험의 신호가 있긴 했었지만 김 도리 신부는 우선 복사를 피신시키고 다른 교우들을 위태롭게 할 수 잇는 물건들을 모두 감춰버리고 기다렸었다. 김 신부는 서 볼리외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 감옥에서 다른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다. 김 도리 신부도 예외 없이 많은 고문을 받았지만 강인하고도 위대한 정신력으로 온갖 고통을 잘 참아 견디었다. 그리고 그는 장 주교를 비롯하여 다른 동료 신부들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그 다음 사형장인 새남터로 끌려갔다. 이를 목격했던 한 증인은 김 도리 신부에 관해 "눈을 내려뜬 모습은 확실히 참된 기도하는 자세였고, 순교를 준비하고 있는 그의 침착한 모습은 당당하기조차 하였다."고 말했다. 마침내 정해진 잔악한 의식 절차가 끝나자 처형이 실시되었다. 김 도리 신부는 이날 처형되었는데 그의 목은 두 번째의 칼에 땅에 떨어졌다. 이렇게 순교한 김 도리 신부와 다른 전교신부들의 머리는 그곳에 3일 동안 군문효수로 메달려 있다가 후에 와고개(瓦署峴)골짜기에 베드로 박순집 일행이 시신(屍身)들을 거두어 안장하였다. (출처- 쥴리오 단테 著 심영택 譯 "한국 신앙의 씨앗들"에서 발췌, http://cafe.daum.net/Sonkol)

 

성 서 루도비코 신부 

 

좌측 입구 조각물

 

우측 입구 성화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1처

 

2처

 

3처

 

4처

 

5처

 

6처

 

7처

 

8처

 

9처

 

10처

 

11처

 

12처

 

13처

 

14처

 

15처 

 

15처

 

수녀원

 

성모동산 입구

 

성모동산 입구

 

성모동산 

 

성모동산

 

성모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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