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부터 경주-울산 국도길에는 봄바람에 흙먼지가 회오리처럼 날렸다.
불국사 역 앞 들판에는 온통 농경지 정리공사가 한창이고, 통일전 공사도 바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 때 보문관광단지도 공사가 한창이던 때였다.
불국사 역 뒷편에는 불국사초등학교가 있었고, 그 사이에 작은 개울이 있었다.
그 개울에는 언제나 빨래하는 아낙네들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겨울에는 그 냇물에는 김이 서려 있었다. 어디에선가 따뜻한 온천수가 쏟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아주 옛날부터 온천수가 내려온다고 했다. 그로부터 10 여년 후에 그 가까운 곳에 온천호텔이 생겼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에도 문화재보호법이 있었고, 경주지역에는 문화재가 수없이 묻혀있는 곳이다. 신라시대의 서라벌지역이 지금의 경주지역보다 훨씬 넓었다고 하니, 안강과 불국사 아래의 외동에서 아화 건천을 지나 거의 영천 부근까지가 당시의 서라벌 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문화재보호법이 더욱 엄하게 적용되어서, 경주시 일원에는 모든 토목공사나 기반시설공사, 새마을사업이나 개인주택 보수에도 땅 밑 지하 1 미터 흙파기를 하는 곳에는 관계관청에서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국도변의 모든 집들과 경주시 일원에는 기와지붕공사와 기와 지붕을 얹은 대문공사를 국가에서 대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5.16 혁명 후에 처음으로 국토개발사업이 진행되었고, 대규모 토목공사들이 새마을사업과 더불어 곳곳에 진행되고 있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국도나 지방도도 확장공사가 동시다발로 진행되고 있었다.
천마총이 발굴되었고, 천마기상도가 한반도의 기상을 높이고 있을 때였다.
좁은 돌담길 옆에는 개나리가 흩어러지게 피어 있고, 뜰 앞 화단에는 눈부시게 하얀 꽃매화가 솜방망이처럼 달려 있던 토요일 늦은 오후에 나는 아낙네들의 빨래터인 작은 개울 건너 아내의 집을 들어 가고 있었다.
그 때 주인 집 할머니가 대문 간에서 보기에도 엄청나게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토기들을 모아 놓고 망치로 으깨어서 돌담위에 얹고 있었다. 왜 그 고풍스런 토기들을 깨고 있느냐고 여쭈어 보았지만, 완전히 귀가 먹어버린 할머니는 들은 척도 않고 계속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물어 보니 지금까지 가정에서 엣부터 전해 내려오는 토기들을 항아리로 사용하며 곡식이나 음식들을 담기도 하며 보관용기들로 사용해 왔는데, 최근에 경리정리나 주택 수리시에 출토되는 신라 문화재들을 신고 없이 개인이 보관하기도 하고, 도굴꾼들에게 팔기도 하던 것들이 관계기관에 적발되어서 엄청난 벌금을 물어준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시 문화재 담당부서에서 한 번씩 가정에 보관하고 있는 문화재들을 조사하기 위해서 방문 사찰을 한다고 하며, 적발시에 벌금형을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모든 집에서 자기들이 보관하고 있던 토기들을 전부 파기처리하는 것이라 했다.
문화재청에 신고하고 줄려고 해도, 언제 어디서 그것들을 발굴했는지? 왜 지금까지 신고를 하지 않았는지를 소명해야하고, 만약에 그 소명에 거짓이 있다면, 벌을 받기도 하고, 또한 그 과정에 여러번 관계청에 불리어 가서 해명하느라 농사일에 지장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미리 전부 파기시켜버리는 게 현명한 일이란다.
물론 자진 반납하거나 희사를해도 적당한 보상비를 주지도 않는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귀가 찰 노릇이다. 물론 당시에 국가에서 그 많은 문화재들을 회수하기 위한 국고의 자금에 여유는 없었을 테지만, 문화재보호법이 문화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재를 파기하게 만드는 법이 되었다는 게 가슴칠 일이었다.
수년 전에 고향의 대구 부인사 초조대장경이 보관되었던 부인사지 터에서 몽고병화로 소실된 고려청자가 무더기로 출토가 되었지만 대부분이 도굴꾼에 넘어갔던 사례들이 생각 났다.
그 때도 보상비도 받지 못하는 관계청에 신고하기 보다 쌀 한 말이라도 주는 도벌꾼들에게 파는 게 훨씬 이익이 되니까 그런 경과가 나왔던 것이다. 그 때는 그 문화재들이 도벌꾼을 통해서 대부분 해외 특히 일본으로 밀반출 되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