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날
하봉엽
강아지 허리춤에 손수건으로 묶여온 카네이션과 부채, 어버이날이라고 딸들의 선물이다. 부채를 펼치니 기쁨, 감사, 건강, 희망, 사랑, 여유, 성공, 평안, 재물, 행복이라는 글자와 함께 신 사임당이 주렁주렁 달렸다. 어버이날 딸들의 선물. 난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없는데,.. “효녀상”이란 게 있으면 그날을 챙기고 싶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2학년일 때 어른이 되어야 했던 시절, 어느 날부터 예고도 없이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이 돼야 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학벌도 없고 직장생활도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아이들은 하루도 돈이 필요치 않은 날이 없을 때 였다. 준비물이나 학교에서 필요한 학용품 따위조차 챙겨줄 수가 없었다. 고민하는 나를 보고 이웃 사람이 야쿠르트 배달 한번 해 보지 않겠느냐고 말을 해 주었다.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라 해 보겠다고 했다. 마침 운전면허증을 따고 연습한다고 샀던 조그만 “프라이드” 짐차가 하나 있었다. 그때부터 야쿠르트 배달일이 직업이 됐다.
차로 운반을 하니 석 달 만에 대리점에서 일등을 차지했다.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보다는 헌 차지만 이동 수단이 좋아서 남보다 훨씬 많은 월급을 받곤 했었다. 학교건, 법원이건, 아파트건, 주택이건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학교 선생님들께 배달 해야 했기 때문에 아이가 다니는 학교도 가야 했다. 배달을 마치고 올 때면 철없는 아이들은 “야쿠르트 아줌마 야쿠르트 주세요”, 하고 떼창을 부른다. 그런 엄마가 부끄럽지 않으냐고 애들한테 물어보면 “어때 먹고 살라고 하는 일인데, 남한테 피해주지 않는 일인데 뭐가 부끄러워”하곤 했다. 그렇게 제법 어른 같은 말을 하면서 배달일을 마칠 때까지 일을 도와주던 아이들이다. 빨리 철이 들어버린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 토요일 날 곱빼기로 많이 돌리려고 양손에 바구니를 들자 허리가 뜨끔했다.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길로 병원행이었다. 무거운 걸 들면 척추가 다 나간다고 했다. 일을 하다가 못다 돌린 일은 동료들이 다 같이 하루 일을 마무리 해 주었다. 일 년 반이 넘는 야쿠르트 배달은 그날로 마감이었다. 그리곤 석 달 동안 병원 치료를 해야 했다. 무거운 것을 들면 안 된다기에 다음으로 택한 직업이 마트 일이었다. 교대근무로 집에 오면 새벽 한 시다. 그때까지도 아이들은 공부하고 있있다. 엄마가 온 후에 잠들곤 했다. 그런 아이들은 힘든 인생길에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그때는 새벽에 일어나서 도시락을 한 아이 앞에 두 개씩 싸야 했다. 합쳐서 네 개다. 지금은 학교에서 급식을 주는데 우리 애들 시대는 저녁까지 도시락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26년이 흘러갔다.
그런 와중에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했다. 남들같이 과외를 해 본 적도 없고, 학원을 한번 다닌 적도 없다. 그냥 엄마를 따라서 아이들도 열심히 살았다. 수능도 우수한 성적을 받아서 서울에 있는 대학을 들어갈 수 있는 좋은 성적이 나왔다. 하지만 아이들은 대학 나오면 직장을 바로 다닐 수 있는 대학을 택했고, 장학금을 받는 학교를 택하여 4년 내내 장학금으로 졸업했다. 방학 때면 닥치는 대로 알바를 해선, “엄마! 한동안 기숙사비 안 보내도 되겠다” 하곤 했다. 졸업도 하기 전에 직장이 생겼다.
졸업이 가까운 어느 날, 딸한테서 편지가 왔다. “엄마! 이제 이 세상에 엄마 혼자라고 생각지 말란다, 이제 우리가 다 컸으니 엄마 건강 챙기면서 살라고” 큰딸이 편지를 보내왔다. 처음으로 텅 빈 집에서 소리 내어 펑펑 울어 봤다.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아이들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어버이날을 챙기겠는가?
어려서부터 자립심이 강한 아이들은 직장생활도 적응을 잘한다. 이 세상에 나 같은 복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보물 1호. 보물 2호, 힘든 세상 잘 헤쳐왔고 앞으로도 잘 헤쳐가리라 믿는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어디 있으랴. “청춘! 듣기만 하여도 가슴 설렌다“는 시절을, 청춘도 만끽해 보지도 못한 딸들. 대학 들어가서는 응원단 들어가더니 거기서 세상사는 용기를 배운 건지? 내가 생각해도 그런 딸들이 대견하면서도 고맙고 또 고맙다. 그리고 미안한 생각이 드는 건 뒷바라지 제대로 못 해줬는데도 아이들이 너무 잘 커 주었기 때문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지난날을 돌아본다. 일을 할 수가 없어진 나는 오롯이 나만의 황금 같은 시간이 돌아왔다. 평소에 늘 꿈꾸던 공부를 시작했다. 검정고시로 졸업장을 따고, 방송대를 지원하여 여기까지 왔다. 나의 인생 삼모작은 설레임과 기대로 이제부터 시작이다.
경기지역대학 3학년 글타래회원
첫댓글 학우님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진솔한 이야기 감동적 입니다...
학우님~
글 읽으며 괜스레 눈물이 나고 소름 돋았어요
멋지고 훌륭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