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부상
증언자 : 김광헌(남)
생년월일 : 1932. 6. 2(당시 나이 48세)
직 업 : 접골원(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2
개 요
1980년 5월 18일 제일극장 근처인 샘다방 앞에서 공수대원과 시비가 붙어 두들겨맞았다. 의식을 잃은 김광헌 씨를 공수부대가 상업은행 앞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정신을 차린 김광헌 씨는 공수부대 대위에게 장교 출신이라는 사실과 아무 혐의가 없다는 사실을 밝혀내 풀려났다.
천석군 집안에서 태어나
우리 집은 장흥에서 유명한 동문안 김씨로 학식과 재산을 두루 갖춘 양반 집안이었다. 대대로 천석꾼을 자랑하던 우리 집은 일찌기 광주로 이사를 와 기반을 잡았다. 그때는 대밭이던 광주 사동 7백여 평의 땅이 우리 집의 소유였다. 광주 농업학교를 2회로 졸업하신 아버지는 교편생활을 하신 어머니와 결혼하여 4남매를 두셨다.
내가 태어날 무렵 어머니는 직장을 그만두셨고 아버지는 교도관이셨다. 나는 두 번 태어난 셈이다. 한 번은 1930년 김씨 가문의 장손 '김길성'으로 태어났다. 나는 태어난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심장이 멎어버렸다. 성미가 급한 아버지는 내가 죽은 줄만 알고 출근길에 사망신고를 냈다. 그런데 인부가 나를 항아리에 넣으려는 순간, 내가 갑자기 몸을 꿈틀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하마터면 생매장당할 뻔한 나를 아버지는 곧바로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시켰다. 병명은 폐렴이었다. 2년을 병원에서 치료하여 겨우 사람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때서야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다시 해 '김광헌'이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올렸다.
퇴원해서도 병치레가 심해 나 때문에 한의사가 기거할 집을 따로 지어줄 정도였다. 부잣집의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자란 것이다.
철저한 반공주의자
광주 서석국민학교를 다닐 무렵 유도 3단, 검도 3단이신 아버지는 몸이 약한 나에게 유도를 하라며 도장에 데리고 다니셨다. 그때부터 나는 운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상업학교를 다닐 때에 해방이 되었다. 해방이 되자 전국이 '신탁통치안 문제'로 떠들썩했다. 나는 전국학련 창설 멤버로 활동했다. 육촌인 방병매 형이 전국학련 창설 멤버였기 때문에 나도 따라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전국학련이란 반탁을 지지하는 극우계통의 학생들이 만든 단체였다. 나는 전국학련의 전위대를 맡았다. 유도를 잘했던 나는 좌익단체의 활동을 방해하는 일을 선두에 서서 한 것이다.
그 후 유도 특기자로 발탁되어 조선대 체육과 1학년을 다니던 중 6·25가 일어 났다. 나는 인민군이 내려오자 1950년 7월 22일 마산으로 피난을 갔다. 마산에서 일주일 정도 여관에서 지내다가 미 24사단 학도지원병으로 입대, 전투생활을 했다. 3개월 후 사단에서 학생들을 학제 복귀시키자 나는 광주로 와 조선대학교를 다시 다니게 되었다.
3개월간 전투생활을 하며 군대의 질서에 길들여진 나는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별 수 없이 육군 보병학교에 들어가 전투생활을 하며 실전에 참가했다. 휴전이 되고 그로부터 2년 후 5년 5개월의 장교생활을 마쳤다. 장교생활을 하면서 육군병원의 약사이던 연상의 여자와 동거를 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가 그 여자와 아들을 쫓아버렸다.
접골원 원장 생활을 하다
제대 후 유도를 했던 인연으로 뼈맞추는 데 관심이 있어 접골원 조수 생활을 하면서 의술을 익혔다. 1980년 5월에는 구시청 앞에서 접골원을 하고 있었다. 병원에까지 가서 환자들을 치료했고 전남체육회 선수단까지 따라다니며 치료를 했다. 워낙 의술이 뛰어나 '접골원의 김원장' 하면 의료계통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한 달 평균 수입은 지금 돈으로 하면 2백만 원이 넘었다.
서른이 넘도록 장가도 못 가고 있었는데 우연히 기차 안에서 가출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집에 들어가라고 많은 돈을 주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독신으로 살던 나를 찾아왔다. 어머니가 그냥 같이 살라고 해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내가 부상당하기 전까지 함께 살면서 딸 하나를 낳았다.
연행을 하지 왜 시비냐
1980년 5월 18일에는 제일극장 근처에 있는 단골다방인 샘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 나가봤다. 그때 시각이 오후 2시 40분쯤 됐을 것이다. 나가보니 대인약국 앞에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 두 명이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세 명의 공수대원과 대여섯 명의 영감님들이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아마 할아버지들이 공수대원들에게 "학생들을 왜 때리느냐, 잡아가지 마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 영감들은 내게 하소연하듯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전남대학생을 공수들이 무자비하게 때렸다는 것이다.
나는 공수대원에게 점잖게 타일렀다.
"나는 예비역 장교 출신인데 학생들을 연행만 하면 되지 왜 때려서 시민들과 시비를 하요."
그때 내 나이가 쉰 한 살이었으나 나이에 비해 젊어 보여 마흔 살 정도로 보였는지 공수 중의 한 명이 진압봉으로 내 어깨를 내리쳤다. 잔소리 말라는 뜻이었다. 엉겹결에 맞은 나는 화가 났다. 가만히 참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대로 공수대원의 턱을 주먹으로 갈겨버렸다. 그 공수는 그 자리에서 퍽 주저앉아버렸다.
그러는 사이 다른 공수들이 "이 자식, 맛 좀 봐라"며 머리, 팔다리, 몸뚱아리 할 것 없이 온몸을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그 뒤 수십 명의 공수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어떻게 해서 눈을 떠보니 상업은행 앞이었다. 공수부대에 의해 그곳까지 끌려 간 것이다. 머리에는 피가 흐르고 이빨 전체가 흔들거렸다. 무릎이 다 깨졌는지 움직이기가 힘들었으며 온삭신이 쑤시고 아팠다. 거기에는 대인약국 앞에 있던 영감들도 있었다. 그 영감들은 공수부대에게 사정을 했다.
"저 사람은 장교 출신인데 아무 죄도 없으니 제발 풀어주시오." 결과적으로 나를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맞게 한 것도 그 영감들이었고, 어떻게든 구해 내려고 증언과 항의를 한 사람도 그들이었다.
중대장 대위는 나에게 증명을 보이라고 했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어 손가락으로 주머니를 가르켰다. 공수대원 한 명이 주머니에서 증명서를 꺼내 대위에게 주었다. 그 대위는 증명서를 보면서 확인하려는 듯 계급군번을 말해 보라고 했다. 나는 힘없게 "23802번이요"라고 대답했다. 대위는 공수부대를 향해 "누가 이 사람을 연행했냐"고 했다. 그러자 나를 제일 먼저 때린 공수대원이 슬슬 피하면서 우물쭈물했다. 그렇게 풀려났다.
곧바로 시민들에게 업혀 영감들과 함께 한일병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대강 응급치료를 했다. 무릎뼈가 깨져 기브스를 하고 머리는 몇 바늘 꿰맸다. 스물여덟 개의 이가 빠지고 네 개만 남았다. 손마디 다섯 군데의 뼈가 부러졌으며, 얼굴이 퉁퉁 부어 있어 사람 몰골이 아닌 것 같았다.
한일병원측은 너무 복잡하고 환자가 많았는지 종합병원인 적십자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지나가는 시위차를 잡아타고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그곳 역시 환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겨우 병원 복도에서 21일까지 치료를 받았다.
시위 차에 탑승하다
21일 오후 5시 10분쯤 25인승 미니버스에 탄 시위대가 적십자병원으로 와서 "시민들과 젊은 사람들은 모두 공원으로 갑시다. 광주를 우리 손으로 지킵시다....."라고 외쳤다. 그때 우리 집은 기독병원 근처에 있었다. 나는 집에 갈 생각으로 기독병원에도 가냐고 물었다. 그들이 기독병원에도 간다고 해 환자, 보호자 대여섯 명과 함께 버스를 타고 광주공원으로 갔다. 광주공원 계단 앞에 4천 자루의 카빈총이 쌓여 있었고 3백여 명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나 아무 제약 없이 총을 가져가고 싶은 대로 총을 집어갔다. 우리 차에 탄 사람들도 각기 총을 들고, 나 역시 총을 들었다. 그리고 2백40-2백50자루의 총과 얼마간의 실탄을 가지고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병원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서른 개 이상의 총을 나눠 주었다. 그 때문에 병원 중에서 적십자병원이 제일 먼저 무장을 했을 것이다.
우리가 탄 미니버스는 광주천을 따라서 아세아극장, 전남방직 앞을 거쳐 전남대로 갔다. 그때 시각이 오후 6시쯤 되었을 것이다. 전남대 정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정문 앞에 1백여 정의 총을 길바닥에 놓고는 학교 안으로 30미터 정도 들어가 나머지 총과 실탄을 풀었다.
잠시 후 학생들이 버스 두 대를 가져왔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거의 무장을 했다. 그때는 지휘를 하는 사람도 없었고 통제하는 사람도 없었다. 누구나 총을 들 용의가 있으면 총을 들었다.
총을 배급한 우리들은 그 미니버스를 다시 타고 전남대 후문으로 나갔다. 후문 근처에 있는 하천에 소방차가 고꾸라져 있었다. 나는 온몸에 통증이 심해 그들에게 아프다고 했다. 그러나 그 차에 탔던 사람들은 내가 광주 토박이라 광주 지리를 잘 알았기 때문에 나를 필요로 했다. 나 역시 어차피 병원에 입원하지 못할 바에야 차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가끔씩 병원에 들러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대로 있었다. 또한 그들과 함께 있으면 음료수, 김밥 등 시민들이 준 음식 들로 먹는 것에도 불편이 없었다. 24일까지 차를 타고 광주시내 일대를 돌아다녔다.
24일 오후 6시경 시위차를 타고 서부경찰서 앞을 지나려는데 그곳에 있던 시민들이 차를 세웠다. 다른 시위 차들도 있었다. 차를 세운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조를 편성해서 조직적으로 재배치하여 싸워야 한다'면서 가지고 있는 총을 모두 반납하라고 했다.
우리들은 과연 그럴 것도 같아 그들에게 총을 넘겨주었다. 총을 반납하지 않은 팀도 있었는데, 그들은 차를 타고 나주로 갔다. 총을 반납한 우리들은 도청으로 갔다. 나는 다친 곳의 통증이 심하기도 했지만 내가 더 이상 그들에게 필요없을 것 같아 전남일보 옆에서 내렸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재배치를 받았을 것이다.
시위 차에서 내린 나는 그 근처 아는 자전거 가게로 갔다. 그곳 창고에서 이틀 간을 지냈다. 쉽게 차를 잡아 병원에 다닐 수 있었고 시위대의 상황을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도청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창고에서 지내려니까 불편하기도 하고 가게 주인에게 미안하기도 해 불로동 삼양여인숙으로 숙소를 옮겼다. 그곳에서는 하루에 한두 번 약방에서 약을 지어다 먹으면서 치료를 했다. 그 사이에 집을 두 번 들어갔다 왔다.
피신생활을 하다
5월 27일 광주가 계엄군의 손에 넘어가자 나는 내심 불안했다. 접골원을 했던 탓으로 얼굴이 많이 알려진 내가 시위 차에 탑승한 사실 때문이었다. 잡히기 전에 손을 써야 할 것 같아 28, 29일쯤 31사단 부사단장인 박준장에게 가서 하소연을 했다. 박준장은 나의 여동생 남편인 37사단 부사단장인 이철호와 육사 동기생인 까닭에 친분관계가 있던 사람으로 노태우와도 육사 동기생이었다. 다행히 박 준장의 도움으로 구속은 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일이 해결되자 여인숙에서 지내던 나는 집에 들어갔다. 병신이 다된 내 몰골을 보고는 아내가 일주일 만에 가출을 했다. 아내가 석 달 만에 다시 돌아오자, 1980년 9월 27일 정식으로 이혼을 했다. 마누라가 이혼할 때 재산을 거의 다 가져가버렸다.
그 후 전두환이가 집권하면서 시국이 계속적으로 살벌해진 느낌이 들었다. 다시 불안한 생각이 들어 강릉에 있는 여동생집에 찾아갔다. 37사단 부사단장으로 있던 매제는 예편하여 강릉문화방송 사장으로 있었다. 2년 동안을 여동생집에서 숨어지냈다. 매제가 지겨웠는지 각 기관에 연락하여 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신변이 안전해지자 광주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으나 먹고살 길이 묘연했다. 재산은 아내가 다 가져가버린 상태였고, 몸은 병들어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병간호하며 광주여상을 다니던 딸이 자퇴를 하여 타월공장을 다녔다. 그곳에서 6만 원의 월급을 받아 겨우 생활을 꾸려나갔다.
지금은 순천에서 직장에 다니는 딸이 생활비를 부쳐주고 형제들이 약간씩 도와 주어 혼자 사는 데 크게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살고 있다.
다시 태어난 나
한때 구차하게 살 바에야 차라리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두 번씩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한 번은 방 안에 생연탄 두 개를 피워놓고 문을 잠가놓은 채 잠을 잤다. 동생집에 간 어머니가 빨리 돌아와 나를 발견하시는 바람에 겨우 살아났다. 또 한 번은 수면제 20알을 먹었는데 바로 누워 있지 않고 엎드려 있어 다행히 살아났다.
이렇게 삶의 환멸을 느끼면서 지내던 중 하루는 잠을 자다가 우연히 깼다. 외할머니가 여승이라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어머님이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부처님, 여든이 다 된 이 늙은이에게 남은 명이 있다면 저 자식에게 돌려주십시오" 하며 염불을 하고 계셨다. 잠결에 그 소리를 들은 나는 앞으로 절대 자살을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남은 내 평생을 민주화를 위해 바칠 생각을 했다.
사실 나는 다치기 전까지는 민주의식이 전혀 없었다. 전전세대였던 나는 학생들이 데모를 하면 나라가 혼란스러워진다고 걱정을 했다. 정치안정이 된 후 민주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처한 환경과 처지에 따라 생각하고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민주화가 먼저 되어야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지 않고 공산화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지금도 약을 많이 먹고 있다. 골수염에 걸리지 않으려고 마이신과 진통제를 계속 복용하고 있다. 아직도 무릎 통증이 심해 압박붕대로 감고 다닌다. 데모를 하거나 집회를 할 때는 무릎에 두 겹으로 붕대를 감는다.
재작년(87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선거유세장을 쉰한 군데나 쫓아다녔다. 며칠 전에는 노태우의 광주 방문을 저지하는 데 동참하라며 핸드마이크를 들고 외치고 다녔다. 그 때문에 전경들에게 두들겨맞기도 했다.
나는 여한이 없다. 딸린 가정도 없고 육십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 미련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집회 때마다 선두에 서서 주동을 하고 대중연설을 한다.
주동하다 다치면 '열사' 될 각오를 하고.... (조사.정리 신봉화)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