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속공연때는 서울특별시 대표로'경복궁지경다지기'와 '수표교 다리밟기'로 출전하여 서울시에 장관상을 두 번씩이나 안겨주었다. 그럴때면 박상옥은 소리를 메기는 모갑이며, 전체를 지도하는 연출 역활도 한다. 위의 일들로 보면 서을의 민속예능과 서울소리를 통달한 명창이지만, 그의 자란 내력을 보면, 그는 '용인의 소리'를 가장 잘하는 토속민요의 명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옛 날, 지방의 농요와 상여소리는 누구의 가르침을 받아서가 아니라, 소질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고, 스스로 배우고 터득해야 했다.
때문에 지방의 민요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동네에 다르다.
우리네의 삶은 모를 심을 때도 노래를 부르면서 모를 심었고, 김을 멜 때에도 노래를 하면서 김을 멨다. 동네에 초상이 나서 상여를 메고 나갈때도 어김없이 요령잡이의 선소리에 맞추어 소리를 받아 주며 상여를 메고 나갔다. 묘를 다질 때나, 집터를 다질 때에도 터 다지는 소리를 하면서 터를 다졌다. 이러한 토속 농요나 상여소리, 농악놀이 고사소리 거북놀이 지경소리를 익히고 발전 시켜 인근의 소리꾼으로 활동했다.
박상옥은 1970년대 초 KBS라디오릐 민요백일장에서 심사위원인 안비취선생이 "남자 소리꾼이 드문데 좋은 재목"이라고 칭찬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민요백일장에서 고수를 맡았던 김득수의 소개로 이창배선생의 제자가 된다.
1973년 KBS TV 민속백일장에 "초한가"를 불러 주말장원, 월말장원, 년말장원까지 하고, 국악협회에서 주최하는 민요경창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정득만과 이창배의 산타령을 배워서 무형문화재 제19호의 전수조교로 지내다, 1999년 7월 1일 "휘몰이잡가 서울시 무형문화재 21호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어려서 우리소리에 빠져 미친 아이 취급을 받으면서 배우고 익힌 소리로, 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