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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강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 넓지도 않은 방을 이미 삼십분 가까이 이 잡듯 샅샅이 뒤졌는데도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휴대폰이 보이질 않는다. 쓰레기통을 뒤엎어도 보고 책상서랍을 거꾸로 털털 털어도 보고 침대 밑에 고개를 처박고 휘휘 둘러봐도 어디에도 없다.
밀라노에 가 있는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부활 축하 인사와 함께 어떤 중요한 부탁을 했었는데 그에 대한 답을 빨리 전해주기 위해서는 그 전화기에 찍혀있는 밀라노 전화번호가 필요한 데 말이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을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생각하니 조급한 마음에 약간의 신경질까지 났다.
방 밖으로 나간 적이 없으니 틀림없이 휴대폰은 내 방안에 있을 터이다. 눈을 감고 자리에 앉았다. 조급함과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큰 호흡과 함께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까지 세기를 서너 번 반복하는 동안 휴대폰이 겨울 코드 주머니에 들어있다는 것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오전에 좀 걷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반팔에 겨울 코트를 잠깐 걸쳤다 벗은 적이 있는데 그때 시계 대용으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조급함이 이 부분을 완전히 가려버렸고 나는 내가 찾는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인생에 있어서는 더욱 말할 나위가 없다. 당신이 지금 인생에 있어서 뭔가 중요한 것을 찾아 나섰다면 결코 조급해 하지 말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찾아야 할 창조주의 선물이라면 그것은 이미 당신이 창조된 그 순간부터 당신의 마음 안에 있다. 그것은 결코 도망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성급한 당신이 그것들을 계속해서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고 있을 뿐이다.
풍요로운 존재를 위해 당신이 꼭 찾아야만 하는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당신의 ‘본성’本性이다. 하늘이 내려주신 ‘천성’天性이다. 당신의 본성을 찾아 그것을 충실히 따르는 삶을 살도록 하라. 기쁨과 평화가 항상 그대와 함께 할 것이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다.
“당신 뜻대로 힘써 살려하오니, 이 몸을 아주 버리지 마소서.”(시편119.8)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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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 29 대림 제1주간 화요일
- 이기양 신부님
사랑하면 보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서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를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값진 것은 무엇이며 어떤 것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과,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볼 수 있는 '눈'에 관해서입니다.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고 게십니다. 하느님의 판단과 인간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많이 배우고, 많이 소유하고, 권력이 높은 사람들이 대접을 받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런 것에 익숙해져 있고 또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가끔 신자들이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신부님도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없는 사람을 불편해 하는 우리들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마치 세례자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미쳤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먹고 마시기만 한다고 했던 유다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들입니다.
신부들이 검소하게 지내면, 어떤 사람들은 궁상을 떤다고 말하고 조금 센스 있게 지내면 또 사치스럽다고 말합니다. 모두가 자기들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권력이 높거나, 재산이 많거나,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보고 우러러 보는 것이 이 세상 풍조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짜 부유하고 풍요로운 사람은 제대로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또 이웃을 위해서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정말로 부유한 사람이고 제가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쥐고 있어도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인색한 사람이지요. 그에 비해서 풍요롭지는 않지만 이웃과 함께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에 누가 더 부유한 사람이겠습니까?
이웃을 위해 쓸 줄 아는 사람이지요. 하느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여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을 신부가 더 좋아하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있어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또 없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쓸 줄 알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도 이런 사람을 좋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가 사람을 대하는 기준은 세상과는 좀 다르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도 똑같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부유하고 지혜로운 사람, 또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이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만이 인정을 받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는 많은 재산이나 높은 지위, 또 지식 그 자체만 지니고 있어도 우러름을 받습니다만 하느님 나라에서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 모든 것을 다 놔두고 떠납니다. 오로지 남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얼마나 나누고 얼마나 함께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정말 가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로지 자기와 또 가족만을 위해서만 쓸 줄 알고 꽁꽁 싸 두었다가 그대로 다 놓고 죽어 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어서, 가난하기 때문에 나눌 수가 없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가진 것이 별반 없다 하더라도 그에 맞는 나눔을 실천하고자 노력할 때 오히려 하느님 보시기에는 가장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루카10,23-24)
중요한 것은 볼 줄 아는 '눈'입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습니다. 요즈음 제 눈에는 성탄 트리 장식이 제일 많이 보입니다. 이번 구유와 성탄 장식에 대한 구상이 거의 마무리 되어갑니다만 관심이 있으니까 자꾸 눈에 뜨이는군요. ''
관심이 있으면 보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그냥 스쳐지나가겠지요. 사랑하면 보입니다. 관심이란 사랑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루카10,24)
그렇습니다. 옛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가 오시기를 수천 년을 기다렸으나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대는 하느님께서 오셔야지 볼 수 있는 시대였으므로 예수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그 시대에 태어났다고 해도 알아볼 줄 모르고 깨닫지 못하였다면 똑같이 불행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수천 년을 기다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메시아를 알아 본 유다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제로 아기 예수님의 곁에는 목동 몇 사람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말씀을 전하셨을 때에도 그토록 간절히 하느님 나라를 기다렸던 사람들은 알아듣지도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입장에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이런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자기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늘에서 내린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들이 바라고 생각하는 메시아만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욕망에 가득 차고 이기심에 부풀어서 메시아를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눈이 가리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옆에 와 계신 예수님도 볼 수가 없었는데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서도 똑같이 해당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본당에서도 똑같습니다.
사목자로서 신자들을 대하면 이 분은 이런 것 때문에 눈이 가려져 있구나 하는 것이 다 보입니다. 미사 중에 성체 분배를 아무리 빨리 해도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느낌이 그대로 다 오는데 그것은 마치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그 식구의 기분을 알아맞히는 여러분과 흡사한 것입니다.
성체 분배를 17년간이나 해 왔는데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다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으며, 왜 사목자의 흐름을 따라오지 못하는지 대충 파악이 되지요.
예수님을 보고 만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도 만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은 각자 개개인의 장벽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의 시기는 언제든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단지 나의 욕심과 굳은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뿐입니다.
3년 전에 저는 성경 쓰기를 하는 우리 신자분들에게서 이런 소리를 내내 들어왔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너무나 편안했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성경 말씀이 죽어있는 말씀인 것으로 알았는데 써 보니까 살아 계신 말씀이었으며 그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나를 움직이신다는 것을 감격에 겨워 써 내려간 <성경 쓰기> 후기담을 피정하는 마음으로 보아왔습니다.
이렇게 <성경 쓰기>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누누이 말씀드리고 독려하였지만 실제로 여기에 참여한 신자분은 한 30% 정도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도 마음과 생각이 내 방식대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지요. 차라리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이라면 따라 하면서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으며 참 하느님 나라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길이 있을 때 참여하여 그 분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제대로 행하지 않고 불평만 하며 이런 기회를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가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이며, 그것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인정받는 사람의 조건인 것이지요.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 동참하며 기꺼이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 분명 우리가 원하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을 기억하고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 이기양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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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현 요셉 신부
하느님의 권능은 나약함 안에서 드러납니다.
생활하다보면 자신의 장점 때문에 힘든 경우가 있고, 또 반대로 나의 단점 때문에 오히려 도움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때문에 장점에 대해서 겸손할줄 알고 단점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셨는데 이들이 복음을 잘 선포하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 드리자 예수님이 기쁨에 넘쳐서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드리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시대는 특별한 시대였습니다. 그 세대는 다른 어떤 세대에 비해 세상에 오신 구세주를 눈으로 직접 뵙고, 손으로 만지고, 그분 말씀을 듣는 특별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푸셨고, 수많은 은혜와 기적도 베풀어주시며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 신비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혜롭다는 사람들,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이것을 깨달을 수 없었고, 오히려 역설적으로 철부지 어린이 같은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지혜롭다는 사람들,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불행하다”고 선언했던 부유하고, 권력 있고, 많이 배운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상의 행복한 삶을 끊어버리기가 어렵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가진 재물과 권력과 지식과 명예가 자신들을 지켜주고 미래를 보장해 줄 거라고 믿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마지막까지 매달립니다.
그러나 철부지 어린이 같은 이들은 예수님이 “행복하다”고 선언했던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들, 박해받는 이들, 슬퍼하는 이들 입니다.
이들은 지상의 것 너머 영원한 하느님의 가치가 있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가진 것에 매달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 매달릴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단점으로 알고 있던 것이 하느님의 신비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는 사람들 입니다.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달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신비를 감추십니다. 그러나 철부지 어린이 같은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을 하느님께 맡긴 겸손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십니다.
우리도 가끔 ‘내가 모든 것을 이루어 내겠다’, ‘내가 마지막까지 다하겠다’, ‘내 능력으로 구원을 쟁취해 내겠다’는 유혹에 쉽게 떨어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권능은 나약함 안에서 드러납니다.
겸손은 우리가 하느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맡겨드릴 때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우리 안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 대구대교구 한창현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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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 청년들의 모임에서 OX 퀴즈를 맞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즉, 어떤 한 문장의 내용이 맞는다고 생각하면 O로, 틀리다고 생각하면 X로 향해 서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모두 다 O나 X에 서게 되면 사회자가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그때 틀린 답에 서 있는 사람은 떨어지게 되면서 최후의 한 명을 남기는 것이지요. 바로 이 OX 퀴즈 문제 시간에 나왔던 문제를 여러분들에게도 내 보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시고 정답을 말씀하세요.
“신부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O일까요? X일까요? 그래도 신부님인데 O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꽤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네요. 그렇다면 다음 문제…….
“지금 막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신부님들의 장래 희망은 성인사제가 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O일까요? X일까요? 그래도 이제 막 사제서품을 받았으니까, O일 것 같죠? 그런데 아쉽게도 신부님들의 장래 희망은 본당신부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 갓 사제서품 받은 신부처럼 저의 장래 희망은 본당신부가 되는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소원 성취했습니다.
12월 4일자로 주교님의 명을 받아서 인천에 있는 간석4동 성당의 본당신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룻밤을 간석4동 성당 사제관에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내가 본당신부가 맞나? 이게 꿈이 아니지?’ 라는 엉뚱한 생각을 지금 이 새벽에 해보게 됩니다.
아무튼 꿈이 아닌 현실이니까 새로운 부임지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더욱 더 열심히 살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본당신부가 되었으니 이제 운영하던 카페도 없어지고, 또한 새벽 묵상 글과 새벽 방송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들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사실 저는 단 한 번도 이것들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고, 입으로 말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 미래의 일을 저보다도 더 잘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더군다나 더 황당한 것은 이런 말에 동조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 세상 안에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부족한 사람들, 그래서 겸손하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정확한 사실도 아니면서 정확한 사실인양 말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서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을 자청했던 것은 아닌지요?
그런 모습은 결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없다고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겸손한 모습, 그래서 섣부르게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나의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맙시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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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쇠 신부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면 참으로 안타까울 것입니다.
불행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다면 적어도 행복하지 않을 겁니다.
반대로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은 분명 행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보는 것이 행복이기 위해서는 보고 싶었어야 합니다.
보고 싶지 않았는데도 보게 되는 것은 사실은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저 눈에 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보고 싶어서 본 것이 아니라
눈에 들어와서 보게 되면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수없이 보면서도 보고 싶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는 꼴도 보기 싫은데 보거나
또 많은 경우는 보기 싫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은데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보통 이렇습니다.
꼴도 보기 싫은 것을 보지 않으려다보니
보고 싶은 것도 없어지곤 합니다.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으니 아예 안 보는 것입니다.
꼴 보기 싫은 것 보지 않기 위해
도매금으로 보는 것에 무관심해지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진통제를 맞는 것과 같습니다.
통증만 못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죽이는 것이지요.
무시라는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없을 무無에 볼 시視, 보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또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있는데도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한 사람이 남을 무시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분명 앞에 있는데도 보는 것이 없고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이것저것 다 꼴 보기 싫기에 아무 것도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만한 사람과 다른 눈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눈이 있고
제자들의 눈이 있습니다.
행복한 눈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그러니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들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합니다.
프란치스코가 보는 것을 보는 눈도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더 행복합니다.
- 작은 형제회 한국관구, 당쇠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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